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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름다운 세계 배낭여행 원문보기 글쓴이: 바이칼3
난쉰 여행 6 - 운하에 이어지는 옛 마을을 보고 돌아오면서 밤거리를 구경하다!
2023년 10월 30일 저장성 후저우시 난쉰전에 도착하여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30분을
걸어 강남의 10대 수향 마을중 하나인 난쉰구전(南浔古镇 남심고진)
서문으로 입장하는데 여긴 입잘료를 받지 않으며 700년 역사를 가진 부자 동네입니다.
쌀 3모작에 실크를 생산하니 사조지부(絲組之府) 에다가 쌀과 물고기가 풍부해 어미지향 (魚米之鄕)
으로 불리며 남자들이 살림을 하는데..... 여자들은 섬세한 손으로 누에에서
생사를 뽑고 비단을 짜니 손가락이 상하면 안되는 지라 설거지와 뻘래등 집안일은 남자들이 한답니다.
1840년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패배해 5개 항구를 개항하게 되면서 인근 상하이가 개항되니 생사 수출이 급증
하는데, 그 생사의 70% 는 난쉰 인근에서 생산되었으니 마을에 사조(비단) 박물관에 들어가 구경합니다.
비단은 누에 나방의 고치에서 나온 실을 가지고 만든 섬유로 영어로는 실크(silk).
한자로는 견(絹) 이라고 하며...... 비단(緋緞), 명주(明紬) 라는 명칭으로도
쓰이는데, 양모와 함께 인류 역사상 오랫동안 사용된 동물성 천연 섬유라고 합니다.
운하변에 멋진 카페가 있어 들어가니 국산인 칭따오등 중국 맥주는 없고.... 뜻밖에도
일본 맥주인 아사히 뿐이라 가격을 물으니 한 캔에 무려 35위안이라지만
달리 방법이 없으니 하나 사서 창 밖으로 운하와 나룻배에 사람들의 모습을 구경합니다.
운하에 떠다니는 나룻배와ㅣ 옛 송나라 옷을 입은 처녀들을 구경하다가 문득 왕은철 전북대
교수가 동아일보 ‘왕은철의 스토리와 치유’ 칼럼에 쓴 “관기의 비애” 라는 글이 떠오릅니다.
김소월의 스승이었던 안서 김억은 시인이면서 선구적인 번역가였다. 대부분의 번역이 일본어 번역본을
중역하는 상황에서 그는 원전 직역의 물꼬를 텄다. 일제강점기에 일종의 탈식민적 번역을 한 셈이다.
그는 서구 유럽과 미국의 시들은 물론이고 중국과 조선의 한시까지 우리말로 옮겼다.
그중에서도 여류시인들의 시를 많이 번역했다. 가장 유명한 것이
당나라 시인 설도(薛濤) 의 시를 옮긴 ‘동심초’ 다. 김성태가 곡을 붙여 더 유명해진 시.
원 제목은 동심초가 아니라 ‘봄을 기다리는 노래’ 라는 의미의 ‘춘망사(春望詞)’ 다. 김억은 네 개로
된 시 중 하나만을 번역해 ‘동심초’ 라고 제목을 붙였다. “꽃잎은 하욤없이 바람에
지고/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랴는고.”
3행과 4행의 동심인(同心人) 과 동심초(同心草) 라는 표현에서 동심은 ‘한마음’
이라는 의미다. 마음과 마음이 하나로 묶여야 사랑인데, 시인은 그러하지
못하고........ 한갓되이 풀잎만 묶으며 기약 없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삭인다.
그 마음이 더욱 애절하게 느껴지는 것은 시인이 부모를 일찍 잃고 관기(官妓) 로 살았던
여성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사랑해도 보통 사람 처럼 사랑할 수 없는 게
관기의 숙명이요 비애였다. 남자는 떠나면 그만이었다. 그녀는 시로 위안을 삼았다.
