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항해 시대
1. 1400년 경의 유럽
1) 십자군의 실패 – 기독교 확산이 중지된 상태였다.
2) 흑사병의 유행 – 유럽 인구의 1/3이 줄었다.
3) 세계사 관점에서 이 시기는 중국과 인도가 중심이었다.
이슬람-인도- 중국 간의 교역이 활발했고
유럽은 이슬람 세력에 막혀 동참하지 못했다.
4) 유럽인에게는 대서양이 유일한 활로였다.
5) 유럽인이 대서양으로 나가는 이유는 오로지 ‘돈’(부의 축적)이었다.
(1) 인도상품(특히 향료)은 이득이 많았다.
(2) 금도 수지가 맞는 상품이었다.
(*유럽인이 대항해에 나서는 이유는 위대한 꿈이라든지, 종교적인 열정이라든지가 아니고 가장 큰 동인은 돈벌이 였다. 대항해를 이런 관점에서 보아야 이해가 빠를 것이다.)
6) 복음전파나, 종교적 신천지를 찾아 나서는 일은 나중에 나타나는 부수적 인 것이다.
7) 이베리아 반도는 오래 동안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는 전투를 하였으므로
종교적 열정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남미 대륙에 카콜릭을 전파한다
8) 선도국은 지리적 위치로(대서양 쪽으로) 폴투갈과 스페인이 앞장 섰다.
(*폴투갈은 워낙 가난한 나라라서, 모험을 피할 처지가 아니었다.)
2. 과학의 발달
1) 나침판
2) 삼각돛의 사용(아랍인에게 배워서 개선했다. 이유는 공부해 보세요.)
3) 선박제조 기술의 발달(장거리 항해가 가능하도록)
1. 콜럼버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영어: Christopher Columbus 크리스터퍼 컬럼버스1450년 ~ 1506년)는 이탈리아 제노바이다. 그러나 유년시절은 불확실하다. 포르투갈에서 활동하며 그곳에서 결혼까지 했다.
중세의 유럽도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었다. 때문에 그는 대서양을 건너서 서쪽으로 가면 아시아가 나올 것이라 생각했다. 지리 지식이 부족해서 거리를 정확히 계산하지 못했다.
당시의 스페인은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 1세와 아라곤 왕 페르난도 2세가 공동 통치하고 있었다. 이사벨과 페르난도 부부는 해외 진출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콜럼버스는 여왕을 설득했다. 이사벨 여왕은 콜럼버스를 해군 제독에 임명하였고, 선박 2척(핀타호와 니나호)을 내주었다. 하지만 워낙에 무모한 계획이었기 때문에 참여하겠다는 선원이 많지 않았다. 결국 과거에 죄를 지은 자들은 면죄해 준다는 조건으로 범죄자와 부랑자들까지 승무원으로 모집하였다. 팔로스항(Palos)에 사는 핀손이라는 선장이 자기 소유의 선박인 산타 마리아호와 함께 참가하였다.
항해목적은 향신료의 수입을 위한 인도의 교역으로 얻을 수 있는 금과 보물이 가장 큰 이유였다. 실제로 콜럼버스의 항해 일지를 보면 금과 보물에 대한 언급이 10일 분량에 수백 차례나 등장한다. 또한 이사벨 여왕과의 계약 내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가장 중요한 목적은 부의 축적이었다. 콜럼버스는 총 4차례나 유럽에서 아메리카 대륙을 항해하였다.
제1차 항해 출범은 1492년 8월 3일이었으며, 같은 해 10월 12일에 현재 바하마 제도(Bahamas)에서 과나하니 섬(추정)에 도달했고, 이 섬을 산살바도르(San Salvador, 구세주의 섬)라고 칭하였다. 이어서 그는 쿠바·히스파니올라(아이티, Haiti)에 도달하여 이곳을 인도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원주민을 인디언이라 칭하였다. 이후 항해 도중, 산타마리아호가 파손되어 한 섬에 약 40명의 선원을 남긴 후에 에스파뇰라(Española, 후 스페인)라고 이름 지었다.
