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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략 1,000여 명의 직원이 있는 걸로 추정되는데 가장 중요한 국가 기관이기 때문에 정확한 통계는 나오지 않는다. 그중 경호처 소속 직원이 절반 조금 넘고 나머지 400여 명의 비서실 소속 직원이 있다. 기타 안보실 관련 직원도 있는데 직제상 인원은 2~30여 명이지만 업무에 따라 정부 각부처 소속으로 파견 나와 있는 직원도 있어서 실제로는 더 많을 것으로 짐작된다.
2. 역사
청와대 터의 기원은 고려 숙종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풍수가인 김위제가 국토를 저울로, 지금의 서울인 당시 남경을 저울추에 비유하며 천도를 주장하였고, 1104년에 궁궐이 준공되어 숙종이 직접 남경에 행차하기도 하였으나, 이때 남경은 서경처럼 지역 세력이라든지 지역 중심지로서의 중요성이 크지 않아 정치적 논의만 거친 채 흐지부지 끝났다. 다만 당시 남경개창도감을 설치하여 궁궐터는 조성을 했는데, 그게 현재의 청와대 자리다.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서 경복궁을 건설하면서 현재 청와대 자리는 경복궁의 후원으로 사용되다가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불타 사라진 후 한동안 방치되었다.[6] 고종대에 이르러 흥선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이 지역에도 각종 전각들을 세우고 과거장이나 권농, 연무 등의 목적으로 사용하였다. 당시 네 개의 전각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중 한 건물의 이름이 "경무대(Kyung Mu Dai)"로, 훗날 이승만 정부 시절 경무대라는 명칭의 기원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이 전각들을 헐고 공원부지로 만들었으며, 1937년 이 지역을 조선 총독 관저 부지로 선정하여 오늘날의 청와대 구 본관 자리에 관저를 세우게 되었다. 1939년 완공 후 6대 총독 미나미 지로가 관저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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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으로 재현한 청와대 구 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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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의 구 본관
이후 해방이 되면서 미군정 치하에서 미군정 사령관인 미합중국 육군 중장 존 하지 장군의 관저로 쓰이다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하지 장군이 물러나며 이승만 대통령에게 관저를 주면서 그렇게 대한민국 대통령의 관저로 쓰이게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 이후 이 자리에 있던 경복궁의 전각 중 하나인 경무대(景武臺)로 불리게 되었다.[7] 이곳에 입주한 첫 대통령이 된 이승만 대통령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망치를 들고 가 모든 일본산 전구와 가로등을 깨 버리는 것이었다고 전해진다.[8]
서울이 2차례 함락 당한 6.25 전쟁 당시에는 임시수도 부산광역시 서구 부민동에 임시 관저를 두었는데 이 건물은 경상남도지사 관사를 거쳐 현재 임시수도기념관이 되었다.[9] 그리고 환도 이후 경무대가 다시 대통령 관저가 되었다.
그러나 자유당 정권에 대한 반감의식 때문에 경무대라는 이름은 원성의 대상이 되었고, 결국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한 후 윤보선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경무대라는 이름을 바꾸는 것을 두고 논의가 이뤄졌다. 당시 서울시사 편찬위원이던 김영삼이 윤보선 대통령에게 불려가 경무대라는 이름을 바꾸지 말 것을 요청했지만, 윤보선 대통령의 의지는 확고했고, 김영삼은 '화령대'와 '청와대'의 두 가지 안을 제시했다. 윤보선 대통령은 백악관(화이트 하우스)과 대조되는 의미에서 '청와대'를 선택하였다.
대통령경호처 유튜브에서 청와대에 윤보선 대통령이 쓴 '청와대' 바위 각자가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박정희 대통령 당시, 청와대라는 명칭을 황와대로 바꾸자는 의견이 제기되어 논란이 일기도 했다. 청색보다는 황색이 더 고귀하다는 의미[10]에서 논란이 일었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이름을 또 바꿀 수는 없다." 며 기존 이름을 고수하기로 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청와대를 '블루 하우스'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 영부인 육영수가 불쾌감을 표하여 청와대를 한국어의 발음대로, 'Chong Wa Dae'로 표기하게 했다고 한다. (당시 로마자 표기는 Chong Wa Dae였고 추후 'Cheong Wa Dae'로 바뀌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대통령 측근을 비롯한 청와대 직원들은 블루 하우스, 약칭 BH로 부른다. 대통령의 지시를 'BH의 하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일제시대 총독부 관저로 지어진 건물이었던 만큼 대통령 관저로 사용하기에는 협소하고 노후화되어 재건축하자는 의견이 여러차례 있었으나 이승만이나 윤보선은 청와대 건물에 별로 손을 대지 않았다. 이후 취임한 박정희는 청와대를 대대적으로 개보수, 증축하였다. 당시 청와대 1층은 집무 공간으로 대통령 집무실과 서재 등이 있었고, 2층은 대통령 가족의 생활공간이 있었다. 그러나 이후 건물이 노후화되고, 협소하여 외국 정상 방문시 수행원이 머물 공간조차 없어서 청와대를 재건축하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박정희는 재건축 건의는 무시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전두환 시절에 청와대 구본관을 다시 리모델링하였다.
이후 노태우 시절이 되어서야 본관과 관저, 프레스센터인 춘추관을 신축하여 2년 2개월간의 공사 끝에 1991년 9월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경복궁, 창덕궁 등 전통 궁궐을 많이 참고했다고 한다. 청와대 관저를 신축하는 과정에서 땅을 파다가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祉)"라고 쓰인 비석이 발견되기도 했다.
1993년 취임한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로 그 해 10월 구본관이 철거되었다. 일제시대에 북악산의 정기가 이어지는 능선을 끊기 위해 해당 건물이 지어졌다는 풍수적 해석에 따라, 벽돌과 기와는 기존 능선의 복원에 사용하고 가구와 집기는 보존하는 한편, 샹들리에와 승강기는 대통령이 사용하던 물건이라는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도록 분해 후 재사용을 전제로 경매에 내놨다.( 당시 KBS보도)
김영삼 대통령은 철통같이 막힌 청와대 앞길과 인왕산을 시민들에게 개방하고 PC통신 하이텔에 '청와대 큰마당'[11]을 개설했고, 1995년에는 CI를 도입하고 인터넷 홈페이지까지 열었다.
3.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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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 시절, 기존 로고의 낡고 권위적인 이미지를 탈피, 다양한 사용 환경에 맞춰 효과적으로 활용한다는 명목으로 디자인을 개선한 새 청와대 로고가 확정되었다. '청와대를 상징하는 청와대 본관 건물의 이미지를 그대로 살리면서 국민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단순화, 상징화한 것으로 전체적인 형태와 색상을 개선하여 균형 잡힌 유연한 이미지를 형상화했다. 이는 국민을 섬기는 청와대, 국민과 가까운 청와대를 시각화한 것이다. 기존 로고보다 밝고 투명한 청색 컬러를 활용하여 '투명한 청와대'와 '진취적이고 젊은 청와대'의 이미지를 강조했으며, 로고 타입도 보다 현대적인 서체를 바탕으로 정교하게 획의 강약을 조정하여 이미지를 세련되게 현대화했다.'는 것이 작업 취지다.
4.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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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사진은 여기를 참고하자. 또한 청와대는 당연히 국방부 국가중요시설 지정 및 방호 훈령에 따른 "가"급 국가중요시설이며 그 중에서도 맨 첫 번째에 올라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상세하게 서술하지는 못하며 국내 포털사이트에서 검색 가능한 언론에 보도된 정도로만 서술 가능하다. 그래서 카카오맵, 네이버지도 같은 포털 사이트의 지도상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단, 다음, 네이버 지도에서 지적편집도를 켜면 제1종주거지역이라고 뜬다.
그러나, 구글 어스 등 해외 지도에서는 선명하게 잘 나와 있으며 노무현 대통령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거의 다 공개했고, 박근혜 정부 당시 세월호 7시간 및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청와대의 구조가 많이 공개되었다.
4.1. 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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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9월 4일 새로 지어진 건물로[13], 의외로 역사가 오래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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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2층 구조. 출처는 중앙일보 2012년 12월 13일자 기사(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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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에는 영부인의 집무실과 접견실, 무궁화실[14], 인왕실이 있고, 1층 별채에는 충무실[15], 세종실[16]이 있으며, 2층에는 대통령의 집무실과 접견실, 백악실, 집현실[17]이 있다. 본관 앞에는 엄청나게 넓은 잔디마당이 있는데, 대통령이 참석하는 야외행사에 주로 사용된다. 국빈 환영식이 대부분 여기서 진행된다.
본관이 완공된 노태우 정부 시절부터 대통령 집무실이 위치한 본관과 비서실이 위치한 여민관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어 대통령과 비서관 사이의 소통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새 정권이 출범할 때마다 청와대 본관을 리모델링 해서 대통령 비서관들을 입주시키거나, 본관 옆에 비서동을 새로 만들자는 안이 제출되었으나 여러가지 이유로 번번이 무산되었다.
