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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함평천지와 천지함평 중에 일부입니다.
불이법문
2. 불이법문의 평등
유마경은 3본이 현존하고 있다. 지겸支謙의 불설유마힐경佛說維摩詰經과 구마라집의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 그리고 현장의 설무구칭경說無垢稱經이다. 우리는 통상 유마거사라 말하지만, 유마힐경은 거사 또는 장자라 병칭하고 있고, 설무구칭경은 모두 무구칭이라 호칭하고 있다. 다만 대보살 리차비종 무구칭과 보살무구칭 그리고 무구칭보살 등이 경에 나오지만 상호간에 호칭으로 사용되지는 않고 있다. 어떻든 유마거사보다는 무구칭보살 또는 유마장자라 일컫는 것이 옳은 듯하다.
불이법문의 불이不二는 무이無二와 같다. 아니불자를 없을무자로 바꾸어 해석하면 그 뜻이 명확한 경우가 매우 많다. 사전에 의하면, 상대와 차별의 일체경계를 초월하는 절대 평등의 진리를 현시하는 교법을 불이법문이라 한다. 유마경에 33종의 불이법문이 있다. 앞과 뒤만 인용한다. 아래와 같다.
이때 무구칭이 회중會衆의 모든 보살에게 두루 질문했다. “어떻게 보살이 불이법문에 옳게 깨달아 들어갈 수 있습니까? 인자는 모두 응당 자기의 변재에 맡기고 각기 즐겨 익힌 바를 따라서 설하시기 바랍니다.” 이때 회중에 있는 모든 보살이 각기 즐겨 익힌 바를 따라 차례로 말씀하셨다.(時無垢稱 普問衆中諸菩薩曰 云何菩薩善能悟入不二法門 仁者皆應任己辯才各隨樂說 時衆會中有諸菩薩 各隨所樂次第而說)
각수요설各隨樂說은 갈고 닦은 장기를 말한다. 능엄경의 25종 원통법문과 그 양상이 유사하다. “어떤 것이든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子曰 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공자님의 명언이다. 배우고 익히는 것보다 더 강력한 표현이 즐기는 것이다.
이때 보살이 있으니 이름이 법자재이다. 이와 같이 말했다. “생멸이 둘입니다. 만일 모든 보살이 제법이 본래 무생이고 또한 무멸인 줄을 분명히 알고 이와 같은 무생법인을 증득하면, 이것이 불이법문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입니다.”(時有菩薩名法自在 作如是言 生滅爲二 若諸菩薩了知諸法本來無生亦無有滅 證得如是無生法忍 是爲悟入不二法門)
다시 보살이 있으니 이름이 주계왕이다. 이와 같이 말했다. “정도와 사도를 분별하면 둘이 됩니다. 만일 모든 보살이 정도에 잘 안주할 수 있다면 사도는 필경 행하지 못합니다. 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곧 정도와 사도의 이상이 없고, 이상을 제멸하기 때문에 이각이 없습니다. 만일 이각이 없다면, 이것이 불이법문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입니다.”(復有菩薩名珠髻王 作如是言 正道邪道分別爲二 若諸菩薩善能安住正道邪道究竟不行 以不行故則無正道邪道二相 除二相 故則無二覺 若無二覺 是爲悟入不二法門)
다시 보살이 있으니 이름을 제실이라 한다. 이와 같이 말했다. “허망과 진실은 분별하면 둘이 됩니다. 만일 모든 보살이 진실의 자성을 자세히 관찰하면 오히려 진실도 보지 못하는데 하물며 허망을 보겠습니까? 어째서 그러한가? 이 자성은 육안으로 보는 바가 아니고, 혜안이라야 바로 봅니다. 이와 같이 볼 때 일체법에서 보는 것도 없고 보지 않는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불이법문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입니다.”(復有菩薩名曰諦實 作如是言 虛之與實分別爲二 若諸菩薩觀諦實性尚不見實 何況見虛 所以者何 此性非是肉眼所見 慧眼乃見 如是見時於一切法無見無不見 是爲悟入不二法門)
첫째 법자재보살과 30번째 주계왕보살 그리고 31번째 제실보살의 불이법문을 인용했다. 사람을 위시하여 유정을 기준하면 생사라 말하고, 유정과 무정 일체를 광범위하게 말하면 생멸이라 한다. 생멸은 생기와 멸진이고, 또 생주와 이멸이다. 사람은 태어나면 죽기 마련이고, 일체법도 생기하면 멸진이 있기 마련이다. 인연법이 그러하다. 만일 태어나지 않으면 죽을 일이 없다. 설령 태어날지라도 그 가운데서 무생의 도리를 알면 또한 죽을 일도 없다. 이 무생의 도리를 원각경은 환화로 설명하고, 유식은 삼성과 삼무성으로 파설하며, 십이인연은 생관과 멸관으로 자세히 구명한다. 단적으로 말하면 무성이기 때문에 무생이고 무멸이다. 정도와 사도 그리고 허망과 진실도 또한 그러하다. 위에서 “모든 분별의 본성이 청정함을 무의주지라 일컫는다.”라는 구절을, “모든 분별은 중생심이고, 또한 일체중생의 청정한 근본각지이며, 이 때문에 모든 분별의 본성이 청정할 수 있으며, 이를 무의주지라 한다.”라고 해설한 바 있다.
