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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경 9회차 특강 - 사랑을 회복하는 과정
왕자 마인드셋
불자의 마인드셋은 독특합니다. 올바른 마음가짐을 기본적으로 지니지 않는다면, 온 삶을 걸고 수행하는 깨침의 길에 도전하는 것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것 모두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마인드셋>의 저자는 마인드셋을 연구하기 시작했던 문제의식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왜 어떤 사람은 아무리 어려운 일에도 기꺼이 도전하는 반면, 자신의 안전지대에서 벗어나지 않고 그저 머무르려는 사람도 있는 걸까? 왜 어떤 사람은 실패를 딛고 올라서는데, 어떤 사람은 실패를 겪으면 포기하고 주저앉아 버리는 걸까?"
스탠퍼드를 중심으로 연구가 시작된 이 마인드셋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고정 마인드셋과 성장 마인드셋입니다. 고정 마인드셋은 발전할 수 없다는 마음가짐이고, 성장 마인드셋은 이와 반대입니다. 요약하면 이 마인드셋은 윗단이 어디까지 열려 있는지를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당연히 수행자는 성장 마인드셋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장과 발전의 최종 목적지에 해당되는 인간완성의 열반의 길을 걷기로 결정한 이가 고정 마인드셋을 가지고 있을리 없으니까요. 다만 성장 마인드셋을 다시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윗단의 잠재력이 아니라 기반이 되는 정체성을 기준으로 나누는 것으로 거지 마인드셋과 왕자 마인드셋입니다. 이는 <묘법연화경>의 장자궁자의 비유를 모티브로 삼은 용어 선택입니다.
거지와 왕자 마인드셋은 미래가 아닌 현재를 바라봅니다. 모든 수행자는 당연히 미래에 올바른 노력을 통해 성불이 가능함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 시작점에 해당되는 현상태를 거지와 왕자 중 무엇으로 볼지에 따라 마음가짐이 달라집니다. 거지라면? 항상 부족하기에 얻으려 할 것이고, 왕자라면? 이미 충분하기에 얻는 것이 아닌 되찾으려는 태도를 가지게 됩니다. 이 둘은 안심과 수행의 효율에 엄청난 차이를 불러옵니다.
세 가지 수준의 사랑
사랑은 감정이 아닌 태도입니다. 물론 이성에 대한 감정도 포함되지만, 이는 사랑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기에 이를 전부라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님의 사랑수업>에서는 사랑을 경애의 태도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태도와 아끼는 태도가 곧 사랑이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경애의 태도는 불교의 자비심과 맞닿아 있습니다.
자비심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됩니다. 중생연자비, 법연자비, 무연자비입니다. 먼저 중생연자비심이란 "중생을 인연하여 생기는 자비심"입니다. 이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사랑과 유사합니다. 가족이라는 중생들을 인연하면 자비심이 일어납니다. 마음에 쏙 드는 이성이라는 중생을 봐도 자비심이 일어납니다. 심지어 선호하는 애완동물이라는 중생을 인연하여 자비심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이 중생연자비는 흔히 '중생'의 의식수준에 머무르는 존재의 자비심입니다. 이는 업연에 따른 호불호의 차별적 자비심이고, 조건부 사랑이라고 표현합니다. 악연으로 엮인 존재는 첫인상부터 혐오할 수도 있습니다. 더불어 선연으로 엮인 이들조차도 상황상황마다 마음에 들지 않게 굴면 자비심이 사라지고 분노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수 많은 중생들은 고정 마인드셋에 묶여 있거나, 거지 마인드셋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조건부로 사랑의 태도를 가질 수 밖에 없고, 사랑을 주기보다는 받기를 바라는 애정결핍에 시달리기 때문에 자비심이 약하기 마련입니다.
