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목대비의 노기
그러는 중에도 고함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오고 궁중 대소 관속이 혼비백
산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하는 소요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궁중에 벌써 화광이 충천하였다. 김상궁은 이 위급한 중에도 자가의 친가
로 보낼 보물 상자를 꾸리어 궁녀 하나에게 들려서 북문으로 달려보내고
자기는 급급히 옷을 갈아 입기 시작했다. 상궁이 아니라 여느 나인 부스러
기에 불과한 차림을 하자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번 반군의 중심 인물이
이귀라 하니 이귀의 생명은 수차에 걸쳐 자기의 입으로 살려 주었고 수양
딸인 예순이가 있은즉 설마하니 나의 목숨까지야 죽이랴 하는 어리석은 추
측을 하였다.
편전 앞 누마루에서
"종묘에 불이 붙었나 보아라."
하고 외치는 광해군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죽느냐 사느냐의 이 자리에서
종묘는 다 무엇이냐 하는 생각에 김상궁은 냉랭한 코웃음을 치며 문으로
내다라 도망쳤다.
광해군은 생사가 위급한 지금에도 반정의 중심 인물이 왕자 종실이라면 종
묘에 불을 지를리는 없다고 추측한 때문에 종묘에 불이 붙느냐고 연방 부
르짖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대답이 귀에 들어오기 전에 황황히 어전으로 달려온 영의정 박
승종은 혼백이 몸에 붙지 않은 듯 왕에게 국궁할 여유도 가지지 못하고
"상감마마..."
하고 부르짖었다.
광해군에게는 그 소리쯤으로도 반가왔다. 내시의 대부분이 도망하고 선전
관 무감 등속이 하나도 눈에 보이지 않는 이때 영의정 박승종이 나타난 것
은 고맙고 반가왔다.
"나의 대에 와서 나라는 망했구료. 어이 하면 좋겠소?"
"상감 모든 것이 천운입니다. 빨리 옥체를 피하십시오."
"경의 어이 할려오?"
"늙은 신이야 이제 죽사온들 한이 있사오리까."
하고 박승종은 눈물이 비오듯 내리는 것도 모르는 듯 서 있었다.
신하들은 하나도 광해군의 신변에 시립한 사람이 없었고, 단지 남아 있는
것은 변숙의(邊叔儀)와 내시 두엇이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거의 허탈상
태에 빠져 있는 광해군을 모시고 간신히 북문에 이르렀다.
화광은 궐내 이곳 저곳에서 충천해 있고, 금호문 내외에 고함소리 연하여
들려온다. 당초에 능양군은 궐내에 불을 놓지 말라고 영을 내리었지만 의
거 군사의 대부분이 대궐에 불을 지름으로써 자기 가족들에게 의거가 성공
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었다.
북문에 이른 광해군은 몸을 부들부들 떨렸다. 북문에 당도하기는 하였으나
문은 굳게 잠겨 있어서 나갈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광해군은 내시의
어깨에 올라 무등을 타고 간신히 성벽을 넘었다.
한편 능양은 궐내에 들어와서 인정전에 우선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곧 중
신들에게 예궐하라는 초패를 놓았다. 이 초패를 받고 맨 먼저 예궐한 것이
병조판서 권진(權縉)이었고 그 뒤를 이어 대소 판원이 황황히 궁중에 모여
들었다. 반정 북새가 아직 끝나기 전이라 곁에 이귀, 김유, 이괄등이 시립
하고 있고 모여든 전조(前朝) 신하들은 쳬례를 차릴 여우가 없어 인정전
대뜰 아래에 무질서하게 늘어서 있는 형편이었다.
이때 맨 먼저 예궐한 권판서가 때마침 대뜰 앞에 나선 능양군 앞에 나아가
국궁하고 넓죽이 절을 했다. 이 광경을 바로본 대소 관원은 거의 모두가
그 뒤를 따라서 절을 했다. 능양군은 이귀에게 분부하여 전조 대소 관원을
일단 정원과 집으로 물러가 있게 하고 의거에 참가한 군관 소임 이상을 불
러들이게 했다.
할 일이 태산 같았다.
반정은 성공했지만 첫째 광해군을 잡아들여야 할 것이고, 서궁에 유폐된
인목대비(仁穆大妃)께 문안 인사를 보내어 궁중으로 모셔들일 것, 전조의
관원을 전반적으로 해직하고 새로 정부를 조직하여야 할 것 등 등의 일이
어느 것 하나 급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먼저 영을 내려 내시와 여관(女官) 등을 안정 시키고, 이흥립과 상의하여
의거 군졸을 각 영(營)에 임시 수용케 하였으며 일변 광해군의 행방을 상
을 걸고 수색케 했다.