이와 같이 회중에 있는 모든 보살이 깨달아 아는 바를 따라 각기 따로 설한 다음 동시에 묘길상보살에게 질문했다. “어떻게 보살이 불이법문에 깨달아 들어간다고 말합니까?”(如是會中有諸菩薩 隨所了知各別說已 同時發問妙吉祥言 云何菩薩名爲悟入不二法門)
이때 묘길상이 모든 보살에게 일러주셨다. “여러분들이 말한 바가 비록 모두 옳기는 합니다. 나의 뜻과 같은 것이라면, 여러분들의 이러한 설법이 오히려 두 가지 분별이 된다고 일컫습니다. 만일 모든 보살이 일체 법에서 말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으며, 표창할 수도 없고 지시할 수도 없습니다. 모든 희론을 여의고 일체 분별을 끊으면, 이것이 불이법문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 됩니다.”(時妙吉祥告諸菩薩 汝等所言雖皆是善 如我意者 汝等此說猶名爲二 若諸菩薩於一切法 無言無說無表無示 離諸戲論絕於分別 是爲悟入不二法門)
이때 묘길상이 다시 보살 무구칭에게 질문했다. “우리들이 뜻을 따라 각기 따로 설했습니다. 인자도 마땅히 설하소서. 어떻게 보살이 불이법문에 깨달아 들어간다고 말합니까?”(時妙吉祥 復問菩薩無垢稱言 我等隨意各別說已 仁者當說 云何菩薩名爲悟入不二法門)
이때 무구칭이 잠자코 말이 없었다. 묘길상이 말했다. “옳고 옳도다. 이와 같구나. 보살이 진실로 불이법문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다. 이 가운데는 일체 문자나 언설 분별이 전혀 없도다.” 여기 모든 보살이 이 법을 설할 때에 회중 가운데 5천 보살이 모두 불이법문에 깨달아 들어갈 수 있었고, 동시에 무생법인을 증득했다.(時無垢稱默然無說 妙吉祥言 善哉善哉 如是 菩薩是眞悟入不二法門 於中都無一切文字言說分別 此諸菩薩說是法時 於衆會中五千菩薩 皆得悟入不二法門 俱時證會無生法忍)
이상은 설무구칭경을 의거했다. 3본 중에 가장 완벽하다. 지겸스님의 불설유마힐경은 문수보살이 유마장자에게 불이법문을 묻는 문답이 없고, 구미라집 삼장의 유마힐소설경은 “나의 뜻과 같은 것이라면,”(如我意者) 다음에 “여러분들의 이러한 설법이 오히려 두 가지 분별이 된다고 일컫습니다.”(汝等此說猶名爲二)라는 구절이 없다. 그러나 설무구칭경 주석서는 자은스님의 설무구칭경소 외에는 눈에 띄지 않는다. 유마경 주석서는 대부분 유마힐소설경을 의거하고 있다. 그런데 지겸스님의 원명이 오월씨우바새지겸(吳月氏優婆塞支謙)이다. 삼국시대 손권이 박사로 예우한 “오나라 대월씨국 우바새 지겸”이다. 손권이 태자 손량의 스승으로 모신 것을 보면, 유마경을 번역할 당시 수수입전하신 것 같다. 집삼장의 유미힐소설경 중에 불이법문은 아래와 같다.
