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세청 대선자금 불법모금 사건(세풍)은 대권이라는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해 신성한 징세권을 멋대로 남용한 국기문란 사건이었다. 따라서 그 진상을 낱낱이 규명하고 관련자들을 추상같이 응징함으로써 다시는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국민적 합의였다.
검찰이 8일 발표한 최종 수사 결과에서도 한나라당과 국세청의 합작■공모를 입증할 몇가지 새로운 사실이 추가로 확인됐다. 이석희 전 국세청 차장이 차수명 전 한나라당 재정위원장으로부터 선거자금 고액 미납자 명단을 건네받아 이들에게 기탁금 납부를 독촉한 사실이 새롭게 드러난 것이다. ■채무자■를 협박하기 위해 ■해결사■를 동원하는 시중잡배들의 행태를 집권여당과 국가기관이 버젓이 자행한 셈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의 중대성에 비춰볼 때 검찰 수사는 변죽만 울린 채 끝나고 말았다. 그동안 제기됐던 의혹들이 대부분 사실로 드러났는데도 ■공소시효 만료■ ■관련자 소환불응■ 등을 이유로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뜨거운 관심사인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관련 여부부터 그렇다. 이 전 총재가 임채주 당시 국세청장에게 전화를 걸어 격려한 사실이 새롭게 확인됐으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 전 총재의 개입 문제를 둘러싼 궁금증과 의혹만 더욱 키워놨을 뿐 검찰은 속시원한 해답을 내놓지 않았다.
언론인 연루 문제도 마찬가지다. 검찰은 이 전 차장의 차명계좌에서 출금된 수표가 언론인 20여명에게 수백만원에서 수천만원씩 건네진 사실을 확인하고서도 공소시효 만료를 이유로 더 수사를 진척시키지 않았다. 돈까지 서로 주고받으며 얽히고 설켜 돌아간 권언유착의 실태를 적나라하게 들추어냄으로써 언론계의 치부에 칼을 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도 검찰은 이를 피해갔다.
검찰은 이제라도 추가수사에 나서야 한다. 비록 사법처리에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하더라도 진상규명만은 분명히 해둬야 유린된 국가기강이 바로 설 것이다.
한겨레 편집 2003.04.08(화) 17:53
0. 세풍 해당 정치인들 ■당에서 받아 선거활동비로 써■
?해당 정치인들의 반응
검찰의 계좌추적 결과, 지난 1997년 대통령 선거 당시 이른바 ■세풍자금■을 개인 용도로 사용한 것으로 나타난 정치인들은 대부분 ■횡령■ 혐의를 강하게 부인하면서 ■당에서 받아 선거 활동비로 썼다■고 주장했다. 괄호 안은 검찰의 수표 추적에서 드러난 액수다.
■ 서상목 전 의원(5억2800만원)=(연락이 되지 않음)
■ 김영일 의원(1000만원)=당시 한나라당 선거기획조정위원회에서 1주일이나 2주일에 한번 정도 선거활동비로 200만~3백만원씩 줬다. 100만원짜리 수표였다. 밑에서 일하는 직원들에게 다시 나눠주기 위해 수표를 친척한테서 현금으로 바꿔 썼다. 당시에는 당 후원금인지 국고 지원금인지를 일일이 구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모두 선거자금으로 썼을 뿐 개인용도로 사용한 적은 없다.
■ 박명환 의원(1억원)=당시 유세본부장이었다. 부임해 보니 상대 당은 유세차량이 20~30대 되는데 우리는 2대 밖에 없더라. 그래서 당 공식회의에서 이런 사정을 말하고 1억원을 받아, 유세차량 비용과 인건비 등으로 사용했다.
■ 윤원중 전 의원(600만원)=당으로부터 2000만~3000만원을 지원받았는데 후원금과 개인 돈을 함께 하나의 통장으로 관리했다. 이 돈을 선거비용으로 쓴 것인데, 물론 개인용도로 쓰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당에서 받은 돈과 다른 돈을 어떻게 구별하나.