전직 대통령 비서관들의 말에 따르면 여민관에서 본관으로 가는데 차로 5분, 걸어서 최소 10분이 걸린다고 하며, 같은 청와대 경내임에도 불구하고 검색대를 따로 통과해야 한다고 한다. 같은 건물 안에서 대통령 비서관들이 수시로 만날 수 있는 백악관과는 천양지차. 자세한 내용은 아래 여민관 문단으로. 결국 본관 집무실은 문재인 대통령이 집권하여 여민관 간이 집무실이 주 집무실이 되면서 국무회의 및 귀빈 방문시에만 사용하는 보조 집무실이 되고 말았다.
옛 궁궐 양식에 대입해 보면, 전면 9칸에 지붕 처마 끝에는 잡상이 11개가 올려져 있다.[19] 황제의 격에 맞는 건축이다.[20]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의 정전, 근정전은 전면 5칸에 처마에는 잡상 9개를 올렸다.[21]
4.1.1. 대통령 집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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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청와대본관집무실
상당히 넓은데, 넓이가 약 100m²이 넘는다고. 출입구부터 의자까지 15미터에 달할 정도로 넓은데, 백악관의 경우 그 거리가 8~10m 정도에 불과하다. 천장 높이도 3m가 된다고 한다.
너무 넓어서 장관이 보고를 마치고 뒷걸음으로 나오다 뒤로 넘어지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전임 대통령들도 대부분 문제 인식을 했다고 전해진다. 이명박 대통령은 처음 집무실을 둘러본 뒤 "운동을 해도 되겠다"라고 했을 정도. 김영삼 대통령은 아예 정부서울청사로 옮기고 싶어 했고, 노무현 대통령은 비서관들과 소통하기 위해 비서동에 집무실을 설치했고 이명박 대통령도 가끔 여민관 집무실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근혜 대통령은 집무실과 관저를 번갈아 가며 사용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국무회의나 귀빈 방문시에만 본관에서 업무를 보고 그 외의 평시에는 여민관에서 근무한다고 한다. 사실상 본관 집무실은 행사용으로만 쓰게 되었다. 문재인 대통령 부분의 집무실 사진이 집무중 사진이 아닌 행사 사진인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이전 버전엔 대통령 당선 후 첫 행정명령에 사인하는 사진이었다. 참고로 2020년 3월 26일에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펜데믹 수준의 대유행에 따라 G20 국가들이 화상회의를 가졌는데, 한국 측이 선택한 장소가 본관 집무실이었다#. 이후 아세안+3 특별 화상회의 당시에도 본관에서 한 것으로 보아 화상회의할 때에는 본관에서 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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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집무실에 선 노무현 대통령과 문재인 당시 대통령비서실장
4.2. 영빈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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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12월 준공된 청와대 경내의 현대식 건물 중 제일 오래된 건물로, 대규모 회의와 외국의 국빈들을 맞이하는 장소다. 민속공연이나 만찬, 연회, 회의 등을 하는 곳. 석조 양식으로 건축된 건물이다. 이곳이 준공되기 이전까지 소규모 국빈 접객은 청와대 본관에서 이루어졌으며, 대규모 접객은 서울신라호텔의 영빈관[22]에서 이루어졌다.
1970년 이후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국빈들은 증가하였지만 청와대 내에 만찬이나 연회 등 행사를 치를 공간이 마땅치 않아 여러 가지로 불편하고 또 국가 위상과도 걸맞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많은 인원이 참석하는 대규모 회의도 자주 열리게 되었는데 당시 청와대에는 마땅한 공간이 없었다. 따라서 청와대 내에 대규모 행사장을 갖춘 지금의 영빈관을 마련하였다. 하지만 영빈관에 국빈이 묵을 숙소가 없어 국빈은 환영행사 후 사내 호텔로 이동한다.
겉모습은 경복궁 경회루를 닮았다. 정작 내부는 프랑스 루이 14세 때의 건축 양식을 따라 부조화라는 지적이 있다. 탁현민 전 의전비서관실 선임행정관은 퇴임 이후 "세계 여러 나라의 국빈행사장과 의전 행사장소를 둘러봤지만, 고백하건대 우리나라의 청와대 영빈관이 최악이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라고 혹평했다. 구민회관보다 못한 시설이라며, 어떤 상징도 역사도 스토리텔링도 없다고 평가했다. 이에 대해 실내를 설계한 유희준 한양대 교수는 "탁 전 행정관의 의견을 존중한다", "40여 년이 지난 지금, 영빈관을 재설계하라고 한다면 지금의 모습과 똑같이 할 것"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스스로는 자신의 작품에 자신감이 있고, 다시 봐도 스스로 감탄했다.’고 말했다.
1층은 대접견실로 외국 국빈의 접견행사를 치르는 곳이다. 만찬행사시에는 음악과 무용 공연이 행해지기도 하며, 국빈행사 외에 대규모 회의장소로 사용되기도 한다. 내부 정면 벽 중앙의 원형 속에 새겨져 있는 봉황 문양은 태평성대와 대통령을 상징하고, 천장의 원형은 대화합을 상징한다.
2층은 대규모 오찬 및 만찬 행사를 하기 위한 장소로서, 내부는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무궁화와 월계수 등으로 장식하였다.
4.3. 여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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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여민1관이다.
與民館
국민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는 곳
대통령비서실이 위치한 건물로, 대통령 관련 업무가 실질적으로 이루어지는 곳. 이 건물은 볼거리가 별로 없고, 흔히 볼 수 있는 콘크리트 건물이다. 대통령실 행정을 위한 건물로 3개 동이 있다. 1관은 2004년, 2관은 1969년, 3관은 1972년에 지었다. 1관에는 대통령 간이집무실과 대통령비서실장실이 있다. 이명박 정부 시절 위민관(爲民館)으로 이름을 바꿨다가, 문재인 정부 들어오면서 여민관으로 복귀했다. 위민이라는 이름이 청와대가 주체가 되어 권위적인 인상을 주기 때문에, 국민과 함께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이름을 복구시켰다고 한다.
너무 오래돼서 안전진단결과 D등급을 받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 청와대 시설유지보수 담당자는 재건축 심의에 적용되는 내진설계기준이 강화돼서 그런 것이라며, 2008년에는 2관이 C등급, 3관이 B등급을 받았다고 밝혔다. 관련기사 2관에 위치한 경제수석실 천장이 내려앉아 유리창이 깨지는 사고도 발생할 정도니 말 다했다. 관련기사
2015년, 재건축 및 재배치를 위한 예산을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여야 의원들은 이 과정에서 대통령의 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목적을 밝혔는데, 이에 대해 이재만 비서관이 소통에는 문제가 없다고 오히려 예산을 거절하는 묘한 상황이 연출됐다. 가뜩이나 박근혜 대통령의 불통 문제가 꾸준히 제기되는 상황에서 예산을 덜컥 받아버리면 그걸 인정하는 꼴이 될까 걱정됐던 모양. 관련기사
여러 언론에서 실무진과 대통령 사이의 거리를 좁히기 위한 비서실 재배치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다. 비서동에서 본관까지 가는데 2개의 관문과 경비초소를 지나야 하고 검색대까지 통과해야 한다고 한다. 국회는 예산을 받으라고 재요구할 예정이라고 한다. 긴급상황 때 벙커에 모이려면 20분?-조선일보 JTBC 팩트체크에서는 물리적 거리와 소통의 상관관계에 관한 경영학 이론에, 다른 나라 행정부 수반의 집무실과 실무진 사무실 사이의 거리와 구조까지 비교하며 재배치의 필요성을 드러내기도 했다.유튜브 영상12
external/image.c... 청와대와 백악관 비교
4.3.1. 대통령 여민관 집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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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소집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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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이 2004년 비서관들과의 소통을 위해서 당시 '여민1관' 3층에 설치한 간이 집무실이다. 본관 집무실의 절반 정도 크기인 87m²로, 짙은 베이지색과 갈색으로 내장을 꾸몄으며 전반적으로 차분하고 현대적인 느낌.
이명박 정부 때에는 본관 집무실과 비슷한 인테리어로 변경되고, 매주 금요일마다 조찬을 겸한 수석비서관회의를 가졌다고 한다.
박근혜 정부 시절에는 쓰이지 않았다가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후 비서관들과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주 집무실로 다시 쓰이고 있다. 정부서울청사로 대통령 집무실을 이전할때까지, 기존 본관 집무실은 해외 국빈 방문 등 행사 시에만 쓰고 평시에는 계속 여기서 집무할 예정이라고. 문재인 대통령은 민정수석 시절 쓰던 10인용 원형탁자를 찾아내 배치했다. 하지만 대통령 집무실 이전이 백지화되면서 앞으로 여민관 집무실을 계속 쓸 예정으로 보인다.
4.4. 관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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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0월 25일 완공된 전통 한옥 양식의 건물. 대통령과 그 가족들이 생활하는 공간이다. 생활공간인 본채(내실), 접견공간인 별채(외실), 전통양식의 뜰과 사랑채로 구성되어 있다. 이전에는 구 본관 2층을 대통령 관저로 사용하였다.
