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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조지훈 문학동산 원문보기 글쓴이: 曉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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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의 민족운동사 인식과 동학관
김기승*1)
Ⅰ. 머리말
시인 조지훈(1920-1968)은 전 생애에 걸쳐 민족이 당면한 현실에 대
해 고민하면서 민족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지적 탐색을 멈추지 않았
던 실천적 지성이었다. 특히 그는 일제 식민지 시기에는 일제와 타협
하지 않고 저항적 자세를 견지하면서 민족문화운동에 헌신했고, 해방
이후에는 공산주의에 반대하고 독재정권에 저항하면서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실천하고자 했다. 그는 일제 식민 통치, 해방 정국, 6.25 전쟁,
4.19 혁명, 5.16 군사정변 등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한 고비에서 주저
함이 없이 자신의 소신을 밝혔고, 그 소신에 따라 분명한 행동을 취하
였다. 그는 언행이 일치했던 선비형 지식인이었다. 또한 그는 지조를
지키면서 잘못된 정치 현실을 비판하고 민족의 올바른 진로를 제시하
고자 했던 비판적 지성이기도 했다.
조지훈의 삶과 사상은 민족해방운동에서의 문화적 민족운동, 해방
이후 민족주의 계열의 국가건설운동, 그리고 그 이후의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대변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참여하거나 지지했던 정치노선의
*순천향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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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적 토대를 구축하고자 했고, 그 이념을 문화운동의 방식으로 실천
하고자 했다. 그의 말과 행동은 한국 현대사의 방향과 과제에 대한 뚜
렷한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조지훈은 시인이면서도 1964년 한
국민족운동사라는 주목할 만한 역사서를 저술했다.1) 한국민족운동
사는 1884년 갑신정변부터 1945년 8.15 해방까지 60년 동안 한국의
근대 민족운동이 어떻게 발전되었는가를 서술한 역사서이다. 그의 민
족운동사 서술은 해방 이후부터 자신이 살고 있는 당대까지를 포함한
역사 서술로 계속될 예정이었다. 그는 해방 이후의 ‘반탁운동, 반공운
동, 반독재운동’에 관한 역사를 후속 작업으로 구상하고 있었다.2) 한
국 근·현대 민족운동사 서술에 대한 그의 관심은 자신의 당대에 살고
있는 당대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관련되어 있었다. 이 점에서
한국민족운동사는 비판적 지성 조지훈의 실천적 역사 의식이 반영
된 저술이라고 할 수 있다.
조지훈의 한국민족운동사에 대해서는 이미 학계에서도 그 의의
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것은 독립운동사와 관련하여 새로운 사실
을 발굴하고, 독립운동사 인식 방법론을 체계화했으며, 독립운동의 발
전 논리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독립운동사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 저술
로 평가받고 있다.
인권환은 한국민족운동사의 연구사적 의의를 높이 평가했다. 그
는 첫째 풍부한 자료를 구사한 체계적 저술이라는 점, 둘째 사건 나열
과 자료 정리를 넘어선 사상사적 흐름을 파악한 본격적 저술이라는
점, 셋째 3.1운동 이후의 독립운동 사실을 새롭게 밝힌 점, 넷째 사회·
1) 조지훈, 한국문화사대계 1-민족.국가사, 한국민족운동사, 고려대학교 민족
문화연구소, 1964; 조지훈의 한국민족운동사는 조지훈 전집6, 나남출판,
1996에 수록되어 있는데, 본고에서 사용한 이 전집에 수록된 한국민족운동
사를 참고하였다.[이하 한국민족운동사로 약칭함]
2) 조지훈, 한국민족운동사, 3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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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운동사 분야를 새롭게 개척한 점, 다섯째 종래의 국외·개인·자가
노선 중심에서 국내·집단운동·민족 노선 중심으로 새롭게 파악한 점,
여섯째 종래의 오류를 시정하고 객관적 사관을 견지한 점 등 6가지를
제시하였다.3) 그의 평가는 조지훈이 추구했던 목적과 서술 방법의 특
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민족운동사
가 1950, 60년대의 다른 독립운동사와 차별화되는 점에 주목한 평가로
서, 독립운동사 연구의 새로운 단계를 개척한 업적임을 강조하는 견해
이다.
강만길은 한국민족운동사를 서술 배경, 서술 방법, 민족운동관 3
부분으로 나누어 구체적으로 검토하였다.4) 먼저 서술 배경에 대해서
는 조지훈이 민족주의적 환경에서 성장한 뚜렷한 역사 감각을 지닌
시인이었음을 지적했다. 그리고 민족운동사 서술에 필요한 유용한 자
료, 즉 고등경찰요사를 갖고 있었음을 밝혔다.5) 다음으로 한국민
족운동사의 「머리말」에 따라 서술 방법을 4가지로 정리하면서, 그 중
2가지 방법이 지닌 의미와 한계성을 지적했다. 첫째 사회주의운동을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파악한 것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민족연합전선운동의 성격에 대한 적극적 이해가 부족한 아쉬움이 있
다고 했다. 둘째 민족운동사를 국내와 집단 중심으로 객관적으로 서
술한 것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지식인 운동에 중점을 두고 민
중운동을 소홀히 한 점은 아쉽다고 했다. 끝으로 민족운동관에 대해
3) 인권환, 「지훈의 학문과 그 업적」, 김종길 외, 조지훈 연구, 고려대학교 출
판부, 1978, 322쪽.
4) 강만길, 「지훈과 <한국민족운동사>」, 김종길 외, 조지훈 연구, 고려대학교
출판부, 1978, 343-351쪽.
5) 해방 직후 조지훈은 고향 영양에서 마을 청년들과 함께 경찰서를 접수했는
데, 이때 경찰서에서 고등경찰요사를 얻었다는 것이다. 이 고등경찰요사
가 한국민족운동사 서술의 기본 자료가 되고, 이를 통해 객관적이고 종합
적인 민족운동사 인식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강만길, 앞의 글, 3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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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는 민족운동을 근대와 전근대로 나누고 또 저항 즉 대일항쟁에 중
점을 두어 명확하게 개념을 규정하고자 한 데 대해서는 높이 평가했
다. 그 결과 민족운동의 대내적 측면, 즉 민중적 성격과 개혁적 측면
에 대해서는 관심이 소홀했던 한계가 있음을 지적했다.
강만길은 독립운동사를 전공한 역사학자의 관점에서 역사 서술 방
법과 인식 체계에 대해 매우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평가를 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강만길의 독립운동을 보는 관점은 1980년대 이후 일반
적인 인식 틀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 점에서 조지훈의 독립운동사 인
식에 대한 강만길의 평가는 현재 역사학계의 관점을 10여 년 전에 미
리 반영했다고 할 수 있다.
김정배는 조지훈의 문화사관을 연구하는 가운데, 한국민족운동사
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6) 우선 그는 조지훈이 역사학자가 아니면서
도 역사학계에서 미개척 분야였던 민족운동사 분야를 자료 나열 수준
의 다른 책과는 달리 편년사적 전개와 사상사적 흐름을 종합하여 체
계화하였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조지훈의 민족운동 사관은
국외보다는 국내 노선을 중시하고 좌익 노선보다는 민족 노선을 옹호
하는 것이었다고 보았다. 그것은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통
성을 올바로 파악한 데서 확인된다고 했다. 그의 평가에서는 조지훈
의 민족운동사 연구를 ‘현실 극복의 다른 길이라고 본 점, 즉 현재적
의의에 대한 지적이 주목된다. 그는 조지훈의 민족운동사 서술이 반
독재 운동의 역사적 근거를 독립운동 연구를 통해 확립하려 한 것으
로 보았다. 그는 조지훈이 “정치인은 아니면서 역사로서 정치의 정도
를 제시하며 정론을 펴나갔던 것”으로 보았다. 즉 민족운동사 서술이
라는 학술적 행위가 현실정치적 함의를 지녔다고 보았다.
이상의 연구는 조지훈의 한국민족운동사는 독립운동사 연구의 새
6) 김정배, 「조지훈의 역사관 연구」, 민족문화연구22, 1989, 107-128쪽.
조지훈의 민족운동사 인식과 동학관 359
로운 경지를 개척한 업적이었음을 공통적으로 확인하고 있다. 그것은
자료와 사실의 확대, 새로운 서술 방법의 채택, 민족운동의 개념과 유
형 분류, 민족운동의 발전 논리 규명 등에서 독립운동사 연구를 한 단
계 발전시켰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 대해서는 재론이 필요없
다.
시인 조지훈은 어린 시절부터 민족운동에 직접적으로 참여했다. 어
려서부터 천도교 소년회가 주도하던 어린이 운동에 접하면서 성장했
다. 그는 천도교 소년회에서 간행한 어린이 정기구독자였으며, 마을
에서 어린이회나 소년회 활동을 하면서 문학잡지를 간행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민족과 사회 의식의 싹을 틔웠다. 청년이 되어서는 조선어
학회 등 민족문화운동에 참여했다. 그리고 해방 직후에는 영양 지역
의 청년 치안대 활동도 하였다. 그리고 우익 민족주의자로서의 적극
적이고 실천적으로 문인들 세계의 정치 투쟁에 열정적으로 참여했고,
6.25 전쟁에서는 반공 전선의 일선에 서서 투쟁하였다. 이러한 실천
지향적 지성의 태도는 4.19와 5.16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그의 활발
한 정치 참여는 현실 정치의 문제를 좀더 구체적이고 실체적 문제로
체험하도록 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한국민족운동사 서술
은 민족운동에 대한 자신의 체험적 인식에 바탕을 두고 집필되었다.
