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그리스인은 ‘헬라스’라고 하고 로마인은 ‘그리스’라고 함. 아테네 북부 보이오티아의 ‘그라리아’에서 유래)에서는 3번의 격변기가 있었다. 트로이 전쟁(BC1250~1240, 헤로도토스 주장), 페르시아 전쟁(BC490 1차, BC480 2차), 그리고 펠로폰네소스(Peloponnesos) 전쟁(BC431~404)은 그리스 민족의 집단 기억에 어제 일처럼 생생히 각인되었다. 그래서일까, 불멸의 세 고전이 탄생되었다. 그것들은 각각 호머의 『일리아드(그리스인들은 트로이를 ‘일리움’이라고 부름. 일리아드는 ‘일리움의 이야기’라는 뜻)』, 『히스토리아(원래의 의미는 탐구 inquiry)』,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이다. 『일리아드』는 서사시라서 역사라기보다는 신화이다.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서문에서 역사적 사실과 시의 과장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트로이 전쟁에서 동원된 군대는 호머가 말한 1200척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양초(糧草, 군인의 식량과 말의 먹이) 문제 때문에 가능한 정예병을 데려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유추한다. 그들은 트로이(오늘날의 소아시아 근방) 해변에 도착한 후에도 곧장 흩어져서 먹을 것을 약탈하거나 농사를 지어야 했기 때문에, 집중공격을 못해서 전쟁을 10년간이나 끌었다고 추론한다.
지금은 헤로도토스가 일반적으로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지만, 19세기까지만 해도 투키디데스(BC 460~398)가 역사의 아버지라 불렸다.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 랑케의 박사 학위 논문은 실전되긴 했지만「투키디데스 연구」였다. 헤로도토스가 비록 대부분 직접 현장을 답사하며 『역사』를 집필했지만,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많아서 고고학적으로 뒷받침되기 전까지, 그는 허풍쟁이로 통했던 것이다.
하여간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는 서양 역사에서 쌍벽을 이룬다. 그들의 서술 방식과 목적이 대조된다. 헤로도토스는 개별성과 특수성을 중시하여 세상에는 다양한 민족과 나라가 있고 강대국과 약소국은 끊임없이 바뀐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과거의 사실(史實)이나 전승되는 이야기를 필자의 주관은 가급적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전달하고자 했다. 반면에 투키디데스는 어떤 상황, 어떤 환경에 놓이면 인간은 거의 똑같은 행동을 보인다고 믿고 날카로운 이성으로 엄밀성을 추구하여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은 제거하고, 역사의 보편성을 강조하면서, 사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과감히 생략하고 후세에 교훈을 주고 했다. 동양과 비교하면, 헤로도토스는 『사기』의 사마천에 가깝고, 투키디데스는 『춘추』의 공자에 가깝다.
투키디데스는 말한다.
“개개의 사실에 대해 있는 그대로 내가 할 수 있는 한, 탐구한 결과에 바탕을 두고 쓰는 것을 첫째로 삼았다. 그러나 이것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각각의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라도 편견이나 기억의 차이에 의해 같은 사실에 대해서도 똑같이 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이 저작에는 흥미 본위의 이야기가 전무해서 청중들(그리스에서는 모든 글을 소리 내어 읽었기 때문에, 독자 reader란 말이 따로 없었음. 청중이 곧 독자)에게는 아마 재미없게 들릴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사건이나 이와 비슷한 것은 인간의 보편성에 따라 장래에도 다시 일어난다는 것을 명확히 알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이 책이 유익하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한때 갈채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불멸의 재산으로서 이 책을 썼던 것이다.”
페르시아의 침략을 물리친 아티카의 아테네와 펠로폰네소스의 라케다이몬(스파르타, 제우스의 아들 ‘라케다이몬’이 에우로타스의 딸 ‘스페르타’와 결혼하여 스파르타 지역을 물려받았다고 함.)이 27년 전쟁으로 그리스 전체를 초토화시킨 원인이 무얼까. 투키디데스는 신의 이름을 빌리지 않고 냉정하게 한 줄로 말한다.
“아테네가 강대해져서 라케다이몬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킨 것이 전쟁을 필연적으로 일으켰다고, 나는 생각한다.”
BC480년 아테네인들은 크세르크세스의 파죽지세 대군이 쳐들어오기 전에 거의 대부분 배를 타고 살라미스 섬 등으로 달아났다. 테미스토클레스의 선견지명으로 아테네는 해군을 증강시켰는데, 일단 주민들을 배로 피신시킨 다음 살라미스 섬과 그리스 본토 사이의 좁은 해협으로 페르시아 전함을 유인해서 일망타진한다. 이 전쟁의 승리로 오늘날의 서구가 탄생했다고 많은 사람들이 믿는다. 승리 후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의 맹주로 군림한다. 페리클레스 장군이 상공업 진작과 여러 폴리스로부터 받은 공물로 아테네의 전성기를 이끈다.