이와 같이 모든 보살이 각각 설하고 나서 문수사리에게 질문했다. “어떤 것이 보살이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것입니까?”(如是諸菩薩各各說已 問文殊師利 何等是菩薩入不二法門)
문수사리가 말씀하셨다. “나의 뜻과 같은 것이라면, 일체 법에서 말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으며, 지시할 수도 없고 나타낼 수도 없습니다. 모든 문답을 여의면, 이것이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것입니다.”(文殊師利曰 如我意者 於一切法無言無說 無示無識 離諸問答 是爲入不二法門)
이때 문수사리가 유마힐에게 질문했다. “우리들은 제각기 설했습니다. 인자도 마땅히 설하소서. 어떤 것이 보살이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것입니까?”(於是文殊師利問維摩詰 我等各自說已 仁者當說 何等是菩薩入不二法門)
이때 유마힐이 잠자코 말이 없었다. 문수사리가 찬탄하여 말했다. “옳고 옳도다. 바로 문자나 언어가 없는 곳에 이르니, 이것이 참으로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것이니라.” 이 입불이법문품을 설할 때에 이 회중 가운데 5천 보살이 모두 불이법문에 들어갔고, 무생법인을 증득했다.(時維摩詰默然無言 文殊師利歎曰 善哉善哉 乃至無有文字語言 是眞入不二法門 說是入不二法門品時 於此衆中 五千菩薩皆入不二法門 得無生法忍)
해설: 이 불이법문을 나는 해설할 만큼 역량을 갖고 있지 않다. 나의 분수 밖이다. 그렇지만 나의 분수 안에서 해설해보고자 한다. 여아의자如我意者는 하나의 문장이다. 그런데 이를 직역하면 “나의 뜻과 같은 것”과 같이 반토막 문장이 되고 만다. 부득이 의역할 수밖에 없는데, “나의 뜻과 같은 것은 어떠한가?” 또는 “나의 뜻과 같은 것이라면,”처럼 하나의 조건절을 만들어야 한다. 여기에는 어떤 뜻이 함축되어 있을까?
유마힐소설경은 여아의자 다음에 바로 문수보살의 불이법문이 나온다. 그렇지만 설무구칭경은 이 여아의자 앞뒤에 질문한 31명 보살의 불이법문에 대한 문수보살의 총평이 완전무결하게 전개된다. “여러분들이 말한 바가 비록 모두 옳기는 합니다. 나의 뜻과 같은 것이라면, 여러분들의 이러한 설법이 오히려 두 가지 분별이 된다고 일컫습니다.”(汝等所言雖皆是善 如我意者 汝等此說猶名爲二) 후세 모든 주석가는 이 총평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문수보살의 불이법문은 양본이 조금 다르다. “일체 법에서 말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으며, 알려줄 수도 없고 나타낼 수도 없습니다. 모든 문답을 여의면, 이것이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것입니다.”(於一切法無言無說 無示無識 離諸問答 是爲入不二法門) 또는 “만일 모든 보살이 일체 법에서 말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으며, 표창할 수도 없고 지시할 수도 없습니다. 모든 희론을 여의고 일체 분별을 끊으면, 이것이 불이법문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 됩니다.”(若諸菩薩於一切法 無言無說 無表無示 離諸戲論絕於分別 是爲悟入不二法門)
전자는 무시무식無示無識이고 후자는 무표무시無表無示이다. 이를 의거하면 무식은 알 수 없다는 뜻보다는 표지의 개념으로 무지無識라 독음하고 ‘나타낼 수 없다’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또 하나의 이유는 무언과 무설 무시가 모두 안에서 밖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무식 또는 무지만 홀로 안의 의식작용으로 보는 것보다는, 셋과 함께 동일한 작용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다. 그리고 표창과 지시는 자은스님의 견해를 따른 것이다.
3. 불이법문에 대한 제가의 해석
무엇이든 원전의 번역이 첫째이고, 해설은 그 다음의 일이다. 범어 원전을 한역한 삼장이 부지기수이지만 첫째가 구마라집 삼장이다. 후대 주석가는 집삼장의 금강경과 유마경 등에 무한신뢰를 표출하고 있다. 승조스님 등과 청량국사의 해설을 소개한다.
1) 승조스님의 주유마힐경注維摩詰經과 삼주
승조스님이 주석한 주유마힐경은 집삼장과 도생스님의 견해도 함께 있다. 모든 보살의 질문에 대한 문수보살의 답변 중에 “말할 수 없다.”(無言)를 집삼장은 “곡변하여 설한 것이다.”(什曰 說曲辯也)라고 하고, “설명할 수 없다.”(無說)를 “한차례 지나간 말을 설한 것이다.”(什曰 說一往說也)라고 하며, “알려줄 수 없다.”(無示)를 “그 법상을 드러내고자 이것은 선하고 저것은 악하다고 말한 것이니, 이를 일컬어서 알려준다고 한다.”(什曰 顯現其相 言是善是惡 名爲示也)라고 주석했다. 이 시示자에는 보이다 가르치다 알리다 등의 뜻이 있다.