본고에서는 조지훈의 한국 민족운동사에 나타난 민족운동사 인
식 체계를 살펴보면서, 동시에 그의 동학관에도 주목하고자 한다. 민
족운동사 인식과 동학관을 함께 살펴보고자 하는 이유는 조지훈의 민
족주의 사상에서 동학이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1960
년대 조지훈은 민족문화 개념을 체계화하면서 민족 고유사상의 실체
를 상정했고, 이 고유사상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추적
했다. 이 과정에서 동학은 이후 한국적 고유사상의 원형적 특성을 가
장 잘 표현한 사상으로 평가했다. 그리고 근대 민족운동사 연구에서
는 근대민족운동을 추동한 주요한 사회개혁사상으로 높이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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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동학을 ‘한국적 사회 사상의 전형’이라고 평가했다. 따라서 한국
민족운동사와 동학 인식을 함께 살피는 작업은 한국 민족운동의 특수
성에 대한 조지훈의 인식을 살피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Ⅱ. 조지훈의 생애
1. 출생과 성장
조지훈은 1920년 12월 3일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곡동 호은 종택에
서 부친 조헌영과 모친 유노미 사이에서 3남 1녀 중 2남으로 태어났
다. 그의 생일은 양력으로는 1921년 1월 11일이다. 그 자신은 ‘신유
(1921년) 1월 11생’이라고 함으로써 양력 생일을 주로 사용했다.7)
조지훈은 9살인 1929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때 처음 쓴 글이
동요였으며 프로 문학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라고 기억했다. 그가
처음 쓴 글이 한시가 아니라 프로문학적 경향성을 띤 동요였다고 한
다면, 이때 그의 교육 환경은 농민야학 배영학당의 학풍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1932년 13세 이후에는 프로문학에 대해
일찍부터 회의했지만, 소년회 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하고 사회과학 서
적을 탐독했다고 했다.8) 이러한 그의 회고는 그가 어린 나이에 민족
운동의 환경에서 교육받고 성장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의 민족
7) 조지훈 전집의 연보에는 1920년 12월 3일생으로 되어 있다. [조지훈, 조지
훈 전집 1-8(나남출판, 1996)의 「연보」 참조.] 그러나 서익환의 연구에 의하
면, 조지훈 본인과 가족들은 1921년 1월 11일을 생일로 삼았다고 한다.[서익
환, 조지훈 시와 자아·자연의 심연(국학자료원, 1998), 31쪽]. 이러한 생일
의 혼란은 음력과 양력의 차이에 기인하는 것이다.
8) 조지훈, 「나의 역정」, 조지훈 전집 3-문학론, 1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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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 참여는 직접적으로는 부친 조헌영과 형 조동진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조헌영(1899-1988)은 조인석의 차남으로 와세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으며 유학 시 친구의 병을 고치기 위해 독학으로 동의보감을
공부하여 한의사가 되었다. 나아가 그는 토속한의학원론을 비롯한
한의학서를 저술했고, 동양의학과 서양의학을 비교하기도 하는 등 한
의학의 체계화에 공헌하기도 하였다. 조헌영의 형 조근영(1896-1970) 또
한 와세다 대학에 유학했으며, 동생 조준영(1903-1962)은 보성고보를, 조
애영(1911-2000)은 배화여고보를 졸업하였다.9)
조근영, 조헌영 형제는 1920년대 영양 민족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1920년 창립된 영양청년회에서 조근영은 체육부장을 맡았으며, 조헌
영은 1921년 의사부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청년회의 주요 활동은 강연
회 개최, 농민야학 실시 등이었다. 영양청년회는 1925년 가을 영양청
년동맹을 결성했는데, 도박 퇴치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조헌영의 동
생이며 조지훈의 숙부인 조준영은 노동공제회 활동을 주도하였다. 1922
년에 영양에는 노동공제회가 결성되었는데, 결성 장소가 바로 조준영의
집이었다. 이 노동공제회는 1924년까지 지속되었고, 이것이 1925년에는
노동조합으로 발전하였다.
1927년에는 민족운동과 사회운동 진영이 연합하여 신간회를 결성
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에 따라 영양에서도 신간회 지회를 결성하였다.
영양 지역 신간회 결성은 조지훈의 조부 조인석이 중심인물이었다.
1927년 8월 16일 결성된 신간회 영양지회 지회장은 조인석, 간사는 조
석기였다. 1928년에는 조인석이 지회장을 계속 맡았으며 아들 조준영
이 총무로서 가담하였다. 이때 조지훈의 부친 조헌영은 일본에 유학,
와세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있었다. 그는 유학중인 1926년 감
9) 정천구, 「문학과 국학, 지방에서 세계로」, 영양 주실 마을, 172-1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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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에 있는 무정부주의자 박열과 교류했고, 1927년 5월에는 신간회 동
경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신간회 영양지회에서는 향교 철폐운동을
전개하였다.10)
조지훈은 9살인 1929년을 전후해서 신문과 잡지를 읽기 시작했고,
동요를 지었다고 했다. 이때 그가 읽은 잡지는 방정환의 어린이 잡
지였을 것이다. 지훈보다 3살 위인 형 세림 조동진은 6살인 1923년부
터 부친 조헌영의 뜻에 따라 어린이를 정기구독했으며, 1925년부터
는 개벽지도 구독했다. 조동진은 1925년 주실 마을 어린이회를 조직
했는데, 지훈도 6살인 1926년에 이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따라서 조
지훈이 9살 전후에 읽은 잡지는 어린이였고, 여기에 실린 동시나 동
요를 보고 동요를 창작해 보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때 지은 동요
는 ‘프로 동요’라고 했는데, 이는 앞서 주실 마을의 노동운동과 농민운
동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조동진과 조지훈이 참여했던 어린이회는 1930년대 소년회로 이름
을 바꾸었고, 꽃탑이라는 문집을 간행하였다. 이때를 조지훈은 13살
인 1933년으로 회고했다. 이 무렵 그는 「파랑새」, 「피터팬」, 「행복한
왕자」와 같은 동화를 읽으면서 소년회 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했고, 사
회과학 서적을 주워 읽기에 게으르지 않았다고 했다. 이때의 소년회
활동조차도 일제의 감시 대상이 되었고, ‘어린이 날’을 산중에서 비밀
리에 개최한 것이 일제 관헌에게 발각되어 해체되었다. 그는 소년회
가 해산되던 날 소년들과 함께 울었던 기억을 생생하게 기억하였
다.11) 13세 소년이 전개한 생애 최초의 집단적 민족운동이 좌절을 경
험했던 셈이었다.
1936년과 1937년의 시기는 조지훈에게 사상적 전환의 계기가 되었
10) 일제시대 주실 마을의 민족운동에 대해서는 김희곤, 앞의 글, 151-162쪽 참
조.
11) 조지훈, 「나의 역정」, 1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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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16세인 1936년 조지훈은 처음으로 시를 습작하였다. 이때를 그는
사춘기의 방황기였다고 하면서 ‘복자 투성이의 팜플렛을 탐독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팸플릿을 탐독했던 것은 ‘그 흥분과 항쟁의 몽상
이 좋아서였다.’고 했다.12) 1936년 무렵의 팸플릿이라고 한다면 사회
주의운동 관련 문건이라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조지훈이 9살인 1929
년부터 16살인 1936년까지는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이었던 사회
주의 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고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주실 마을의
민족운동은 그러한 사상적 분위기를 형성하기에 족한 것이었다. 그도
소년회 활동을 통해 이른바 운동가로서 교육받고 훈련받으면서 성장
했던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 일제 식민지 교육의 부당성을 깨달아 보
통학교에 진학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일부
사회운동가 사이에서는 부르주아 교육기관에서의 교육을 거부하는 움
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17살인 1937년 조지훈은 처음으로 상경하여 동향 선배인 오일도를
찾아가 시원사에서 머물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조선어학회에 출입
하게 되었고, 사회과학서 대신에 민족문화에 대한 학술서를 읽게 되었
다.13) 16세까지 그가 읽는 책은 주로 사회과학 서적이었으며 사회주
의운동가들이 작성한 팸플릿이었다. 이러한 책들이 그를 흥분시키고
감동시켰는데, 그것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 내용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문학의 경향시에 대해서는 만족하지 못했다.
그러나 1937년 이후에는 사회과학 서적이 아니라 민족문화 관련 서적
을 탐독하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어학회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이
로써 그의 관심과 활동 영역이 사회운동에서부터 민족운동으로 전환
하게 되었던 것이다.
「연보」에 의하면 조지훈은 1934년부터 와세다 대학 통신강의록을
12) 조지훈, 「나의 역정」, 200쪽.
13) 조지훈, 「나의 역정」, 2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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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자습한 것은 와세다 대학 강의록이 아
니라 와세다 중학 강의록이었다. 그가 진학한 혜화전문학교의 학적부
입학 전 학력란에 ‘와세다 중학 강의록 자습’으로 되어 있다. 이 기록
에서 그가 정규교육을 받지 않았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는 1938년 4
월 11일 혜화전문학교 특과에 입학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가 혜화전
문학교에 진학하게 된 것은 불교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기 위함인 것
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주로 문학 작품을 읽거나 한국 문화에 대한 관
심을 가졌던 그가 갑자기 불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그 이유
를 알 수 있는 자료는 발견하지 못했다. 다만 1937년 이후 그의 관심
은 민족문화였는데, 민족문화의 정신적 원천으로 그는 불교를 생각한
것이 아닌가 한다. 아니면 사회운동에 대한 관심에서 민족문화에로
관심을 옮기는 과정에서 자아 정체성 문제가 발생했을 수도 있다.
