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을 종주하고 백두대간을 누비고 다니는 산꾼은 되지 못하지만
나는 산이 좋다
아마도 유년시절 진달래가 타는 듯이 피어나던 고향의 붉은 산을
봄바람처럼 휘저어 다니던 기억이나
내 의중은 조금도 반영되지 않은 결혼에 비구승이나 되어 버리겠다며
엄마의 부아를 지르고 산 속의 작은 암자를 찾아 가던 날
부드럽게 흐르던 안개 숲의 기억이 잠재되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30 여년 간의 새벽밥 짓는 일에서 벗어나 고즈녁히 동네의 뒷산을 걷다보면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설치미술같은 거미줄이나
해거름녁에 바쁜 한쌍의 노랑나비를 지켜보는 일
갈잎에 내려앉던 첫눈의 은밀한 바스락거림에 귀 기울이며
"요정의 발자욱 소리 같아...... "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감성에 잠기는 일들이 어찌 그리 편안함으로 와 닿던지....
마음도 눈길도 주지 않았던 작은 일들을 산길에서 만나면서
그 작은 일들로 해서 내 가슴이 얼마나 따뜻해지는가에 놀라며
산길에서 얻게 되는 작은 위안들이 소중하게 다가왔다
나는 자주 혼자 산을 찾는다
그리고 산이 품은 뜻을 헤아리며 자신을 돌아본다
한발 한발 산을 오르며
편견의 옹졸함에서 벗어나는 법을 배우고
나이에 맞는 진중함과 생을 관조할 줄 아는 여유를 배우며
인내의 참뜻과
내 경험이나 사고(思考) 의 범주(範疇)를 넘어선 진정한 이해란 것에 대해 생각한다
바람을 조금만 쐬어도 감기로 고생하던 몸이
살을 에는 팔공산 동봉의 설한풍(雪寒風)을 즐기고
낮은 오르막 길에도 가쁜 숨을 몰아쉬던 가슴은
웬만한 높이의 산을 올라서는 이제 그리 힘들지 않음은
내가 산을 사랑하므로 하여 얻은 산의 은혜이다
나에게 있어 산은 오즈의 마법의 숲이다
우기에 무성한 청태에 미끌어져 부어 오른 발목으로 오래고생 했을 때나
어두워져 가는 산길에서 일행을 따라 붙지 못해 애태웠을 때는
" 다시는 산에 안 올거야.... "하고 혼자 야무진 다짐을 두지만
더욱 힘들었던 산행에서 돌아 와 보면
사자의 용기와 마음을 얻은 허수아비처럼 기쁘다
준엄하고 비단에 수 를 놓은 것 같은 산이 아니어도
모든 산은 숭고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나름대로 아름답다
이제 내 생의 나머지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을 것이고
나는 그 시간들을
내 눈과 마음에 담았던
산을 닮은 아름다움으로 채울 수 있기를 소망한다
첫댓글 수준높은글에 답글 달기도 넘 조심스럽네요.시간이 여유로울때 다시 한번 읽어 볼께요.고맙습니다.
오랜만에 가슴에젖는 격조높은글 읽고갑니다
저도 산행을 하면서 나 자신보다 남을 생각하는 마음을 배웠습니다
아름다운 글이군요 많은 생각을 떠올리며 감미롭게 읽었습니다.
지리산이나 백두대간을 종주하지는 않으셨지만 틀림없는 산 메니아십니다. 산 메니아 답게 산을 좋아하는 찬미의 아름다운 글에 한참 머물다 감니다. 건필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