박근혜 시절, 내실은 침실[23], 서재, 피트니스 룸[24], 소식당[25], 한실[26], 파우더 룸[27]으로 구성되었으며 박근혜와 윤전추[28], 김막업[29]이 거주했었다고 한다. 외실에는 경호실, 조리실, 대식당, 접견실[30]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대통령 관저 뒤편에는 통일신라 불상이 있는데, 흔히 '청와대 불상', '미남 불상', '미남 석불' 등의 별칭으로 불린다. 비교적 최근인 2018년 4월 20일에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이란 정식명칭으로 대한민국의 보물 제1977호에 지정되었다. 경주에 있던 불상이 청와대에 있는 이유는 일제가 약탈해서 조선총독부 총독관저에 둔 것을 광복 이후 그대로 있었던 것이고 경주로 돌려줘야 한다는 운동이 꾸준히 있다. 원래 위치는 경주 이거사라는 절이라고 한다.
대통령경호처 YouTube에서 대통령 관저에 있던 한옥 '침류각'이 효명세자와 관련 있는 것으로 추정했다.
4.5. 상춘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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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춘재내부
일제강점기때에는 이곳에 20여 평 규모의 "매화실"이라는 이름의 조선총독부 별관 건물이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상춘실"로 이름만 바꿔 사용하다가 1977년 12월에 철거되었다. 1978년 3월 양식 목조건물이 들어섰으나 다시 철거되고, 규모를 크게 키워 1983년 4월 5일 전통 한옥양식으로 다시 지어 청와대 최초의 전통 한옥이 되었다.
당초 니스칠이 되어있었으나, 2017년 문재인 정부에서 니스칠을 벗겨 내고 들기름으로 다시 바르는 등 보수 공사를 진행했다.
외빈 접견이나 비공식회의 장소로 사용되는 건물이다. 여야 당대표를 초대하거나 기업인을 불러 호프미팅을 하기도 했다.
내부 모습
대통령경호처 YouTube에 따르면 녹지원에서 상춘재로 올라가는 계단에 천록이 있다고 한다. 이 천록은 국립고궁박물관 수장고에 있는 천록과 재질이 같다고 한다.
4.6. 녹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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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도 특별한 날(특히 어린이날)이면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장소. 큰 소나무가 있는 잔디를 깐 야외 행사장이다. 본관 앞 대정원이 국가적인 귀빈을 맞는 행사 등에 쓰인다면 이 녹지원은 좀 더 대중적인 행사에 주로 쓰인다. 어린이나 어르신, 장애인 초청 행사 등 국민을 초청하는 행사는 대부분 여기서 치러진다. 1995년에는 이곳에서 열린음악회가 열리기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 때 본인의 국회의원 시절 만들었던 전산시스템인 노하우에서 착안해 청와대 사상 최초 도입된 전산 시스템인 e지원이 녹지원에서 따온 이름이다.
일부는 텃밭으로 쓰이기도 하는데, 이곳에서 재배된 보리, 밀과 메밀로 만든 차를 2020년 경자년을 맞아 전국 119 상황실에 선물했다.
녹지원 건너편에 한옥 건물이 바로 위에서 소개한 상춘재이다.
4.7. 춘추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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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는 언론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건물. 청와대 프레스센터로 각 언론사의 기자들이 이곳에 출입한다.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기자회견장도 여기에 있다.
비공식적인 쓰임새가 또 있는데 바로 극장이다(...). 2000년대 이전만 해도 대통령이 일반 극장에 방문한다는 인식은 생소해서 쉽게 방문하기 어려웠다. 한 번 극장에 갈 때마다 경호원들이 따라붙어야 하고 극장에서도 경호 문제로 신경써야 할 게 많아지기 때문에 일반 관람객들에게 민폐를 끼친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컸다. 그래서 대통령과 그의 가족, 그리고 청와대 상주 직원들이 영화를 보려 할 때 이 춘추관에서 영화를 본다고. 한 예로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가 대흥행할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춘추관에서 직원들과 함께 서편제를 감상했다. 물론 영화 상영을 위한 준비 또한 상당히 번거로운 관계로 춘추관에서의 영화 상영은 상당히 드문 편이다. 그리고 2000년대 이후에는 대통령의 일반 극장 방문도 이루어지는 편이다. 한 예로 박근혜 대통령은 일반 영화관에서 넛잡: 땅콩 도둑들, 국제시장, 인천상륙작전 등을 관람한 적이 있다. 또한 문재인 대통령도 일반 영화관에서 택시운전사와 1987을 관람하였다.
4.8. 수궁(守宮)터(구 본관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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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경복궁 후원이었던 곳. 일제강점기때 일본이 여기를 허물고 총독 관사를 지었다. 이 총독 관사를 그대로 대통령 집무실 및 관저로 사용한 것이 청와대의 시작이다. 새 본관과 관저가 완공된 뒤, 구 본관은 1993년 철거되었고 그 터를 옛 지형대로 복원하여 수궁터로 부르고 있다.
4.9. 서별관
본관 서쪽[31]에 위치한 건물[32]로, 1997년 거시정책협의회가 이곳에서 열리며 알려졌다. 청와대에서도 중요한 비공개회의를 자주 하는 곳으로 알려졌다. 이 외에도 대표적인 곳으로 성균관대학교 명륜캠퍼스 후문과 연결된 그 곳이 있다.
서별관 회의는 김영삼 정부 이후 20여 년간 각종 경제 정책의 지휘부 역할을 했던 비공개회의로 경제부총리, 경제수석, 한국은행장, 금융위원장을 비롯한 최고위급 인사들이 참여한다. 비공식회의이기 때문에 어떠한 회의록이나 기록물이 남지 않아 밀실 회의라는 비판이 있다. 2016년 6월 이래로 잘 열리지 않다 2018년 12월에 한 번 열렸다 계속해서 열리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4.10. 시화문
시화문(時和門)은 경호실 업무를 위한 건물이다.
4.11. 연풍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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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풍문(年豊門)은 외부인이 공무수행을 위해 출입 절차를 밟는 건물이다. 외부인이 이용할 수 있는 복지시설이 있으며 각종 국정홍보를 위한 공간이기도 하다.
2009년 2월, 기존에 있던 북악안내실을 헐고 지상 2층 지하 1층 규모로 준공되었다. 옆에 있는 시화문과 짝을 이뤄 "시화연풍"(時和年豊ㆍ나라가 화평하고 해마다 풍년이 든다)을 뜻한다.
이명박 정부 당시 정책이었던 "저탄소 녹색성장"에 걸맞는 태양광 발전, 독도 수호의 의지를 보여주기 위한 독도 CCTV 영상 중계시설(KBS 제공) 등이 있다. 즉 공무상 방문한 민원인에게는 첫 대외적 공간 역할을 하므로 각 대통령의 정책을 홍보하는 건물 역할도 한다. 따라서 몇몇 드라마나 동화 같은 곳에 보면 어린이들이 대통령에게 편지 보내려다 경찰에 제지당한다는 클리셰가 있는데, 그럴 필요 없이 연풍문에 있는 민원실에 전달하고 나가면 된다.
은행업계에서 큰 화제를 몰고온 NH농협은행 청와대지점도 이 건물에 있다. 금융공동망 상의 지점번호도 뭔가 위엄있어 보이는 숫자 0100007이다. 다만 농협은행 청와대지점을 포함한 연풍문 건물 내부에 일반 시민이 출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사전에 명확하게 공무 약속이 되어 있어야 한다.
2009년과 2012년, 2016년엔 이곳에서 열린 비공개 회의로 인해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4.12. 청와대 사랑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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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비서실장 공관이 있던 자리로, 1996년 2월 청와대 앞길 개방과 함께 대통령이 해외에서 받은 각종 선물을 전시하는 전시관으로 개장하였다. 대통령이 해외, 그리고 외교 사절로부터 받은 각종 선물은 국민을 대신해서 받은 것으로 개인 소유가 될 수 없다. 공직자윤리법은 공무원이 직무를 수행하며 외국 정상이나 외국인·외국단체 등으로부터 받은 선물이 시가로 10만 원(미화 100달러) 이상이면 즉시 신고하고 국고에 귀속되도록 되어있으며, 대통령의 경우에는 더 엄격해서 받은 선물의 가치에 상관없이 신고 후 국고로 귀속되도록 되어있다. 대통령의 경우 국가와 국민을 대신해 선물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선물 자체가 정상회담의 중요한 사료가 되기 때문인 데다 선물 자체가 중요한 외교 수단이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바로 취식하는 음식물 등을 제외한 모든 선물은 국고에 귀속된 후에 바로 청와대 사랑채에 전시되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외교 사절로부터 받은 선물 목록을 제대로 공개하지 않는 것이 큰 논란이 된 적이 있었는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당시 이 선물들이 최순실 집에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 결국 이 선물들은 청와대 사랑채에 전시되지 못하고 검찰에 의해 범죄 증거물로 채택되었다.
원래 "효자동 사랑방"이라는 이름의 소규모 전시관이었으나, 건물이 너무 작고 노후화되어 일단 허물고 새 건물을 지어 2010년 1월에 재개장하였다. 현재 청와대 사랑채 신축건물이 들어선 부지는 서울시 시유지[34]였으며 이름도 "청와대사랑채"로 바꿨다. 새 건물은 기존 전시관에 있던 전시물과 함께 국정홍보관 역할도 하고 있다.
이곳은 늘 개방되어 있는 곳으로 언제든지 구경이 가능하다. 청와대 관람 여부와 상관없이 자유롭게 관람이 가능한 곳이다. 관람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고, 마지막 입장은 오후 5시 30분까지다. 입장료는 무료. 하루에 4회 전시해설을 해 준다. 자세한 것은 공식 홈페이지로.
