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7일(수)
* 시작 기도
주님...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이 한 날에 요셉이 갇혀 있던 친위대장의 집 안에 있는 옥에 들어왔습니다.
이들이 한 날에 꿈을 꿨는데 술 맡은 관원장은 그의 꿈대로 사흘 후에 관직이 회복되었고 떡 맡은 관원장은 사흘 후에 처형당했습니다.
요셉은 자신이 옥에 갇힐 일은 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술 맡은 관원장에게 밖에 나가거든 바로에게 잘 이야기 하여 자신을 꺼내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전직이 회복되었지만 요셉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요셉은 2년이나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만 했습니다.
누명을 쓴 것도 억울한데 2년씩이나 옥살이를 하였고 그것도 자기가 해몽을 하여 전직을 회복한 관원조차 요셉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사람이 제일 힘들어하는 것이 사람에게 잊혀지는 것이지요.
하지만 사람에게 잊혀질지라도 하나님께는 잊혀지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아니 우리 하나님께서는 언약에 신실하셔서 결코 우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그렇기에 오늘도 우리 주님의 신실함을 붙들고 담대하게 아버지 품으로 나아갑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아들의 생명으로 주님과 더 깊은 교제와 사귐을 갖기 원하오니 이 부족한 자를 불쌍히 여기사 주의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
이 하루도 주님과 함께 연합하여 동행하는 순간순간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막 12:35-44
제목 :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35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새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36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37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듣더라.
38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39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0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41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 나의 묵상
서기관들 중 한 사람이 예수님께 계명 중에서 첫째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에 대하여 주님께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씀하셨다.
이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따로 나뉘어져 있는 이원론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뜻이다.
한편 고난주간 화요일, 성전에서 주님은 유대 종교지도자들로부터 올무에 빠뜨리려는 질문을 계속 받으셨다.
하지만 이번에는 예수께서 먼저 그들에게 질문하신다.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성경적 전통에 근거한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서기관들이 알고 있는 그리스도 곧 메시야관은 육신적 혈통에 따라 다윗의 자손으로 온다는 예언을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음을 대변하는 것이다.
그런 잘못된 메시야관을 주님께서 바르게 가르쳐 주신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신분은 다윗의 자손이라는 혈통적 계보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적 계보에 있음을 밝히 드러내신 것이다.
그래서 36절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서 말한 내용이다.
이 말씀은 시편 110편의 내용을 인용하신 것이다.
(시 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있으라 하셨도다.
여기서 ‘내 주’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런데 다윗이 그리스도를 가리켜 ‘내 주’라 하였는데 어떻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고 반문하시는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아브라함을 가리켜 말한 것과 같다.
(요 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이 볼 때는 분명 예수가 아직 50세도 안 되었는데 아브라함이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였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기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곧바로 네가 아직 50세도 못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고 질문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었다”고 말씀하시자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치려고 하였고 주님은 성전을 빠져 나가신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창세전의 세계를 유대인들을 전혀 알지도 못하였고 보지도 못하였다.
오늘 회사에 출근해서 경건회를 하려는데 한 직원이 책상을 닦았다.
그런데 하얀 수건이 시커멓게 변하고 말았다.
그 직원 왈, 안 보인다고 없는 게 아니네요, 하는 것이다.
그렇다 창세전의 세계 곧 하나님 나라가 눈에 안 보인다고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시종일관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믿으려 한다.
창세전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생명을 아들에게 주어 말씀으로 나셨다(요 5:26).
그 아들이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온 세상을 창조하셨다(잠 8:30).
그리고 삼위 하나님은 창조된 것들을 보고 너무 즐거워하며 기뻐하신다.
이를 삼위 하나님의 페리 코레시스라고 한다.
이렇게 창세전 곧 만물 위에 계신 아들은 때가 되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
(갈 4:4-6)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이렇게 육신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의 이름이 예수이다.
예수라는 이름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이며 그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셔야만 했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십자가를 지고 죽기 위하여 지금 고난주간 화요일에 성전에서 유대의 종교지도자들과 변론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를 바르게 알지 못하고 자기들이 알고 싶은 것만 취사선택하여 알고 있을 뿐이다.
나는 어떤가?
나는 예수를 바르게 알고 있는가?
물론 나도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나 역시 창세전의 세계를 오해한 자였다.