보살이라는 존재는 일체중생을 구하겠다는 서원의 실천을 바탕으로 성불하기를 희망합니다. 이것이 보살의 '성불법'입니다. 비록 현재의 의식이 중생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고 하더라도 보살은 성불을 위해 중생에 대한 차별없이 자비심을 일으키는 수행을 약속했습니다. 그렇기에 보살의 자비심은 "법을 인연하여 생기는 자비심"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법연자비심은 왕자 마인드셋을 지니고 있을 때 자연스럽게 실천 가능합니다. 여전히 거지 마인드셋에 머무르고 있다면 스스로 거지처럼 가진 것이 없기에 베풀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착각에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조건부로 중생을 인연하여 자비심을 일으키는 수준을 넘어, 차별없이 일체중생을 사랑하는 태도를 지니려고 하는 법연자비심을 갈고 닦아 완성에 이르르면 바로 부처님의 자비심인 무연자비가 생겨납니다. 무연자비란 마음의 기본적인 상태가 무조건적 자비심이 되었기 때문에 자비심에 아무런 인연이 필요 없다는 뜻입니다. 중생의 기본적 마음 상태가 탐진치의 삼독심으로 인한 애정결핍인 것과 180도 달라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완전한 사랑이고 자비심입니다, 크리스찬은 이를 아가페적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중생연자비의 특징
존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중생들에게 있어 무조건적인 사랑은 환상에 불과합니다. 그렇기에 사랑은 무조건 차별적인 것입니다. 이러한 명료한 구분이 없을 때, 사랑을 오해하고 사람에 대해 과한 기대를 하여 문제를 발생시키기 마련입니다. <자존감 수업>의 저자의 신간 <사랑수업>에서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사랑의 특징을 양가감정과 이중성 그리고 양방향성의 세 가지로 표현합니다. 이 중 양가감정에 대한 설명을 살펴보겠습니다.
"양가감정이란 대상이나 상황에 대해 서로 반대되는 두 감정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같은 상황, 같은 사람을 두고도 두 극단의 감정이 생길 수 있다. 가령 좋으면서도 너무 밉고, 가까이 두고 싶지만 두렵고, 사랑하지만 그만큼 증오나 원망도 하게 되는 것. 이러한 양가감정은 다루기가 무척 까다로운데 사랑을 하면 더 자주, 더 크게 찾아온다."
중생의 마음가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탐진치의 삼독심에 물들어 있음으로 인해 스스로를 거지로 보는 상태"
탐진치로 물든 마음이 사랑을 한다면 어떤 모양이 나올까요? 당연히 양가감정이 생기지 않을까요? 경애하는 마음이 분명 존재하지만 동시에 상대에 대한 탐욕과 분노의 집착으로 인해 반대에 해당되는 부정적 마음을 품게 될 것입니다. 이런 양가감정은 사랑이 깊어질수록 더욱 심각해집니다. 그 이유는 중생연자비심은 항상 집착과 함께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연애를 시작한 청년들에게 항상 해주는 조언이 한 마디 있습니다.
"집착을 바탕으로 한 사랑은 폭력으로 변질된다."
이성간의 연애가 자비심을 연습하는데 있어 큰 도움이 되는 이유는 첫째, 사랑과 동시에 집착이 생겨나는 마음의 특징을 직접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 속에서 높은 수준의 사랑에 이르고 싶다면 스스로의 집착을 다스리는 연습이 필연적이기 때문입니다.
중생의 사랑에는 중생연자비심의 잣대를 들이대야 합니다. 보살과 부처님의 사랑의 기준을 혼용하는 순간, 참으로 폭력적이고 비현실적인 사랑을 요구하기 마련입니다. <사랑수업>에서는 이를 사랑에 대한 '신화'라고 표현하며 다음의 세 가지 오해로 소개했습니다.
"사랑한다면 무조건 믿어야 한다? 사랑한다면 모든 것을 이해해달라고? 사랑한다면 이심전심이어야 한다?"
사랑하는 대상이 중생이라면 무조건 믿을 수 없습니다. 더불어 사랑의 주체도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못합니다. 마지막으로 표현하지 않으면 모릅니다. 이는 보살 중에서도 수행이 원숙해진 대보살들의 능력입니다. 수행자들 중에서도 타심통이 열린 위대한 존재들의 영역입니다. 사랑한다는 말로 위장하여 상대방에게 말도 안되는 기준을 요구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폭력입니다.
건강한 중생연자비심을 위한 두 가지 선결과제
평범한 이들의 사랑인 중생연자비심은 분명히 조건부사랑입니다. 이 조건부사랑이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조건을 갖추면 됩니다! 조건을 갖추기 위한 노력도 없이 무작정 사랑을 달라고 우기는 사람에게 질리는 것은 범부에게 있어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두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첫째는 평등한 관계입니다. 평등은 무엇으로 이루어질까요? 희망과 말 그리고 약속으로 평등이 가능할까요? 아닙니다! 평등은 오직 주고 받는 거래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조건부라는 의미는 주고 받는 것의 비율 즉, 인과율의 저울 위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저울이 한쪽으로 기울어 일방적으로 양보하기 시작하면 관계는 병들기 시작합니다. 일시적으로는 이런 관계도 유지될 수 있지만, 병들어 버린 마음에게 양보가 소화하기 어려울만큼 커지면 관계는 끝이 납니다.