경문: “나의 뜻과 같은 것이라면 일체 법에서 말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으며, 알려줄 수도 없고 나타낼 수도 없습니다. 모든 문답을 여의면, 이것이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것입니다.”(如我意者 於一切法無言無說 無示無識 離諸問答 是爲入不二法門)라고 한 문수보살의 답변에 대하여 승조스님과 도생스님은 아래와 같이 해설했다.
승조스님 해설: 위에서 모든 보살이 천명한 법문은 비록 동일하지만, 인유한 까닭은 각기 다르다. 게다가 법상만 바로 변명하고 무언은 천명하지 못했다. 이제 문수가 모든 보살의 설법을 총괄하고 불이의 문을 열어젖히며, 법상을 설할 수 없다고 직언하고, 법상에 대하여 언설을 안배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 그 말씀이 지극하도다. 그러나 정묵과 견주면 오히려 또한 차후로다.(肇曰 上諸人所明雖同 而所因各異 且直辯法相 不明無言 今文殊總衆家之說 以開不二之門 直言法相不可言 不措言於法相 斯之爲言 言之至也 而方於靜默猶亦後焉)
도생스님 해설: 이전의 모든 보살은 각기 불이의 뜻을 설하니, 불이를 설할 수 있는 것 같다. 만일 불이를 설할 수 있는 것이라면 곧 다시 둘을 대대해야 불이가 된다. 그래서 문수는 설할 수 없음을 천명하니, 바로 불이가 되는 것이다.(生曰 前諸菩薩 各說不二之義 似有不二可說也 若有不二可說者 即復是對二 爲不二也 是以文殊明無可說 乃爲不二矣)
해설: 고인이 설명하면 바로 알아차려야 하는데, 손에 쥐어주어도 알기 어려운 것이 바로 상승법문이다. 내가 이 글을 해석하느라 노심초사했다. “게다가 법상만 바로 변명하고 무언은 천명하지 못했다.” 이와 같이 승조스님은 모든 보살과 문수보살의 법문의 차이를 변별했다. 법성은 진여나 실상 법성 등과 동의어이다. 곧 31명의 보살이 설한 무이법문이다. 그리고 문수보살의 법문을 침이 마르도록 극찬했지만, 구경에는 유마장자의 정묵 곧 묵연무언의 뒷자리에 안배했다. 방方자에는 비교하다 견주다 등의 뜻이 있다.
도생스님의 해설은 아래 청량국사의 해설과 비교하면 유사한 점이 있다. “첫째 모든 보살은 무이로써 둘을 차견遮遣하면, 오히려 말로써 법을 드러내어 불이를 설할 수 있는 것 같지만, 설령 둘을 대대하여 불이를 천명할지라도 대대가 끊어진 것은 아니다.”(一諸菩薩以無二遣二 則是以言顯法 似有不二可說 便是對二明不二 非絕待也) “불이를 설할 수 있는 것 같다.”(似有不二可說) 그리고 또 “곧 다시 둘을 대대해야 불이가 된다.”(復是對二 爲不二也) “설령 둘을 대대하여 불이를 천명할지라도”(便是對二明不二) 등이 유사하다. 마지막 “대대가 끊어진 것은 아니다.”라는 결론에 유념하고자 한다.
경문: 이때 문수사리가 유마힐에게 질문했다. “우리들은 제각기 설했습니다. 인자도 마땅히 설하소서. 어떤 것이 보살이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것입니까?”(於是文殊師利問維摩詰 我等各自說已 仁者當說 何等是菩薩入不二法門)
집삼장 해설: 부처님이 열반하신 이후 6백년에 한 사람이 있었다. 나이 60세에 출가하고, 얼마 되지 않은 시간에 삼장을 외워서 모두 마치고, 다음 삼장 논의를 저술하였으며, 논의를 저술하고 나서 사유하고 말했다. “불법 중에 다시 무슨 일이 있으랴. 오로지 선법이 있을 뿐이니, 내가 응당 수행하리라.” 이리하여 선법을 수령하고, 스스로 맹세했다. “만일 도를 얻지 못하고 일체 선정 공덕을 갖추지 못하면, 마침내 누워서 쉬지 않고 허리도 땅에 대지 않겠노라.” 이로 인하여 협비구라 일컫게 되었다. 소시에 아라한과를 성취하고, 삼명육통을 구비했으며, 대변재가 있어서 논의에 뛰어났다. 외도 논사가 있었으니 이름을 마명이라 한다. 근기가 날카롭고 지혜로워 일체 경서를 모두 다 통달했고, 또한 대변재가 있어서 일체 논의를 최파할 수 있었다. 협비구의 명성을 듣고, 모든 제자를 거느리고 그 처소에 이르러 큰소리로 외쳤다.