5. 관람
청와대 홈페이지를 통한 청와대 관람 신청이 가능하다.
일요일과 공휴일을 제외한 매주 화요일~금요일과 둘째·넷째 주 토요일에 무료로 관람 가능하다. 개인관람(10명 이하)과 단체관람(11명 이상~200명 이하)이 가능하며, 토요일은 10인 이하의 개인관람만 받는다. 관람은 1일 4회로 오전 10시, 11시와 오후 2시, 3시이다. 매년 7월 1일부터 9월 16일까지는 오후 시간대가 1시간씩 늦춰져서 3시와 4시에 관람이 가능하다. 1회 350~450명(한국인 기준)까지 신청이 가능하다.
관람 희망일 6개월 전부터 최소 20일 전까지 신청이 가능하며, 신청정보가 변동되었을 시 내국인의 경우 관람일 전주 화요일, 외국인을 동반할 경우 관람일 기준, 2주 전 일요일까지 수정이 가능하다. 관람 당일 인원 추가 및 교체는 불가능하다.
인기가 상당히 좋은 편으로, 봄이나 가을 같은 시즌에는 한두 달 전에 신청해야 할 정도이며 관람시간은 90분 정도다. 경복궁 바로 위쪽에 위치해있기 때문에 이왕 경복궁에 가는 김에 같이 청와대에 들렀다 가는 외국인 관광객들도 많은 편으로, 특히 중국인 관광객들이 많이온다. 홍보관(춘추관 옆)과 녹지원, 수궁터(구 본관 터), 본관, 영빈관, 칠궁 순으로 둘러보는 코스다. 홍보관 외에는 건물 외부만 둘러보는 코스이며 간단한 기념품도 제공된다.(손지갑, 머그컵) 그리고 관람한다고 해서 대통령을 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니므로, 청와대의 건물 겉모습을 살짝 둘러본다는 마음으로 가면 된다.
아무래도 국가 중요 시설이기 때문에 사진 촬영이 엄격한 편. 지정된 장소에서만 촬영이 가능하고, 동영상 촬영은 아예 안 된다. 물을 제외한 음식물 반입도 금지이므로 주의하자. 또한 망원렌즈, 대형가방(여행용 가방 및 캐리어 등), 애완동물, 담배&라이터, 주류, 악기, 정치적 표현물(플래카드 포함), 무전기, 기타 위험물 등도 반입이 금지된다.
과거에는 말 그대로 "공개"가 이루어진 시절도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인 1954년부터 봄철에 2, 3일씩 일반에게 경무대 공원을 공개했고 수천 명씩 관람을 오곤 했다. 윤보선, 박정희 시절에도 이 전통은 이어져서, 1주일의 봄철 청와대 개방 기간 동안 청와대를 구경하러 온 국민학생들이 점심을 먹으러 가던 박정희와 마주쳐 "대통령이다!"하고 법석을 떨자 "공부 열심히 해라"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도 했고, 즉석에서 수학문제를 내어 답을 맞춘 학생들에게 용돈을 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1.21사태 이후 경호가 강화되면서 청와대와 주변 지역은 수십 년간 일반인이 범접할 수 없는 철옹성이 되었다.
다만 1988년 노태우 정부 때는 청와대 앞길, 효자동, 궁정동 등 근처 도보 허용, 경내 단체관람 허용 등을 일부 시행하긴 했지만, 이후 경비는 더 강화됐다. 1993년 문민정부 때는 청와대 앞길 및 인왕산 등산로에 섰던 바리케이트를 치우고 궁정동 안가를 철거해 '무궁화동산'으로 조성하는가 하면, 1998년 김대중 정부 때는 개인 및 외국인 경내관람을 허용시켰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6년부터 경내관람객을 위해 의장대 시범 등 볼거리를 제공하고 2007년부터 북악산 성곽로까지 개방했지만,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 후 경비가 더 강화됐다가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야 2017년 6월 26일부터 청와대 앞길을 24시간 전면개방하기로 했다.
청와대 볼펜
청와대 볼펜2
청와대노트1
청와대노트3
관람예약, 행사 등으로 청와대에 방문하면 기념품을 준다. 위 사진은 이명박 정부 때의 기념품이다. 당시에는 성인은 볼펜, 미성년자에게는 수첩을 주었다. 보면 매우 고급스럽다. 위의 검은색과 금색이 섞인 형태의 볼펜은 정부 관련 시설 기념품의 필수품목인 것처럼 똑같이 생긴 것만 있다.
박근혜 정부 때는 성인에게는 지갑, 미성년자에겐 '대한민국 청와대' 라고 적힌 지구본을 주었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방문 기념품으로 사람이 먼저다가 쓰여있는 머그 컵과 어린이는 어린이용 버스카드 지갑을 준다.
5.1. 민간인 숙식
청와대는 특별한 허가가 없으면 숙식은커녕 민간인이 접근할 수 없는 1급 중요 경계 시설이지만 2017년 3월 10일부로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민간인이라도 청와대 시설 관리자인 대통령 비서실장과 경호처장의 승인이 있으면 숙식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또한 민간인의 숙식 기간 또한 2017년 5월 시점으로는 별다른 규정이 없기 때문에 시설 관리자인 대통령의 승인만 있으면 이론상으로는 무제한 숙식도 가능하다.
실제로 박근혜의 경우, 10.26 사태가 일어난 후 두 동생들과 한동안 청와대에 있었고, 2017년에도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파면 선고 이후 민간인 자격으로 56시간 동안 체류하다가 여론의 비판으로 퇴거했다. 이는 이전 유고인 1980년 8월 16일 최규하 대통령의 하야 선언 이후 퇴거까지 걸린 46시간의 기록을 10시간 경신하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 당시에, 최순실이 청와대에서 거주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집사 역할을 한 김막업에 따르면 접견실에서 주로 머물 뿐 자고 가지는 않았다고 한다. 박근혜가 철저히 혼자 있기를 원해서 내실에 들어오지는 않았다고.[35] 당시에 실제로 청와대에 거주했던 이는 박근혜와 윤전추 그리고 김막업 3명뿐이라고 한다. 윤전추는 당시 제2부속비서관실 행정관 신분으로, 김막업은 총무비서관실 계약직 신분으로 지내며 24시간 옆에서 상주했다고 한다.
6. 개축, 이전 주장
6.1. 현 청와대 문제점 요약
청와대 본관은 1991년 완공 이래 25년간 이따금씩 문제가 제기되기도 한다. 주로 내부 소통이 어려운 구조라서 리모델링하거나 이전해야 한다는 주장이 선거철마다 나온다. 논란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건물의 배치, 구조 및 형태, 자리 잡은 터 문제다. 물론 경제적인 어려움과 보안상의 어려움이 있지만...
•한국은 전통적으로 각종 건축물을 세울 때 그냥 기능과 편의만을 추구한 것이 아니고 그 안에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理相)이나 철학(哲學)을 담고자 건물의 배치나 각종 상징이나 명칭 등에 그러한 뜻을 관철시켜 놓았다. 예를 들자면, 경복궁의 정전(正殿)인 근정전(勤政殿)의 경우 임금의 공적인 근무처이니만큼 “부지런한 가운데 맑은 정치를 하라”는 뜻을 그 명칭에 부여한 것이고, 편전인 사정전(思政殿)도 “임금이 깊게 생각하여 옳고 그름을 가려 백성을 굽어 살필 수 있도록 취해야 할 마음가짐”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청와대는 단순히 푸른 기와가 얹혀진 집이기에 그렇게 이름 붙여졌다. 그래서 건축물의 소재를 작명에 썼으니 당연히 국가 기관의 이름을 정하는 데 고심한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아 청와대 명칭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본관 건물은 전통 목조 건물 구조에 팔작지붕을 올리는 등 궁궐 건축양식을 따랐다. 그런데 규모가 너무 커서[36] 나무가 아니라 콘크리트로 지었다. 그래서 청와대를 “전형적인 봉건왕조 건축의 짝퉁”이라고 평가하는 건축가도 있다. 실제로 해방이후 최악의 건물들 7위에 선정되었다. 당시 설계를 맡았던 정림건축의 김정식 대표(현 목천김정식문화재단 이사장)는 2011년 출간한 회고록에서 “청와대는 여러 가지 논란이 많았다”며 “본관을 2층으로 하려니 지붕을 어떤 형태로 하느냐를 놓고 서양식이냐 한국 스타일로 전통적인 양식을 취할 것이냐 하다가 전통으로 돌아섰다”고 말했다. 또한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는 게 전통 한국 건축의 기본인데 청와대 건물은 주변의 지형이나 앞에 있는 경복궁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지적도 있다.