사방으로 사람을 내놓아 광해군의 행방을 수색케 한 결과 광해군이 내서
두엇과 그릭고 변숙의 등과 더불어 북문을 넘었다는 것만을 알게 되었을
뿐 북문을 넘은후의 행방이 모연하였다.
어느덧 날은 밝아 해가 높다랗게 떠올랐다. 능양군은 차츰 역정이 나기 시
작했다.
"그래 광해의 행방 하나 알아들이지 못한단 말이요?"
참다 못해 터져나오는 능양군의 역정소리가 시립한 여럿을 황송케 하고 민
망케 했다.
이때에 대전 별감 하나가 어떤 중노인을 데리고 들어와서
"전 상감의 소식을 아뢰고자 전의(典醫) 정남수(鄭楠壽) 소명도 없이 들어
와 뵙고자 하오."
이 말에 능양군은 반기며 놀라서
"그래 그대가 전왕의 행방을 아는가?"
하고 전각 앞에 엎드린 노인에게 물었다.
"행방이 아니오라 지금 숨어 계신 집을 이 눈으로 보고 왔습니다."
"어떻게 해서 보았더란 말이요?"
"그전 상감이 작취 미성으로 정신이 혼미하신데다가 오늘 이 대궐에서 몸
을 피하시느라고 기절하시다시피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변숙의가 평소
소인의 집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급보해 왔기에 그 들어 계신 집에 소인이
가서 약을 지어올렸던 것입니다."
"그대에 대한 상전(賞典)은 차차 내리겠거니와 지금 곧 무감을 데리고 그
집으로 인도하도록 하오."
하고는 능양군은 곁에 있는 이귀에게 고개를 돌려 눈짓을 했다.
이리하여 정남수란 전의에게 인도를 받아 들이닥친 무관과 병졸들에게 광
해군은 붙잡혀서 창덕궁으로 압송되어 왔다. 능양군은 비로소 얼굴의 주름
살을 폈다.
능양군은 이귀와 의논하고 광해군을 우선 궁중 일실에 감금하여 놓고 승지
홍봉서(洪鳳瑞)를 불러서 서궁으로 인목대비를 찾아 뵙게 하였다.
인목대비는 서궁 하배들의 보고로서 반정 의거의 큰 소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을 듣고 몹시 궁금히 여기던 차다. 창덕궁에서 승지 홍봉서가 능양군의
사신으로 문안차 대령했다는 말을 듣고 곧 그를 불러들이었다.
홍봉서는 대청 끝에 굴복하고는 곧 능양군의 전갈을 주달하기 시작했다.
"능양군이 이귀, 김유, 이괄 등 동지와 더불어 반정 의거를 감행하와 오늘
새벽에 창덕궁을 점령하옵고 간신들을 방금 숙청 중에 있사옵니다. 능양
군은 마땅히 달려와서 대비마마께 문안을 드려야 할 것이오나 반정 벽두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하여 잠시도 자리를 떠날 수 없는 형편이므로 우선 소
신을 보내서 의거의 전말을 사뢰옵고 겸하여 창덕궁의 뒷수습이 대충 정리
되는 대로 대비마마를 몸소 모시러 오겠다는 말씀이옵니다."
홍승지가 이렇게 말을 마치자 대비는
"상감은 지금 어이 되었누?"
"궁중에 감금되어 있습니다."
대비의 얼굴에는 비로소 기쁨의 표정이 뗘올랐다.
"그럼 옥새는?"
"옥새는 신왕께서 지니고 계십니다."
"신왕이라니, 새임금이 뉘란 말이냐?"
홍봉서는 무심히
"능양군 말씀이옵니다."
하고 대답했다.
"능양군이 누구의 허락으로 보위(寶位)에 올랐단 말이냐?"
갑자기 대비의 노기 띠운 음성이 홍승지의 가슴을 찔렀다.
- 인목대비의 전교
"이제 보니 능양은 임금의 자리가 탐나서 반정을 일으킨 것이로구나. 벌써
부터 이 늙은 것을 무시하는 꼴을 보니 장래가 무섭다. 냉큼 돌아가서 능
양군더러 제멋대로 올라 앉은 자리 오래 잘 누리라고 전갈하라."
하고는 벌떡 일어섰다가 다시 앉으며 열어 놓았던 미닫이를 손수 불쾌스러
이 닫아버렸다.
홍승지는 어안이 벙벙했다. 말 한마디 무심코 잘못했다가 대비의 큰 노여
움을 사게 된 것이다. 그는 곧 창덕궁으로 돌아와 이 사실을 능양군에게
보고했다.
"허허 그거 큰일 났군, 대비의 말씀이 지당하시지."
하고 이귀를 다시 서궁으로 보냈다.
대비는 시녀의
"이귀 노인이 문안겸 급히 아뢸 말씀이 있다고 등대했습니다."
하는 전갈에 얼굴에 화기를 띠우며
"들어오라고 그래라." 하였다.
