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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조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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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불전 |
유형 | 유적 |
문화재 지정 (지정일) | 국보 제62호 (1962년 12월 20일) |
건립시기 | 조선시대 |
소재지 |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금산사 |
분야 | 예술·체육/건축 |
요약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금산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불전.
1층과 2층은 정면 5칸, 측면 4칸이고, 3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된 팔작지붕건물. 국보 제62호. 거대한 미륵존불을 봉안한 불전으로, 일명 용화전(龍華殿)·산호전(山呼殿)·장륙전(丈六殿)이라고도 불린다.
1층은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은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은 미륵전의 편액이 붙어 있는 우리 나라 유일의 3층불전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금산사는 백제 법왕 1년(599)에 창건한 대찰로서, 신라 혜공왕 2년(766)에 진표(眞表)가 중창한 것으로 되어 있다.
현 건물은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1635년수문(守文)이 재건한 뒤, 네 차례에 걸친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장대석 바른층쌓기의 기단 위에 커다란 막돌초석을 놓고, 민흘림두리기둥을 세워 창방(昌枋)을 걸고 평방(平枋)을 놓아, 공포를 주상(柱上)과 주간(柱間)에도 짜올린 다포식건축이다.
공포는 내외이출목(內外二出目)으로 주간에는 공간포(空間包)를 1구씩 두었고, 살미첨차[山彌檐遮]의 끝은 모두 앙서[仰舌]로 되었는데 섬약하며, 연봉(蓮峰)을 새김한 것이 조선 중기에서 말기로 넘어가는 양식을 보여 주고 있다.
내부는 3층 전체가 툭 터진 통층으로, 초층에 네 개의 고주(高柱)를 세우고, 이 고주와 변주(邊柱) 사이에 퇴량(退樑 : 툇간에 건 보)을 걸었다. 이 퇴량 위에 2층의 변주들을 세워 이 변주들과 초층에 세웠던 고주들 사이에 커다란 퇴량을 걸었다. 3층에서는 1층부터 올라간 고주들이 그 변주가 되었다.
이와 같은 가구법(架構法)은 목조탑파에서 하나의 심주(心柱)를 세워 보[樑]들을 심주에 걸던 수법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서, 이 법당은 목조탑파의 가구법이 아니라 3층전각의 가구법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내부의 공포에 있어 초제공(初諸工)과 이제공(二諸工) 모두의 살미첨차 끝은 한 판(板)으로 붙은 운형(雲形)으로 조각되어, 조선시대 중기 이후의 양식을 보여 주고 있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추녀에는 모두 활주를 세워서 떠받치고 있다. 중앙의 본존은 도금한 소상(塑像)으로서 높이 39척 (11.82m)의 입상이며, 좌우의 보처불(補處佛 : 主佛의 좌우에 모신 보살)은 높이가 각각 29척(8.79m)으로 역시 동일한 입상으로 되어 있다.
이 법당(法堂)은 방등계단(方等戒壇)에 참배(參拜)하기 위하여 특별히 건립된 방등계단 예배전(禮拜殿)이다.
원래 나한전(羅漢殿)으로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제화가라보살(提和竭羅菩薩), 미륵보살(彌勒菩薩),
그리고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의 제자(弟子)인 16나한상(羅漢像)을 봉안(奉安)하고 있었으나
1998년 방등계단을 성역화 할 때 다시 크게 개축한 것이다.
법당 뒤에 있는 방등계단에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가 모셔져 잇기 때문에
법당내에는 불상(佛像)을 따로 봉안하지 않았으며,
그 기능이 부처님 진신사리 예배소(禮拜所)이기 때문에 이름을 적멸보궁(寂滅寶宮)으로 바꾸었다.
높이 3.55m. 두 개의 지주가 남북으로 마주보고 있으며, 당간을 받쳤던 간대(竿臺)와 지주를 놓은 받침돌 등은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다.
