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웅기의 <걷기 미학>
길은 자신이 어디에 도착했느냐고 묻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길 위에서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어떤 온도로 세상을 딛고 지나 갔는지를 기억할 뿐이다.
오늘 내가 걷는 그 걸음걸이가,
바로 나라는 사람의 인격이라 본다면서,
다음과 같이 걸으면서 명상을 하라고 알려 주었다.
1 시선 조절:
땅만 보지 말고, 시선을 3~4미터 앞 먼 곳에 두어 본다.
마음의 여유가 시야와 함께 확장될 것이다.
2 리듬의 선택:
세상의 속도에 떠밀려 걷고 있지는 않은지 자문해 본다.
의도적으로 평소보다 10%만 느리게 걸으며
나의 리듬을 회복해 보는 거다.
3 태도의 자각:
걷는 행위에 자신의 가치관을 투영해 보는 거다.
‘나는 지금 목적지를 향해 도구적으로 걷는가,
아니면 삶을 누리며 걷는가?’를 음미하며 걷는다.
명상이라 하면 으레 정좌하여 눈을 감고
고요히 앉아 있는 상태(坐禪)를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걷기 명상은, 정적인 관조를 넘어,
움직임 속에서 뇌의 주파수를 맞추는
고도의 동적 수행이라는 거다.
민웅기는 이것을 “행선(行禪)”이라 말했다.
걷는 동안 우리의 뇌는 단순한 신체 이동을 넘어,
스스로를 재구성하는 놀라운 신경 가소성의
과정을 겪는다는 거다.
걷는 동안 마음속에 부정적인 생각이 떠오르면,
그 생각을 발걸음과 함께 땅속으로 내보낸다고 상상하며
경쾌하게 발을 떼어보면, 신경 재배치가 이루어 진다는 거다.
신경 과학적으로 볼 때,
규칙적인 걷기는 양측 뇌반구의 활동을 동기화하고,
왼쪽 발을 내딛고 오른쪽 팔을 흔드는 교차 동작은
뇌의 좌우 반구 사이의 정보 교류를 원활하게 하며,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 수치를 낮추는 데
탁월한 효과를 보인다는 거다.
특히, 걷기 명상 중
발바닥에 집중하는 행위는
‘고유수용감각(Proprioception)’을 자극하는데,
이는 뇌가 외부 세계와 신체의 경계를
다시금 명확히 인식하게 돕는다는 거다.
고유수용감각(Proprioception)이란,
우리 몸이 공간 속에서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근육이 얼마나 수축하고 관절이 어떤 각도로 굽혀져 있는지
스스로 느끼는 감각을 말한다.
이를 흔히 ‘제6의 감각’ 또는 ‘신체 자각 감각’이라고 부르며,
시각의 도움 없이도 내 몸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핵심적인 감각 시스템이다.
걷는 과정에서 뇌의 ‘전측 대상 피질’이 활성화되며
감정 조절 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한다는 거다.
앉아서 명상할 때 잡념을 떨치기 어려웠던 이들도,
걷기 명상에서는 발바닥의 감각이라는
물리적 지지대 덕분에 훨씬 쉽게
‘현재’로 복귀할 수 있다고 본다.
걷기는 뇌를 깨우는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정교한 알고리즘인 셈이다.
걷기 명상을 수행하는 이들에게
길은 거대한 실험실이 된다.
자신이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뇌세포 사이의 연결 회로는
새롭게 짜이고, 습관적으로 분노하거나
불안해 하던 신경 경로 대신
차분하고 명료한 경로가 강화된다는 거다.
명상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신비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걷고 있는 자신의 뇌 구조를 더 평온하고
지혜로운 상태로 변화 시키는 매일의 ‘물리적 연습’인 것이다.
민웅기의 다음 결론은, 걷기가 왜 중요한 지를 잘 설명해 준다.
자신의 발걸음은 뇌의 지도를 다시 그리는 펜 끝이다.
그런 까닭에 오늘 자신이 걸어온 거리는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더 명징해 졌는지를
증명하는 척도가 된다는 거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또 걷기 명상을 가르쳐 준다.
1 교차 감각 느끼기:
왼발이 닿을 때의 감각과 오른발이 닿을 때의 감각이
서로 어떻게 다른 지 미세한 차이를 느껴본다.