혜화전문학교는 3년 과정이었는데, 그가 수학한 교육과정을 살펴
보면 1-2학년에서는 <불교학·불교사>, <종교학·종교사>, <윤리학·
윤리사>, <철학·철학사>, <교육학·교육사>, <법제 및 경제>, <사회
학>, <한문 및 조선 문학>, <국어 및 국문학>, <영어>, <음악>,
<체조>, <문학>을, 3학년에서는 <수신>, <일본학>, <국어>, <한
문>, <불전 강독>, <천태학>, <밀교학>, <화엄학>, <일본불교사>,
<철학개설>, <인도철학>, <종교학>, <교육학>, <응용사회학>, <영
어>, <체조>, <무도>, <교련> 등이었다. 학업 성적은 1학년에서는
40명 중 20% 이내이고, 2학년 38명 중 10% 이내, 3학년에서는 31명
중 10% 내에 드는 우수한 성적이었다. 특히 온순하고 정직한 학생으
로 기록되어 있고, 기호는 문예창작으로 되어 있다. 가장 성적이 뛰어
난 과목은 2학년의 문학으로 95점을 기록하고 있다.14)
그가 수학한 교과목으로 볼 때, 1-2학년에서는 철학과 종교학에 대
14) 서익환, 조지훈 시와 자아·자연의 심연, 국학자료원, 1998, 41-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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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전반적 교양을 쌓고, 3학년에서는 불교에 대한 전문적 교육을 받았
던 것으로 보인다. 조지훈의 한국민족운동사는 사용하는 용어와 개
념에 대한 명확한 정의부터 시작하여, 여러 사건을 분류하고 운동의
흐름을 단계론적이며 체계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여러 자료와 사실들
을 역사적으로 체계화하는 훈련은 바로 혜화전문학교 시절의 교육 과
정에서 습득하였다고 볼 수 있다. 혜화전문학교 시절 그가 배운 과목
에는 <불교학·불교사>, <종교학·종교사>, <윤리학·윤리사>, <철학·
철학사>, <교육학·교육사>, <일본불교사> 등 역사 과목이 다수를 점
하고 있는데, 이들 과목을 1-2학년에서 2년 동안 학습하였다. 그런데
이들 역사 과목은 정치·경제사 중심의 사학과 교과목과는 달리 철학
및 사상과 관련된 역사, 즉 사상사 혹은 철학사였다. 그의 역사 서술
은 역사학을 전공한 전문 역사가와 다르게 나타나게 되는 것은 당연
하다고 하겠다.
조지훈은 1941년 3월 16일 혜화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그
는 오대산 월정사의 불교 강원의 외전강사가 되었다. 그는 월정사에서
‘가승假僧’으로 1년 정도 머물렀다가 1943년 봄부터 조선어학회 큰사
전 편찬 작업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그해 가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를 피해 피신했다. 피신 중인 1945년 3월 징용을 위해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폐병으로 ‘노무감내불능勞務堪耐不能’이라고 판정 받아 석방
되었다. 1940년대 그는 친일문인단체인 조선문인보국회 참여를 강요
받았으나 끝까지 거절하여 문인으로서의 지조를 지켰다.
2. 해방 후의 활동
조지훈은 해방 소식을 1945년 8월 16일 저녁 고향에서 들었다. 소식
을 듣자마자 그는 청년운동하던 선배들과 함께 군민대회를 개최하여
친일파를 성토·추방하고 밀정을 적발하였다. 일제 시대 영양의 청년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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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조직이 자생적인 치안대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조지훈
은 해방 직후 마을 청년들과 함께 했던 ‘심쾌(心快)’한 일 세 가지를 다
음과 같이 회고했다.
첫째는 남한 초유로 경찰서를 접수하여 경찰을 무장해제 시키고 청
년들이 무장하여 치안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대구에서 급파된 200명
의 군대가 위협하는데도 굴하지 않고 경찰서를 반분하여 공동으로 집
무했다는 것이다.15) 둘째는 하곡공출을 계속하여 군내 배급을 실시했
으며, 마을 주민들의 보복적 파괴 행동이 없도록 질서를 유지했다. 셋
째는 국민학교를 다시 열어 교재를 만들고 등사판 유인물을 만들어
아이들을 모아 교육을 시켰으며, 어린이들과 함께 신사를 불태웠다.
군정 시대 중등 국어 교과서 제1과에 수록된 「무궁화」는 바로 이때
자신이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쓴 글이라는 것이다.16) 해방 직후 조
지훈은 영양 지역에서 자생적으로 결성된 치안대 활동에 참여했던 것
이다. 이때 결성된 치안대는 일반적으로 여운형과 안재홍이 결성한
건국준비위원회와 관련이 있었는데, 영양의 경우 이와 관련이 있는지
는 알 수 없다.
1945년 9월 조지훈은 상경하여 조선어학회에서 주관하는 국어교본
과 진단학회의 국사교본 편찬 작업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조선문화
건설협의회, 전국문필가협회, 청년문학가협회,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등 우익 민족주의계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문인 단체 활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이때 우익 문인 단체에서 활동한 것에 대해 긍지를
갖고 있었다. 그는 말하기를 “고군분투의 멋이라고 할까, 98퍼센트를
15) 바로 이 한국민족운동사를 집필할 때, 주요 자료로 사용했던 고등경찰요
사를 경찰서 서고에서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강만길, 「지훈과 <한국민
족운동사>」, 김종길 외, 조지훈연구, 고려대학교 출판부, 1978, 344쪽.
16) 조지훈, 「해방 전후의 추억」, 조지훈전집 3, 문학론, 213-214쪽 ; 「무궁화」, 조지훈전집4, 수필의 미학, 363-364쪽.
조지훈의 민족운동사 인식과 동학관 367
공산주의에게 점령당한 문화면에서 소수의 동지와 함께 버티고 지키
는 의지에 대한 매력이 상당히 컸던 것도 사실이지만 민족의 향방에
대한 나의 작은 신념의 소산에 틀림이 없었다.”고 했다.17)
해방 직후 조지훈의 정치적 신념은 철저한 반공주의 입장이었다.
따라서 민족주의계의 문인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면서 계급문학과
경향문학을 비판하고 민족문학과 순수문학을 옹호하는 글을 집필하고
강연을 하기도 했다. 그는 찬탁과 반탁 논쟁에서는 반탁운동을 옹호
했다. 이러한 그의 정치적 선택은 그의 집안의 정치노선과도 관련이
있다. 해방 후 그의 부친 조헌영은 한국민주당에 가입하여 활동했고,
제헌국회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친일파 처리 특별위원회 위원이 되면
서 한민당을 탈당했다. 지훈의 숙부 조준영은 대구 경찰국장과 경북
도지사를 지내기도 했다. 지훈의 가문은 일제시대와 해방 직후 민족
운동 진영에 속했다. 이로 말미암아 6.25 전쟁을 전후해서는 좌익으로
부터 고초를 겪기도 했다. 6.25 전쟁 중 조부 조인석의 자결은 좌우익
의 첨예한 대립이 주실 마을 단위에서 발생한 비극적 사례였다.
1950년 6.25 전쟁 시 조지훈은 문총구국대 기획위원장이 되어 국군
을 지원했고, 직접 종군하여 1951년 5월에는 종군문인단 부단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6.25 전쟁 시 반공의 최일선에 활동했다고 하
겠다. 그러나 6.25 전쟁은 그에게 커다란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는 이번 난리통에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의 소식을 모르게 되었다.
조부가 자결하시고, 아우가 죽고, 하나뿐인 매부마저 잃어서 천애의 고아
가 되었다. 내가 이 충격에서 깨어나기까지에는 詩가 쉽사리 歸家하지 않
을 것을 내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18)
17) 조지훈, 「나의 역정」, 205쪽.
18) 조지훈, 「나의 역정」, 206쪽.
368 동학학보 제6호
해방 후 조지훈의 직업은 교육자였다. 그는 1945년 10월부터 1946
년 2월까지 혜화전문학교 강사, 경기여고 교사로 한 학기를 지냈고,
1946년 10월부터 1947년 10월까지는 서울여의대 교수로 지냈다. 그리
고 1947년 4월부터는 동국대학교 강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47년 10월부터 고려대학교 국문학과 조교수가 되었으며, 이후 1968
년 5월 17일 타계할 때까지 고려대학교 교수로 봉직하였다.19)
Ⅲ. 한국민족운동사 저술 배경
1. 1960년대 이전의 독립운동사 연구
일제 식민지 시대 가장 대표적인 독립운동사 저서는 박은식의 한
국독립운동지혈사(1920)였다. 이 책은 구한말부터 1919년 3.1운동 시
기까지의 독립투쟁사를 기록한 고전적 독립운동사이다. 해방 후에는
독립운동사 관련 저술이 쏟아져 나왔다. 1945년부터 49년까지 4년간
최남선의 조선독립운동사(동명사, 1946), 김학무의 조선근대혁명운동
사(노농사, 1947), 유홍렬의 조선독립사상사고(정음사, 1948), 채근식의
무장독립운동비사(공보처, 1949) 등 현재 알려진 것만 해도 22종의 독
립운동사가 간행되었다. 이 밖에 독립운동가 개인의 전기물도 많이
발행되었다.20) 그러나 이때 출판된 독립운동사는 해방 직후의 정치
투쟁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해방 후 정치세력은 일제시
대의 독립운동 노선에 따라 형성되어 대립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시
기 독립운동사는 자신이 처한 정치노선을 정당화하거나, 자신과 관련
19) 서익환, 앞의 책, 67쪽.
20) 조동걸, 현대한국사학사, 나남출판, 1998, 346-348쪽.
조지훈의 민족운동사 인식과 동학관 369
된 인사들의 독립운동 사실을 선전하는 목적이 강한 것이었다. 결국
독립운동에 대한 학문적이고 객관적인 연구서로서의 성격보다는 자료
적인 성격이 두드러진 독립운동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해방 직후에 출판된 독립운동에 관련된 자료들은 연구자료
로 활용되지도 못하고 사장되고 말았다. 그것은 이승만 정권 시기 독
립운동에 대한 소극적 태도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이승만 정권이 성
립되면서 독립운동사 연구는 거의 불모지에 가깝게 되었다. 해방 직
후 일어났던 독립운동사 서적 출판 붐은 1949년 반민특위 사건과 김
구 암살 사건을 계기로 급격하게 위축되었고, 이승만 정권 시기 내내
침체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승만 정권에 참여한 광복군 출신자는
김구 계열로 간주되어 감시 대상이 되기도 했고, 군대에서는 진급에
지장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반공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일제시대
독립운동에서 민족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이 연합전선을 형성했던
역사적 사실 자체가 거북한 것이었다. 따라서 6.25 전쟁 후 미소 냉전
체제라는 국제적 환경에 의해 남북의 분단체제가 고착화된 상황에서
독립운동사 연구는 활발하게 전개될 수 없었다.21)
1950년대에 출판된 독립운동사로는 이선근의 한국독립운동사와
애국동지원호회에서 편찬한 한국독립운동사가 있다. 이선근의 한
국독립운동사는 1950년 6.25 전쟁 시 육군 정훈교재로 편찬된 것을
출판한 것이다. 1876년부터 1919년 3.1운동까지를 다루고 있다. 독립
운동사 연구서라기보다는 근·현대사의 주요 사건을 연대기적으로 서
술한 일반 개설서에 가깝다.22) 사단법인 애국동지원호회에서 편찬한
한국독립운동사는 여러 명의 집필자가 분담하여 집필했다. 이 책은
「범례」에서 밝혔듯이 ‘역사적 자료를 수집 제공하였을 뿐으로 시비를
21) 박찬승, 「분단시대 남한의 한국사학」,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하, 창작과비
평사, 1994, 327쪽 ; 조동걸, 현대 한국사학사, 나남출판, 1998, 425-426쪽.
