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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강해 제 13장 사울의 첫 번째 실패
백성들의 요구에 따라 세워진 사울 왕에 대한 하나님의 시험이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경고한 전장에 이어 본장은 사울이 하나님의 그 첫 번째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사울은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블레셋을 쳤으나 전황이 불리하게 되자 백성들은 동요하기 시작했고 그것을 수습할 목적으로 번제를 드림으로 제사장의 직무 영역을 침범하는 범죄를 저질렀던 것이다.
당시 사울 왕국은 아직 완전한 국가 조직을 갖추지 못했는데 백성들은 당초 열방과 같은 통치 체제를 갖춘 왕국을 원했지만 오랫동안 자유로운 체제에 익숙했던 백성들은 왕이 있다는 사실 만으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 것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또한 사울 역시 집권 초기이기 때문에 중앙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중앙 집권적 통치 체제를 갖추려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각 지파별 자방 자치제도로 운영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1. 사울의 불신앙적 행위의 배경 (13:1-8절)
사울의 첫 번째 전투는 암몬 왕 나하스와의 전투였고 이제 두 번째 전투로서 블레셋 수비대를 습격한 결과 이스라엘과 블레셋 간에 접전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사울은 40세에 이스라엘 왕이 되었으며 그가 즉위한 후 2년 째 해당하는 때에 비로소 열방과 같은 왕으로서 자신의 직임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정예군 삼천 명을 징발하여 이천 명은 왕의 친위대로 자기 곁에 두고 일천 명은 그의 아들 요나단의 수하에 두어 병력을 운용했다. ‘요나단’이라는 이름은 ‘여호와께서 주셨다.’라는 뜻으로 그는 베냐민 기브아 즉 사울의 고향에 거주하였다. 당시 그 지방에 속하는 게바에 블레셋의 수비대가 있었는데 이는 이스라엘의 주요 거점에 설치한 블레셋의 ‘군사 초소’ 혹은 ‘파견진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스라엘 영토 깊숙이 블레셋의 군영이 있었다는 사실은 당시까지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압제를 받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사울이 군사 삼천 명을 징발하여 남북으로 두 대로 나누고 자신과 왕자 요나단이 지휘를 한 것은 아마도 블레셋의 수비대를 쳐서 이스라엘 영토 내에서 쫓아내려는 계획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매뉴얼에 따라 요나단이 먼저 수비대를 기습 공격하여 전멸시켰다. 이 소식을 접한 블레셋은 대규모 전쟁을 준비했으며 사울 역시 온 이스라엘에 나팔을 불어 군사를 소집했는데 ‘히브리 사람들아 들으라.’고 한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를 ‘히브리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 명칭은 타민족이 이스라엘을 경멸할 때 사용하는 것으로 사울이 이 명칭을 사용한 것은 블레셋의 압제를 받고 있는 자기 민족의 저항심과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려는 것이었다. 블레셋 사람들이 크게 격분하고 전쟁을 준비한 것은 직접적으로는 사울이 자신들의 수비대를 공격했기 때문이지만 그 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이 왕을 세우고 그 왕을 중심으로 군사력을 증대시키며 블레셋에 저항하는 세력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사울은 이 같은 내용을 백성들에게 말하기를 ‘이스라엘의 블레셋 사람들의 가증히 여김이 되었다.’ 즉 ‘미움을 받게 되었다.’고 하여 백성들의 지지와 참전을 호소했던 것이다. 백성들은 사울 왕의 지시에 따라 길갈에 모여 진을 쳤으며 백성들이 기브아가 아닌 길갈에 진을 친 이유는 병력 집결이 용이한 들판이었고, 자신이 왕으로 즉위한 곳으로 백성들의 충성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으며, 블레셋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군사 훈련이 용이했을 것이다.
이때 블레셋 사람들이 전열을 갖추고 진격해 왔는데 병거가 삼만, 마병이 육천, 보병은 바다의 모래 같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이는 블레셋의 분노가 얼마나 컸고 그 반격이 얼마나 거세었는가를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전쟁에서 병거가 마병보다 많은 경우는 없는데 마병이 육천이면 병거는 보통 삼천 이하로 편성하는 것이 상식이다. 어찌되었든지 간에 블레셋의 군대는 벧아웬 동쪽 믹마스에 진을 쳤다.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집인 벧엘이 타락하게 되자 경멸하는 뜻으로 ‘벧아웬’ 즉 ‘사악한 집’으로 불렀다고 한다. 그렇다면 블레셋은 벧엘 동쪽까지 진격했을 것이며 벧엘에서 길갈까지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다. 블레셋의 물리적인 큰 압박에 극도의 심적 고통과 불안을 느낀 이스라엘 백성들은 괴롭고 답답하여 굴과 수풀과 바위틈과 은밀한 곳과 웅덩이에 숨었고, 어떤 사람은 요단강을 건너 길르앗 땅으로 피난을 갔다. 그러나 사울은 전일 사무엘과 약속한 일이 있었으므로 선지자를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길갈에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삼상10:8 너는 나보다 앞서 길갈로 내려가라. 내가 네게로 내려가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리니 내가 네게 가서 행할 것을 가르칠 때까지 칠 일 동안 기다리라.
