일본에 안식년으로 갔다가 사표를 팩스로 제출하고는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내 인생 후반기엔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노인용 성인만화를 배워둬야겠다 싶어 미대에 입학했다. 거기서 빠져든 것이 일본화다. 학교 가서 그림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산책할 때가 제일 행복하다. 아이스크림도 먹고, 글감도 떠올리고. 이제 생각하니 교수직 사표 쓴 게 내 인생 최고의 결정이었다.
사람들은 내가 글을 먼저 쓰고 그림을 그릴 거라 생각하지만 반대다. 그림을 먼저 그리고 글을 쓰다 보면, 지적인 내용을 정서적으로 건들 수 있는 모티브들이 막 생긴다. 지도 교수가 일본화를 권했다. 해보니 아주 재밌었다. 돌가루, 조개가루를 갈아서 아교에 녹여 바르는 식인데, 천연물감이라서 색이 너무 예쁘다. 인공적인 번뜩임이 없고 편안하다. 대신 비싸다. 요만 한 게 몇 십만 원씩 한다. 학생들은 돈이 없으니까 연하게 풀어 쓴다. 수채화처럼. 나는 물감을 마구 짓이겨서 그린다. 그랬더니 다들 잘 그렸다고 하더라. 그래서 돈 떨어지면 이렇게 와서 물감 값 벌어 가고 하는 거다.
독일에서 13년 청춘을 공부로 보냈다. 거기서 박사 하고 전임강사로 있다가 귀국했다. 내가 한으로 남는 게, 결과적으로는 감사한 일이 되긴 했지만, 심리학과 교수가 못 된 것이다. 명지대에서도 교양학부 교수였다. 국내 심리학과에서 다 나를 거부했다. 내 성격적 결함이 가장 크다고 생각한다. 나라도 나 같은 사람은 안 쓴다. 언제 어떻게 들이받을지 모르는 사람이니. 지금이야 내가 많이 유순해졌지만. 1980년대 초반에 대학 다니고 청춘을 보내면서 치열하게 산 사람들 특징이 있다. 막히면 들이받고 돌파하려는 거다. 어떤 분노 같은 게 체득돼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학문적 역량만 보면 얼마든지 인정해 줄 수도 있었을 텐데, 다른 이유도 있었다. 내가 독일에서, 더구나 문화심리학이라는 생소한 분야를 공부했다는 사실도 작용했다. 내가 공부한 것은 지식심리학이랄까, 심리학의 구성사 같은 것이다. 요즘 창조 이야기는 많지만, 아무도 풀어내지는 못하고 있지 않나. 그러다 보니 신비화되고 있다. 스티브 잡스 같은 특별한 사람에만 해당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나는 그게 아니라고 본다. 21세기에 맞는 학문 영역으로 창조 방법론이 성립할 수 있고, 그걸 심리학적, 지식사회학적, 지식구성사적인 것과 연결시키면 해법이 나오지 않을까 고민했다. 그러다 2006년 와세다대에 가 있을 때 가리타니 고진과 마츠오카 세이고의 책을 보게 됐다. 눈이 확 떠졌다. 편집 개념을 재발견한 것이다. 이 정도면 언젠가 세계적인 학문이 될 수도 있겠다 싶어, 명칭도 '에디톨로지'라고 새로 붙였다.
심리학 교수가 못되고 변두리에 헤맬 때는 참 괴로웠다. 자존심도 많이 상하고. 그냥 교양 교수로 있다가 내 인생을 끝낼 건가. 학계 주류에서 자리를 잡지 못했으면 대중적으로 접근해야겠다 싶었다. 그 결심을 하는 과정 자체가 굉장히 힘들었다. 그만큼 학문적 자존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설득하는 데 한 6개월이 걸렸다. 철저하게 대중적으로 가자, 쪽팔려도 할 수 없다고 설득했다. 그 대신, 이전에 없던 방식으로 대중적인 목소리를 내면 내 활동 영역이 다르게 열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내용이 함량 미달이었던 것은 아니다. 대중적인 담론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역할을 하고 싶다는 목적이 내겐 있었다. 그 목표가 1차적으로는 어느 정도 달성이 됐다. 그러고 나서 자유로워지니까 이제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것이 뭐냐, 새로운 학문을 해보자 싶은 생각이 들었다. 주변부 지식인으로서 느꼈던 한계에 종지부를 찍는 역할을 해보고 싶다는 욕심을 내본 것이다.
전통적인 계층적 지식 구조를 갖고 책을 쓰려고 했다면 나도 얼마든지 쓸 수 있었다. 하지만 21세기는 그런 지식이 필요한 시대가 아니다. 하이퍼텍스트 사회다. 하이퍼텍스트적 지식을 근대적 지식 구조로 만들어내는 것은 바보짓이다. 황우석 사태, 미네르바가 뭘 얘기하나. 계층적 지식의 시대는 끝난 것이다. 책의 편집은 다 내 것이다. 팩트는 확인된 사실이지만, 팩트와 팩트를 연결시킨 방식은 내 것이란 얘기다. 가령 일본에 '공부방'이라는 러브호텔이 있다는 것은 팩트다. 일본 가옥 구조가 옆방 소음이 다 들리게 돼있다는 것도 팩트다. 이 둘을 연결해 일본에서 러브호텔 문화가 시작된 이유는 가옥 구조 때문이라고 유추 해석한 것은 내 생각이고 편집 능력인 거다.