22) 이선근, 한국독립운동사, 尙文院, 1956.
370 동학학보 제6호
논하거나 비평을 가하지는 않은’ 자료집 성격의 책이다. 따라서 편목
도 국내운동, 만주운동, 해외운동 세 부분으로 나누어 독립운동 관련
사실을 많이 수록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23) 애국동지원호회의 한국
독립운동사는 여러 명의 필자가 참여하여 독립운동 관련 사실들을
충실하게 수집·정리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따라서 1950년대 당시에는
독립운동 관련 자료와 사실이 가장 풍부하게 수록된 책이 되었다. 이
책은 조지훈이 한국민족운동사 서술에서 주요한 참고자료로 적극
활용하였다.
2. 1960년대 초반 독립운동사 연구 필요성 인식
해방 이후 남한에서 독립운동사 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본격적
인 연구가 시작된 것은 1960년 4.19혁명 이후의 일이다. 4.19 혁명으로
자유로운 연구 풍토가 조성되었고, 민족주의적 요구가 분출되면서 독
립운동사 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제일 먼저 저술된 독립운동사가 바로 조지훈의 한국민족운
동사였다. 이 책은 1964년 11월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에서 간
행한 한국문화사대계 1권: 민족·국가사라는 이름으로 간행되었다.
그러나 실제 집필은 1963년부터 진행되었다. 1963년의 시점은 박정희
가 5.16 군사정변을 일으키고 군정을 실시하는 시기였다. 그리고 박정
희에 의해 월남 파병이 추진되고 한일 수교 협상이 진행되고 있는 시
점이었다. 특히 한일회담 추진에 대해서는 강력한 민중적 반대 운동
이 전개되고 있었다.24) 바로 이러한 민족주의적 분위가 고조되던 무
렵에 조지훈의 한국민족운동사가 저술되어 출판된 것이다.
23) 집필자는 김승학, 안재환, 이석호, 홍도, 채수반, 이학수, 신백우, 유승훈 등
독립운동가들이 대부분이었다. 애국동지원호회편, 한국독립운동사, 1956.
24) 조동걸, 앞의 책, 416쪽.
조지훈의 민족운동사 인식과 동학관 371
1950년대 말 조지훈은 이승만의 독재정권을 비판하는 활동을 전개
하였다. 1959년에는 민권수호 국민총연맹 중앙위원과 공명선거전국위
원회 중앙위원이 되어 반독재 투쟁 대열에 동참하였다. 특히 1960년에
는 한국교수협회 결성에 참여하여 중앙위원이 되었으며, 4.19 학생혁
명을 지지하는 4월 26일의 교수 시국선언에 참여하고 거리 시위에 나
섰다. 이때 교수협회의 시국선언은 조지훈이 집필했다.25) 4.19 혁명에
직접 참여했지만 조지훈은 4.19 이후 학생운동의 분열과 혼란이 발생
하여 혁명의 실패로 돌아갈 것을 우려하면서 혁명의 바른 길을 모색
하였다. 또한 그는 허정 과도정부의 무능과 민주당의 분열로 인해 혁
명정신이 실종되는 것을 우려했다.26)
이러던 차에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다. 이에 그는 학생운동의 혼란
과 민주당 정권의 무능과 부패로 인해 실패로 끝난 4.19 혁명을 다시
살릴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국가재건최고
회의에서 추진하고 있었던 재건국민운동의 사상적 토대와 실천 방법
을 기술한 「재건국민운동요강」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5.16 ‘군
사혁명’이 실패한 쿠데타가 아니라 성공한 혁명이 되기 위해 반드시
실천해야 할 구체적 지침을 마련한 것이었다.27) 그는 4.19 혁명은 민
주주의적 민권혁명이라고 했고, 5.16은 민권보다 민생혁명의 성격이
강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5.16 군사정변 세력에게 여론에
기초하여 조속히 민주주의를 회복시키라고 충고했다.28)
25) 한국교수협회 조직은 위원장 조윤제, 부위원장 이상은, 총무부장 정재각, 중
앙위원 조지훈 등이었는데, 조지훈은 문장을 도맡아 썼다. 정재각, 「지훈의
인품과 사상」, 민족문화연구22, 1989. 2, 18쪽.
26) 조지훈, 「혁명에 부치는 글」, 「혁명정신은 어디로 갔는가」, 조지훈전집 5,
지조론, 143-151, 152-155쪽.
27) 조지훈, 「나라를 다시 세우는 길-재건국민운동요강」, 조지훈전집 5, 지조론,
221-241쪽.
28) 조지훈, 「군사혁명에 부치는 글」, 조지훈전집 5, 지조론, 156-159쪽.
372 동학학보 제6호
그러나 5.16 군사정변 세력이 추진했던 작업은 조지훈이 요구했던
대로 실천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기대와는 달리 자유와 민권을 억
압했고, 민족의 이익에도 반하는 조치를 취했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이에 그는 1962년 4.19 혁명 2주년을 맞이하여 ‘죽음을 무릅쓴 학생혁
명’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1962년 6월에는 한미행정협정 체
결을 촉구하는 학생 데모를 옹호하는 글을 집필하였다. 이어 1962년 9
월에는 군사정부의 문화혁명의 몰이해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가하였
다.29) 박정희 군사정권에 대한 비판은 1965년 박대통령의 진해 발언
에 대한 비판에서 직접적이고 격렬하게 표출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진해에서 학생 데모의 비애국성, 언론의 무책임, 지식인의 옹졸을 격
렬하게 비판하였는데, 이에 대해 조지훈은 박정희 대통령을 직접 거론
하면서 그 발언의 잘못을 조목조목 지적하였다.30) 이때의 학생 데모
는 바로 한일회담 반대 데모였다. 항일 민족주의가 뜨겁게 달아오르
던 시기였다.
조지훈이 고려대학교 내에 설치된 고전국역위원회를 민족문화연구
소로 개편하였던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고전의 국역이나 자료 간
행 차원이 아니라 민족문화의 의미와 실체 그리고 그것의 발전 방향
에 대한 고민 속에서 민족문화연구소가 탄생한 것이다. 조지훈은 고
려대학교에서 1962년 고전국역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가 1963년 민족
문화연구소 소장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연구소의 첫 번째 사업으로
한국문화사대계를 구상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당시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던 민족주의 열기에 부응하는 계획으로 시장성도 있다고
판단되었다.31) 지식인만의 연구가 아니라 지식인과 대중이 함께 하는
29) 조지훈, 「큰일 위해 죽음을 공부하라」, 「우리의 신념에 의혹은 없다」, 「혁명
정부에 직언한다」, 조지훈 전집 5, 지조론, 164-181쪽.
30) 조지훈, 「그들은 과연 비애국적이며 무책임하고 옹졸한가-박대통령의 진해
발언과 데모 학생·언론인·지식인-」, 조지훈 전집 5, 지조론, 182-184쪽.
조지훈의 민족운동사 인식과 동학관 373
‘문화혁명’을 꿈꾸었던 것이다. 5.16 시기 그가 군사정변 세력에게 기
대했던 것 중의 하나가 ‘문화혁명’이었다. 그러나 그는 군사정변 세력
의 반문화 정책을 목격하고, 그것을 철저하게 비판하면서 민족문화혁
명을 직접 실천할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3.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독립운동사 편찬
조지훈이 한국민족운동사를 기획하고 집필하던 무렵, 다른 기관
에서도 독립운동사 저술이 기획되었다. 그것은 민간 연구소가 아니라
관립기관인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추진한 작업이었다. 그리고 그 작업
은 군사정변 세력의 정책적 지원에 의해 진행되었고, 그 작업 결과는
1965년부터 1969년까지 한국독립운동사라는 5권의 책으로 출판되
었다.32)
국사편찬원회의 한국독립운동사 편찬 작업이 이루어지게 된 경
위는 「서문」에 밝혀져 있다. 「서문」에서는 먼저 해방 직후 독립운동
관련 역사서가 수많이 출판되었지만, 대부분 부분적이었기 때문에 종
합적이고 정확한 독립운동사가 필요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독
립운동사 편찬 계획을 세웠지만, 인원과 재정 문제로 실행하지 못하였
다는 것이다. 이러던 차에 “1962년 3월 2일자 내각수반 지시각서 주요
사업지시로 비로소 용기를 얻어 계획에 착수하였고, 동년 동월 5일자
내각수반 주요사업 실천지시, 동년 6월 15일자 내각수반 주요사업 실
시에 따른 추가지시 및 1963년 7월 18자 최고회의 지시 사항 실천확
31) 정재각, 「지훈의 인품과 사상」, 민족문화연구22, 1989. 2, 13쪽.
32)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1-5, 1965-1969. 제1권은 박성수, 김후경,
신재홍이, 제2권은 윤병석, 김후경, 신재홍이, 제3권은 윤병석, 김후경, 신재
홍, 박한설이 제4권과 5권은 윤병석, 김후경, 신재홍, 이현희가 집필을 담당
하였다.
