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다시 한반도 침략 야욕을 드러낸다면 두 번이 아니라 열 번이라도 나서 싸워야지요."
안동 권씨 부정공파 대곡문중(안동시 남후면 검암리)의 종손인 권대용(66) 씨. 광복절을 맞은 그는 자신의 할아버지인 항일순국지사 추산 권기일(1886~1920) 선생의 초상화를 안고 최근 우경화의 길을 걷고 있는 일본을 향해 다시 한 번 강한 투지를 불태웠다.
권 씨 문중의 종손은 두 차례나 목숨을 던져 일본과 싸웠다. 그때마다 끊긴 종가의 대를 차남이 이어왔다. 일제 침탈 시 종손 권기일은 만주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항일투쟁에 나섰고, 임진왜란 당시엔 종손 권전(1549~1598)이 이순신 휘하의 장수로 해전에 참전, 왜군을 바다에 수장시켰다.
안동시 풍산읍 막곡리 권전의 묘소에 있는 비문에 따르면 권전은 조선 중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마애 권예의 맏손자로 선조 15년(1582년) 무과(武科)에 급제, 1592년 임진왜란 발발 후 삼도수군통제사인 이순신 장군의 휘하로 들어가 만호라는 벼슬을 받고 판옥선 함장에 임명돼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는 데 나섰다. 조선 수군의 선봉장으로 용맹을 떨친 그는 해전마다 혁혁한 전과를 올렸고, 아장(亞將`준장군)이 돼 이순신 장군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면서 조선 수군의 전략과 전술을 창의적으로 개발하고 수하 장수들의 선임으로 활약했다. 1598년 노량해전에 나서 왜군 전함 500여 척을 격파, 승전으로 이끌었지만 결국 장군과 함께 장렬히 전사했다.
임진왜란 후 300여 년이 흐른 뒤 다시 문중 종손이 항일투쟁에 뛰어든다. 1910년 일제가 군사력을 앞세워 조선을 강점하자 권기일은 전답과 1천 석에 이르는 종갓집 재산을 팔아 독립운동에 필요한 군자금을 마련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11년 3월, 식솔들을 이끌고 만주로 건너가 만주 통화현에서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을 도와 독립군 양성소인 신흥무관학교 설립자금을 대고 본격적인 항일 무장투쟁에 나선다.
이곳에서 훈련된 약 3천여 명의 독립군은 훗날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하는 등 독립운동 청사에 길이 빛나는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된다. 전투에 대패한 일본군이 독립군의 본거지인 신흥무관학교를 보복 습격할 당시 1920년 신흥무관학교를 홀로 지키면서 일본군과 싸우다 순국했다. 임진왜란 때 활약했던 권전은 권기일의 13대 종조부이다.
종손 권대용 씨는 가슴 한쪽이 시리다. "한 분은 동짓달 차가운 경남 남해 노량 바다 물속에서, 한 분은 살을 에는 듯한 동토의 만주 통화현에서 호국영령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집안에서는 두 분 다 시신을 거두지 못해 한이 맺혀 있습니다. 그럼에도 다시 나라가 위급한 상황에 처한다면 열 번이라도 다시 싸울 준비를 해야 합니다. 바로 이 준비가 제가 죽기 전 꼭 해야 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