최강의 육군을 보유한 스파르타(스파르타는 왕이 2명)가 계속 딴죽을 건다. 아테네 식민지의 해방을 기치로 내걸고! 마침내 패권을 두고 양 진영은 파멸적인 전쟁에 돌입한다. 크세노폰의 『1만인의 퇴각』에서 보듯이, 펠로폰네소스 전쟁 직후 페르시아 용병으로 갔다가 고용주가 망하는 바람에 스무 개 이상의 민족과 싸우면서 1년 반에 걸쳐서 돌아왔지만 5분의 1밖에 죽지 않은 데서 보듯이, 그리스의 중장보병은 살인기계였다. 엄정한 규율, 높은 자긍심, 개인의 용기나 힘보다 대오(隊伍)를 중시하는 철벽 방진(方陣), 누구나 의견을 개진할 수 있고 장군이 앞장서는 민주군대! 이런 자들끼리 27년간 싸웠으니, 그 처절함은 그리스-페르시아 전쟁보다 더했으리라는 투키디데스의 말이 과장으로 들리지 않는다.
이 책에는 안 나오지만 마침내 스파르타가 아테네에게 이기게 되고 그 후에는 다시 테베가 이긴다. 그러나 어릴 때 테베에 인질로 있었던 필리포스에 의해, 최종적으로 그 아들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그리스 전체가 마케도니아의 말발굽 아래 놓인다.
투키디데스의 글은 화려하면서도 간결하고 난해하면서도 우아하고 차가우면서도 살갑다. 명문 아닌 문장이 거의 없을 지경이다. 니체의 화려한 문체가 군데군데 번득이는 창의성으로 빛나지만 자아도취에 빠져 감정의 삼천포로 빠지기 쉬운 반면에 투키디데스의 겉보기에 화려한 문체는 극도로 절제되어 있다. 모든 문장을 꼭꼭 씹어서 읽어야 한다.
투키디데스의 역사 서술은 그만의 독특한 연설 기법이 있다. 그것은 중요한 사건에 중요한 사람이 나타나 연설하는 것이다. ‘이런 요지로 말했다.’고 기술한다.
전쟁 초기 페리클레스가 전사자를 추모하는 연설의 일부를 소개한다. 아테네 10장군 중 1명으로서 오로지 연설로써 직접 시민들을 설득하여,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고 아무리 국가를 위해 큰 공을 세웠더라도 조금만 수틀리면 가차 없이 추방하는 아테네 시민들을 설득하여 아테네의 전성시대를 만들고 전쟁을 이끌어가는 페리클레스의 명연설은 곳곳에 등장한다. 이 추도 연설은 그중에서도 백미다.
“ ..... 우리의 정체(政體)는 이웃의 관례를 따르지 않고, 남의 것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들의 규범이 되고 있습니다. 그 명칭도 정치 책임이 소수자에게 있지 않고 다수자 사이에 골고루 나뉘어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의 분규와 관련해서는 모든 사람이 법 앞에 평등하며, 이와 동시에 개인의 가치에 따라, 즉 각자가 얻은 명성에 기초하여 계급에 의거하지 않고 능력 본위로 공직자를 선출합니다.
..... 이 도시의 위대함 때문에 온갖 물건이 빠짐없이 모이고, 우리 아테네인은 세상 끝의 산물까지도 이 땅의 산물처럼 똑같이 즐기고 있습니다.
..... 우리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도 사치로 흐르지 않고 지혜를 사랑하면서도 유약함에 빠지지 않습니다. 부자는 부를 자랑하지 않고 그것을 활동의 바탕으로 삼고, 가난한 사람은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은 그것을 이겨내는 노력을 게을리하는 것으로 봅니다.
..... 우리는 문제를 비판하고 또 동시에 그것을 올바른 방향으로 촉진시킵니다. 비판이 실행을 방해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렇다고 비판으로만 흘러, 해야 할 행동을 소홀히 하는 일도 없습니다.
..... 나아가 우리의 또 다른 특질은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고, 이해를 따지지 않으며, 자유를 신뢰하는 데 있습니다.
..... 그들은 지하에 묻히고 만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영명(英名)은 영원히 기억되고, 일이 있을 때마다 사람들의 언행 속에서 기억될 것입니다. 요컨대 대지는 모든 영웅들의 묘지가 되어, 모국에서 묘석의 비문에 드러날 뿐만 아니라 아무 관련이 없는 땅에서도 무형 무언의 기념비로서 사람들의 마음에 깃들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 여러분은 그들을 모범으로 삼아, 자유가 없는 곳에 행복이 없고 용기가 없는 곳에 자유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전쟁의 위험 앞에서 망설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 이 전몰자들처럼 최상의 영광으로 가득 찬 최후를 맞이하고, 여러분이 바치는 것과 같은 애도를 받을 수 있으며, 게다가 그 풍요로운 생애의 종말까지 충실했던 사람들이야말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가 여러분의 깊은 슬픔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여러분이 예전에 (맛보았던) 자신들의 기쁨을 오늘 이후로는 남들의 손안에서 찾아내야 할 때, 여러분은 수없이 그 추억에 슬픔을 느낄 것입니다. 행복을 모르는 사람은 불행도 쓰라리지 않지만, 오랫동안 익숙했던 행복을 빼앗기는 것은 고통입니다.
..... 내 자식의 생명을 나라에 바치지 않고 평등과 권리를 주장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 이 전몰자들과 그 유족에게 나라가 주는 그들에 대한 승리의 관으로서 그들의 자식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양육비를 아테네가 국고를 통해 오늘부터 보증합니다. ..... ”
그리스는 13만㎢에 지나지 않고,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21,600㎢, 아테네가 속한 그리스 본토의 아티카는 3,800㎢, 스파르타가 속한 라코니아는 3,600㎢밖에 안 된다.
바로 여기서 서양의 거의 모든 본류가 흘러 나왔다.
(2012. 12.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