“일체 논의를 모두 다 최파할 수 있습니다. 만일 제가 당신의 언론을 최파할 수 없다면 응당 머리를 베어버리고 굴복을 선언하겠습니다.”
협비구는 이 쟁론을 듣고 잠자코 말이 없었다. 마명은 곧 교만이 생겼다.
“이 사람은 부질없이 허명만 있고, 실제는 아는 것이 없구나.”
자기 제자와 함께 그를 버리고 떠나갔다가, 중로에 사유하고 나서 제자들에게 말했다.
“이 사람은 매우 깊은 지혜가 있구나. 내가 부처負處에 떨어지고 말았다.”
제자가 괴이하게 여기고 질문했다. “어째서 그러합니까?”
응답하여 말했다. “내가 일체 언어를 최파할 수 있다고 말했으니, 곧 스스로 최파한 것이다. 그 사람은 말을 하지 않았으니, 곧 최파할 것이 없다.”
곧 바로 그 처소로 돌아와서 협비구에게 말했다.
“제가 부처에 떨어졌으니, 오직 어리석을 뿐입니다. 어리석은 머리는 제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바로 베어버리십시오. 만일 저를 베어버리지 않으면 제가 응당 스스로 베어버리겠습니다.”
협비구가 말했다. “그대의 머리를 베어버리지 않고 응당 그대의 결발만 베어버리겠노라. 세간에 비유하면 죽음과 다를 바가 없다.”
바로 삭발하고 협비구의 제자가 되었다. 지혜와 변재가 세간에 견줄 만한 이가 없었다. 널리 경론을 조성하고, 크게 불법을 펼쳤으니, 그 당시 사람들이 그를 둘째 부처님이라 일컬었다. 무릇 침묵과 말은 비록 다르지만, 종취를 천명하는 것은 동일하다. 회득한 바가 비록 동일하지만, 행적은 정추精麁가 있다. 무언에 대하여 말이 있는 것은 무언에 대하여 말이 없는 것만 못하기 때문이다. 잠자코 논명論明하니, 그 논명이 현묘하도다.(什曰 如佛泥洹後六百年有一人 年六十出家 未幾時頌三藏都盡 次作三藏論議 作論已思惟言 佛法中復有何事 唯有禪法我當行之 於是受禪法 自作要誓 若不得道 不具一切禪定功德 終不寢息 脇不著地 因名脇比丘 少時得成阿羅漢 具三明六通 有大辯才 善能論議 有外道師 名曰馬鳴 利根智慧一切經書皆悉明練 亦有大辯才 能破一切論議 聞脇比丘名 將諸弟子往到其所 唱言一切論議悉皆可破 若我不能破汝言論 當斬首謝屈 脇比丘聞是論 默然不言 馬鳴即生憍慢 此人徒有空名 實無所知 與其弟子捨之而去 中路思惟已 語弟子言 此人有甚深智慧 我墮負處 弟子怪而問曰 云何爾 答曰 我言一切語言可破 即是自破 彼不言則無所破 即還到其所 語脇比丘言 我墮負處 則是愚癡 愚癡之頭 非我所須 汝便斬之 若不斬我我當自斬 脇比丘言 不斬汝頭 當斬汝結髮 比於世間 與死無異 即下髮爲脇比丘作弟子 智慧辯才世無及者 廣造經論 大弘佛法 時人謂之 爲第二佛 夫默語雖殊 明宗一也 所會雖一 而迹有精麁 有言於無言 未若無言於無言故 默然之論 論之妙也)
승조스님 해설: 무언에 대하여 말이 있는 것은 무언에 대하여 말이 없는 것만 못하니, 이 때문에 묵연한 것이다. 위에서 모든 보살은 법상에 대하여 말이 베풀어지고, 문수는 무언에 대하여 말이 있으며, 정명은 무언에 대하여 말이 없다. 이 셋은 종취를 천명함은 비록 동일하지만, 행적에는 심천이 있다. 그래서 말은 무언보다 뒤에 있고, 앎은 무지보다 뒤에 있는 것이니, 믿을 만하도다.(肇曰 有言於無言 未若無言於無言 所以默然也 上諸菩薩措言於法相 文殊有言於無言 淨名無言於無言 此三明宗雖同 而迹有深淺 所以言後於無言 知後於無知 信矣哉)
도생스님 해설: 문수는 비록 설할 수 없음을 천명했지만, 여전히 유설이 무설임을 천명하지 못했다. 그래서 유마는 잠자코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말이 실답지 않음을 드러낸 것이다. 말이 만일 실답다면, 어찌 잠자코 있었으랴.(生曰 文殊雖明無可說 而未明說爲無說也 是以維摩默然無言 以表言之不實 言若果實 豈可默哉)
해설: 협비구를 협존자라 한다. 부법장인연전付法藏因緣傳에 의하면, “그 협비구는 숙업을 말미암기 때문에 모태 중에 60여년을 있었고, 이미 탄생한 이후 수염과 머리털이 호백했다.”(彼脇比丘由昔業故 在母胎中六十餘年 既生之後鬚髮皓白)라고 하니, 60세 출가설은 와전인 듯하다. 마명 전후에 대변재란 말이 두 번이나 나오는 것을 보면, 소시에 아라한과를 성취한 이가 또한 협비구임이 분명하다. 부법장인연전에 의하면 마명보살은 협존자의 손상좌가 되고, 이 집삼장의 해설에 의하면 제자가 된다. 두 존자의 문답에 어려운 점은 없다. 다만 중로에 자기 허물을 돌이킬 줄 아는 것을 보면 마명보살이야말로 참으로 지혜롭다고 하겠다.