■ 최병렬 의원(2200만원)=공동선대위원장으로서 당에서 판공비조로 1억원을 받은 것으로 기억한다. 돈의 성격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함께 일하는 의원들에게 격려금조로 주기도 하고, 고생하는 사람들에게도 술이나 밥 사먹으라고 주기도 했다. 대선 이후 남겨서 쓴 것은 전혀 기억이 없다. 내게서 돈을 받아간 사람들이 내 이름을 배서했는지, 다른 돈과 섞였는지 모르겠다. 공동선대위원장으로서 판공비, 활동비로 썼을 뿐이다.
■ 김윤환 전 의원(1100만원)=(미국에서 투병생활중. 측근이 대신 대답)그 때 당에서 선거자금 지급할 때 그런 돈이 끼어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 정형근 의원(1000만원)=(무응답)
■ 이철 전 의원(4000만원)=선거운동을 도와주면서 활동비도 좀 받았을 것 같은데, 그렇게 큰 돈은 아니다. 내가 그렇게 큰 돈을 받을 위치에 있지도 않았고 배서한 기억도 없다.
■ 백남치 전 의원(800만원)=(연락이 되지 않음)
■ 이회창 전 총재(200만원)=(미국에서 연구중. 측근이 대신 대답)이 전 총재는 개인계좌를 가지고 있지 않다. 비행기 삯을 비롯해 어떤 비용도 이 전 총재가 직접 계산한 적이 없다. 선거 관련 모든 비용은 당 비용으로 처리했다.
한겨레 편집 2003.04.09(수) 19:00, 정치부
0. 남경필 ■세풍 철저수사를■
한나라당내 소장파 원내외 위원장 모임인 미래연대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남경필 의원이 ■세풍■ 사건에 대해 ■현 지도부를 포함해 재수사가 필요하면 철저히 수사해 법적으로 완전히 털고 가야 한다■고 주장해, 눈길을 모았다.
남 의원은 11일 정치전문 사이트인 ■이윈컴■과의 인터뷰에서 ■국세청에서 돈을 모아 (선거를) 했다는 것은 당연히 사과해야 할 문제이고 잘못된 일■이라며, ■잘못된 것은 법적으로 처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의 당 지도부에 대한 재수사도 ■필요하다면 해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나라당 전■현직 의원들이 세풍 자금을 횡령했다는 의혹(<한겨레> 9일치 1면)이 번지고 있는 가운데 나온 남 의원의 이런 발언은 당 지도부를 정면으로 비판한 것이어서, 파장이 예상된다.
남 의원은 또 인터뷰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세풍 관련 공소를 취하하도록 정치적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박희태 대표권한 대행의 발언에 대해서도, ■나라종금 사건에 대해서는 철저한 수사를 요구하면서, 세풍에 대해서는 공소를 취하하라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남 의원은 인터뷰 내용이 알려진 뒤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미래연대 대표로서가 아니라 개인적 생각을 말한 것■이라며, ■세풍 관련 발언도 마치 우리 당이 세풍에 구린 구석이 있는 것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적극적으로 임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해명했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한겨레 2003-04-11 22:39:00
0. 잘못 발급한 ■세풍■ 면죄부
국세청 대선자금 불법모금 사건에 대한 검찰의 최종 수사결과가 발표된 뒤에도 여진이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이 돈을 선거자금으로 지원받았다가 개인적인 용도로 쓴 정치인들의 이름이 공개되고, 촌지로 이 돈을 받은 언론인들의 이름도 확인되고 있다.
의혹의 실상이 하나둘 드러나고 있는데도 당사자들이 보이는 반응은 매우 실망스럽다. 해당 정치인들은 ■그럴 리가 없다■ ■불법으로 조성된 자금인 줄 몰랐다■는 등의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고, 언론인들도 ■기억에 없다■며 잡아떼는 사람들이 많다.