두번째 조건은 쌍방 모두의 어른스러움을 위한 노력입니다. <어른수업>에서는 온전한 어른의 지표를 세 가지 제시합니다. 육체의 직립과 심리적 자립 그리고 경제적 독립인데, 이 세 가지는 전부 탈의존성이라는 하나의 결과로 귀결됩니다.
상대방에게 육체적, 심리적,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면, 이것은 어른스럽지 못한 것입니다. 이렇게 질척대는 행태가 이어진다면 첫번째 조건인 평등에 위배됩니다. 만약 현재의 상황이 의존성을 가지고 있다면, 최소한 탈의존성을 위해 노력이라도 해야 합니다. 물론 참는 시간에도 한계가 있기에, 노력만이 아닌 결과물도 보여줘야 합니다.
건강한 법연자비심을 위한 단 하나 - 확신
불보살의 자비심은 매우 비정상적입니다. 정상이라는 것이 결국 보편적인 것을 의미하기에, 극소수만 지닐 수 있는 법연자비와 무연자비심은 외눈박이 나라에서 두 눈을 가진 돌연변이에 해당됩니다. 중생연자비심이 조건의 평등을 통해 건강해질 수 있다면 법연자비심은 어떻게 건강해질 수 있을까요? <묘법연화경>에는 상불경보살의 법연자비심 수행이 이렇게 묘사됩니다.
"이 비구는 여러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를 보면 그들을 예배하고 찬탄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느니라. '나는 그대들을 깊이 존경하고 감히 가볍게 보거나 업신여기지 않노라. 왜냐하면 그대들은 모두 보살도를 행하여 반드시 부처님이 되실 분들이기 때문이라.'"
상불경보살은 당연히 왕자의 성장 마인드셋을 지니고 있습니다. 특이한 점은 이 마인드셋이 밖을 향해서도 적극적으로 적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체중생은 불성을 지니고 있는 고귀한 법왕자'라는 법을 인연하여 차별적 개성을 지니고 있는 모든 중생을 무차별적으로 존경하고 아끼는 태도를 지닙니다. 상불경보살이 모든 이를 향해 수희찬탄하는 법연자비심은 아무런 조건이 필요 없습니다. 그가 의지하는 것은 단 하나 일체중생이 불성을 지니고 있다는 진리에 대한 확신 뿐입니다.
상불경보살이 일체중생을 존중하는 이런 태도의 근거가 되는 진리가 과연 <묘법연화경> 속에만 있을까요? 아니 불교에만 존재하는 사상인가요? 아닙니다! <세계인권선언문> 제1조를 소개하겠습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그 존엄과 권리에 있어 동등하다. 인간은 천부적으로 이성과 양심을 부여받았으며 서로 형제애의 정신으로 행동하여야 한다."
인간은 선험적으로 고귀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진리를 추구하는 모든 철학과 종교에서 공통으로 지니고 있는 관점 중 하나입니다. 이 평등한 신성과 불성에 주목을 할지, 현상으로 드러난 장단의 차별적 모습에 주목을 할지에 따라 그 자비심의 여부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겉모습에 주목하는 범부들의 경우 조건부사랑이 일어나는 것이고, 진리를 꿰뚫어 알기 위해 노력하는 보살들은 불성의 관점을 지녔기에 무조건적인 사랑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법연자비심은 중생연자비심에서 붓다의 무연자비심으로 나아가기 위한 교량 역할을 하기에 매우 중요합니다. 법연자비심은 일시적으로 흉내내는 것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위선이 위선에서 끝나면 지속이 불가능합니다.
위선의 근거가 되는 법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위선의 뿌리를 튼튼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법의 관점을 확고하게 다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진실한 시간 투자를 통해 관점이 차별에서 평등으로 바뀐다면 위선을 초월하여 법연자비심을 활용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건강한 법연자비심은 오직 법에 대한 공부와 실천을 통한 확신을 먹고 자라납니다.
무연자비심의 무조건적 자비심
"너무 착하게만 굴면 호구된다?!"
