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읍 행원리
하늘에서 본 행원마을 전경이다. 마을 앞에는 수확기에 접어든 황금 들녘이 펼쳐져 있다. 마을 앞과 마을을 끼고 드넓게 기름진 평야가 있으며 이를 비옥하게 하는 장흥의 젖줄 탐진강이 흐른다. 교통은 마을 우측에 고속도로 진출입로가 개설되어 있다. 이 마을은 한눈에 봐도 풍수상지리상 길지가 틀림없다.
행원마을은 장흥위문 행원문중 본산이라 할 수 있는 장흥위씨 집성촌으로 장흥에서는 일기산, 이행원, 삼방촌이라 부를 정도로 인물이 끊임없이 배출되는 인재의 산실이기도 하다.
행원마을의 역혁에 대하여 알아보자. 행원 마을은 장흥읍에서 부산면 방향 국도 23호선 동쪽에 위치한 마을로 주로 논농사를 영위하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마을유래를 보면 오래 전부터 마을 뒷산에는 杏園寺(행원사)라는 古寺(고사)가 있었다고 하여 杏園(행원)이라 했으며 처음에는 「杏花村」「杏源」으로 쓰다가 杏園(행원)이라 쓰게 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廢合(폐합)에 따라 잣두. 松山(송산)을 병합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입지적 조건이 좋은 이 마을은 農耕時代(농경시대)에 들면서부터 巨村(거촌)이 형성되었다.
高麗中葉(고려중엽)에 黃氏(황씨)가 開村(개촌)했다 하며 기록에 의하면 1500년경 光山金氏(광산김씨) 浹(협)이 康津縣監(강진현감)으로 있다가 入住(입주)했으며 魏大用(위대용)을 영입하여 兩大性氏(양대성씨)가 세습적으로 살아오면서 盛村(성촌)되었다.
한편 마을의 동쪽에 위치한 송산은 주변에 솔이 울창하여 송산이라 했고, 마을 뒷등에 대나무가 많고 갓을 만드는 집이 많다 하여 갓점이라고도 했다 전하며, 행원의 마을 세가 커지자 송산으로도 주민이 이주하여 성촌되었다고 전한다.
송산에 처음 터는 잡기는 홍(洪) 씨가 잡았고, 이후 김해 김(金) 씨가 이주하여 왔으나 관덕리(觀德里) 가치동(加峙洞)으로 이거하였으며, 1770 년경 장성에서 장홍 고(高)씨 시갑(時甲)이 입주하여 마을이 크게 형성되자 언양 김(金), 장흥 위(爲) 씨, 김해 김(金) 씨 등이 입주하여 성촌하여 부동면 (府東面)에 속하였다.
이후 "행원(杏園)"이 크게 번성하자 1912년경에는 행내(杏內) 행외(杏外)로 구분하여 운영 되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행내, 행외 송산 마을을 통합하여 행원리(杏園里)가 되었다. 이후 예양강(汭陽江)의 범람으로 모래땅으로 형성된 행원리에 속한 잣두에 1930년 4월 장흥농업실수 학교가 들어서면서 일부 농가 주택이 들어오고, 1975년 8월에 지금의 장흥 실업고등학교가 들어서므로 마을이 크게 형성되자 잣두지역을 2002년 9월 16일자로 행원리에서 분구하게 됨에 따라 행원 1 구라 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곳 마을을 행원리라 부른다. 행원은 현재 6개반 (송산, 아랫 동, 송촌, 분드골, 강정, 솟대거리)을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