제2차 항해(1493년 9월 24일)는 그의 선전에 따라 금을 캐러 가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는데, 1,200명이 참가하였으며 17척 대선단을 꾸렸다.
처음 항해에서 식민지 개척자로 남겨두었던 사람은 모두 인디언에게 전멸했다. 2차. 3차 항해에서 금의 산출이 보잘 것 없자. 인디언을 성폭행, 학대, 살육하고, 노예화했다. 이때 스페인으로 들어온 상품은 주로 노예였다고 한다.
히스파니올라에 남겨 두었던 식민지 개척자는 인디오의 저항으로 전멸했지만, 콜럼버스는 여기다 식민지 행정관으로서 이사벨라 시를 건설하는 한편, 토지를 스페인 경영자에게 분할해 주고 인디언에게는 공납(貢納)과 부역(경작과 금 채굴)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금의 산출량이 보잘것없자, 항해자들은 원주민을 학대·살육·성폭행하였으며 노예화하였다. 이 항해에서 스페인으로 보낸 산물은 주로 노예였으며, 이 때문에 1496년에 귀국한 후 문책당했다.
3차, 4차 항해도 있었으나 소득이 별로 없었다.
통풍과 관절염으로 수년간 고생하던 그는, 1506년 5월 20일 바야돌리드에서 사망하였다. 사망할 때까지 그는 자신이 도착했던 땅이 인도라고 확신했다.
평가
1) 긍정적 평가
탐험과 발견으로 인하여 아메리카 대륙이 비로소 유럽인의 활동 무대가 되었고, 현재의 미국(United States of America)이 탄생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토대가 생길 수 있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서양인의 관점에서 볼때 역사의 무대를 전 지구로 확장하는 계기가 되는 중요한 사건이기는 하다. 또한 지중해 중심이던 서양역사가 대서양 중심으로 전환되기도 했다. 서양인들은 자신들이 사는 세계가 더 큰 세계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콜럼버스의 사후에도 개척열기가 이어지며 아메리카 대륙에 서양문명을 이룩하게 되었다. 거대한 신대륙의 발견과 대서양보다 훨씬 더 넓은 태평양의 존재를 알게되는 등 당대의 지식인들에게 놀라운 지적 자극이 되어 전통적으로 '주어진 것'에 회의를 품게 되었고, 고전적 권위에 대한 존경이 사라지고 지식인들의 사고의 문을 넓혀주었다.
2) 부정적 평가
원주민을 잔혹하게 학살했다는 사실은 오늘날 큰 비난을 받고 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식민지를 통치하며 원주민을 노예로 삼고, 고문 등 잔혹 행위를 일삼은 사실이 역사적 고증으로 밝혀지면서, 콜럼버스 데이에 반대하는 운동이 미 전역에서 벌어졌다. 최근 몇년 사이 미국의 주요 도시와 주(州)에서는 콜럼버스 데이를 '원주민의 날'로 바꾸기까지 했다.
콜럼버스의 평가에 모험심을 들어 근대적 인물로 평가하였으나, 최근에는 중세적 가치에 사로잡힌 중세적 인물로 평가한다.
부와 명성을 얻어서 기사적 신분으로 상승하려는 욕망은 중세의 대표적인 개념이다.라는 평이다.
2. 바스쿠 다 가마 (1460-1524)
포르투갈 출신 탐험가로서 포르투갈의 숙원이던 인도 항로를 개척하였다. 이는 항해왕자 엔히크(1394~1460)가 대서양 탐사를 시작한 이래 80년 만에 이룬 결실이라 할 수 있다. 1497년 7월에 리스본을 출발하여 귀국할때까지 총 2년이 걸렸고 약 42,000km를 항해하였다.