긴 네모난 모습의 받침은 1층으로 구성되었는데, 길고 큰 장대석(長大石) 6장을 바닥돌로 놓고 그 위에 2장의 돌로 짠 받침돌을 둔 모습이다. 길고 네모난 옆면에는 면 마다 테두리를 따라 윤곽을 마련하였는데, 위아래에 굽이 있다. 모서리에는 모서리기둥을 새겨 놓았고, 가운데에 기둥을 두고서 양쪽에 안상(眼象) 1구씩을 오목새김하였는데, 앞뒷면은 길고 옆면은 짧은 모습이어서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적 특징을 보이고 있다. 받침 윗면은 각 변의 모서리를 죽였고, 가운데 부분에는 둥근 간대를 조각하여 당간을 받치게 하였다. 간대 주변에는 4분원(四分圓)으로 테두리를 조각하고 각형 받침을 새겼을 뿐 별다른 조각은 없다.
서로 마주보는 두 지주의 안쪽면에는 아무런 조각이 없지만, 바깥면에는 테두리를 따라 세로띠를 돋을새김하였는데, 그 가운데 부분에 또 하나의 세로띠를 장식하였다. 옆면에도 똑같이 테두리를 따라 세로띠를 돋을새김하였다. 정상 부분은 안쪽면 꼭대기에서 바깥면으로 내려오면서 반원형의 선을 그리며 깎였고, 1단의 얕은 굴곡을 두었다. 당간을 고정시키는 간(杆)은 지주의 위아래는 물론 가운데 3군데에 간구(杆溝)와 간공(杆孔)을 마련하여 장치하였는데, 윗부분에는 긴 네모난 간구를 마련하였고, 가운데 부분에는 네모난 구멍을 두었으며, 아래부분에는 둥근 구멍을 파서 간을 설치하였다. 3군데에 간구와 간공을 설치한 것은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주보문리당간지주(보물 제123호)과 익산미륵사지당간지주(보물 제236호) 등에서도 볼 수 있다.
이 당간지주의 짜임새있는 받침 부분과 바깥쪽 3면의 조각 등 각 부분의 수법은 우리나라에서 두드러지게 발달한 당간지주 가운데서도 가장 완성된 모습을 갖추었다. 대체로 통일신라의 전성기인 8세기 후반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 사찰의 문
보통 큰 사찰을 들어서다 보면 세 종류의 문을 지나게끔 되어 있다.
이것을 사찰의 삼문(三門)이라 하며 그 순서는 일반적으로 첫 관문이 일주문, 그 다음으로 금강역사가 버티고 있는 금강문(金剛門)이나 사천왕상이 있는 천왕문(天王門), 그리고 마지막 관문은 불이문(不二門) 혹은 해탈문(解脫門)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순서는 사찰의 구조나 형편에 따라 다양한 차이가 있어 양산 통도사나 부산 범어사는 일주문, 천왕문, 불이문의 순서로 되어 있지만 김제 금산사 같은 경우는 그 순서가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으로 구성되어 있기도 하다.
이러한 사찰의 삼문은 제 각각 나름의 고유한 상징을 담고 있지만 한편으로 모두 사찰의 문이라는 한 가지 점에서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사찰의 산문은 단순한 통행의 기능을 넘어서는 것으로 문 이전과 문 이후의 공간에 상징적인 차이를 두고 이를 문으로 구별하므로, 문의 통과행위는 곧 차원의 상승과 경지의 전이를 의미한다. 사찰의 산문에서는 일반적인 문과 같은 문짝이나 혹은 담장이 나타나지 않은 것은, 산문이 물리적 존재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마음 챙김과 같은 고차원적 경계를 지닌다는 것을 알려준다."
첫댓글 새해 첫산행 너무 따뜻해 힘든 산행이었읍니다.
올한해에도 좋은뫼 많이 구경시켜 주세요.
10좌 축하 드립니다..ㅎ
음악소리가 조용한 절 풍경소리 같습니다....
즐감했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