374 동학학보 제6호
인에 의거하여 「한국독립운동사」 편찬을 추진하여 왔다.”고 했다. 말
하자면 이승만 정권 시기에는 독립운동사 편찬 계획에 대한 지원이
없었다가 군사정권이 성립되면서 독립운동사 편찬에 대한 지원이 결
정되었다는 것이다.33)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편찬한 한국독립운동사는 독립운동사의 발
전 과정을 일관된 체제와 기준을 갖고 체계적으로 서술한 것이라기보
다는 일반 시대사를 일제의 침략과 그에 대한 저항이라는 측면에 중
점을 두어 서술하는 체제였다. 그리고 사건 기술적이며, 자료를 편집
한 사료집 성격도 지니고 있다. 실제로 각 권의 절반 이상은 자료집으
로 편제했다. 독립운동을 지역적으로 분류하여 각 지역에서 전개된
독립운동의 사실을 충실하게 전달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1910년 이전
을 서술한 부분과 1910년 이후 부분이 편목 분류 기준에서 차이가 있
다. 1910년 이전은 내용 중심으로, 1910년 이후는 지역을 기준으로 하
면서 주요 사건이나 단체 요소를 가미하였다. 이것은 연차적 사업으
로 기획됨에 따라 통일성을 기하지 못한 한계를 보이게 된 것이다. 여
러 학자가 집필한데다가 여러 해에 걸쳐 간행되는 데서 오는 문제점
으로 생각된다.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독립운동사는 독립운동사에 대한 역사학
자들의 연구 성과를 정리하고 이를 체계화한 저술이라고 하기 어렵다.
오히려 연구를 위한 자료를 제공하고 본격적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했
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공을 국시로
표방한 군사정권 하에서 편찬되었기 때문에 좌익 사회주의 운동 부분
은 사실과 자료도 빠져 있다. 또한 독립운동에 대한 역사학적 연구의
시작으로 사료의 수집과 정리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독립운동사의
연구 방법론에 대한 모색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즉 독립운동의 개념
33)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1, 1965, 서문.
조지훈의 민족운동사 인식과 동학관 375
과 방법, 독립운동 발전의 내적 논리, 독립운동의 사상사적 의미, 역사
적 의미 등에 탐구는 후일을 기약하고 있는 것이다.
조지훈의 한국민족운동사는 1963년 같은 시기에 시작된 국사편찬
위원회의 한국독립운동사보다 1년 앞선 1964년 11월에 한국문화사
대계 1권으로 간행되었다. 조지훈의 한국민족운동사는 기존의 연
구에서 지적했듯이 최초의 체계적인 독립운동사 연구서였다.
Ⅳ 한국민족운동사의 역사관
1. 독립운동론에서 민족운동론으로의 변화
조지훈은 한국민족운동사 「머리말」에서 서술 목적과 방식에 대
해 언급하였다.
그는 자신의 글이 ‘갑신정변(1884)에서 을유광복(1945)까지 만 60년간
의 한국 근대민족운동사를 정리한 것’이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근대
민족운동사 관련 자료를 편년사적으로 정리하되 사상사적 흐름을 절
충 종합했다고 하였다. 민족운동을 시대순으로 정리하는 데 머물지
않고, 민족운동의 사상사적 흐름에 주목하겠다고 하였다. ‘민족운동의
사상사적 흐름’을 포착한다는 문제 의식은 1960년대 전후의 독립운동
사 연구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전혀 새로운 주제 의식이었다. 이것
은 민족운동에 대한 정치사적 이해를 지양하려는 의식적 노력이기도
했다.
다음으로 그는 자신의 연구의 특징을 ‘종래 다른 사료의 국외 항쟁
중심, 개인 활동 중심, 자가 노선 중심의 폐를 재검토함으로써 국내
항쟁 중심, 집단 운동 중심의 관점을 견지하였다.’고 하였다. 이것은
376 동학학보 제6호
종래의 독립운동 개념 자체를 바꾸려는 의도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독립운동이란 무장투쟁, 의열투쟁, 만세시위운동, 비밀
결사운동 등 항일투쟁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따라서 누가 언제 어떤
투쟁을 했는가가 주요 관심사가 되었다. 이러한 독립운동에 대한 관
념에서는 독립투사인지의 여부와 독립운동에 대한 공적의 정도를 평
가하는 것이 독립운동사 연구의 주제가 되게 된다. 이 경우 사건별,
개인별 중심의 서술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독립운동
사 서술에서는 개개의 사건이나 인물보다도 ‘사회적 집단이 형성되어
지속적인 흐름을 형성한 독립운동’이라야 서술 대상이 된다는 판단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의의 혹은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판단되는
독립운동을 서술 대상으로 삼는다는 명확한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
런데 그는 역사적 의미 부여를 주로 ‘사상사적 흐름’에 주목하여 보고
있다. 이 점에서 한국민족운동사는 독립운동의 사상사 혹은 지성사
적 관점에서 본 독립운동사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개인이 아니라 집단을 형성하여 지속적인 흐름으로 계승되어 민족
운동의 사상사적 흐름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 독립운동, 이것이 그의
주된 관심사였다. 이 경우 주목되는 독립운동은 민족 구성원 다수가
참여하거나 다수에게 영향을 미친, 특히 사상적 형향을 미친 운동이
주된 연구 대상이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해외보다는 국내의 민중과
함께 한 운동이 서술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조지훈은 왜 이런 관점에 서게 되었을까? 직접적인 원인은 그 자신
이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국내에서 일상적 삶을 영위하면서도 민족의
독립을 위해 헌신해 왔다는 자부심이다. 앞서 그의 생애에서 살펴보
았듯이 그는 소년시절부터 민족의식을 품었고, 그러한 의식에 의거하
여 독립을 위한 조직적 활동을 멈춘 적이 없었다. 국내에 머물면서 민
족의식을 잃지 않고 표현하면서 일상적 삶을 영위하고 있던 대다수
민중의 존재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의 문제와 관련되는 것이었다.
조지훈의 민족운동사 인식과 동학관 377
식민지 시기는 3-4년이 아니라 그것의 10배가 되는 30-40년간이라는
긴 시간이었다. 이러한 시간 속에서 국내에 살았던 대다수 민중의 삶
은 독립운동과 무관한 것일까? 조지훈의 대답은 “아니다. 밀접히 관련
되어 있다.”였다. 왜냐하면 독립운동은 사상, 방법에 따라 다양한 유형
을 갖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생활의 모든 부문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
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일항쟁의 민족운동은 민족·사회 생활의 모든 부문에 뿌리 깊게 박히
게 되었고, 그러므로 1910년 경술국치에서 1945년 민족해방에 이르는 36
년간의 역사는 소수의 친일 주구의 반동을 예외로 하고는 전민족적인 대
일항쟁사라고 할 수 있다. 적극적 항쟁과 소극적 항쟁의 차이와, 그러한
消長이 시기적으로 있었다고는 하나, 민족의식의 저류로서의 장구한 항일
의식에는 아무런 변동도 있을 수 없었다.
이 기술은 조지훈이 왜 한국민족운동사를 서술했는가의 이유를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그가 강조하고자 한 바는, 독립운동이 소수
의 개인적 운동이 아니라 ‘전민족적’인 것이고, 또 방법과 성쇠의 차이
는 있지만 끊임없이 지속되었다는 점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기존의
독립운동 개념에서는 소극적이라고 해서 소홀히 취급되었던 국내의
문화운동을 독립운동의 한 유형으로 적극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민족
운동의 유형을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34)
민족운동의 방법적인 유형을 분류하면, 대체로 다음의 세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내 목숨을 걸고 원수의 목숨을 강요하는 피의 항쟁이다. …
34) 조지훈, 한국민족운동사, 29-31쪽.
378 동학학보 제6호
둘째, 민족의 요구를 절규하고, 국제 여론에 호소 청원하는 조직적 시
위의 항쟁이다. …
셋째, 민중을 계발하고, 민의를 대변하며, 민족의 요구와 이념을 구현하
는 문화항쟁이다. …
이처럼 그는 국내에서 전개된 ‘문화항쟁’을 민족운동의 주요한 유형
중의 하나로 그 의의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는 일제시대의 문화운동
노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문화운동을 통하여 민족정신을 함양하고 실력을 양성하고 독립을 장래
에 기약한다는 것은 애초의 독립운동에서는 제3의 노선이었으나 첫째의
무력항쟁 노선이 군국주의 국가로서의 일본의 예봉을 꺾을 수는 없었고,
둘째의 외교선전 노선도 파리강화회의(1919년 4월), 미국의원단 내
한(1920년 8월), 워싱턴회의(1922년 1월)에 걸었던 기대가 돈좌됨으로써
일단락을 고한 형편이었으므로 이 문화운동 노선은 독립운동 제3의 단계
로서 필연한 추세였던 것이다.35)
조지훈은 또한 이념적 차이를 넘어서서 전민족적인 독립운동이 전
개되었다고 보았다. 그는 1960년대를 전후하여 이념 문제로 독립운동
사 서술에서 제외되었던 사회주의운동도 독립운동의 사상적 흐름의
한 갈래로서 자리매김하였다. 그는 사회주의운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우리나라에 사회주의운동이 대두하기 시작한 것은 3.1운동 전후의 일
이다. 그것의 배경에는 러시아에서의 볼세비키 혁명운동의 간접적 또는
35) 앞의 책, 212쪽.
조지훈의 민족운동사 인식과 동학관 379
직접적인 영향 아래 이루어졌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지에서의 해방이라는 근본 명제는 8.15 해방까지 사회주의에
기본적인 제약을 주었을 뿐 아니라 우리의 민족주의에 사회주의적 경향을
자극해 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민족운동은 민족적 사회주의·사회
주의적 민족주의의 색조가 진작부터 짙었고, 이러한 상호 영향의 요소 때
문에 해방 전까지의 공산주의운동은 민족해방운동사에서 제외될 수가 없
는 것이다.36)
그는 8.15 이전의 사회주의 운동은 민족해방을 목표로 한 운동이었
기 때문에 민족운동사에서 제외될 수 없다고 했다. 더구나 사회주의
운동은 민족주의운동에도 영향을 미쳐 민족주의운동의 사상적 발전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했다. 그는 한민족의 독립운동은 이념적 차이를
넘어서서 전민족적 항일투쟁 형태로 전개되었음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이다.