•본관 좌우로 배치된 별채의 이름이 실로 엉뚱하다는 지적이 있다. 하나는 세종실이고, 또 하나는 충무실인데, 제아무리 대통령 공관일지라도 후손된 도리로서 그들의 이름을 좌청룡 우백호의 건축물에 빗대어 마치 신하를 거느리듯 함부로 쓸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동쪽 별채가 충무실이고, 서쪽 별채가 세종실인데, 본채가 남향할 경우 음양오행 이론상 왼편인 동쪽이 문(文)이고, 오른편인 서쪽이 무(武)다. 그런데 문을 상징하는 세종실을 서쪽에, 무를 상징하는 충무실을 동쪽에 두어 위치를 서로 바꿔 놓았다. 경복궁의 융문루(동쪽·좌측)와 융무루(서쪽·우측) 배치 상태와, 삼문 출입 시 가운데 문을 기준으로 동쪽 문을 문관, 서쪽 문을 무관이 각각 이용한 사실만 보더라도 그것은 한국 건축의 원칙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건물 내부의 경우 업무 공간이 지나치게 커서 사람을 압도한다는 지적이 많다. 본관 2층 대통령 집무실은 운동장만 한 크기에 책상과 회의용 탁자가 집기의 전부다. 구조 자체가 사람을 주눅들게 한다.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간 고위 관료가 뒷걸음질쳐 나오다 넘어졌다거나 너무 긴장해 오줌을 쌌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대통령이 수시로 조언을 구하고 지시를 해야 할 비서실 직원들과 동떨어진 공간에서 근무하는 불통과 비효율 문제도 계속 지적되어 왔다. 청와대 비서실 건물인 여민관에서 500여 m 떨어진 본관의 대통령에게 대면 보고를 하러 가려면 아직도 두 개의 초소를 통과해야 한다. 물리적·심리적 거리감이 배가 될 수밖에 없다.
•청와대 경내에는 대통령이 마음을 가다듬거나 닦을 수 있는 상징물이 없다. 미국은 워싱턴 기념탑을 중심으로 백악관과 제퍼슨 기념관, 국회의사당과 링컨 기념관이 각각 대칭을 이루고 있어 대통령의 수심(修心)에 큰 역할을 해주고 있다. 조선왕조 때에도 경복궁을 중심으로 배치된 동서축의 종묘와 사직단, 남북축의 북악신사와 목멱신사가 있었다. 종묘는 왕실의 조상에게 한 점 부끄럼 없는 올바른 정치를, 사직단은 토지신에게 풍년을 빌어 백성의 살림살이를 궁핍하지 않게 해야 한다는 애민(愛民)정신을 왕에게 심어주는 공간이었다. 그런데 현 청와대 경내에는 기껏해야 역대 대통령들이 기념 식수해 놓은 나무와 푯돌, 그리고 세종실 입구에 걸어 놓은 역대 대통령들의 초상화가 전부다. 대통령의 수심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새로운 상징물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있다.
•청와대가 땅을 너무 많이 차지해 주변 개발에 장애가 되고 있다. 경비를 위한 군부대, 일반인 출입이 통제되는 지역까지 합하면 엄청난 땅이 사실상 청와대 때문에 묶여 있다. 그런데 청와대를 옮기면 그 터와 주변 지역이 강북 발전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다. 서민만을 위한 주택 단지를 만들 수도 있고[37], 역사·문화의 중심지로 서울을 새롭게 디자인할 수 있다. 청와대를 본래대로 경복궁의 후원으로 복원한다면 서울의 4대문 안 전역을 관광 자원화할 수 있다.
•청와대가 서울 시내에서 너무 외진 곳[38]에 있어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그래서 서울의 배꼽이라고 할 수 있는 용산구로 청와대 이전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있다. 특히 용산 미국군 기지 이전으로 청와대의 용산 이전론이 탄력을 받은 적이 있었다. 현재 서울 시내에서 청와대가 옮겨갈 만큼 넉넉한 부지가 용산 이외에는 없을 뿐만 아니라 용산 지하에 있는 벙커 등을 지하시설로 활용할 수 있다는 이점, 무엇보다 원주민에 대한 보상이 불필요하다는 것이 장점으로 꼽혔다.
•청와대가 풍수지리상 터가 좋지 않아[39] 역대 대통령들의 말년이 대부분 나쁜 것이라며 이전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40] 굳이 풍수지리가 아니더라도 본래 청와대 터가 조선시대 칠궁과 같은 사당이나 호위무사 연습 터로 쓰던 자리였기 때문에 자연으로 돌려놔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자세한 내용을 담은 조선일보 기사.
•앞 내용들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문제가 청와대가 너무 크고 넓다는데 있는데, 이 때문에 경호상에도 문제가 있고, 특히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드러난 충격적인 내용들을, 그동안 하나도 몰랐을 정도로 대통령이 작정하고 숨거나 뭔가를 숨기려면 숨길 수 있는 구중궁궐 같은 공간으로 악용하기 딱 좋은 수준의 관저이기 때문에, 대통령의 업무에만 쓸 수 있는 적절한 새로운 공간을 대통령 관저로 쓰고 청와대는 다른 방식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 이후 제기되었다.
6.2. 대통령 집무실 이전 시도
•노무현 정부 시절 행정수도계획은 종국적으로는 대통령 집무실을 세종시로 이전하는 계획까지 포함이였다. 그러나, 행정수도 반대파가 제기한 헌법재판소의 행정수도 이전 위헌결정[41]으로 인해 이전이 불가능한 관계로 세종시에 제2집무실을 건설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실제로 세종시에는 비록 건물은 지어지지 못했으나 청와대 제2집무실 부지와 국회의사당 분원 부지는 남겨놓은 상태다. 혹시 나중에 개헌해서 서울시에 있는 청와대와 국회의사당을 철거한 뒤 수도를 세종시로 옮기고 청와대와 국회의사당을 세종시에 새로 짓기로 결정할지 모르니까.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유력 후보들도 이구동성으로 당선되면 집무실부터 정부서울청사 등 보다 소통이 원활한 장소로 옮기고, 장기적으로는 대통령 관저 자체를 이전하고 현재 청와대는 박물관 등의 공간으로 변경하겠다고 공약하고 있다.
•2017년 5월 10일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가 제19대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면서 공약 이행에 따라 청와대와 북악산이 단번에 개방될 가능성이 크게 높아졌다. 문재인 대통령은 공약으로 대통령 집무실을 정부서울청사로 이전하고 청와대 지하벙커, 영빈관 등은 대통령 시설로 사용하되 본관, 관저, 녹지원 등은 대통령박물관, 시민공원 등으로 변경하겠다고 공약했다.[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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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전의 가장 유력한 시설인 정부서울청사는 주위에 고층건물이 둘러싸고 있는 경호에 취약하다는 단점이 있다. 대통령이 집무를 하기 위해서는 각종 대대적으로 뜯어고쳐야 하며 경호실이 입주할 공간도 충분히 마련되어야 한다. 참고로 미국의 백악관은 주변이 보안구역이고 영국의 다우닝 가 10번지는 건물은 허름할지 모르지만 주변은 정부청사 건물로 둘러싼 안전지대다. 주변에 고층건물이 둘러싼 일본의 수상관저는 무려 2000년대 초반 7천억원을 들여 건축하면서 보안에 중점을 두고 설계되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무리한 대통령공약으로 인해 대통령 경호 문제가 발생하는 거 아니냐는 우려도 많은 편이였다. 이로 인한 문제 때문인지 대통령 공약에 불구하고 보안시설, 지휘시설 등을 갖출 때까지는 기존 청와대 집무실을 이용할 예정이다.# 정부서울청사 내에 대통령 집무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서울청사를 사용하던 행정안전부 등 일부 부처가 추가로 세종시 정부청사로 이전할 계획이다.# 2019년 현재 정부세종청사 2청사와 민간건물 임대로 이전이 완료되었다.
•정부서울청사로 대통령 집무실이 이전시 대통령 관저문제도 불거지는데 당장은 관저는 그대로 이용하고 집무실만 정부서울청사로 이전하자 안과 옮길거면 다 옮겨야 하기에 국무총리는 세종시에 제2공관이 마련된 관계로 삼청동 공관을 대통령 공관으로 바꾸자는 안이 나왔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의 공약은 청와대를 국민에게 개방할 예정이므로 대통령의 거주지인 관저도 함께 이전해야 하는데, 역시 예상대로 삼청동 국무총리공관을 대통령 관저로 사용하는 방안이 가장 유력했었다.#기사 말미에 언급 이럴경우, 국무총리공관은 세종시에 제2공관이 이미 만들어져있기 때문에 세종시로 이사가게 될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건축가 승효상은 청와대를 정부서울청사가 아닌 경복궁 내 국립고궁박물관 또는 국립민속박물관 건물을 개조하여 새 청와대로 만들자는 주장을 했다. 하지만 청와대는 개인의 의견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6.3. 이전 공약 백지화
•2019년 1월 4일, 유홍준 '광화문 대통령 시대' 자문위원은 청와대 춘추관에서 가진 브리핑을 통해, 시설, 부지 등의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 대통령 집무실 정부서울청사 이전과 청와대 개방은 광화문광장 재구조화 사업이 끝난 후에 장기적인 과제로 검토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로 인해, 문재인 대통령의 청와대 이전 공약은 사실상 백지화 수순으로 가게 되었다.#
7. 여담
•청기와집, 초원의 집이라는 별칭도 있다. 또한 청화대로 잘못 불리는 경우가 있는데, 청화대는 중국[43]에 있는 대학교의 이름이다. (중국식으로 읽으면 '칭화') 반대로 청화대를 청와대로 부르는 경우도 있는 듯. 이런 사정 때문에 인터넷에서는 대한민국 대통령을 비꼴 때 청와대학교 총장이라고 돌려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중국의 명문대인 칭화(청화)대를 모르는 사람들도 약간 있기 때문인지 그렇게 많이 쓰이진 않는 듯.