중생의 마음은 기반이 고귀한 불성이라고 하더라도 표면의 활동은 탐진치의 흐름에 지배당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모든 중생심은 이중적인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법연자비심에 대한 반응도 이중적입니다. 누군가는 감동 받아 찬탄을 할 것이고, 반대로 호구라고 판단하여 이용하기도 하며, 화를 내며 해를 끼치기도 할 것입니다. <묘법연화경>의 내용을 보면 상불경보살 역시 마찬가지의 상황에 놓입니다.
"사부대중 가운데 화를 잘 내고 마음이 깨끗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가 악한 말로 욕설하기도 하고...(중략)...몽둥이로 치거나 때리며 기와와 돌은 던지기까지 했다."
<묘법연화경>은 일체중생이 모두 법왕자로써 이미 성불의 길을 걷고 있음을 천명했습니다. 이 진실을 듣게 된 청중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습니다. 심지어 성문제자들 중 일부는 법회 자리를 박차고 떠나버리기까지 하는 모습이 묘사됩니다. 도대체 그들은 왜 왕자의 성장 마인드셋을 받아들이지 못할까요? 거지 마인드셋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집착하고 있는 것이 부정 당할 때 사람들은 거부감과 분노를 느끼기 마련입니다. 상불경보살의 찬탄을 듣게 된 이들 중 거지 마인드셋을 지닌 이들은 이처럼 거부와 분노를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불경보살은 유연하게 대처하며 그들의 단단하게 굳어버린 고집을 두드립니다.
"기와와 돌을 던지면 상불경은 멀리 피해 달아나면서 오히려 더 큰 소리로 되치기를 '나는 그대들을 업신여기거나 가볍게 보지 않노라. 그대들은 반드시 부처님이 되실 분들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느니라."
불성법에 대한 확신을 지닌 이는 오직 이 관점에 의지할 뿐입니다. 어떤 차별적인 모습을 보이더라도 겉모습에 현혹되지 않습니다. 내면의 법왕자를 주목합니다. 미래의 법왕이 되실 모두의 자성불에 귀의합니다. 이렇게 조건이 아닌 법에 의지하여 자비심을 갈고 닦습니다. 그럼 언젠가는 마음의 기본 모드가 탐진치가 아닌 자비심으로 바뀌는 순간이 옵니다. 이것이 진정한 무조건적 자비심인 것입니다.
붓다의 자비심은 탐진치와 자비심의 길고 길었던 줄다리기의 승패가 결정된 결과물입니다. 승리한 자비심은 더 이상 중생이라는 인연과 법이라는 인연도 필요가 없어집니다. 자비심을 일으키는데 필요한 것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붓다들의 동창회에 참석하여 탐진치의 마음을 일으키라고 종용하려면, 강력한 조건이 필요할 것입니다. 마치 중생에게 불보살의 자비심을 일으키라고 요구하는 것이 어렵듯이.
중생은 조건이 맞으면 사랑합니다. 보살은 진리에 대한 확신으로 모두를 사랑합니다. 이 자비심이 완성되면 무조건 사랑하게 됩니다. 일체중생을 그리고 온 세상을 그저 사랑하게 됩니다. 이것이 감정이 아닌 태도 그리고 존재 방식으로써의 사랑입니다. 그거 아세요? 사람이라는 말도 사랑에서 변화했다는 의견이 있다는 것. 만약 그렇다면 이 사랑을 연습하는 과정은 사람의 본래 모습을 회복하는 과정일 뿐입니다. 사랑으로 존재할 때 사람은 안락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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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일체중생이 모두 법왕자로써 이미 성불의 길을 걷고 있다.
왜 나는 왕자의 성장마인드 셋을 받아들이지 못할까요?
정사유 하겠습니다. 스님
잘 읽었습니다. 내용 올려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성장 마인드셋을 넘어 왕자 마인드셋을 실천하기 위한 보살의 사랑~~가능할까?를 의심하는 것 또한 고정마인드셋임을 압니다.
하지만, 이미 매 순간순간 내 식대로 판단하고 범주화시키는 분별의 괴물이 되어 있고, 특히 존중받지 못했다고 느껴질때, 무시 당할때는 지금은 상대방을 경애하기는 힘든것 같습니다ㅠㅠ.
중생연자비심(조건부사랑)의 3가지 특징에 관한 내용도 인상적입니다.
감사합니다.스님_()()()_
성장마인드에 역행하는 거지마인드셋이 먼저 솟아나곤 합니다.
자신을 돌아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