조지훈은 한국독립운동사에 대한 개념적 인식 틀을 처음으로 확립
하였다. 그리고 그의 새로운 인식 체계는 식민지 시기 존재했던 다양
한 방법과 다양한 이념을 갖고 있었던 모든 독립운동을 포괄하고 종
합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종래 사용되던 ‘독립운
동’이란 용어 대신에 ‘민족운동’이라는 보다 폭넓은 용어를 사용했다.
그는 “민족운동사는 우리 역사를 대 이민족 투쟁사 및 민족의식 발달
사의 각도에서 고찰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마침내 민족항쟁
사, 곧 독립운동사에 귀결된다.”고 하였다.37) 그는 독립운동사는 외적
표현으로, 민족운동사는 외적 표현뿐만 아니라 ‘민족의식의 발달사’도
포함하는 광의의 개념으로 규정했다. 독립운동사보다 포괄적인 개념
인 민족운동사로 파악함으로써 독립운동사의 범주는 확대되었다.
36) 앞의 책, 231쪽.
37) 앞의 책, 19쪽.
380 동학학보 제6호
2. 한국민족운동의 발전 맥락 인식
한국민족운동사의 편목 체제는 크게 3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제1
편에서는 민족자위항쟁사를, 제2편에서는 민족해방투쟁사를, 제3편에
서는 민족사회운동사를 다루었으며, 결편 민족운동의 단락에서는 독
립준비 과정을 서술하였다. 목차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표 1>과 같
다.
<표 1> 한국민족운동사 목차
<표 1>에서 보듯이 한국민족운동사는 「서설」 부분에서 민족, 민
족운동의 개념에 대한 정의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근대 민족
운동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탐구하고, 나아가 민족운동의 유
형을 분류하고 있다. 이것은 독립운동에 대한 이론적 인식 체계 정립
서설
1. 민족의 형성과 민족의식
2. 근대 민족운동의 발단
3. 근대 민족운동의 유형
제1편 민족자위항쟁사
1. 갑신정변과 근대화운동의 풍운
2. 동학의 민중봉기와 민족의식
3. 갑오경장과 보수적 민족항쟁
4. 독립협회의 민권항쟁
5. 노일의 마수와 자위운동
6. 을사보호조약의 반대투쟁
7. 군대해산과 의병항쟁
8. 경술국치와 인민의 반항
제2편 민족해방투쟁사
1. 국외망명지사의 활약
2. 민족자결주의의 풍조
3. 동경유학생의 독립선언
4. 3.1운동의 거족적 항쟁
5. 임시정부의 수립
6. 파리강화회의와 외교활동
7. 협사의 의거와 공포투쟁
8. 독립군의 무력항쟁
제3편 민족사회운동사
1. 민족항쟁으로서의 문화운동
2.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공산주의
3. 6.10만세운동
4. 민족주의의 모색과 단일당 운동
5. 임시정부의 분규와 분열
6. 학생만세와 민중대회 사건
7. 신간회의 해소와 민족전선의 붕괴
8. 마지막 항거의 자세
결편 민족운동의 단락
1. 일본의 고립과 한국 독립운동
2. 연립정부와 대일 선전
3. 일제의 패망과 민족해방
조지훈의 민족운동사 인식과 동학관 381
에 대한 최초의 시도였다.
조지훈은 한국 민족운동의 발전 과정에서 나타난 특징을 다음과 같
이 파악하였다.
첫째,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독립운동사에서는 볼 수 없는 ‘사회
주의, 무정부주의, 공산주의’ 장을 별도로 설정하여 본격적으로 다루
고 있다. 또 국사편찬위원회의 독립운동사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해외 지역 독립운동의 비중이 약화되고, 국내 운동 중심으로 서
술하였다. 이것은 국내에서 전개된 민족운동과 사회운동 모두를 포괄
하여 파악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이념적으로 분화된 독립운동을
통합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1920년대 이후의 민족운동을 ‘민족사회운
동사’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서로 다른 사상적 흐름을 동시
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민족적 사회주의’ 혹은 ‘사회주의적 민족주의’
개념을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둘째, 민족운동의 흐름을 정리하겠다는 의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국내외를 통합한 민족운동의 내적 발전 논리를 찾아내기 위한 노력이
엿보이고 있다. 우선 시기별로 1884년부터 1910년까지를 ‘민족자위항
쟁’으로, 1911년부터 1919년 3.1 운동까지를 ‘민족해방투쟁’으로, 1920
년대 이후의 운동을 ‘민족사회운동’으로 규정함으로써, 민족운동을 내
용과 형태 중심으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각 단계의 사상적 흐름에 주
목하여 민족자위항쟁사에서는 근대화운동과 보수주의적 근왕운동이,
민족사회운동사에서는 문화적 민족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의 두 조류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서로 다른 흐름은 하나로 통합되
어 새로운 단계의 민족운동으로 발전하는 것으로 그려졌다. 즉, 근대
화를 추구하는 개화운동과 보수주의적 의병항쟁 가운데 동학농민항쟁
이 있었음을 지적했고, 거족적인 3.1 운동의 발생으로 민족운동이 한
단계 고양되었다고 했다. 3.1 운동 이후 좌우익이 분화되었지만, 신간
회 운동에서 민족단일전선이 형성되었음을 밝혔다. 그리고 태평양 전
382 동학학보 제6호
쟁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좌우연합정권을 구성했던 사실을 지적했
다.
3. 한국민족운동사의 정치적 지향
한국민족운동사는 민족운동의 중심과 상징적 존재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강조하고 있다. 조지훈은 <임시정부의 분규와 분열>에서
1920년대 중반 이후 임시정부가 분규를 겪고 분열되는 과정을 자세하
게 서술하였다. 그는 당시의 임시정부를 평가하기를 ‘간판만의 법통이
지켜질 따름인 침체상을 노정’했다고 했다.38) 그러나 그는 해방 직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좌우익이 연합한 연립정부를 수립했고, 일본에
대해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선전포고한 사실을 중시했다. 그리고 그러
한 노력으로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의 독립에 대한 약속이 있게 되었
음을 강조했다. 결론적으로 그는 임정의 역사적 정통성과 의의를 높
이 평가해야 한다고 했다. 해방 후의 임시정부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
이 말했다.
임시정부는 1919년 상해에서 수립된 지 만 26년에 국외 독립운동에 종
지부를 찍고, 해방된 조국에 국민의 감격적인 환영을 받으며 입국하였던
것이다. 그동안 임시정부는 한국의 망명정부로서 안으로는 민족혼의 상징
이 되었고, 밖으로 세계 만방에 대하여 무력항쟁과 외교와 선전으로 한국
이 일본의 통치에 복종하지 않는다는 대의와 취지를 밝혀 전후 처리에 독
립의 보장을 받게 된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니, 임정이 밟아온 중로의 분열
과 침체와 이산을 들어 이를 폄한다는 것은 그 형극의 길에서 끝까지 ‘대
한민국임시정부’의 간판을 지켜온 그 피눈물어린 지조와 드높은 신념에
38) 앞의 책, 280쪽.
조지훈의 민족운동사 인식과 동학관 383
침을 뱉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극언한다면 이 3.1 독립선언의 구현인 임시정부의 이름을 허물어 버리
지 않고 지켜왔다는 것만으로 족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으로써 우리 민
족사가 적의 발굽 아래 아주 끊어진 적이 없었다는 정신을 세울 수가 있
기 때문이다.39)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각원의 귀국을 이야기하면서 “이로써 민족
자위항쟁, 민족해방투쟁, 민족사회운동의 3단계로 이루어진 한국 근대
민족운동사는 일단락을 고하고 유종의 미를 거두었던 것이다.”라고
했다.40) 이것은 곧 해방 후 임정봉대론, 임정법통론을 인정했던 것이
라고 할 수 있다.
한국민족운동사는 해방 이후 전개된 올바른 민족운동의 역사적
연원을 밝힌다는 역사의식을 갖고 저술되었다. 그는 한국민족운동사
끝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민족해방 후의 반탁운동, 반공운동, 반독재운동사는 앞으로 다시 정리
될 것이다.41)
1884년 갑신정변으로 시작된 한국의 근대 민족운동은 일제시대의
독립운동을 거쳐 해방 이후에는 ‘반탁운동, 반공운동, 반독재운동’으로
계승되고 발전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가 살고 있던 당시의 상황에서
전개되는 민족운동은 바로 ‘반독재 민주화운동’이었다. 말하자면 1964
년 한국민족운동사 간행은 당시 전개되고 있었던 반독재 민주화운동
의 역사적 맥락을 독립운동에서 찾으려는 역사의식을 나타내고 있는
39) 앞의 책, 336쪽.
40) 앞의 책, 337쪽.
41) 앞의 책, 337쪽.
384 동학학보 제6호
것이다.
결국 한국민족운동사는 잘못된 정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문화
적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일제시대 그 자신이 수행한
민족문화에 대한 연구와 맞닿아 있었다. 시인 조지훈은 당대에 독립
운동사를 서술한 다른 역사학자보다도 더 실천적인 역사의식을 지니
고 있었다고 하겠다.
Ⅴ. 한국민족운동사에 나타난 동학
조지훈은 한국 근대 민족운동사를 민족자위항쟁, 민족해방투쟁, 민
족사회운동의 3단계로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그러면 각 단계에서 동
학은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에 대한 지훈의 평가를 살펴보자.