집삼장의 결론은 압권이다. “무릇 침묵과 말은 비록 다르지만, 종취를 천명하는 것은 동일하다. 회득한 바가 비록 동일하지만, 행적은 정추精麁가 있다. 무언에 대하여 말이 있는 것은 무언에 대하여 말이 없는 것만 못하기 때문이다. 잠자코 논명論明함이여, 그 논명이 현묘하도다.”
정추에 대한 해설, 곧 “무언에 대하여 말이 있는 것은 무언에 대하여 말이 없는 것만 못하다.”(有言於無言 未若無言於無言)라는 이 문장도 고심했다. “(문수보살이) 말이 무언에 대하여 있는 것은 (유마장자가) 말이 무언에 대하여 없는 것만 못하다.” 이와 같이 해석할 수도 있다. 무언은 불이법문이다. 주어는 생략되었다. 전자를 취했다. 고故자는 앞에 붙였다. 그래야 앞뒤 문장이 살아난다. 무언은 삼단의 불이법문 중에 최고층이다.
“그래서 말은 무언보다 뒤에 있고, 앎은 무지보다 뒤에 있는 것이니, 믿을 만하도다.(所以 言後於無言 知後於無知 信矣哉) 후後자는 능력 따위가 뒤떨어지다, 뒤로 돌리다, 뒤서다 등 동사의 뜻이 있다. “말이 만일 실답다면,”(言若果實)의 약과若果는 하나의 단어이다.
경문: 문수사리가 찬탄하여 말했다. “옳고 옳도다. 바로 문자나 언어가 없는 곳에 이르니, 이것이 참으로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것이다.”(文殊師利歎曰 善哉善哉 乃至無有文字語言 是眞入不二法門)
승조스님 해설: 묵연무언 법문을 수령한 이는 문수 그 일인뿐이로구나. 그 유마를 말로 지지하고자 하니, 그래서 옳다고 칭찬한 것이다.(肇曰 默領者 文殊其人也 爲彼持言 所以稱善也)
도생스님 해설: 말의 자취가 무언에서 다했다. 이 때문에 탄사歎辭로 옳다고 한 것이다.(生曰 言迹盡於無言 故歎以爲善矣)
해설: 무정설법은 아는 이가 드물다. 육조스님의 문하에서도 하택스님과 마조스님의 제자 대주스님은 부정했지만, 혜충국사는 문수나 보현의 경계에 이르러야 알 수 있다고 극찬했다. 유마장자의 묵연무언도 일종의 무정설법이다. 오로지 문수보살만이 감파했다. 그래서 승조스님이 찬탄한 것이다.