•청와대 근처에서의 시위는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제11조 (옥외집회와 시위의 금지 장소) 누구든지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청사 또는 저택의 경계 지점으로부터 100m 이내의 장소에서는 옥외집회 또는 시위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 '대통령 관저(官邸), 국회의장 공관, 대법원장 공관, 헌법재판소장 공관'. 청와대는 1km 이내에서도 시위를 하지 않았었지만, 최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관련 퇴진 요구 시위가 2016년 11월 27일 기준 청와대 앞 200m 까지 허가를 받는 헌정 사상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그리고 12월 3일 집회때는 청와대 앞 100m까지 허가를 받았다.
•본관 정원 쪽에는 사슴 일가족이 살고 있다. 사람들 말에 따르면 정말 운 좋을 때 한 번씩 볼 수 있다고 하지만 가끔 정원에서 튀어나오면 앞쪽 도로가 차단되고 사슴을 다시 정원으로 돌려보낸다. 그 외에도 연못에는 원앙이 날아와서 한가롭게 떠다닐 때도 있다.
•수도방위사령부 직할 부대에서 복무 중 자신이 연대장/주임원사/대대장/중대장/행정보급관/소대장/분대장 등 지휘관이 된다면 연대장/대대장/중대장/소대장/분대장 교육 과정 중 하나로 이 곳을 견학한다. 참고로 부연대장/부대대장/부중대장/부소대장/부분대장은 견학 기회가 없다. 사실 수방사가 청와대로부터 이런 배려를 받는 이유는 수방사가 대통령을 지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청와대 정문의 석등이 야스쿠니 신사와 같은 양식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논란이 확산되었다.
•국가 지도자의 관저를 '궁(宮)'이라고 표현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영문식 행정 용어 '대통령궁(presidential palace)'의 번역어로, 프랑스의 경우에는 엘리제 '궁'이다[44]. 또, 나라에 따라서는 아예 대통령 관저 공식 명칭이 그냥 대통령궁인 경우도 있다.
마찬가지로 기관명으로서 '대통령부(府)'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입법부(府), 행정부 등의 예에서 유래한 용법이다. 한국에서는 90년대 이전까지는 언론에서 '대통령부', '대통령궁' 등의 용어도 사용되었으나, 오늘날에는 청와대라는 명칭을 두고 따로 '한국 대통령궁' 또는 '한국 대통령부'로 부르지는 않는다. 단, 외국의 같은 격(格)에 해당하는 기관 또는 청사는 '궁' 또는 '부'를 붙여서 부를 수 있다. 예를 들어, 따로 이름이 없는 외국의 지도자 청사를 언론이나 방송에서 소개할 때 한국어로 '○○국 대통령궁'으로 칭하기도 한다.
•대만에서는 '青瓦臺', 홍콩, 중국, 일본에서는 '青瓦台'로 표기한다.
•경상남도 합천군 정원테마파크에 68% 규모로 축소해서 건설된 청와대 본관 세트장이 있다. 겉모습만 만든 게 아니라 내부 구조도 실제 청와대 본관의 방 배치와 똑같이 만들어서 대통령 집무실에서 기념 촬영을 할 수도 있는 등 합천의 관광명소가 되었다. # 영화 강철비에서 청와대 외부 장면 촬영을 한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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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최중요시설이므로 당연히 여러 겹의 군부대와 경찰부대로 싸여 있다. 넓게는 수도방위사령부 제1경비단과 제1방공여단, 좁게는 대통령경호처 지원부대의 보호를 받는다.
•청와대 근처에서 비행 물체를 띄운다면 군인들이 뛰어와 말리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다.[45] 사실 말리는 정도로 끝나면 다행이지, 일정 고도를 넘어가면 수방사 제1방공여단 및 모 극비 방공부대가 즉시 격추하도록 되어 있다. 띄운 사람은 당연히 철컹철컹. 실제로 외국인 관광객이 북촌한옥마을에서 드론으로 한옥마을 사진을 찍으려다 적발되어 대통령 경호처 경호원들과 경찰이 출동한 적도 있었다.
•참여정부 말인 2008년 2월, MBC에서 다큐멘터리로 <대한민국 대통령>을 방영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일상을 다룬 다큐로, 관저와 비서실, 상황실을 비롯한 청와대 내부가 거의 다 나온다. 당시 참여정부 청와대에서 일하던 문재인, 문희상, 전해철, 김경수 등도 나온다. 1부 청와대 사람들, 2부 대통령으로 산다는 것 이명박 대통령도 이를 벤치마킹해 본인의 일상을 다큐로 직접 제작했다. 대통령의 하루 박근혜 대통령은 집사 역할을 했던 김막업의 증언으로 하루 일과가 공개되었다. 김막업 검찰 진술서
•2016년, 북한이 청와대를 본 뜬 모형 건물을 만들어서 타격 훈련을 하기도 했다. # 이후 부서진 채로 있다가 2020년에 다시 만들어졌다. # 그리고 이 모혐 건물을 중심으로 2백 미터 정도의 원 표적을 새로 그렸는데, 원 표적은 포격 훈련 때 사용하는 것이다. 이외에는 7월에 무인도에 청와대 또는 국방부 청사를 축소시킨 모형 건물을 설치한 정황이 미국 정보당국에 포착되었다.
•문재인이 대통령 당선 후 청와대에 바로 들어가지 않았는데 그 이유로 '거울방' 때문이었다는 뉴스가 있었다. 이후 알려진 내용에 따르면, 거울방은 피트니스 룸으로 쓰이며, 러닝머신과 운동기구들이 놓여 있으며 박근혜가 윤전추와 매일 1시간씩 운동을 하는 곳이였다고 한다.
•박사모와 일부 친박 극우세력은 박근혜가 수감된 서울구치소를 서쪽에 있는 청와대 라고 해서 서청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2020년 5월 5일, 평소라면 어린이날 행사가 진행되었겠지만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해 만나지 못하자 마인크래프트에서 맵으로 구현되었다. 폭파시키니까 바닥에 금괴가 나왔다고 해서 예전에 잠시 돌던 루머인 문재인/금괴 루머와 연관되어 화제가 되었는데, 이후 알려진 바에 의하면 해당 맵을 제작한 업체가 기초공사를 금블럭으로 하는 관행이 있었다고 한다. pc버전be버전 자세한 내용은 마인크래프트/맵/도시 참고.
•프로게이머 임요환이 청와대에 초청되어 방문한 적이 있다. 자세한건 임요환 항목 참고.
7.1. 식단
현재는 한식, 중식, 일식, 양식 4명의 주방장(셰프)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 식모 1명과 11명의 주방인원을 거느리고 있다. 국가적인 행사나 외국 정상을 접대할 때 해당 국가 음식을 잘하는 셰프를 외부에서 초청하기도 한다.
청와대 내부에는 역대 대통령의 식단도 전시되어 있다. #역대 식단#MB 식단#역대 애식, 라면 에피소드 물론 상식적으로 매일 저 식단만 먹었을리는 없고 대체로 이런 음식들을 좋아했다고만 생각하자.
•이승만은 미국 유학생활을 오래 했던 사람답게 양식을 좋아했다. 주요 식단이 피자, 햄버거, 치킨, 샌드위치, 와인, 카스테라, 커피 등. 이는 본인의 선호도 있지만 같이 밥을 먹는 프란체스카 영부인의 영향도 있었다. 한식 중에서는 타락죽과 현미떡국을 좋아했다고 한다.[46] 아침에 샌드위치나 토스트 한조각으로 때우는 등 당시 기준으로는 소식, 서양식을 선호하였다.
•윤보선은 귀족적인 성격에 걸맞게 비교적 화려하게 먹었다. 더덕구이, 갈비찜, 잣죽, 해물전골, 송이산적 등 궁중식사 스타일로 매우 푸짐하게 먹었다. 다만 술은 절대 입에 대지 않았고, 특이하게도 부유한 유력 양반가문 출신이었음에도 쌀밥이 아닌 잡곡밥만을 먹었다고 한다. 재산이 많을수록 청빈해야 한다는 양반가다운 집안 가르침의 영향이었다고. 이 금주와 잡곡밥이라는 건강한 식단이 그의 장수의 비결로 꼽는 사람이 많다.
•박정희는 어릴 적 가난했던 습관이 들어있어 비교적 소박하게 먹었다. 편육, 순두부, 막걸리, 열무김치 정도에 불과했다고. 경기가 어려우면 반찬 가짓수를 줄이라고 했다고 하는데, 그러다보니 나중에는 하도 식탁이 볼품이 없어져서 아예 큰 접시에 뷔페마냥 여러 종류의 반찬을 담아서 내기도 했다고 한다. 가난했던 출신답게 음식을 절대 남기지 않았고 좋아했던 메뉴는 된장찌개였다고 한다. 비교적 마른 인상답게 식사량은 많은 편이 아니었다고. 술은 막걸리를 거의 매일 마실 정도로 아주 좋아했다고 한다. 음식은 군인 출신이기도 하고 시골에서 오래 산 경험이 있는지라 아무거나 잘 먹고 흔히 말하는 서민 음식들을 거부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하도 안먹다 보니 티가 안 날뿐. 영부인이던 육영수의 사망 이후 양주같은 독한 술을 먹었으나, 10.26 사건 당시 술상도 그렇게 화려한 수준은 아니였다고 한다. 단순 편육, 인삼 절임, 전복 수준으로 검소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대중매체에 나온 것처럼 호화로운 수준은 아니었다고 한다.#
•최규하도 박정희처럼 간단하게 먹었다. 나물, 생선구이, 전골 정도다. 고기를 그렇게 선호하지 않았고 역시 된장찌개를 좋아했다고 한다. 다만 박정희와는 다르게 술을 잘 못해서 술은 잘 올라오지 않았다고. 가끔 과일주를 즐긴 정도다.