민족자위항생사는 갑신정변으로부터 시작했으며, 그에 이어서 1894
년의 동학농민항쟁을 다루었다. 조지훈은 <동학의 민중봉기와 민족의
식>라는 제목을 통해 동학혁명의 민중적 성격과 민족주의적 성격을
강조했고, 이를 다시 ‘삼정 소요’, ‘동학혁명’, ‘청일전쟁’ 3부분으로 나
누어 서술했다. 그 가운데 동학혁명 부분에서 그는 동학농민항쟁의
역사적 사실을 기술한 뒤, 동학사상 자체 내에 사회개혁운동으로 발전
할 수 있는 요소가 있음을 지적했다.
우리가 여기서 밝혀 둬야 할 것은 동학혁명이 내세운 기치인 ‘제폭구민’
은 ‘광제창생·포덕천하’의 현실적 표현이었다는 점이다. 동학혁명은 당시
동학 제2세 교주 해월 최시형이 처음에는 찬성하지 않았으나, 전봉준이
창의한 뒤에는 좌시하여 동학의 분열을 바랄 수도 없어 따라서 일어난 것
이다. 그는 전봉준의 전승의 보를 듣고 공주와 진금을 점령하였으나, 대세
조지훈의 민족운동사 인식과 동학관 385
가 불리하자 그대로 해산한 소극적 태도였다. 그러므로 동학혁명은 전봉
준이나 손병희의 인간적 기질의 표현이라 볼 수 있다.42)
그는 동학혁명이 교주 최시형보다는 전봉준과 손병희의 주도에 의
해 일어났다고 보았다. 그러나 동학혁명의 주체는 동학교도였다고 서
술했다. 따라서 동학혁명의 직접적 원인은 사회정세에 있다고 했으나,
동학사상 자체 내에 사회개혁운동을 ‘폭동’의 형태로 전개할 수 있도
록 한 바탕이 있었다고 했다. 말하자면 동학이라는 종교가 혁명을 추
동하는 사회개혁사상으로 발전할 소인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러
한 관점에서 동학혁명에서 내세운 ‘제폭구민’을 ‘광제창생·포덕천하’라
는 종교 교리의 ‘현실적 표현’이라고 해석했던 것이다.
조지훈이 동학혁명에서 주목했던 것은 동학이라는 종교가 어떻게
현실적인 사회개혁사상으로 발전할 수 있었는가였다. 그는 동학의 사
회개혁사상으로서의 성격을 동학 교조 수운 최제우와 관련된 3가지와
당시의 시대적 상황 4가지 등 모두 7가지로 나누어 구체적으로 서술
했다. 우선 최제우가 몰락양반의 후예, 서자, 경주 출신이었다는 점을
들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그의 사상이 유교적 용어로 표현되었으
며, 인간중심주의와 인간평등주의에 기초한 계급 타파를 실천할 수 있
었으며, 국선 화랑 등 민족 고유의 전통이 많이 남은 경주에서 민족
고유사상의 맥락을 계승할 수 있었다고 보았다. 다음으로 시대 배경
으로 정치 부패와 민생 파탄이라는 상황, 천주교 박해, 외세 침략, 질
병 유행 등 4가지를 들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최제우의 개인적 가족적
경험이 사회와 국가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 발전되었고, 서학에 반립하
는 동학의 착상을 얻었고, 민족 주체사상을 확립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의 샤먼적 칼춤이 민중에게 매력적이 될 수 있었다고 보았
42) 앞의 책, 41쪽.
386 동학학보 제6호
다.43)
그는 동학혁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면서 마무리했다.
어쨌든 그의 인내천의 인간중심주의, 지상천국의 현실중심주의는 민족
적인 주체사상 및 민중적 생활 관념과 결부되어 전술한 많은 근대적 요소
를 지니면서도 후학들에 의하여 전형적인 한국사상, 첨단적인 근대사상으
로 계승 발전될 계기를 지녔다고 보겠다. 그것은 그 사상이 지닌 바 민족
적 민중적 의의와 현실적 사회성격이라 하겠다. 이 점이 동학혁명과 3.1운
동에서의 그 신봉자의 방향을 제시한 점이다.44)
이처럼 조지훈은 최제우의 동학사상은 근대성·민족성·민중성을 갖
추었으며, 후대에는 ‘전형적인 한국사상’, ‘첨단적인 근대사상’으로 발
전될 수 있는 요소를 지녔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동학혁명과 3.1
운동이라는 근대 민족운동이 발생할 수 있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조지훈은 1910년 이후부터 1945년 해방되기까지의 시기는 민족해방
투쟁사와 민족사회운동사 두 가지로 나누어 서술했다. 이 시기 동학
에 대해서는 주로 천도교에 대해 서술했다. 왜냐하면 동학의 정통은
천도교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민족해방투쟁사에서도 천도교의
역할을 중시했다. 특히 3.1 운동은 천도교가 교단적 차원에서 중심적
역할을 담당했다고 보았다.
그는 <3.1 운동의 거족적 항쟁>이라는 제목에서 3.1 운동을 다루었
는데, 3.1 운동이 천도교의 독립운동 계획에서부터 시작했다고 서술했
다. 그는 1918년 12월부터 권동진과 오세창이 협의하고 최린의 찬동을
얻어 운동 계획이 구체화되었고, 1919년 1월 15일과 16일 경에 교주
43) 앞의 책, 42쪽.
44) 앞의 책, 42-43쪽.
조지훈의 민족운동사 인식과 동학관 387
손병희가 결정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그러면서 손병희의 결
심을 계기로 ‘천도교의 방침이 일정됨에 이르렀을 뿐 아니라 이것이
곧 3.1 운동 획책의 발단이 되었다.’라고 평가했다.45) 이어서 그는 당
시 한용운이나 이광수가 최린를 설득하여 거사를 요청했다고 하여 3.1
운동의 최초 기획자를 한용운이나 이광수로 보는 견해를 반박했다. 그
러면서 3.1 운동에서의 천도교의 주도적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
론을 맺었다.
손병희의 以身換天의 교도수련과 천도교의 독립선언 서명 인사수와 자
금 및 선언서 인쇄 등에 나타난 천도교의 이 주동적 역할은 부인할 수 없
다. 이 주동 인물들의 3.1 운동 이전이나 이후에서의 毁譽는 3.1운동 주획
의 공과 별문제의 것이다. 적어도 3.1 운동에서만은 그들의 공이 주도적이
었다는 사실은 움직일 수 없는 史實이다.46)
특히 그는 최린이 천도교의 대표로서 3.1 운동의 추진 작업에서 주
동적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것은 그의 후일의 행적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어서 3.1 독립운동
민족 대표 33인 중 천도교 대표가 15명이 참가했음을 기술했다. 그리
고 독립선언서 인쇄 작업이 천도교 교단에 의해 조직적으로 추진되었
다고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독립선언서의 인쇄는 2월 27일 오후 6시경부터 천도교가 경영하는 보
성사에서 21,000매를 인쇄하여 당시 신축중이던 경운동 88번지 천도교당
으로 옮겨 서울을 비롯한 13도에 밤을 도와 배포되었다. 인쇄 책임자는 보
성사 사장 이종일과 동 공장감독 김홍규였다.47)
45) 앞의 책, 128쪽.
46) 앞의 책, 129쪽.
388 동학학보 제6호
이처럼 조지훈은 민족해방투쟁사에서 거족적으로 전개된 3.1 운동
에서 천도교의 역할을 사실에 기초하여 그 역할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면 조지훈은 천도교가 민족사회운동사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
지하고 있다고 보았는가? 민족해방투쟁사가 1910년대의 해외 독립운
동, 3.1 운동, 의열투쟁을 주로 다룬 데 비해, 민족사회운동사는 1920
년대 이후 운동을 주로 다루었다. 따라서 여기서는 사회주의 사상의
유입으로 인한 민족운동의 분화와 임시정부의 분열이 언급되고, 주요
사건으로는 6.10 만세운동, 신간회운동, 광주학생운동, 1930년대 이후
의 사건이 다루어졌다. 이러한 서술에서 천도교가 3.1 운동에 대한 기
술에서처럼 본격적으로 크게 다루어지지는 않았다. 6.10 만세운동과
신간회에 대해 서술하는 과정에서 천도교 관련 사실이 언급되고 있는
정도이다. 민족사회운동사에서 천도교의 역할이 어떠한가에 대한 특
별한 문제의식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소년운동에 대한 서술에서는 천도교 관련 사실이 비교적 구
체적으로 언급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채롭다.
1920년대 초두에는 모든 단체운동과 함께 소년운동도 대두하였다. 서
울·안변·강주·진주 등지에 소년회가 생겼으나 본격적인 소년운동을 외치
고 나선 것은 1921년 여름방학, 동경서 돌아온 방정환이 창립한 ‘천도교소
년회’였다. … 방정환은 손병희의 셋째 사위로 3.1운동 당시 등사판으로
독립신문을 속간하여 비밀 발행하였고, 개벽이 발행 금지된 뒤에 별
건곤, 신여성, 어린이 등 수많은 잡지를 주간한 사람이다. 1923년 3
월 1일에 창간된 소년잡지 어린이는 동경에서 편집되어 천도교소년회
이름으로 서울에서 발행되었고, 그해 5월 1일에는 제1회 어린이날 기념식
이 거행되었다.48)
47) 앞의 책, 135쪽.
48) 앞의 책, 223쪽.