선재선재는 부처님이 제자를 칭찬할 때 쓰기도 하고, 제자가 부처님을 찬탄할 때 쓰기도 한다. 등장인물이 33인 보살인데, 문수보살은 지휘자이기도 하고, 31인의 보살과 유마보살의 중재자이기도 하다. 그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일사천하미진수의 제불보살 등으로 하여금 선재라는 찬탄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다. 선재를 잘했다 또는 착하다고 변역하는 사례가 있다. 그러나 옳다는 번역이 또한 옳다. 선재는 절대긍정의 표현인데, 착하다는 동떨어져 있고, 잘했다는 긍정할 만하지만, 옳다보다는 더 구구절절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2) 청량국사의 삼중사중 그리고 평등
그렇지만 이 경의 뜻은 전후 보살이 서로 이루어주며 함께 심오한 지취를 드러낸다. 만일 우열을 변별한다면 혹 삼중 사중이 있다. 삼중이라 말한 것은 무엇인가? 첫째 모든 보살은 무이로써 둘을 차견遮遣하면, 오히려 말로써 법을 드러내어 불이를 설할 수 있는 것 같지만, 설령 둘을 대대하여 불이를 천명할지라도 대대가 끊어진 것은 아니다. 둘째 문수는 말로써 말을 차견하고 불이를 설할 수 없음을 천명하여 말을 잊고 지취를 깨닫게 하였다. 셋째 유마힐은 무언으로써 현리를 드러내니, 이른바 본인 스스로 무언하여 다시금 차견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셋이 된다. 그리고 사중이라 말한 것은 무엇인가? 문수사리는 말로써 그 불이에 계합하고, 또 말이 곧 무언임을 천명하니, 꼭 여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합일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연후 삼단으로 반복하여 서로 이루어주는 것이니, 오로지 제일의가 될 뿐이다. 처음 문수는 말로써 무언을 드러내고, 다음 정명은 무언으로써 말에 계합하며, 마지막 문수는 말로써 무언에 계합하여, 삼단으로 두 보살이 함께 말이 끊어진 현리를 드러낸 것이다. 이 때문에 앞 32명 보살은 무이로써 둘을 차견하고, 뒤에 두 대사는 무언으로써 말을 차견한 것이니, 그러면 단지 두 단계만 있을 뿐이다. 만일 다시 합일하고자 한다면 어떠한가? 만일 모든 보살이 말로써 둘을 차견함이 없었다면, 부질없이 절언絕言만 있을 따름이라 무슨 인유로 현리를 드러낼까? 이는 곧 앞의 모든 보살이 말을 가차하여 현리를 드러내고, 뒤에 두 대사는 무언으로써 현리를 드러낸 것이니, 유언有言과 무언無言을 함께 잊는다면 모두 진실한 불이이다. 이 때문에 비록 세 단계가 일치해도 상위相違가 없다. 이제 최후를 취하기 때문에 정명이 묵연히 있는 것과 같다고 이른 것이다.(然此經意 前後相成 共顯深旨 若辯優劣 或三重四重 言三重者 一諸菩薩以無二遣二 則是以言顯法 似有不二可說 便是對二明不二 非絕待也 二文殊以言遣言 明無不二可說 令亡言會旨 三維摩詰以無言顯理 謂本自無言 不須更遣 故爲三也 而言四者 文殊師利以言印彼 又明言即無言 非要離耳 若欲合者 然後三段反覆相成 但爲一義 初文殊以言顯無言 次淨名以無言印言 後文殊以言印無言 三段二人共顯絕言之理 故前三十二菩薩以無二遣二 後二大士以無言遣言 則但有二節 若更合者 若無諸菩薩以言遣二 空有絕言何由顯理 是則前諸菩薩假言顯理 後二大士以無言顯理 言與不言雙亡 皆眞不二矣 故雖三節一致無違 今取最後 故云如淨名默住也)
해설: 이 문단의 소제목이 “청량국사의 삼중사중 그리고 평등”이다. 곧 국사는 이 불이법문품 전체를 세 단계로 나누기도 하고, 네 단계로 나누기도 한다. 국사는 앞에 보살을 32명이라 했는데 전사하는 과정에 차오가 아닐까 한다. 문수보살과 유마장자를 포함하여 전인원이 33인이다. 31명 보살의 불이법문이 한 묶음으로 첫째 단계이고, 문수보살과 유마장자의 법문이 각기 한 단계라 도합 세 단계이다. 이를 삼중이라 한다. 사중은 후자를 세 단계로 분류한 것이다. 곧 하나는 문수보살의 불이법문이고, 둘은 유마장자의 묵연무언이며, 셋은 문수보살의 찬탄이다. 합해서 사중이 된다.
차견遮遣은 차지遮止와 견거遣去의 합성어이다. 막아서 못 하게 하고, 내보내 제거하는 것이다. “첫째 모든 보살은 무이로써 둘을 차견한다.” 이는 무슨 뜻인가? 31번째 제실보살의 법문을 사례로 들어보겠다.
“허망과 진실은 분별하면 둘이 됩니다.” 허망과 진실이 둘이다. 곧 두 가지 분별이다. “만일 모든 보살이 진실의 자성을 자세히 관찰하면 오히려 진실도 보지 못하는데 하물며 허망을 보겠습니까?” 이것이 차견이다. 허망과 진실을 차견한다. “이 자성은 육안으로 보는 바가 아니고, 혜안이라야 바로 봅니다. 이와 같이 볼 때 일체법에서 보는 것도 없고 보지 않는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무이이다. 무이는 곧 불이와 같다. 바로 불이법문이다. 불이의 아니불자는 없을무자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불이법문이 바로 무이법문이다. 앞에 31명 보살의 불이법문은 그 양상이 모두 이와 유사하다. 그래서 한 묶음으로 보고 첫째 단계를 삼는 것이다.