•전두환은 무골답게 육식을 좋아했다. 불고기, 편육, 육회, 생선회, 조개구이, 떡갈비, 청주 등 고기 위주의 식단이었고 칼칼하고 자극적인 메뉴를 좋아했으며 동동주, 양주 등 술도 종류별로 많이 올라왔다고 한다.[47]
•노태우는 전두환과 식단은 비슷하지만 스케일이 더 작았다. 갈비구이, 생선튀김, 두부조림, 복분자주, 맥주 정도다. 이쪽은 나물류도 좋아해서 전두환보다는 밸런스가 맞게 먹었던 것 같다. 그 외에 몸이 좀 안 좋다 싶을 때 보양식삼아 고향 음식인 갱시기를 찾았다고 한다. 이쪽도 군인 출신이니 크게 가리는 건 없었다고 한다.
•김영삼은 전두환 못지않게 잘 먹었다. 그를 상징했던 칼국수를 비롯하여 양갈비구이, 설렁탕, 랍스터, 야채 샐러드, 전복죽, 와인 등이 포진되어 있다. 바닷가 출신답게 해산물을 좋아했다고 한다. 특히 해산물이 들어간 미역국을 많이 먹었다고. 칼국수 또한 엄청 찾았다고 한다.[48] 청와대 요리사 이근배 씨는 “김영삼 대통령께서 면을 좋아하셨지만 3~4년 동안 계속 면을 드실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 했었죠” 라고 말하기도.(...) 그야말로 칼국수 매니아.#
•김대중은 출신지의 명물인 홍어삼합을 비롯해 우거지갈비탕, 된장찌개, 해물전골, 매운탕, 냉면 등 주로 국물 음식을 즐겼다. 전라도 바닷가 출신답게 해산물을 좋아했다. 그 외엔 중국 음식인 탕수육, 짜장면, 짬뽕 등을 좋아했고, 해산물도 좋아했는데 특히 대게와 새우를 즐겼다. 아침식사가 끝나고 간식으로 떡 등을 즐겨 먹기도 했고 밤에 간식으로 컵라면도 즐겨먹곤 했다고 하는데 당시 고령이었음을 감안하면 김대중 역시 옛날 사람답게 상당한 대식가였다. 그 외에 흑산도산과 칠레산 홍어를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상당한 미식가이기도 했다고 한다. 전직 청와대 조리부에서 근무한 사람들의 인터뷰를 들어 보면 공통적으로 김대중 대통령이 가장 미식가였다는 이야기를 꼽는다.
•노무현은 서민적인 소박한 식단을 선호해 대체로 박정희와 비슷했다. 삼계탕, 해물탕, 강냉이, 군고구마[49] 등이 포함되어 있다. 주로 고향 경상도 음식을 좋아했으며 주된 식사는 잡곡밥에 된장, 미역, 북어, 사골곰국, 나물류 등 자극적인 음식보다는 좀 담백한 입맛이었던 것 같다. 노무현 하면 밀짚모자 쓰고 막걸리 마시는 이미지가 형성되어 있어서 술도 즐겼을 것 같지만, 재임 시절에는 술을 마시지 않아서 만찬시 건배용 술 정도 빼면 식탁에는 술이 올라오지 않았다. 본래 술을 좋아하긴 하지만, 직무에 충실해야 한다며 재임 중에는 술을 끊었던 것. 우리가 아는 막걸리 사발을 든 노무현의 이미지는 퇴임 후 좋아하던 술을 마음껏 마시면서 생긴 것. 이 외에 식사시간 외에 따로 간식으로 주전부리를 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아래에 쓰여진 라면 에피소드 등. 그 외에는 아무리 맛있게 먹은 반찬이라도 빈 반찬 그릇은 리필을 못하게 했다. 더 갖다 주면 남기게 되고 결국 버리게 된다는 이유에서다. 이런 점에서 미루어 볼 때 식사량이 그렇게 많지는 않고 평범하게 먹었던 듯. 그래도 식사 외에 라면 등[50] 주전부리를 자주 했다는 걸로 보아 이쪽도 넉넉한 인상답게 소식가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명박은 이승만과 비슷했다. 먹방의 대표 주자답게 그를 상징했던 국밥을 비롯하여 그 외에도 미국 음식인 피자, 햄버거, 치킨 등을 좋아했고 또 샌드위치, 바게트, 나물, 냉면, 배추김치 등도 좋아했고 그냥 가리는 음식이 없었다. 해외에 나가서도 굳이 한국음식을 찾지 않고 현지식으로 먹을 정도로 노인답지 않게 음식에 대해서는 오픈 마인드였다고. 식사량도 대식가답게 많이 먹는 편이었다고 한다. 다만 잡곡밥만큼은 먹지 않고 흰 쌀밥을 고집했는데, 즐겨찾는 특식도 흰쌀밥에 날계란과 간장을 뿌린 간장계란밥이었다. 주변인들은 쌀밥을 마음껏 먹고 싶었던 어린 시절의 지독한 가난이 트라우마로 남아서 그렇지 않겠냐는 추측을 한다고 한다. 그 외에 냉면처럼 원래 차게 먹는 음식을 제외하면 찬 음식, 미지근한 음식도 좋아하지 않아서 음식을 굉장히 뜨겁게 먹는데, 후식으로 나오는 커피도 한 번 더 데워 달라고 요구할 정도로 뜨거운 것을 좋아한다고 한다. 건강에 별로 좋은 식습관은 아니지만 이 역시 가난했던 어린 시절 먹고 남은 찬 음식을 자주 먹던 것에 한이 맺혀서 그렇다고. 또한 기업인 출신답게 이곳저곳 출장을 많이 다니며 식사를 많이 해서 맛집을 잘 알고 있어 맛집에 가장 싸인이 많은 전직 대통령(...)으로도 손꼽힌다. 대부분은 서울시장 시절 남긴 것들. 다만 특이하게도 청와대에서 라면을 먹은 적은 없었다고 한다.
•박근혜는 평상시에는 일반적인 청와대 식단을 먹었으나, 자신의 기준에서 특별한 날에는 만찬을 즐겼다.[51] 요리연구가 김막업이 음식을 전담했다.[52] 아침에는 윌 요구르트, 대관령 우유, 견과류, 흑임자 죽, 원두커피를 먹는다고 한다.딱 부잣집 아줌마 입맛이다 보통 전날 냉장고에 음식을 넣어두면 박근혜가 다음 날 아침으로 TV를 보면서 혼자 먹는다고 한다. 밀가루 음식을 입에 대지 않고 국물 요리는 잘 즐기지 않으며 식사량은 굉장히 적게 먹는 편이었다고 한다. 이 소식하는 습관을 건강의 비결로 꼽기도 하며 구치소에 들어간 현재도 소식을 하는 편이라고 한다. 단 싫어하는 음식부분을 보듯 본인 아버지와는 다르게 음식을 꽤 가리는 편인듯 하다. 이명박과 마찬가지로 청와대에서 라면을 먹은적이 없었다고 한다.
•문재인은 종종 여민2관 직원식당에서 식권으로 구내식당 밥을 먹으며,[53] 해외순방중일 경우 현지 정부에서 제공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현지식당에서 현지식으로 조달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긴급 회의가 있거나, 주요 인사들을 초청하여 오찬 및 만찬 자리를 갖는 특수한 경우. 선호하는 음식은 부산 출신답게 생선회와 해산물 종류이다. 그 외에 청국장집에서 식사를 했다는 에피소드 등으로 봐서 전임자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아저씨 입맛인 듯.
•경호상 이유로 대한민국 대통령은 자신이 음식을 직접 요리할 수 없다. 노무현 대통령의 사례가 잘 알려져 있는데, 본인이 편히 직접 라면을 끓여먹을 수 없어서 운영관에게 라면을 끓이게 하고 반개씩 나눠서 먹었다는 일화가 있다.
•구내 직원식당도 잘 되어 있다. 90년대 초 기준으로 식판이 아니라 개인용 접시와 찌개 냄비가 1인당 1개 씩 나올 정도였다.
7.2.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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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홈페이지 서버다운 알림창이 매우 고급스럽다. 사진은 2013년 청와대 홈페이지가 해킹으로 서버가 내려졌을 때 모습.