김억은 이런 시가 진짜 시 라고 생각했다. 그는 좋은 시를 ‘사무사(思無邪)’, 즉 생각에 꾸밈이 없는
경지에 빗댔던 공자의 말을 인용하며 소실이나 기생의 시를 높이 평가했다. “사대부집
아낙네들의 노래에는 어째 그런지 일부러 감정을 눌러 버리고 점잖은 채 꾸민 감이 있습니다.”
그래서 공자의 말이 맞다면 그들의 노래는 ‘낙제’ 이고 감정에 거짓이 없는 소실이나 기생의 노래는
‘급제’ 였다. 제도가 보장하는 안정된 삶이 아니라 한스러운 삶을 살았던 여인들에게서 나오는
순도 높은 감정이 서정시의 본질에 가깝다는 의미였다. 번역가 김억이 일깨우는 예술원론 이랄까.
그러고는 카페를 나와서 홍예교 다리를 넘어가니 저 멀리까지 운하가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고 운하 양쪽으로 주택과 가게에 식당들이 이어져 있으니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광대해 다 볼 엄두가 나지 않는데... 여긴 취두부 냄새가 코를 찌릅니다.
그러니까 이 도시는 울타리를 쳐서 입장료를 받기 힘든 것이...... 하도 마을이 크고
넓게 퍼져 있는지라 여기서 생활하는 일반 주민들의 생활을 통제
하기가 힘드니 입장료 자체를 받지 못하고 특정 건물 입장시에만 받는가 봅니다.
돌아오다가 도교 사원인 廣惠宮(광헤궁) 을 구경하는데.... 이 건물은 원나라 말기에 장사성이
점령해 곡창을 만들고 행궁으로 사용했으니 장왕묘 라고도 불린다고 합니다. 산문에는
왕영관과 사산대제를 모시며 주전에는 황대선을 모신다고 하는데..... 장전강 고거를 지은
장정강은 손문과 장개석의 재정 후원자로 국민당 4대 원로이며 사촌은 장균형이라고 합니다.
도교(道敎) 는 중국의 민족종교 로 중국은 물론 한국, 일본, 동남아시아에 영향을 끼쳤는데 도가는 사상이고
도교는 여기에 여러 토속신앙을 혼합하여 종교로서 발전시킨 것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며 고대
중국의 전설상의 통치자 황제와 도가의 이론가라 할수있는 노자를 신봉한다고 하여 '황로교' 라고도 합니다.
종교로서 도교는 삼국지로 유명한 장각의 태평도 (太平道) 와 장릉의 오두미도(五斗米道) 를
시초로 남북조시대에 구겸지가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당나라 시대에 국가에서 장려하는
종교로 힘이 세지기도 했는데 현대 도교는 전진교(全眞敎) 와 정일교(正一敎) 등이 있습니다.
춘추전국시대 때부터 중국에는 신선방술이 유행하였으니..... 방선도(方仙道) 라고 하고 이걸 익히고
연구하는 사람들을 방사(方士)라고 불렀으니 이들의 목표는 불로장생을 위해 신선이
되는 것이었기에 이러한 방선도의 목표는 도교가 형성될 때 도교의 핵심 내용 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또 이런 본능에 충실한(?) 목표 덕분에 도교가 민간에서 크게 유행할수 있었고 상류층에서도
인기를 끌 수 있었으니 목표가 오래 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하게 늙지도
않으면서 편안하게 오래 사는 것' 이었기 때문에 민간에서도 인기를 끌 수 있었던 듯 합니다.
그러고는 어두워져서 5시 10분이 되니 불을 밝힌 운하변 거리를 걸어 되돌아오는데 민화기인가
적힌 문에는 온갖 꽃으로 장식을 하고 그 아래 바닥에는 레이저를 쏘아 꽃 그림과 글자들을
표시하니 보기에는 좋습니다. 여기 커피숍이 있어 보니 카페 빈 Caffe bene 이라는
세계적 체인 인데... 중국에는 여러 서양 메이커들이 들어와 치열하게 경쟁하는 모습을 봅니다.