출발 시 함선 4척을 이끌고 갔으나 2척만이 돌아왔으며, 170명중 55명만이[4] 생존하여 귀환하였다. 신항로 개척으로 인해, 포르투갈은 동방무역의 새로운 길이 열렸으며 유럽과 인도간 해상을 통한 직접 교역을 시작할 수 있었다. 1524년 인도 부왕(Viceroy)으로 부임하여 활동하다가 인도 코친에서 사망하였다.
제1차 항해
희망봉 발견(1488년)으로 인해 인도로 향하는 신항로는 곧 열릴 듯했다. 마누엘 1세는 선왕의 충신이였던 바스쿠 다 가마를 인도 원정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1497년 7월 8일 리스본의 벨렝항을 출발하였다. 그의 함대는 170명의 선원과 4척의 함선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아프리카를 돌아가는 긴 항해 끝에 캘리컷에 도착했다.
드디어 원정대가 1498년 5월 20일 캘리컷[25]에 도착했다. 그들이 가져간 폴투칼 상품은 인기가 없었고, 선점한 아랍상인의 구박도 심해 향신료를 구하고 서둘러 출항했다.
1498년 8월 29일 인도를 출발하여 1499년 1월 7일 말린디에 도착하였다.
처음 출발 당시 4척의 배가 떠나 단 2척만이 돌아왔고 힘든 여정이었지만, 다가마의 귀국으로 투자자들에게는 무려 투자원금의 60배에 달하는 배당금이 돌아갔다.[31]
1502년 8월 20일 인도 고아 인근에 있는 안제디바(Anjediva)섬에 도착하였다. 이후 응징과 선전포고 겸 기선제압을 위한 무력행사에 돌입한다. 오노르 항구를 초토화시켰는데, 이 소식을 접하고 겁을 먹은 인근 바테킬라 지역이 즉시 굴복하였다.[40]
9월 29일, 이슬람 순례선 미리호를 나포하여[41] 재물을 강탈하였는데, 몸값 지불약속을 하며 자비를 구하는 승객들의 애원이 있었으나 모두 묵살한 채 살육하였고[42] 배마저 불태워 침몰시켜버렸다. 대략 300명정도 사망하였으며 이 사건은 인도 현지인들에게 포르투갈에 대한 엄청난 증오심을 불러일으켰다. 1500년 7월에 있었던 포르투갈 교역소 기습사건과 더불어 미리호 학살사건으로 인해 포르투갈과 캘리컷간에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져갔다. 이외에도 폴투칼 이의 잔인한 행동은 지나쳤고, 이후 폴투칼인에 대한 인도인의 적개심은 최근까지도 이어왔다.
인도인과의 전투에서 다 가마는 생포했던 포로들의 손과 발을 잘라 모욕적인 서신과 함께 자모린에게 보냈다. 이틀날 역시 함포사격을 재개하여 항구도시 캘리컷에 심각한 피해를 안겨주었다. 얼마지나지 않아 캘리컷에서 평화협상 의사를 전해왔다. 다가마는 캘리컷으로 이동하여 함상에서 협상을 진행하던중 매복공격을 받았으나 모두 격퇴시킨후 그곳을 빠져나왔다.
인도에 남겨둔 부하는 다 가마의 명을 어기고 함대를 홍해로 이동하여 이슬람 상선을 상대로 약탈을 일삼았다. 3차 항해도 있었다.
비판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 항해 500주년 행사를 인도 정부와 포르투갈 정부가 추진하였다. 그러나 인도 국민들의 격렬한 반대로 무산되었다. 극우에서부터 극좌에 이르기까지 바스쿠 다 가마는 식민 지배를 가져온 장본인이라고 한 목소리를 내었다.
*우리는 서양사를 배우면서 바다를 건너 미지의 세계로 항해한 사람을
영웅으로 다룬다. 그러나 그들의 항해 동기는 영웅심리가 아니다.
이해를 쫓아서 갔고, 방법도 순리적인 장사가 아닌 약탈의 방법이었다.
영웅일까. 날강도일까.
왜 이런 질문을 하느냐면, 역사란 해석에 따라 얼마든지 바뀐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