•2017년 8월 17일, 청와대는 문재인 대통령 취임 100일차에 맞추어 국민소통플랫폼으로 홈페이지를 전면 개편하였다. 플랫폼 활용과 컨텐츠 구성에 있어 비주얼적인 면이 보다 크게 강조되었으며, 기존 브리핑 코너를 확대 개편한 청와대 뉴스룸 메뉴와 더불어, 대통령의 사진을 공개 및 제공하는 효자동 사진관 및 국민 청원과 제안, 인재 추천[54], 토론이 가능한 국민소통광장 메뉴가 신설되었다.
8. 청와대 국민청원
대한민국 온라인 청원 게시판
청와대
식품의약품안전처
대한민국 국회
서울시
경기도
부산시
인천시
울산시
cheongwadae
external/blogpft...
국회상징
서울특별시 휘장
경기도로고
부산광역시 휘장
인천광역시 휘장
울산광역시 휘장
청와대 국민청원은 문재인 정부가 국민 소통을 위해 신설한 청와대 게시판으로 여기에 청원을 올리고 1달 동안 20만 명 이상이 동의하면 청와대가 직접 답해준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으로.
9. 관련 문서
•대한민국 대통령
•대통령비서실
•대통령경호처
◦대통령경호,지원부대
•국가안보실
•관저
•e지원
•청남대
•청해대
•LIVE 11시 50분 청와대입니다.
아버지 이연(李淵,당 고조)을 도와
수나라를 멸망시키고
당나라를 건국한 이세민.
그는 태자인 형 건성과
동생 원길을 죽이고
피로 얼룩진 황좌에 올랐지만
당시 세계 초강대국이던
이슬람 제국과
어깨를 나란히 겨눌 만한
강건한 국가를 만들었다.
‘정관(貞觀)의 치(治)’라고 불리는
그의 치세는
중국 역사상 태평성대를 상징하는
이상적인 국가로 손꼽힌다.
당 고조 이연
당 태종 이세민
이세민은 수나라 태원 유수
이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연은 한족 귀족 가문 출신으로
수 양제 양광의 이종사촌이었다.
수 양제는 대운하 건설과
동도 건설 같은
무리한 토목 공사에 더해
무리한 고구려 원정을 감행하는 등
백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고구려 원정 실패로
각지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던
호족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혼란은 극심해졌다.
이에 이세민은
아버지 이연에게 봉기할 것을 권유했다.
산서성(山西)의 성도 태원(太原)의
군사령관이던 이연은
군사를 일으켜 장안을 점령하고,
양유를 옹립했다가
618년 선양의 형식으로 즉위했다.
이연은 나라 이름을 당이라고 하고,
이로써 수나라는 멸망했다.
그러나 대륙 곳곳에서는
여전히 지방 군벌들이 득세하고 있었다.
남부 지역은
남조를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독립했고,
변경에서는 돌궐이 호시탐탐
수나라를 노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조로 즉위한 이연은
장남 건성(建成)을 황태자로 책봉하고
이세민을 진왕(秦王),
셋째 원길(元吉)을 제왕(濟王)에 봉했다.
그리고 당나라 개국에 큰 공을 세운
이세민에게
반란 세력을 진압하는 임무를 맡겼다.
이세민은
618년부터 624년에 이르기까지
돌궐 족을 만리장성 밖으로 몰아내고
남부 지방을 정복했으며,
지방 호족 세력의 반란도 진압했다.
혁혁한 전과를 세운 이세민은
고조의 신임과
민심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황제는 그에게 천책상장(天策上將)이라는
칭호를 내렸으며,
이세민에게 새로 홍의궁을 지어 하사했다.
그러자 황태자 건성은
자신의 지위에 위협을 느끼고
이세민을 견제하기 위해
고조와 이세민 사이를 이간질했으며,
여러 차례 자객을 보내
암살을 시도했다.
그는 동생인 원길까지 끌어들여
이세민을 제거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이세민은
626년 고조에게 이 사실을 고한 후,
7월 2일 현무문을 통해
궁중으로 들어서던 건성과 원길을
활로 쏘아 죽였다.
이세민은 그 길로 황제를 협박하여
별궁에 유폐시킨 후
황태자가 되었다.
이 사건이 현무문의 변이다.
이로부터 3개월 후
28세의 이세민은
고조로부터 양위받아
당나라 제2대 황제
당 태종으로 등극했다.
이세민은 이듬해
나라의 연호를 정관(貞觀)이라 하고,
국가 제도를 정비하여 국
정을 안정시키고
당나라만의 독자적인 문화를
창출하는 데 힘써
‘정관의 치’라고 불리는
태평성대를 이룩했다.
당 태종은
먼저 3성 6부 관제를 완성하고,
전국을 10도로 나누어
국가 체제를 정비했으며,
정관율령격식을 공표하여
형벌과 행정에 관한 법령도 완성했다.
그뿐만 아니라 수나라 때부터 이어진
선거 제도를 정비하여
과거 제도를 실시해
출신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했다.
능력이 뛰어나면
적을 기용하는 것도 거리낌이 없었으며,
신하들의 간언 역시
올곧게 받아들였다.
또한 당 태종은 학문을 숭상하여
학자들을 우대했고,
직접 남북조사 편찬 작업에
참여할 정도로 관심을 쏟았다.
당 태종은 학문소를 두고
학자들을 예우로 대접하고
정부의 요직에 앉혔다.
학자들의 역할은 의논을 통해
정책안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당 태종은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한
제도 개혁에도 주력했다.
먼저 새로운 세금 제도인
조용조 법이 실시되었다.
조(租)는 구분전에 징수하는 세금,
용(庸)은 부역,
조(調)는 집에 관한 현물세로
계급별, 재산별로 세금을 차등 부과해
백성들의 세금 부담을 가볍게 했다.
군역은 부병제로,
지역별로 정남
(丁男, 부역이나 군역에 소집될
연령의 남자) 중
3명당 1명씩
3년에 한 번 징집하여
근무하게 했고,
농민들이 군장과 군량을
스스로 마련하던 부담을 덜기 위해
정남 1인에게
100묘(畝)의 토지를 지급하는
균전법을 시행했다.
또한 군역을 이행하는 중에는
조용조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
당 태종이 이러한 정관의 치를
이룩한 데는
그가 발탁한 인재들의 활약도 컸다.
대표적인 인물이
위징(魏徵),
방현령(房玄齡),
두여회(杜如晦) 등이다.
위징은 수나라 출신으로
당 고조 이연에게 발탁되어
당시 황태자였던 건성 아래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위징은 이세민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하여
건성에게 이세민을 먼저 제거할 것을
간언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건성이 현무문의 변으로 죽은 후
위징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세민에게 자신의 책략을
당당하게 밝혀 감탄을 샀다.
이세민은 위징의 기개를 높이 사
측근으로 중용했으며,
이후로도 위징은
당 태종에게 서슴지 않고
충언을 올려
재상의 자리에 올라 활약했다.
위징과 함께
당나라의 기틀을 세우는 데 공헌한
또 한 사람은 방현령이다.
방현령은 당 태종의 최측근으로
그가 즉위하기까지의
과정을 같이하여
큰 신임을 받았다.
당 태종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장안을 비울 때는
대신 수도를 지켰다.
그런 그가 발탁한 인물이
정관의 치를 주도한 두여회다.
두여회는 수나라 조정에서
현위를 지냈던 인물로,
당 태종이 즉위한 후에는
병부상서, 상서우복야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며
법률 제도 및 행정 제도를
확립한 명신이다.
이렇게 내적으로 안정을 되찾자
당 태종은 밖으로 눈을 돌려
영토를 확장하고자 했다.
그러나 고구려 원정은
그의 오점 중 하나로 남았다.
644년 11월
당 태종은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직접 30만 명에 이르는 군대를 이끌고
원정을 떠났다.
당 태종은 고구려의 군사상 요지인
개모성, 비사성, 요동성, 백암성을
차례로 함락시킨 후
드디어 안시성에 도착했다.
당 태종은 안시성 동남쪽에
흙산을 쌓고 공격을 꾀했으나
갑자기 큰 비가 내려
흙산이 무너진 데 이어
고구려군에게 산을 빼앗기기까지 했다.
당나라는 사력을 다해 공격했으나
군량이 점차 바닥나면서
결국 안시성을 함락시키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당나라군은 고구려의 거듭된 공격에
엄청난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
이 과정에서 당 태종은
눈에 화살을 맞았는데,
이후 이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했다고도 전해진다.
당나라 시대의 무사와 말
당 태종의 왕릉에서 출토된 무사와 말 부조.
당 태종 시절 당나라는
중국 역사상 손꼽히는 강대국으로
성장했으나
후계는 그와 달리 현명하지 못했다.
당 태종은 전례에 따라
정비 장손황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승건(承乾)을 황태자로 책봉했으나
승건이 역모를 일으키자 폐위하고,
다시 장손황후 소생의
셋째 아들 치(治)를 태자로 책봉했다.
그가 바로 당나라 제3대 황제인
고종이다.
그러나 고종은 태자 시절부터
당 태종의 후궁이었던
무미랑과 남녀 관계를 맺었으며,
태종 사후에는
그녀를 자신의 후궁으로 책봉했다.
무능력했던 고종은
그녀를 두 번째 황후로 삼고
점차 모든 권력을 빼앗긴 채 죽었다.
고종의 황후가 된 무미랑,
그녀는 고조가 사망한 후
아들들을 차례로 폐위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기까지 하는 등
15년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그녀가 바로 측천무후(則天武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