중국인들은 옛날부터 차를 많이 마시는 나라이니, 전 세계에서 가장 커피를
많이 마시는 나라는 한국이지 싶은데, 작년 말 서울의 커피 전문점
은 무려 1만 8316개에 달했으니 편의점 과 치킨집을 합친 것 보다 많습니다.
매달 서울에만 200~300 개 커피집이 새로 생겨나고 커피수입량도 사상 최대였으니
2016년 원두와 생두 등을 포함한 커피수입량은 16만톤. 금액으로
7200억원에 달하니 소비층이 성별 구분 없이 모든 연령층으로 확산된 영향 입니다.
국내 커피시장이 포화 상태라는 지적이 수년 전부터 나왔지만 국내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 성장은 계속되고
있다.스타벅스커피 코리아는 지난해 1조28억원 판매를 올려 국내 커피전문점 최초로 1조원을 돌파했다.
스타벅스 매장은 1000개가 넘는다. 스타벅스 점포의 매출과 매장 수 기준으로 한국이 세계에서 다섯 번째다.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이 제공하는 ‘소상공인상권정보시스템’에 따르면 현재 전국에 있는
커피숍은 10만개다. 여기에 커피숍으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커피 음료를 판매하는
베이커리, 디저트 전문점 등까지 포함하면 실제로는 11만개를 훌쩍 넘을 것으로 보인다.
대한민국은 ‘커피공화국’ 이란 말이 과언이 아니다. 커피공화국은 그늘도 만들었다.
커피전문점의 1년 생존율은 55.6%. 절반은 1년 만에 망하는 셈인데......
중국은 원래 차를 마시는 나라였는데 세계화가 되다 보니 낯선 커피숍들이 생겨나네요?
해가 져서 어두운 밤거리이지만 거리에 늘어선 숍과 옷 빌려주는 집이며 커페와 식당등이
불을 밝히고 있으니 이리저리 구경하면서 천천히 운하변을 걸어 나옵니다.
거리 공중화장실에는 변기가 ToTo 이니 일본이나 유럽에서 많이 보는
상표인데.... 여기에는 글귀가 써 있으니 “向前 小步 文明 大步 (향전 소보 문병 대보) 라?
중국어 외에 영어와 일본어에 한국어로도 적혀있으니 한국어로는 “앞으로 한걸음 문명 한걸음”
이라.... 저 한국어 번역은 “앞으로 한걸음 문명 큰걸음” 으로 고치는게 나을 듯 합니다?
그러고는 서문으로 해서 난수니구전을 나와서는 몇시간 전에 왔던 길을 거꾸로 밟아서 돌아옵니다.
돌아오는 도중에 슈퍼에 들러 캔 맥주를 사서 호텔로 돌라오니 30분은 걸린 듯 합니다.
문득 동아일보 김기용 베이징 특파원이 동아일보에 쓴 “中, 70년 유지
조선족 한글 간판 단속..... 현지 ‘정체성 사라진다’ 한숨” 이란 기사가 떠오릅니다.
지난달 26일 중국 지린성 옌볜조선족자치주를 찾았다. 옌볜조선족자치주는 북한 러시아
와 국경을 맞댄 동북 지역이다. 6개 시(옌지 투먼 훈춘 룽징 허룽 둔화)와 2개현
(왕칭 안투)으로 이뤄져 있다. 면적은 4만 2700km² 로 한국 면적 5분의 2에
해당한다. 별다른 생산시설이 없어 지역 경제의 상당 부분을 백두산 관광에 의존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만 아니었다면 여름철 성수기 백두산을 찾는 한국 관광객
으로넘쳐났을 터다. 관광 가이드 리선화 씨는 “코로나19 이전에는 인천과 옌지를 오가는 항공편이 주
6회였다” 면서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30년 동안 사실상 한국인들이 이 지역을 활성화시켰다”고 말했다.
자치주는 특정 소수민족이 다수 사는 지역 행정단위다. 55개 소수민족이 있는 중국에는
성(省) 과 같은 지위인 시짱(西藏·티베트) 신장(新疆) 위구르 광시(廣西) 닝샤(寧夏)
네이멍구 (內蒙古) 5개 자치구와 옌볜조선족 자치주를 포함한 30개 자치주,
그리고 120개 자치현까지 155개 소수민족 자치 지역이 있는데, 자치관할권이 인정된다.