검증 가능성, 객관성의 신화는 깨졌다. 그 뒤에 칼 포퍼의 반증 가능성이 등장했고, 객관성은 상호 주관성으로 대체됐다. 그마저도 설명이 다 안 된다. 그래서 내가 제시하는 것은 편집 가능성이다. 과거에 일어났거나 지금 있는 것을 증명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제는 미래의 변화 가능성을 열어 놓는 것이 좋은 학문이라는 얘기다. 일리(一理)와 진리를 구분한 것도 그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진리를 다 확증하면서 살아갈 수 없다. 그 대신 내 경험을 토대로 일리가 있고, 설득력이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것으로 미래를 향해 나가는 거다. 사회적으로도 설득력 있는 얘기를 자꾸 만들어내야 의사소통이 가능한 사회가 된다는 얘기다.
사회 구성원이 합의하는 가치가 있다. 그게 사회적 담론의 수준을 이룬다. 팩트 확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회적 합의를 어떻게 이뤄내느냐는 것이다. 사회 담론이 사회적 가치를 지향하고 있는지 여부가 그 사회의 미래를 결정짓는다. 지식인으로서 내 역할은 여기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적으로 공유할 가치가 있어야 서로 소통이 가능해진다. 이건 설득이자 합의의 영역이다. 근대적 과학관, 진리관과는 다르다.
내 글쓰기의 지향점은 유럽의 주말 신문이다. 독일 있을 때 주말 신문이 너무 좋았다. 문화, 정치, 책, 영화, 음악 섹션 별로 이만큼 두껍게 나오는데, 그걸 주말 내내 커피숍에서 읽는 문화가 너무 부러웠다. 그런데 우리는 왜 안 되나. 그 이유 중 하나가 객관성의 신화 때문이다. 주관을 배제하려 드니까 그런 거다. 그런 신화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이론이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이래 자연과학에서도 끝났다.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이 1960년대 시작해서 2000년대초까지도 그렇게 치열하게 논쟁해서 결론이 났는데, 글쓰기는 여전히 그 모양이다.
어려운 이야기도, 내 책처럼 개인의 편집사로 풀어내면 훨씬 쉽고 재미있다. 이런 얘기를 할 수 있으면 우리 주말이 얼마나 풍요로워지겠나. 그저 모이면 내편 네편 나뉘어 싸우거나, 무한도전 본 얘기하거나, 폭탄주 마시거나 하면, 이런 삶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사람들이 왜 행복해 하지 않나? 사회가 그만큼 재미가 없어서다. 재미란 게 뭔가? 스토리다. 할 얘기가 많아야 재미있는 사람이고 재미있는 사회다. 축구를 왜 보나. 연속극을 왜 보나. 보고 나서 다른 사람과 수다 떠는 게 재밌는 거다. 그게 진짜 목적이다. 우리 사회의 문제는 얘기 소재가 그것밖에 없다는 거다. 다른 걸 던져줄 수 있어야 행복한 사회가 될 수 있다. 지식인들이 그걸 해야 한다.
한국 사회는 정해진 논의 구도에서만 입장을 표시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그것은 미래지향적인 태도가 아니라고 본다. 지금의 것, 현재 기준만 가지고 나누고 재단하는 태도는 옳지 않다. 가령 어렸을 때 산아 제한이 있었다. 그땐 애를 많이 낳으면 무조건 나쁜 거라 생각했다. 지금은 다시 낳자고 그러지 않나. 불과 20~30년 만에 옳다고 강권했던 것이 뒤바뀐다. 내가 독일에서 겪은 것도 마찬가지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걸 직접 봤다. 그 어마어마한 이데올로기가 이렇게 간단히 끝나버리는구나 싶었다. 지금 우리가 싸우는 주제들도 10년 만에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시선은 마음이다. 무엇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대상이 정의되고 세계가 구성된다. 우리는 익숙한 방식과 타성에 젖어 습관대로 사고하며 일상을 반복한다. 창조란 기존의 것들을 해체하고 재구성한 것의 결과물이다. 세상의 모든 창조는 이미 존재하는 것들의 또 다른 편집이다. 그 편집의 구체적 방법론이 ‘에디톨로지(Editology)’다. 추상적인 통섭과 융합 대신, 인간의 구체적이며 주체적인 편집 행위이다. 아는 것이 힘인 시대는 갔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양질의 정보를 선별하고, 그것으로 새로운 지식을 생산해낼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지식의 편집이다. 에디톨로지야말로 편집을 통해 새로움을 창조하는 방법론이다.
저자 김정운은 독일 베를린 자유대 심리학과를 졸업(박사)하고 그곳에서 전임강사로 있다가 귀국해 명지대 교수를 지냈다. 안식년을 맞아 일본으로 갔다가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는 도중 사표를 썼다. 현재 교토사가예술대에서 일본화를 공부하고 있다. 일과 삶의 조화를 중요시하는 ‘휴테크’ 전도사를 자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