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운 맥주
권성업
옛말에 ‘하늘에 제를 올리거나 조상을 모신 사당에 예를 올릴 때, 술이 아니면 음향하지 않는다(祭天禮廟 非酒不響)’라는 말이 있다. 어른을 모시거나, 친구를 만나거나, 다소 서먹한 사이로 처음 만날 때, 손님을 청할 때, 정성을 가득 담아 전하거나 마음을 열고 친교를 맺는 데는 아마 이 음식을 당할 것이 없는 모양이다.
술이란 알맞게 마시면 건강에 좋고 남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니 참으로 유익한 음식이요, 문자 그대로 약주藥酒이다. 아득한 옛날 신랑 신부가 첫날밤에 처음 만나 상견례를 올릴 때 긴장의 벽을 헐고 애정의 다리를 놓아준 백년가약주百年佳約酒가 그것이오. 웃어른 밑에서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 몸을 돌려 마시던 겸양주謙讓酒, 제를 올릴 후 조상님께서 내려주시는 복스러운 한 잔의 음복주飮福酒, 할아버님께서 식사 전·후에 즐기시던 한두 잔의 반주飯酒 등이 그 것이다. 이렇듯 귀한 손님을 대하듯 절제한다면 가히 약이라 하겠다. 흔히 쓰는 말 중 ‘약주 한 잔 드시지요’라는 말의 ‘한 잔’이 바로 약이라는 뜻이 아닐까?
반면 지나친 술은 화禍를 부르는 요물이다. 몸을 망치는 독주毒酒가 그렇고 정신을 돌게 하는 발광주發狂酒, 시비를 걸어 싸워야 직성이 풀리는 호전주好戰酒, 살림살이를 부수는 파괴주破塊酒, 고함치며 골목을 휩쓰는 골목 대장주, 어른을 몰라보는 안하무인주眼下無人酒,아내를 두들기는 파렴치주破廉恥酒, 길가를 안방으로 삼는 노숙주路宿酒, 술값에 옷 잡히는 망신주亡身酒, 가산을 탕진하는 파산주破産酒, 나라를 망치는 망국주亡國酒, 혹 아무 데나 일을 보는 멍멍주 등 천태만상의 모습으로 선량한 사람들을 유혹의 구렁에 떨어지게 하는 주범이 과음이 아닐까?
내가 군을 마치고 공직에 근무하던 60년대만 해도 술이라야 막걸리가 최상의 애용주였고, 다음이 소주요, 다소 고급스런 것이 약주였다. 당시 수입에 의존했던 맥주나 양주는 평범한 말단 공무원으로는 엄두도 못 냈다. 더구나 인력도 부족하여 보통 12시까지 야근을 했다. 봉급은 겨우 쌀 몇 말 정도요 담뱃값도 안 되던 때이니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되는 시절이었다.
나는 주량도 약하여 겨우 한두 잔이 넘으면 손을 젓는 것이 술좌석의 기본 태도였다. 당시 공무원은 퇴근 시간이 되면 주막집 마당에 던져진 마루 위에 걸터앉아 대포 몇 잔으로 시름을 달래고 허허 웃으며 일어서는 것이 고작이었다.
어느 날 나는 시장엘 나갔다가 직장 상사와 동료 몇 사람을 만났다. 내 깐에는 정중히 잘 모셔야겠는데 주머니 사정은 여의치 못했다. 음식점이나 요정으로 갈 수도 없었고 근소僅少한 비용으로 접대하자니 부득이 집으로 청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없다 해도 체면문제지 막걸리를 사오랄 수는 없었다. 그래도 좀 고급스런 술로 모셔야겠기에 아내에게 맥주를 사오라고 부탁하였다.
아내는 급작스런 손님을 맞아 안주를 장만하는 등 최선을 다하느라 분주하였다. 이윽고 안방에 안주상이 차려지고 마침내 각자의 앞에는 자그만 잔이 놓여졌다.
아내는 귓속말로 내게 물었다. 술은 데워야지요? 음 그래야지. 조금 후 주전자에 살짝 데운 맥주가 나왔다. 우선 상사의 앞에 놓인 소줏잔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맥주를 정중히 부어 올렸다. 잔을 받은 이 어른 하는 말씀이 “어! 이거 맥주 아냐?” 그렇다고 답하며 우선 시음해 주실 것을 간청했다. “아니 권선생, 맥주도 안 마셔봤어?” 라고 물었다. 나는 의아한 모습으로 사연을 물었다. ‘술이란 본래 따끈따끈 해야 되지 않느냐?’ 반문하자, 허허 웃으며 맥주는 시원해야 제격이요, 잔은 커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난생 처음 귀한 손님을 모신 자리에서 맥주에 관한 진솔한 비법을 전수 받을 줄이야! 견문이 부족한 자신을 책망하다 보니 어느새 등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요즈음엔 맥주라면 어린이도 알고 있으리만치 우리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당시 수입에 의존하던 고급주가 국내의 자동화된 기술로 값싸게 만들고 마음껏 마실 수 있으니 옛날의 가난과 지금의 풍요를 대비하면 윤택하다 못해 사치스러운 것이 아닐까?
마시다 남기고 버려지는 음식물이나 맥주를 볼 때마다 안타깝기 만하다. 지금도 지구촌 한구석엔 기아에 떨며 죽어가는 생명이 많음에 비긴다면 이 얼마나 행운아일까? 앞으로 낭비를 줄여 이들을 도울 수 있는 길을 찾는다면 일석이조의 덕을 쌓는 좋은 결과를 낳으리라.
아내와 나는 어려웠던 그 시절, 수줍은 소녀의 얼굴처럼 붉게 달아올랐던 데운 맥주의 교훈을 회상하며 한바탕 웃고, 아련한 옛 꿈에 잠겨본다. 먼 인생의 초년시절, 순진했던 그때가 왠지 그리워진다
첫댓글 ㅎㅎ...술손님을 대접해본 경험이 없고..술을 안마시는 남편이라 급작스런 손님이 방문하여 술을 요구했을때 집안에 소주잔 하나도 없었던 신혼시절... 당황하여 소주는 사왔지만 저는소주를 와인잔에 대접하며 절절 맸던 기억이 떠올라 즐겁게 읽었습니다 감사 합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