사울은 칠 일 동안 사무엘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칠 일이 되어도 사무엘이 오지 않자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적군의 공격은 임박했는데 이를 알고 있는 사무엘이 칠 일 동안 한 번도 오지 않았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답답한 일이었다. 백성이 날마다 흩어져가는 것을 본 사울은 더 이상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안절부절 하고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스바 전투 때에 사무엘에 의하여 번제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블레셋 족속들에게 크게 나타났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으며, 이제 약속한 날이 되어도 사무엘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은 막강한 군사력을 소유한 블레셋으로 인한 두려움을 가중시키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2. 사울의 불신앙적 월권행위 (13:9-14절)
사울은 불 신앙적 월권행위를 하였고 이어서 그에 따른 범법 행위를 하였다. 그는 자신의 주도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으며, 이 범죄에 대해 지적을 받자 해명하기에 급급하였고 마침내 사무엘은 그를 정죄하였던 것이다.
사울이 백성들에게 번제와 화목제물을 가져 오게 하고 번제를 드렸는데 이것이 사울이 직접 제사장의 역할을 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제사장을 불러 제사를 드리게 했는지 분명하지 않다. 스미스라는 신학자는 엘리의 증손자 아히멜렉에 의해 제사를 드렸을 것이라고 하나 이 제사 자체가 하나님께 죄를 지은 것이라면 아히멜렉이 후일에 대제사장이 되지 못하였을 것이기 때문에 가당하지가 않다. 사울이 범죄한 것은 두 가지이다.
첫째, 그가 왕으로서 제사장의 직무를 침범하고 거룩한 제사를 임의로 대행했다는 것이다.
둘째, 여호와의 말씀을 무시하고 선지자의 권위를 손상시켰다는 것이다.
사울은 하나님께 드리는 번제와 화목제의 진의와 영적인 의미를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다만 이방인들이 자기들의 신에게 제사하는 것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며 그런 제사는 왕인 자신이 드려도 무방할 것이라는 단편적인 판단을 한 것 같다.
사울이 번제를 필하자 사무엘이 그 자리에 도착했는데 이는 사울이 제사를 드린 때가 사무엘이 오기로 약정된 그 날이 저물기 전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그의 행동이 성급했음을 보여 준다. 그때 사울은 사무엘과의 약속을 굳게 믿고 날이 저물 때까지 기다렸어야 옳은 일이었다. 사울은 사무엘이 나타나자 놀라고 두려운 마음에 그를 문안했는데 ‘문안하다’라는 말은 ‘축복하다’라는 뜻의 엄숙한 단어이다. 사울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세 가지 변명을 늘어놓았다.
첫째, 이스라엘의 군사들이 흩어졌다는 것이다.
둘째, 사무엘의 도착 시간이 지연되었다는 것이다.
셋째, 블레셋 군대의 공격 가능성이다.
사울은 당시 상황이 긴박하게 전개되어 부득이 자신이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고 변명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본주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지 신본주의 신앙은 아닌 것이다. 사울의 변명은 오히려 자신의 믿음이 부족한 것과 선지자를 끝까지 신뢰하지 못한 결과에서 나온 것이었다. 사울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었다면 그는 큰 전쟁에 임하기 전에 여호와의 선지자 사무엘을 끝까지 기다려야 하며 그를 통하여 여호와의 은총을 간구해야 하는 것이다.
사울은 블레셋 군대가 길갈로 공격해올 것을 예측하고 전쟁에 임할 준비를 하는 중에 자신이 여호와의 은혜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다고 했다. 이 말을 직역하면 ‘여호와의 얼굴을 뵙지 못했다.’인데 그는 이방인의 왕처럼 자신의 주도 하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 전쟁에서 승리하려고 했던 것이지만, 사실 희생 제사를 드리는 것은 그 전쟁이 성전이라는 것과 그 성전의 신적 합법성을 하나님께로부터 승인받기 위함이다. 쉽게 말하면 사울이 신을 힘입어 승전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주도하셔서 승리로 이끌어달라고 하는 것이다.
사무엘의 책망은 두 가지이다.
첫째, 사울이 망령된 행위를 행했다는 것이다.
‘망령되다’라는 말 ‘사칼’은 ‘어리석다.’ ‘악하다’라는 뜻으로 매우 어리석고 사악한 범죄를 가리킨다. 특히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침해한 범죄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다.
둘째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린 명령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명령’은 율법이나 규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정치적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은혜로 세워진 왕이 지켜야 했던 직무의 한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울은 성전에 관한 한 선지자 사무엘의 절대적 지도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전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울은 급박한 상황을 이유로 이 원리를 지키지 아니하였고 바로 그것이 여호와의 명령을 어기고 무시한 망령된 행위였던 것이다. 사울 왕조는 언약에 근거한 조건적 바탕 위에 세워졌다.
*삼상12:24-25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 만일 너희가 여전히 악을 행하면 너희와 너희 왕이 다 멸망하리라.