창세전이라 함은 인간의 시간 개념에 비추어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기 이전의 시간으로만 이해하였다.
물론 인간의 시간은 직선이다.
그런데 그 직선 위에서, 보다 좀 앞선 시간쯤으로 이해했으니 나의 이해가 왜곡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이 끝난 이후 곧 종말의 시간은 어디쯤인가?
나의 이해로 본다면 직선이 끝난 그 다음 어디쯤일 것이다.
하지만 창세전과 종말 후는 그런 직선 개념이 아님을 나는 나중에 복음을 통해서 알았다.
창세전과 종말 후는 인간의 시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창세전과 종말 후의 시간은 하나님의 시간으로 카이로스에 해당한다.
이 시간은 인간의 시간을 덮는 또 다른 차원의 시간이다.
그래서 창세전과 종말 후의 시간을 가리켜 창세전 곧 만물 위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써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이미 창세전에 존재하셨고 거기서 다윗과 아브라함을 아셨다.
그래서 주님은,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바울이라 하는 사울 역시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잘 알지 못하는 자였다.
예수가 십자가에 죽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나무에 달려 죽은 것으로 안 것이다.
하여 그런 예수를 믿는 자들은 똑같이 다 죽어야 할 자들이었다.
그래서 스데반 순교 사건으로 인하여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을 좇아 다메섹까지 간 것이다.
그런데 그곳 다메섹에서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
태양보다 더 밝은 빛이 비치자 그는 눈이 멀었다.
그는 사흘 동안 보지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였다.
아나니아의 안수로 인하여 눈이 떠졌을 때 그는 지금까지 그의 눈을 가리고 있던 비늘 같은 것이 벗겨졌다.
(행 9: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그렇게 인격적으로 예수를 만난 사울은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거하는 자가 되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동족인 유대인들이 이 예수를 잘 알지 못하고 그저 육신의 예수만 알아 틈만 나면 그를 죽이려는 궤계 앞에서 너무나 고통스러워하였다.
그래서 자신의 동족 유대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외쳤다.
(롬 9:3-5)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바울의 고백적인 외침을 통하여 분명히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만물 안인 이 세상이 아니라 만물 위에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물론 영으로 오셔서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이심도 맞다.
하지만 우리의 연약함의 극치를 보이는 것은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을 만물 안으로 끌어내려서 나를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것이다.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믿으면서도 그 말씀을 나의 필요와 유익을 위하여 얼마나 많이 이용했는지, 돌아보면 죽기에만 합당한 자임을 부인할 수 없다.
말씀을 인용하여 기도하면서 그것이 나의 신앙이 좋은 것으로 치부하였던 나임을 고백한다.
이렇게 치졸한 나의 신앙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고백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주님을 그렇게 하나의 수단으로 이용하지 않기 위함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 위에 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가 때가 되면 심판주가 되어 온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그 날은 이 세상이 멸해질 것이나 주님이 계신 그곳으로 올라가 그 나라를 영광스럽게 맞이할 것을 생각하면 소름이 돋는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내 안에는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같은 비열함과 나를 높이고자 상석을 차지하려는 탐욕이나 긴 옷을 입으며 경건을 드러내는 외식이 가득함을 고백합니다.
많은 것들 중에 아주 조금 곧 일부를 헌금하는 자들에 비하여 생활비 전부를 드린 과부의 헌금을 기쁘게 받으신 주님 앞에 나는 정말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헌금 하는 것으로 사람들에게 인정과 칭찬을 받으려 했던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이런 나를 주의 공의로 심판하소서.
기초가 없는 건물은 무너질 수밖에 없듯이 기초가 없는 신앙 역시 무너지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무엇보다 기초 없는 신앙이 무너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습니다.
그렇게 심판의 무덤에 눕게 되었습니다.
나 혼자 있는 무덤은 환난과 곤고 외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 무덤이 바로 우리 주님의 무덤이었으며 나를 그 자리로 초청해 주셨습니다.
거기에서 말씀으로 주님과 늘 교제와 사귐을 가지게 하심은 내게 최고의 선물이었습니다.
이 선물을 깊은 호흡으로 받아 날마다 주님과 함께 영생을 누립니다.
이 영생은 하나님 나라를 현재로 누리는 기쁨입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힘들고 괴로운 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현실을 넉넉히 삼킬 수 있음은 복음으로 인함입니다.
날 구원하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