한술 더 떠 한나라당은 ■검찰이 고의로 자료를 유출해 야당파괴 정치공작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검찰과 이 내용을 보도한 언론을 상대로 법률적 책임을 묻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국가 공권력을 불법적으로 동원해 선거자금을 조성한 데 대해 국민들에게 사죄부터 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인데도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국세청 불법모금 자금의 언론계 유입은 당시 만연했던 정치권과 언론의 은밀한 뒷거래의 일면을 보여준다. 특히 관련된 언론인들의 직급과 맡은 분야가 다양한 점에 비춰볼 때, 이번에 드러난 촌지 규모는 빙산의 일각이라는 추론도 가능하다. 검찰이나 언론계에서는 ■합법적으로 조성된 자금에서 촌지를 받은 언론인은 빠져나가고, 국세청이 불법 모금한 자금을 받은 언론인만 재수없이 걸린 셈■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이번 사건을 둘러싼 논란이 이처럼 갈수록 증폭되는 근본 원인은 검찰이 수사를 어물쩍 끝낸 데 있다. 검찰은 ■시효 만료■ 등을 이유로 내걸고 있지만, 법조계 한쪽에서는 정치인에 대해서는 업무상 횡령죄의 적용이 가능하고, 언론인의 경우 배임수재죄의 시효가 살아 있다는 등의 다른 법률적 해석도 내놓고 있다. 이런 해석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겠으나, 검찰은 이 사안의 중대성을 고려해 늦었지만 이제라도 다시 추가수사에 나서야 한다.
그리고 해당 정치인과 언론인들은 변명에만 급급할 것이 아니라 겸허한 자기반성과 고백에 나서야 한다. 특히 불법으로 조성된 자금에서 언론인들이 촌지를 받은 행위는 어떠한 변명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통렬한 자기반성과 고백이야말로 이런 국기문란 행위가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 데 일조하는 길이다.
한겨레 2003-04-10 18:10:00
0. 김영일 사무총장의 ■막말■
국세청 대선자금 불법모금 사건에 대한 한나라당 일부 고위당직자의 발언이 도를 넘어서고 있다. 김영일 사무총장은 지난 10일 당 소속 정치인들의 이른바 ■세풍자금 횡령의혹■ 보도에 대해 ■비열한 정치공작■ ■현 정권의 더러운 술책■ 등 원색적 표현을 써서 비난한 것도 모자라 ■창녀론■까지 들먹였다. ■창녀는 손님 인격이 아니라 돈지갑을 보듯이 검찰과 특정 언론이 피해자 인권은 아랑곳하지 않고 권력의 시녀 노릇을 했다■는 요지였다. 검찰과 이 기사를 보도한 〈한겨레〉는 졸지에 손님의 돈지갑(권력)에만 관심이 있는 창녀로 전락한 셈이다.
세풍자금 유용 의혹이 실명으로 보도된 데 따른 김 총장의 당혹감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를 바라보는 한나라당 안의 눈초리도 썩 호의적이지만은 않은 듯하다. 당 안팎으로 궁지에 몰린 그로서는 ■가장 원색적 공격■이 ■최선의 방어책■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원내 제1당 사무총장이라는 막중한 위치에 있는 정치인이라면 언어 선택에 최소한의 절제가 있어야 한다. 불리하다 싶으면 무조건 ■정치공작■으로 몰아붙이는 구태도 이제는 사라질 때가 됐다. 그렇게 억울하다면 스스로 검찰에 나가 조사를 청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일 수 있다.
마침 한나라당 안에서도 ■현 지도부를 포함해 재수사가 필요하면 철저히 수사해야 한다■는 주장(남경필 의원)이 나왔다. 이 사건에 대한 사과는 없이 공소취하 요구만 난무하던 한나라당에서 오랜만에 올바른 목소리가 나온 것이다.
사실 김 총장도 최근 ■옳은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는 지난 9일 국정원 도청의혹과 관련한 검찰수사에 대해 언급하며 이렇게 말했다. ■여야를 막론하고 불법이 있으면 밝혀야 하고 책임질 일이 있으면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 모든 과거지사를 깔끔하게 털고 가는 것이 국가와 국민들을 위해 봉사하는 일이다.■ 김 총장 자신에게 그대로 돌려주고 싶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