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보리 문둥이’의 유래
경상도에서 반가운 사람을 오랜만에 만나면 “아이고 이 문둥아.” 혹은 사투리 그대로 “이 문디야.” 라는 말을 쓴다. 또 경상도 사람을 가리켜 ‘보리 문디’라고도 한다.
이런 말을 쓰는 유래에 대하여는 두어 가지 주장이 있다. 그 중 한 가지는 경상도는 곡창지대가 적어 쌀보다는 보리를 주식으로 삼으면서 항상 가난에 시달렸고, 또 다른 도에 비하여 문둥병 환자가 많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보리 문디는 한말로 ‘보리를 먹고 사는 가난한 시골사람’이라는 뜻이며, 이 때문에 항상 조롱과 폄훼의 의미로 유통되어 경상도 사람들은 이 말을 들을 때마다 강한 거부감을 보인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설득력이 약하다. 경상도가 쌀 생산량이 적고 주로 보리를 먹었기 때문에 이런 말이 생겼다면, 경상도보다 더 척박하여 쌀이나 보리보다는 한참 떨어지는 잡곡을 주식으로 했던 지방에서는, 왜 그런 말이 생기지 않았는가를 설명할 수 없다.
또 경상도에 문둥이가 많았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일제 강점기의 통계를 제시하는 이도 있는데, 이는 당시의 지역 크기와 인구수를 간과한 자료에 불과하다. 경상도는 전국에서 가장 큰 도였고 인구도 타 지역에 비하여 월등히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에 비례하여 한센병 환자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경상도 사람들이 이 말을 쓰면서 스스로 조롱과 폄훼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했는데, 이것도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친밀감을 나타내면서 그 말을 쓴다. 그러므로 이 말을 들을 때마다 강한 거부감을 보이고 있지도 않다. 경상도 사람들은 지금도 가끔 ‘이 문디야’ ‘문디 자석’ ‘문디 같은 놈’이란 말을 애칭 삼아 쓰는 경우가 있다. 필자는 어린 시절에 그런 말을 종종 들을 수 있었다. 그 말은 무간한 사람끼리 쓰는 정다운 말이었지 결코 조롱하는 비칭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경상도 사람들이 보리를 많이 먹고, 그런 풍토병자가 많았기 때문에 ‘보리 문디’란 말이 생겼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또 어떤 이는 이렇게 설명한다. 경상도는 선비의 고장이기 때문에 글 잘하는 문동(文童)이 많았는데, 반가운 사람을 만나면 상대방을 치켜세워서 문동이라 불렀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 문동이란 말이 변해서 문둥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억지로 가져다 붙인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얼핏 생각해도 문동이가 문둥이로 변할 수는 없다. ‘문둥아’라고 하는 말은, 필자가 체험한 바로는 주로 아녀자들 사이에서 사용되었는데, 지난날의 아녀자들은 지식 계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하필이면 자기네들과는 거리가 먼 문동(文童)이란 말을 끌어와 썼겠는가?
이는 결론부터 말하면 고운 것에는 잡귀가 시기를 해서 괴롭힌다는 민간의 습속에서 생긴 표현이다. 잘생긴 것은 귀신이 질투하고 시기하여 해를 입히기 때문에, 일부러 못 생겼다고 빗대어 말함으로써 그 위해를 피하고자 한 것이다. 생김새가 잘나고 귀염상인 아기를 보고, “그놈 참 밉상이구나.” 하는 표현을 하는 것이나, 충실한 아이를 안으면서 무겁다는 말을 쓰지 못하게 하는 것도 다 그러한 습속에 기인한 표현이다. 잘생겼다고 하면 이를 귀신이 시기 하여 해를 입힐까 염려하고, 또 무겁다고 하면 아이의 충실함을 귀신이 시기하여 해를 끼칠까 염려한 까닭이다.
어린 아이를 보면서 부르는 우리 민요에, “둥글둥글 모과야 아무렇게나 크거라.”는 노래가 있다. 모과는 과일 중에서 가장 못생긴 과일로 일컬어지는 것인데, 이것을 아이에게 비유한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다. 못생겨야만 병마가 달라붙지 않고 아무 일 없이 건강하게 잘 자랄 수 있겠기 때문이다.