사울은 여호와를 향한 자신의 행동 여하에 따라 자신의 왕권을 자신의 후손들에게 계속 이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김으로 그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는 책망을 받았는데 이는 그의 생전에 왕권이 취소될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사울의 왕권이 당대에 끝날 것이라는 예고이다. 한편 사울의 왕권이 그가 죽기 전에 끝날 것이라는 선언은 그의 결정적인 두 번째의 실수 뒤에 나타난다. 즉 사울이 아말렉과 전투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기 때문에 결정적인 선언이 선포된 것이다. 사울은 사무엘을 통한 하나님의 생생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끝내 왕을 요구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왕정제도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누구보다도 철저히 깨닫고 실천해야만 했다. 그는 백성의 요구대로 열방과 같은 왕이 되어서는 안 되며 오직 하나님의 요구대로 그 뜻을 구현하는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투라는 중요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백성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열방의 왕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왕권을 성결하게 하기 위해 사울의 거역 행위를 엄히 문책하신 것이지만 사울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는 결코 불변적이고 결정적인 것이 아니었다. 사무엘을 통한 징계를 받은 후에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했더라면 그의 왕권을 오래 연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징계를 받은 후 사울은 더욱 강퍅하게 되어 스스로 자신의 왕권을 단축시키고 말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울을 대신할 사람 즉 하나님의 미음에 합당한 사람을 준비하셨는데 이 왕은 열방의 왕과 대조되는 신정 왕국의 왕이었다. 여기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이란 다윗을 지칭한다. ‘그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고 하는 말은 과거 완료형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중에는 이미 다윗을 왕으로 세우기로 작정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3. 사울의 전력 상황 (13:15-23절)
블레셋의 군대는 병력이나 장비 면에서 이스라엘을 압도하고 있었다. 사울은 왕이 되어 상비군을 두는 혁신적인 국방 정책을 도입했지만 그 수는 고작 보병 3개 부대에 지나지 않았다. 반면에 블레셋은 수많은 군사력과 전차와 기마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사무엘은 사울을 떠나 기브아 성으로 올라갔는데 기브아는 당시 이스라엘의 정치적 수도였다. 사무엘은 백성들을 격려학고 블레셋과의 전투에 대해 조언하기 위해 수도를 방문하였던 것이다. 사무엘이 떠난 후 사울은 군대를 점고했는데 백성들의 숫자가 육백 병 가량이었다. 이는 사울과 함께 했던 이천 명에서 상당히 줄어든 숫자로서 사울의 성급한 제사가 별로 실효를 거두지 못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사울은 육백 명의 자신의 군대를 베냐민 게바에 있는 요나단의 군대와 통합하여 전열을 정비하였는데, 그곳으로부터 협곡 길로 약 2km 지점에 있는 믹마스에는 블레셋 군대가 진을 치고 있었다. 사울과 요나단 부대는 협소한 지리적 특성을 이용하여 블레셋 군대와 대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블레셋 군대는 삼 대로 나누어서 자신들의 막강한 군사력으로 이스라엘을 단숨에 격파하기 위하여 진격하였다.
첫 부대는 자신들의 진영에서 북쪽으로 진격하여 벧엘 북동쪽 약 7km 지점인 오브라 길을 따라 수알 땅에 진을 쳤는데 이곳은 넓은 지역으로 사울의 부친이 암나귀를 찾기 위해 헤매던 지역 중의 하나이다.
둘째 부대는 벧호론 길로 향했는데 믹마스 서쪽 약 16km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여호수아가 공격한 ‘윗벧호론’과 동일 지역이다. 블레셋 군대는 여기서 사무엘의 고향 라마를 공격하여 많은 피해를 입혔을 것으로 추측된다.
셋째 부대는 믹마스 남쪽으로 향했는데 스보임 골짜기가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갔다. 이곳은 예루살렘 북동쪽을 가리킨다.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 거주할 때에 쇠를 다루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애굽은 세계에서 철을 가장 잘 다루는 민족이었기 때문에 철기문화가 상당히 발달되어 있었고 이스라엘은 그곳에서 노동을 했던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 땅에는 많은 철광석이 묻혀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안 블레셋 사람들은 철 독점 정책에 의하여 농기구 외에는 어떤 무기도 이스라엘 땅에서 만들 수 없게 하였고 이스라엘의 철공들은 모두 블레셋으로 압송하여 갔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군대는 철로 만든 무기가 없었으며 단지 암몬과의 전투에서 노략한 누기들, 블레셋 수비대를 쳐서 얻은 무기들만 있었을 것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 농부들이 농기구를 수리하거나 벼리려고 할 때에 블레셋에 와서 수리하게 했으므로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자신들에게 예속시켰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손에는 칼이나 창이 없게 하였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철갑을 입고 무기로 중무장한 블레셋 사람들을 크게 두려워하였다. 반면에 블레셋 사람들은 농기구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이스라엘 군대를 우습게 여겼던 것이다.
블레셋 군대는 세 부대를 보내고도 남아 있는 부대 병력으로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위하여 믹마스 어귀에 부대를 집결시켰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을 얕보고 우습게 여긴 경솔한 행동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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