2 지면과의 소통:
발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지면의 질감을
뇌로 온전히 받아들인다.
그러면서 뇌가 외부와 연결되는 감각을 즐기는 거다.
마침내 도착지라는 환상마저 사라진 자리,
그곳에 비로소 자신이 서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걷기가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뇌를 재구성하며,
어떻게 삶의 태도를 결정하는지 살폈다.
이제 마지막으로 도달해야 할 지점은 어디일까?
역설적이게도 그곳은 ‘어디에도 없는 곳’이자 ‘지금·여기’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고 했다.
흐르는 강물처럼, 길 또한 매 순간 변화한다.
우리가 걷는 길은 어제의 길이 아니고,
걷고 있는 나 또한 어제의 내가 아니다.
걷기는 이 덧없는 변화 속에서
스스로를 잃지 않고, 변화 그 자체가 되는 과정이다.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 영어권에서는 헤라클리투스)는
‘눈물의 철학자’로 불린다.
그는 <아테나 학당>의 그림 앞 줄에
이마에 손을 대고 혼자 세상의 원인을 고민하느라
늘 ‘인상을 쓰며’ 혼자였고,
자연 법칙 네 가지를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1 자연은 숨기를 좋아한다.
내 방식대로 말하면, 자연은 말이 없다.
즉 설명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에게 자연은 discovery(발견)의 대상이다.
2 자연은 양면성이 있다.
오르막 내리막 모두 같은 길이다.
자연은 대립면의 꼬임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역』에서 말하는 음과 양의 대립,
노자가 말하는 무와 유의 대립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노자는 이것을 “유무상생(有無相生)”이라고 한다.
3 같은 강물에 두 번 빠질 수 없다.
잘 알려진 라틴어 문장이다.
Panta chorei ouden menei.
모든 것은 변하고 그대로만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영어로 말하면 이렇다.
Everything changs, and nothing remains still.
4 모든 것은 원리(logos)가 있다.
자연 현상은 원인에 의해 나타난다.
Natura non facit saltum.
자연은 비약하지 않는다.
자연은 점프하지 않는다.
자연의 작용은 연속적이다.
영어로는 이렇게 말한다.
Nature makes no leap.
우리가 진정으로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것은,
목표했던 지점에 발을 딛는 것이 아니라,
‘걷는 행위와 내가 하나가 되는 경지’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수행적 관점에서는 ‘행주좌와(行住坐臥)’가
모두 ‘도道’라 일컫는다.
서 있어도, 앉아 있어도,
심지어 길을 걸어도 그 모든 찰나가
완전한 삶이라는 깨달음이다.
이제 자신의 보폭은 세상의 속도에 휘둘리지 않는다.
자신의 호흡은 환경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는다.
자신은 그저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완전하다.
길 위에서 얻은 평온은 이제 신발을 벗고
멈춰 선 순간에도 자신의 내면에 고요히 머물 것이다.
도착할 곳은 없다.
자신이 걷고 있는 이 길 자체가 나 자신의 인생이며,
발을 떼는 모든 순간이 자신이라는 존재의 완성이다.
자신은 길을 걷는 여행자가 아니라,
이제 길 자체가 되었다.
오늘 자신이 남긴 발자국은 그저 흔적이 아니라,
이 세상을 지탱하고 있는 자신의 신성한 궤적이다.
민웅기의 글을 읽고 갈무리하면서,
이젠 전보다 다 편안하게 다시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걷기에 의미와 철학 더 나아가 미학을 보태면서.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삶을 사랑하는
한 방식이 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또 다시 더 앞선 걷기 명상 팁을 알려 주었다.
1 통합적 자각:
걷지 않을 때도 걷고 있을 때의 그 고요한 감각을 떠올려본다.
일상의 모든 움직임이 명상이 되는 것이다.
2 완성된 감각:
‘도착하지 않아도 나는 이미 완전하다’는 사실을
매 걸음마다 스스로에게 확인해 보는 거다.
산다는 것은 결과 보다 과정이 중요하다.
3 길과의 합일:
자신이 걷는 길이 곧 나 자신의 몸임을 느끼며,
세상과 조화롭게 섞여 걷는 기쁨을 만끽해 보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