지난날, 아이의 무병장수를 기원하기 위하여 일부러 이름을 천하게 지은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다. 고종의 아명이 개똥이이고, 황희의 아명이 도야지(돼지)인 것은 다 그러한 연유로 지은 것이다. 이는 역(逆)으로 표현해서 귀신의 접근을 막자는 뜻이다. 더럽고 천하기 때문에 귀신도 가까이 오지 않을 것이라 믿은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반갑고 아끼고 싶은 사람을 만나면 역으로 문둥이라 부르는 것이다. 너무 곱고 반가운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천하게 부르는 것이다.
미운 상대와 싸울 때, 인간이나 동물은 다 물고 때리고 꼬집는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귀엽고 사랑스러울 때도 똑같이 물고 꼬집는 것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의 가슴속 저변에 그러한, 역의 심리가 깔려 있기 때문니라 생각된다.
그러면 문둥이 앞에 왜 ‘보리’를 덧붙였을까?
이는 문둥이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린 시절에는 문둥이가 아이를 잡아먹는다는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다. 사람의 간을 먹으면 문둥병이 낫는다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치료가 불가능한 천형이라 여겼기 때문에 의외의 것을 먹어야 약이 되리라고 관념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문둥이가 아이를 잡아먹을 때는 눈에 잘 띄지 않은 보리밭에 들어가서 잡아먹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화 아닌 설화는 전국적으로 퍼져 있는 이야기다.
서정주의 시 ‘문둥이’나 단편소설 ‘보리밭의 문둥이’라는 작품은 다 이러한 모티프를 깔고 생성된 것으로, 공연히 나온 것이 아니다. 그래서 미당은 ‘문둥이’에서 이렇게 읊었다.
해와 하늘 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그러므로 보리 문둥이란 말은 경상도 사람들이 보리를 주식으로 하였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며, 한센병 환자가 많아서 그렇게 생긴 것은 더더욱 아니다. 문동이란 말이 변하여 생긴 말도 아니다. 또 이 말은 경상도 사람들이 조롱이나 폄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애정과 친밀감을 그 밑에 깔고 쓰는 말이다.
그러면 인간의 심리와 결부된 주술(呪術)에 대하여 잠깐 살펴보자. 예로부터 사람들은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두려운 존재에 대해서 양면적인 자세로 그것을 대해 왔다.
첫째는 달램의 수법이다. 두려운 상대를 잘 달래서 화가 나지 않도록 해, 위해를 덜 끼치도록 하는 방법이다. 호랑이를 산신령님이라 하고, 역신을 마마라고 부르는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호랑이를 산신령이라고 높여 부르고, 무서운 천연두를 별성마마나 호구 별성마마 따위로 불러 높은 대접을 해줌으로써, 그것들의 화를 최소화시키고자 했다. 또 홍역에 걸려 나타난 붉은 발진을 가리켜 ‘꽃이 피었다’며 고운 말로 표현하는 것도 여기에 속한다.
둘째는 위협의 수법이다. 상대방을 협박해서 물러가게 하는 방법이다. 민간에서 병을 다스리기 위하여 물릴 때 칼을 들고 “억쇠 귀신아. 물러나라.”고 외치는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또 독한 감기를 가리켜, ‘개⨉부리’ 혹은 ‘개⨉대가리’로 낮추어 부르는 것도 이에 속한다.
고려 처용가에 보면, 열병을 물리치기 위하여 처용의 이름을 빌려 위협하는 가사가 나오는데, “처용 아비가 보시면 열병신이야 횟감이로다.”란 구절이 있다. 열병신을 보고 회를 쳐서 먹어버리겠다고 협박하고 있다. 바로 위협의 수법이다.
이와 같이 무서운 존재에 대하여 그 해를 줄이기 위하여, 때로는 달래고 때로는 위협하는 방법을 썼다. 전자를 백주술(白呪術)이라 하고, 후자를 흑주술(黑呪術)이라 한다. 그런데 귀한 사람을 문둥이로 낮추어 부르는 것은 백주술도 흑주술도 아니다. 대상을 낮추어 부름으로써 나쁜 기운이 아예 달라붙지 못하게 하는 제3의 방법이니,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회주술(灰呪術)이라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