조지훈의 민족운동사 인식과 동학관 389
조지훈이 이처럼 소년운동에서 천도교의 존재에 주목하게 된 것은,
그의 성장 환경과 관련된다고 볼 수 있다. 조지훈은 9살 때인 1929년
부터 동요를 쓰기 시작했는데, 문인 지훈의 삶을 시작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준 것은 어린이 잡지였다. 지훈보다 3살 위인 형 조동진은
1923년 부친 조헌영의 뜻에 따라 6살 때부터 어린이를 정기구독했
다. 그리고 8살인 1925년부터 주실 마을에 어린이회를 조직했다. 조지
훈은 6살 때인 1926년부터 형이 지도하는 주실 마을의 어린이회에 가
입하여 활동했다. 이 어린이회는 1930년대에는 소년회로 이름을 바꾸
고 꽃탑이라는 문학잡지도 발행했다. 조지훈은 어린이날 행사를 비
밀리에 산에서 주최한 것이 발각되어 소년회가 해체되어 울분을 토했
던 기억을 갖고 있었다.49)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는 조지훈이 천도교
소년회가 발행한 어린이 잡지를 정기 구독했던 애독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천도교에서 추진한 소년운동을 모방하여 주실 마을 어
린이회와 소년회를 조직했고, 그 기관지로 어린이 잡지와 유사한 꽃
탑을 발행했다. 소년 조지훈은 천도교 소년운동을 자신의 방식대로
재해석했다거나 창조적으로 계승하여 발전시켰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천도교소년회에서 추진한 어린이 운동은 소년 조지훈
에게 의미 깊은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조지훈의 소년 시절의
경험이 천도교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정착시켰고, 이러한 인식에서 민
족운동사에서의 동학의 역할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것으로 생
각된다. 1960년대 조지훈은 민족문화, 민족사상의 개념을 확립하기 위
해 심혈을 기울였다. 이때 그는 동학을 ‘근대 한국사상의 전형’이라고
평가했으며, 한국문화사 전체를 개관할 때 사회사상 부분에서 한국적
전형성을 보여 주었다고도 평가했다.50)
조지훈이 동학을 한국적 사회사상의 전형으로 보는 이유는 동학사
49) 조지훈, 「나의 역정」, 조지훈 전집3, 나남출판, 1996, 199쪽.
50) 조지훈, 한국문화사 서설, 1964; 조지훈 전집7, 나남출판, 1996, 133쪽.
390 동학학보 제6호
상이 한민족의 고유사상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근대 이후의 사회적 현
실 개혁운동에 주동적 역할을 하였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러한 사실적 근거는 1894년의 동학혁명과 1919년의 3.1 운동이었다.
조지훈은 한국민족운동사에서 이 두 사건에 대한 민족운동사적 평
가, 그리고 동학과의 관련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했다. 그리고 1920
년대 이후 민족사회운동사에서 천도교 관련 사실들에 대해 부분적으
로 서술했다. 그러나 천도교는 “3.1 운동, 6.10 만세운동 이래 민중운
동에 천도교는 그 주동, 또는 배후세력으로 존재하였다”고 함으로써
민중운동에 중심적 역할을 했다고 높이 평가했다.51)
Ⅵ. 맺음말
조지훈의 한국민족운동사는 과거의 독립운동을 회고하고 정리하
는 것으로만 머물지 않았다. 그것은 민족운동의 올바르고 정당한 방
향이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실천적 고민의 산물이었다. 이 책을
통해 조지훈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고뇌하면서 자신
이 살아왔던 과거를 돌이켜 보았다. 자신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통해
미래의 실천 계획을 수립하게 되었다. 그의 민족운동사 서술은 ‘반독
재운동사’로 이어질 예정이었다. 반독재 민주화 운동은 그 자신이 4.19
혁명을 통해 실천했다. 그러나 그 혁명이 군사정권에 의해 좌절될 위
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점에서 그는 항일투쟁이 중심이 되었
던 독립운동사를 되돌아보았다. 항일 독립투쟁사 서술은 곧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역사적 의의를 밝히는 것이었으며, 그 자신의 실천을
51) 앞의 책, 220쪽.
조지훈의 민족운동사 인식과 동학관 391
다짐하는 의식이었다. 그의 투쟁은 일제시대부터 문화 투쟁이었으며,
항상 집단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기에 문화운동이라는 명칭을 사용
했다. 해방 이후 그는 문화운동 전선에서 투쟁하기를 주저하지 않았
다. 그것은 바로 반공과 반탁 운동 노선에 속하는 것이었다. 1960년대
의 문화 투쟁은 반독재 민주화운동과 관련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민
족문화연구소를 통한 지식인의 결집을 통해 성취할 계획이었다. 이에
따라 한국문화의 발전 방향을 점검하기 위한 기초 작업으로서 한국문
화의 발전 맥락을 점검하게 되었다. 한국문화 연구의 실천적 의미는
민족운동사의 발전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민족문화연구소
의 첫 번째 사업인 한국문화대계는 한국민족운동사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민족운동사는 조지훈이 일생을 두고 추구한 ‘문
화혁명’의 자기 점검 과정이었던 것이다.
필자는 한국 근·현대 사회사상사 연구에서 일제 식민지 시기 식
민지 현실과 타협을 거부하면서 국내에 머물러 있던 지식인들도 국외
망명 지사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망명 투쟁을 한 측면이 있다고 했
다.52) 왜냐하면 일제 식민지 시기 민족의식을 갖고 지조를 지키면서
살았던 지식인은 적극적인 무장 투쟁을 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독
립된 민족국가 건설이라는 희망을 잃지 않고 자신들의 고유한 세계를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내에 남아 있던 민족 지성들이 만들었던
세계는 몇몇 동지들끼리의 소집단이거나 자신의 고유한 내면 세계였
지만, 그 세계는 민족애·인류애·자유·평등·민중 등과 같은 인류와 민
족이 추구하는 숭고한 가치들로 충만한 세계였다. 또한 그 세계는 그
러한 가치를 창출하고 실천하는 문화혁명의 장이었으며, 민족해방운
동의 방법을 끊임없이 모색하는 실험장이었다. 지조를 지킨 지식인들
이 만든 문화 세계 속에서 해방 후 새롭게 건설될 국가의 밑그림이 그
52) 김기승, 한국 근·현대 사회사상사 연구, 신서원, 1994, 12쪽.
392 동학학보 제6호
려졌던 것이다. 이 점에서 일제시대 지조를 지킨 지식인은 국외 망명
투사와 다름없는 ‘내적 망명지사’였다고 보았던 것이다.
실천적 역사 의식을 지녔던 시인 조지훈도 일제 식민지 시기 ‘내적
망명 지사’로 문화운동 대열에 참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운동을 통해 구상했었던 문화혁명의 꿈을 해방 후에 실천하려고 했던
실천적 민족 지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추구했던 ‘문화혁명’
은 한국 근대 민족운동의 역사적 경험에 토대를 둔 것이었다. 그리고
민족운동을 사상사적 관점에서 평가할 때 동학은 ‘근대 한국사상의 전
형’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조지훈의 민족운동사 인식과 동학관 393
<국문초록>
조지훈의 민족운동사 인식과 동학관
김기승
이 연구는 조지훈이 1964년에 저술한 한국민족운동사에 나타난
민족운동관과 동학관을 고찰한 연구이다. 조지훈은 일제 강점 시기
국내에 거주하면서 어려서부터 문화운동에 참여했다. 그리고 해방 이
후에는 우익 민족주의 이념을 확립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이어
1960년대 초반 4.19혁명과 5.16군사정변 시기 민족운동의 역사적 맥락
을 체계화하기 위한 목적에서 한국민족운동사를 저술했다. 따라서
한국민족운동사에는 조지훈의 실천적 역사의식이 투영되어 있다.
한국민족운동사는 다른 독립운동사와는 달리 해외는 물론 국내
의 민족운동을 폭넓게 다루고 있다. 동시에 이념적으로 대립되었던
민족주의운동과 사회주의운동 모두를 넓은 의미의 민족운동 범주에
포함시켰다. 이에 따라 한국민족운동사는 시대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발전적으로 전개되는 것으로 체계화되었다. 그의 민족운동사 서술은
다양한 운동을 이념과 방법론을 기준으로 체계적으로 분류했다는 점
에서도 의미가 있다.
특히 그의 민족운동사에서 주목되는 것은 동학에 대한 인식이다.
그는 동학을 ‘근대 한국 사상의 전형’이라고 보면서, 전통적인 한국적
사상이 근대적으로 발전한 형태로 위치지웠다. 이는 동학농민운동, 3.1
운동 그리고 소년 운동 등에 나타난 동학의 역할을 중시하는 평가였다.
_ 주제어
민족운동, 사회운동, 문화운동, 개화운동, 동학, 천도교
394 동학학보 제6호
<Abstract>
Cho Ji-Hoon's Perception of Korean
National Movement and Donghak
Kim, Gi-Seung
This paper deals with the nationalistic idea in The History of
Korean National Movement, which was written by the poet Cho
Ji-Hoon in 1964. In 1960's, Cho Ji-Hoon tried to establish the
conception of Korean national culture and Korean unique thougt
against Western oriented scholars, who denied the value of Korean
unique cultere. Cho Ji-Hoon wrote two significant books on Korean
history, one was The History of Korean National Movement and
the other Korean Cultural History.
The History of Korean National Movement has three characteristics.
Firstly, it dealt with the Korean communist and anarchist movement
as a part of national movement. This is different from other history
books on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during Japanese colonial
period. Secondly, he conceived the modern Korea history as national
movement not merely as anti-Japanese independence movement.
He appreciated the social and cultural movement as the national
independence movement. So his book containd the plentiful contents
of Korean people's historical experience. Thirdly, He established
the nationalistic theory which conceived Korean national movement
history in arffirmative and evolutionistic viewpoint.
Cho Ji-Hoon was born in 1920, and was grown up under the
조지훈의 민족운동사 인식과 동학관 395
influence of the boy movement by Chun-do-kyo Boy Organization.
He thought that the idea of Donghak religion, which was founded
by Choi Je-Woo in 1860, had the possibility to develop as the
leading idea of social revolution. And so, he appreciated the Donghak
Rebelion as the Donghak Revolution for national modernization. He
thought that Donghak was developed by Chon-do-kyo, which was
named by Son Byug-hee in 1904.
March 1st Movement in 1919, which was the representative national
movement during Japanese colonial period, was originated and
leaded by the Chon-do-kyo group. Therefore Cho Ji-Hoon appreciated
Donghak as the central part of Korean national movement and
culture history. He said that Donghak was the typical type of
National thought in modern Korea.
Key-Word :
national movement, social movement, culture movement, enlightment
movement, Donghak, Cheondogyo
396 동학학보 제6호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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