이귀는 대청 끔에 올라 굴복하였다. 대비는 이귀가 문안의 말씀도 올리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이번 반정 의거의 자세한 경과는 홍승지에게 들었거니와, 듣건대 능양군
이 보위에 올라 임금이 되었다 하니 대체 뉘의 허락으로 대통을 이었다는
거요?"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능양군이 보위에 오른 듯이 생각하온 것은 홍승
지의 착각이옵고 반정 뒷수습에 능양군이 주로 명령을 내리는 것을 임금으
로서의 전교인 양 잘못 생각한 과실이옵니다. 능양군이 아무리 분망중이
온들 그러한 법도를 무시할 분이오니까?"
이귀는 진정의 표정을 얼굴에 띠우고 이렇게 변명하였다.
대비는 이귀의 말에 저으기 느끼는바 있는 듯 싶었다.
대비는 부드러운 어조로
"늙은 그대야 설마 거짓말을 하겠소. 그대의 말과 같다면야 낸들 폭군을
내몰고 이 나라 사직을 바로 잡는 이 마당에 무슨 트집을 하겠소. 원체 체
례로 말하면 광해를 잡아들이어 대행대왕의 영위 앞에 꿇리어 수죄하고 몰
아낸 후에 내 손으로 옥새를 능양에게 전하는 것이 법도가 아니겠소?"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생각하옵건대, 미구에 능양군께서 문후차로 등대
하올 줄 아옵니다."
이귀는 이렇게 대답하며 또 한 번 굴복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있은
능양군과 대비의 대면은 극적이었다.
능양군은 대비께 뵈이고 절하면서 눈물을 흘리었다.
"수년 유폐의 고생을 하신 할마마마를 이제야 마음놓고 뵙게 되오니 기쁜
눈물이 앞을 가리옵니다."
이 첫마디의 말이 대비의 가슴을 찔렀다.
능양군을 보면 좀 따져보리라 하던 감정이 스르르 녹아버리고 말았다.
"이 몸이 너의 애쓴 덕으로 다시 기를 펴게 되었으니 고마운 일이다."
"모두가 천운이시지 무슨 이놈의 힘이오리까."
"나는 이귀의 이야기로서 너의 사정은 알았다마는 일시 네가 보위에 올랐
단 소문을 듣고 괘씸한 소행이라고 몹시 한심하게 생각했더니라."
"천만 뜻밖의 일이옵니다. 대통을 이을 인물이야 할마마마께서 하시기에
있느니라고 생각하고 있을 뿐, 어이 그런 방자한 생각을 먹사오리까."
"음" 하고 대비는 머리를 크게 끄덕이었다.
"그럼 이 나라에 한때도 임금이 없으서야 될 수 없으니 즉 조당에 즉위 거
행의 준비를 하고, 옥새를 가지고 와서 내게 전하라."
"예, 하교대로 거행하겠습니다."
능양군은 곧 이귀를 시키어 옥새를 받들어 대비께 올리라 했다. 그러나 이
귀는 옥새를 안고 대비 앞에 나아가
"이러한 판국에 대비마마께옵서 옥새를 올리라 하심은 전혀 그 뜻을 알 수
없습니다." 하고 아뢰었다.
대비도 그 뜻을 알아차리고 급히 대답했다.
"내가 옥새를 가져 무엇하겠소. 나에게는 이미 친자식도 없소. 옥새를 올
리라 함은 이 나라의 국체를 중하게 하고자 함이요."
"그러시다면 정전(正殿)에 납시어 대신을 불러들이어 정식으로 거행함이
옳을까 하나이다. 이렇게 국보가 지름 길로 거쳐 드리어짐은 옳지 아니한
가 하나이다."
하고 이귀는 대답하였다.
대비는 이 말을 듣고 곧 정전으로 자리를 옮겨 대신들을 불러들이었다.
능양군은 김자점으로 하여금 모든 문을 지켜 다른 왕자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박홍구(朴弘耉)를 시켜 공손히 옥새를 받들어 대비께 드리었다.
대비는 옥새를 받아 감격에 넘치는 음성으로
"광해군은 이 세상에 용납지 못할 죄인이니 속히 처치할 것이요. 내 이미
십년을 유폐되었다가 어제 저녁 꿈에 선왕을 다시 뵈왔더니 오늘의 이 경
사로운 일이 있구나."
하고 내시에게 명하여 부복하고 있는 능양군을 당(堂)으로 오르라 하여 친
히 옥새를 능양군에게 전하며
"위로 선왕의 뜻을 받들고 아래로 백성들의 마음을 살펴 일국이 화평하도
록 하라."
하며 전교를 내렸다.
능양군은 머리를 굽혀 세 번 절하고 옥새를 공손히 받았다.
이조 십오대의 임금 인조(仁祖)가 바로 이 능양군이며 이때 그의 나이는
이십구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