“첫째 모든 보살은 무이로써 둘을 차견遮遣하면, 오히려 말로써 법을 드러내어 불이를 설할 수 있는 것 같지만, 설령 둘을 대대하여 불이를 천명할지라도 대대가 끊어진 것은 아니다.” 영구예미靈龜曳尾이다. 꼬리로 발자국을 쓸어도 쓴 흔적은 어찌할 수 없다.
삼중과 사중은 위에서 설명했다. 아래는 이중을 말한다. “처음 문수는 말로써 무언을 드러내고, 다음 정명은 무언으로써 말에 계합하며, 마지막 문수는 말로써 무언에 계합한다.” 말을 인하여 말을 드러내기도 하고,(因言而顯言) 말로써 무언을 드러내기도 한다.(以言顯無言) 만일 문수보살의 찬탄하는 말이 없었다면, 어찌 무언이 현묘한 줄을 알랴. 이 때문에 적멸의 상은 언전을 가차하는 것이다.(若無文殊讚默之言 安知無言之爲妙 故寂滅之相 假以言詮) 사바세계는 불사를 말로 하니 이근원통이 제일이고, 묘언妙言은 지혜의 산물이다. 세간은 말이 시비의 대상이 되지만, 출세간은 말의 묘용을 끝없이 찬탄해도 오히려 부족하다.
“삼단으로 두 보살이 함께 말이 끊어진 현리를 드러내니, 이 때문에 앞 32명 보살이 무이로써 둘을 차견하고, 뒤에 두 대사는 무언으로써 말을 차견하는 것이니, 그러면 단지 두 단계만 있을 뿐이다.” 여기서 국사는 본회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31명 보살의 한 단계와 문수유마를 한 단계로 묶는다. 그래서 두 단계만 있을 뿐이라 말한 것이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만일 모든 보살이 말로써 둘을 차견함이 없었다면, 부질없이 절언絕言만 있을 따름이라 무슨 인유로 현리를 드러낼까?” 절언은 문수보살과 유마장자의 불이법문을 말한다.
“이는 곧 앞의 모든 보살이 말을 가차하여 현리를 드러내고, 뒤에 두 대사는 무언으로써 현리를 드러낸 것이니, 유언有言과 무언無言을 함께 잊는다면 모두 진실한 불이이다. 이 때문에 비록 세 단계가 일치해도 상위相違가 없다.” 마침내 두 단계가 한 단계 진실한 불이로 귀결한다. 이것이 곧 국사의 본회이다. 일치무위가 추기이다. 바로 평등법문이다.
서로 꼭 들어맞는다는 일치一致와 틀림이 없다 또는 다름이 없다는 무위無違는 같은 말이다. 범성일치凡聖一致 시종일치始終一致 심경일치心境一致 또는 시말무위始末無違 성상무위性相無違 진속무위眞俗無違 등의 사례와 같다. 둘이 모두 일치하거나 무위한 이유는 무엇인가? 상호간에 평등하기 때문이다. 만일 위 사례에서 평등관을 갖지 못하면, 원각경의 청정혜보살장 중에 “일체 장애가 바로 구경각이니, 득념과 실념이 해탈이 아님이 없고, ... 일체 번뇌가 필경 해탈이다.”(善男子 一切障礙 即究竟覺 得念失念 無非解脫 ... 一切煩惱 畢竟解脫)라는 평등법문을 결코 알 수 없다.
백유경에 삼층 누각의 비유가 있다. 주인은 목수에게 1층과 2층이 없는 3층만의 누각을 원하지만, 그러한 3층 누각은 있을 수 없다. 비록 유마장자의 묵연무언을 문수보살이 선재선재라 찬탄하고, 역대 모든 주석가도 또한 극찬한다. 그렇지만 이 문장의 초두에 “이 경의 뜻은 전후 보살이 서로 이루어주며 함께 심오한 지취를 드러낸다. 만일 우열을 변별한다면 혹 삼중 사중이 있다.”라는 서설과, 이를 의거하여 이끌어낸 진실한 불이법문이 곧 평등법문이다. 여기에 이르러서는 어찌 그 우열을 논할 수 있겠는가? 만일 우열을 논하고 하나로 평정한다면 삼층 누각을 짓고자 하는 졸부의 신세를 면치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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