조선족은 인구 감소라는 문제와 한국 북한 중국 사이 ‘경계인’ 으로서 겪는 갈등까지 겹쳐 위기감이
크다. 옌지에서 만난 리(李)모 씨는 “북한은 조선족에 관심 가질 여력이 없고 한국의 관심은
식어가다 못해 싸늘해지는데.... 중국 당국 압력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면서 “올해 조선족
자치주 성립 70주년이지만 이대로라면 조선족이 사라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수 있다” 고 말했다.
한글 부터 단속에 들어갔다. 중국어와 한글을 병기하되 한자를 먼저 표기하는 규정을 시행했다.
좌우 가로 표기할 때는 중국어를 앞에 한글은 뒤에 써야 한다. 위아래 세로 표기일 경우엔
중국어를 오른쪽, 한글은 왼쪽에 쓰도록 했다. 옌볜조선족자치주가 설립된 1952년
이래 70년간 유지한 한글 전용 (병기할 경우 한글 우선) 원칙 방식이 갑작스레 바뀐 것이다.
이뿐만 아니다. 조선족 학교 교과서는 2020년부터 한글 교과서 대신 중국어 국정교과서가 쓰이고 있다.
내년 대학 입시에서 소수민족 가산점이 없어지고 역사 정치 어문 과목 시험은 중국어로 치러야 한다.
( 2005년에 선양으로 들어가 지안을 거쳐 백두산에 등정한후 연길에 들렀을때 온통 한글간판 일색이라
무척 놀라기는 했습니다? 그리고 거리에서 중국말 보다 한국말(북한어투?) 이 더 많이 들려 당황했다는...)
한글 우선 표기 정책 변경은 조선족을 한족 문화에 동화시키려는 이른바 ‘한화(漢化)’ 시도라는 해석이
나온다. 2012년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최고 권력을 장악한 이후 중국은 소수민족
정체성을 희석하는 정책을 강화했다. 소수민족 언어 대신 푸퉁화(普通話·중국 표준어) 사용을 확대
하고 있다. 이 방식은 2019년 대규모 민주화 시위 이후 홍콩을 중국화하는 과정에서도 그대로 적용됐다.
중국 당국은 155개 자치지역 가운데 한족문화에 동화된 것으로 판단되는 남부 광시 좡족(壯族)
이나 북서부 닝샤 후이족(回族)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반면
조선족을 포함해 국경 지역에 있어 국가안보에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신장 위구르족,
시짱 티베트족, 네이멍구 몽골족에 대해서는 ‘한화’의 고삐를 더 세게 당기고 있다는 분석이다.
한국과 조선족 사이 갈등도 : 고구려 발해 같은 한반도 역사를 중국 역사로 편입시키는 동북공정을
펴온 중국은 조선족 정체성을 약화시켜 조선족이 지닌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중국
문화인 양 흡수하려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한복 김치 갓을 비롯한 한국 문화는
당연히 조선족에도 내려오는 문화인데 조선족은 중국 소수민족이므로 중국 문화라는 논리이다.
하지만 이 같은 견강부회가 오히려 한국과 조선족 사이를 틀어지게 만들기도 한다.
한국에서 일어나는 반중(反中) 감정이 의도치 않게 조선족에게 불똥을 튀긴다.
대표적 사례가 올 2월 베이징 겨울올림픽 개회식 식전 이벤트에 나온 조선족 한복 논란이다.
당시 한복을 입은 조선족이 다른 소수민족 참가자들과 함께 중국 국기 게양식을 진행했다. 한국 일각
에서는 “김치를 자기네 전통음식이라고 강변하는 중국이 한국 고유문화를 자기 것이라
우기면서 ‘문화공정’ 을 자행하고 있다” 는 비판이 나왔다. 국회의장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입장을 표명했고 청와대도 “한복이 우리 전통문화인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고 말했다.
