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의 심정으로 주님을 바라보다
신학생 때, 존 뉴턴에 대한 책을 읽다가 그의 고백 하나가 제 마음에 꽂혔습니다.
그의 나이 80세가 넘어 노쇠해졌을 때, 했던 고백입니다.
“나이가 들어 기억력이 많이 약해졌지만 나는 두가지 사실만은 똑똑히 기억합니다. 하나는 내가 지옥에 갈 죄인이었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구원한 위대하신 구주라는 사실입니다.”
저도 이 두가지만 분명하면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 자신을 보는 눈’과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뜨이는 것입니다.
요 9장에서 예수님께서 나면서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셨을 때 바리새인들은 격분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그 일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육신으로는 보지만 영적으로는 맹인이라 하셨습니다.
자신들이 어떤 죄인임도 보지 못하였고 예수님이 구주이심도 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저도 바리새인처럼 영적인 맹인이 되는 것이 두렵습니다.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계 3:17-18)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 진정으로 자신이 어떤 죄인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구주가 되신 것도 실제로는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도 앞을 보지 못하데 천길 낭떨어지 절벽 길을 걷고 있다는 심정으로 “주여 나의 눈을 열어 보게 하옵소서” 기도해야 합니다.
저는 요즘 더욱 갈망하는 것이 있습니다.
영 안이 열려 저를 둘러싸고 있는 허다한 증인들을 보고 싶습니다.
히 12:1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 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물론 보이지 않는 주님을 보이는 분처럼 바라보려는 갈망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래서 무엇이 소중한지, 무엇이 정말 급한 일인지, 무엇이 진정 복인지 보는 것입니다.
무엇 보다 사랑할 사람이 보이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어디로 가야하는지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저의 간절한 기도입니다.
쟌느 귀용 부인은 죽음의 문턱에 갔다고 할 만큼 중병을 앓고 난 다음, 세상이 모든 것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를 깊이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비로서 끈질기게 붙잡고 있었던 자아를 내려 놓을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주님께 완전히 순종할 용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완전히 만족하게 되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싶은 마음으로 간절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영적인 눈이 뜨인 것입니다.
저도 정말 영적인 눈이 뜨이기 원합니다.
그래서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의 심정으로 주님을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