반면 조선족은 조선족대로 반발했다. 한족을 포함해 56개 민족으로 구성된 중국에서 소수민족
대표가 소수민족 고유 복장을 입었는데 무슨 문제냐는 것이다. 한 조선족은
인터넷에 “조선족이 한복(조선옷) 을 입지 말고 뭘 입어야 한다는 것일까요” 라는 글을 올렸다.
중국 매체 관차저왕은 “중국 소수 민족이 전통 의상을 입고 나왔는데 유독
한국만 조선족이 한복을 입은 것에 반발했다” 면서 “중국이 많은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나라라는 사실을 한국은 이해해야 한다” 라고 주장했다.
(한국인들은 중국을 한족의 나라라고 생각하는데 비해, 중국에서는 미국이나 러시아
처럼..... "여러 민족으로 이루어진 나라" 라고 생각하니 기준이 다른 듯 합니다?)
(그런데 한가지 아이러니한 것은 조선족이 한복을 입는다고 비난한 한국인들이 정작 자신들은 한복
을 입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평상시는 물론이고 설, 추석이나 지역 축제 그리고 오늘 처럼 이런
관광지 방문때도 입지 않으며.... 지금 경복궁 입장료 할인으로 관광객이 일부 입고, 옛 드라마에나
나오며 결혼식때 신랑,신부 어머니가 입는 정도인데, 옷은 입어야 옷이니.... 안입으면 사라진다는?)
한국으로서는 중국이 조선족을 이용해 한국 문화를 자기 것인 양 가로채려 한다는 의구심을 버릴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한국 대표 시인 윤동주를 ‘조선족 시인’ 이라며 중국인으로 오인하게 만든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옌볜조선족자치주가 관광지화한 룽징시 윤동주 시인 생가에는 ‘조선족 시인 윤동주’ 라고
소개하는 안내판이 버젓이 서있다. 이곳을 찾는 중국인들은 “윤동주가 조선족이면 중국인” 이라고 말할 정도다.
조선족 역사를 한눈에 볼수있는 옌지시 조선족박물관도 상황은 비슷하다. 발해사를 비중있게 다루고 있지만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이 아니라 ‘말갈 수령’ 으로 소개된다. 말갈인이 세운 발해사는 곧
중국사라는 논리다. (대조영은 걸걸중상의 아들인데, 구당서에는 대조영(大祚榮) 을 고구려의 별종 출신
으로 서술했고, 반면 신당서에는 본래 고구려에 부속되었던 속말말갈(粟末靺鞨) 출신이라고 서술되어 있다)
중국의 압박과 냉랭한 한국 관계도 문제지만 더 시급한 것은 조선족 자체가 감소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 정부가 지난해 발표한 ‘2020년 중국 인구 총조사’에 따르면 조선족 인구는 56개 민족중
15번째인 약 170만 명이다. 2000년에 비해 22만여 명 줄어든 수치다. 이 중 베이징을 비롯해
다른 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족을 제외하고 옌볜조선족자치주에 사는 조선족 인구는 59만7000여 명이다.
옌볜 조선족자치주 인구에서 조선족 비중이 30.8%까지 떨어진 것이다. 성립 초기인 1953년
조선족 비율이 70.5% 였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감소다. 한때 조선족 비중이
30% 를 밑돌면 자치주 지정이 해제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기도 했다. 그러나
몽골족 비중이 17.7% 에 불과한 네이멍구 자치구는 ‘자치구 폐지 논의’ 가 나온 적이 없다.
조선족 인구 감소의 가장 큰 원인으로는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일자리를 찾아 한국으로
많이 이주한 것이 꼽힌다. 한중 수교 이후 한국 체류 조선족은 꾸준히 증가해 2020년
1월 기준 70만 8000명에 달한다. 한국에 살고 있는 외국인 약 236만 명 가운데 3분
의 1 가량이 조선족이다. 한국 거주 조선족이 옌볜 조선족자치주에 사는 조선족보다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