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S] 20살 도전자, 석현준의 질주가 시작된다.

[아부지]

[매거진S] 20살 도전자, 석현준의 질주가 시작된다.

     

2009년 7월 1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유럽으로 떠나는 만 18세의 청년 앞에 선 아버지는 이 말을 전했다. “성공을 하지 못해도 네가 두려움 없이 도전하겠다는 것만으로도 이 아빤 고맙다. 성공에 못 매달지 말고 네가 원하는 즐거운 축구를 하고 오거라. 노력하는 만큼 결과는 올 것이다.”

아들이 답했다. “아빠, 저 죽어도 유럽에서 죽을 겁니다. 반드시 성공할게요.”

영입을 하겠다고 공언한 클럽도 없었고, 테스트를 받아주겠다고 확언한 클럽도 없었다. 그야말로 맨몸 하나 믿고 유럽 무대에 부딪히려는 아들의 무모한 도전에 등을 두드려주는 것 외에는 해줄 것이 없었던 아버지였다. 하지만 청년의 가슴에는 유럽의 축구 선수가 되겠다는 꿈을 향한 뜨거운 열정, 그리고 유년 시절부터 복서 출신인 아버지가 심어준 끝 없는 용기와 근성이 있었다.

아약스가 최초로 선택한 동양인이자 한국인 석현준

도전에 나선 지 1년이 지난 2010년 8월 30일. 유럽 최고의 클럽 중 하나인 아약스의 일원이 되어 돌아온 그 청년을 기다린 것은 수 많은 미디어의 카메라 세례였다. 이제는 대표팀의 일원으로 태극마크를 달아 한국 땅을 밟은 장한 아들을 기다리던 아버지는 190cm나 되는 커다란 아들을 껴안으며 말했다. "현준아, 고맙다. 사랑한다."

석현준. 유럽 최고의 클럽 중 하나인 아약스가 최초로 선택한 동양인이자 한국인. 2010년 2월 석현준이 아약스와 정식 계약을 맺음으로써 한국 축구는 네덜란드 리그의 3대 명문(아약스, 페예노르트, PSV)과 모두 인연을 맺게 됐다. 하지만 그 3대 명문 중에서도 첫 손가락에 꼽히는 아약스에 입단하는 한국인이 프로 경험도 없는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19세 선수가 될 거라 상상한 이는 없었다.

석현준의 아약스 입단기는 유럽 내에서도 화제가 될 정도로 동화 같은 이야기다. 그 꿈 같은 이야기를 현실로 만든 것은 석현준의 도전 의식이다. 도전은 젊음의 특권이다. 석현준을 만난 곳은 그가 유럽 진출을 꿈꾸며 도전의 열정을 불태우던 안식처, 용인 FC였다.(인터뷰는 석현준이 대표팀에 소집되기 이틀 전인 8월 31일 이뤄졌다.)

PART 1. 첫 A대표팀 선발, 작은 성공을 안고 돌아오다

조광래호의 떠오르는 신예 주목받는 윤빛가람과 석현준 (사진 : 연합뉴스)

19세에 태극마크를 달았다. ‘국가대표 공격수 석현준’이란 이전보다 업그레이드된 타이틀로 한국에 들어설 때의 기분은 어땠나? 분위기의 변화를 느끼나?(열띤 취재 경쟁 같은)

우선 기분이 좋았다. 처음엔 많이 놀랐다. 그렇게 많은 기자는 처음 봤으니까.(웃음) 내가 서 있는 위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됐던 것 같다. 스스로에게 자부심도 느꼈지만 더 열심히 노력해야겠다는 다짐이 더 컸다.

이번 A매치 데이에 한국에 오게 될 거라 기대했었나? 아약스는 대부분의 선수가 각국 국가대표라 A매치 데이 때는 훈련장이 썰렁할 텐데.

맞다. A매치 데이면 아약스 1군은 선수들이 거의 다 떠난다. 대표팀의 부름을 받지 못한 아주 소수의 선수만이 남아 훈련을 한다. 나도 그 극소수였고. A매치 데이 때 아약스 훈련장이 아닌 파주 NFC로 가는 날이 어서 오길 기대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빨리 기회가 올 줄은 몰랐다.

소집 요청 공문이 들어왔을 때 아약스 구단이나 동료들의 반응은 어땠나? 마틴 욜 감독은 어떤 얘기를 해주던가?

동료들에게 알리진 않았다. 첫 소집의 중요성을 알기 때문에 요란하게 축하 받기 보다는 조용히 준비하고 싶었다. 대신 코칭스태프와 팀 매니저들은 공문이 온 걸 알고 있으니까 축하한다는 말들을 많이 해줬다. 욜 감독님은 “가서 열심히 하되 다치지는 말고 오라”고 당부해주셨다.

조광래호의 첫 부름을 받고 달려온 석현준 (사진 : 연합뉴스)

입국장에 들어오는 모습은 이전의 선배들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캐주얼 한 옷차림에 젊은이들이 가장 갖고 싶어하는 고가의 헤드폰을 목에 건 그의 모습에선 젊은 유럽파다운 자유분방함과 여유가 묻어 났다. 석현준은 “들어올 때부터 긴장은 안 했다. 처음 입국장에 나가면 이렇게 저렇게 해야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입국했다”며 요즘 10대다운 당당함을 보였다.

입국하는 그를 맞이하러 간 아버지 석종오씨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아들에게 키스를 했다. 한국 사회에서는 조금 어색하게 다가오는 부정의 표시였다. 당시 키스 세례에 대해 석현준은 “아버지가 나를 너무 사랑하니까…”라며 웃음을 지었다. 석현준 역시 그런 장면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상하게 느껴지리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전혀 부끄럽진 않았다. 아버지는 석현준에게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석현준은 중학교 1학년 때 부모님의 이혼으로 어머니, 여동생과 떨어진 채 아버지와 둘이 살아야 했다. 하지만 그는 내색 한번 없이 운동에 집중했고, 때론 아버지를 위로한 속 싶은 아들이었다. 석종오씨는 그때 생각을 하면 “아마 현준이는 나 때문에 사춘기가 없었을 것이다”라며 눈물을 글썽인다. 아픈 가정사지만 그로 인해 석현준은 더 강해졌다. 기댈 곳이 적은 그가 믿을 것은 오직 자신의 실력뿐이었다. 친구들이 어머니를 찾을 때 그는 축구공과 싸움했다. 그것이 석현준이 10대의 어린 나이에 유럽에 부딪힐 수 있는 용기와 자신감, 실력을 만든 힘의 근원이었다.

조광래 감독과는 첫 만남이다.

꼭 뵙고 싶었던 분이다. 조 감독님이 경남에서 특별한 성과를 냈다는 걸 기사를 통해 알고 있었다. 감독님만의 남다른 철학이 있고 훌륭한 지도방식이 있기 때문에 그런 성과가 나온다고 생각했다. 국가대표팀에서 만나서 내게 어떤 것을 가르쳐주실 지 기대가 크다. 빠른 공수 전환을 요구하고 열심히 뛰는 걸 좋아하신다고 알고 있는데, 그것은 내가 가진 무기기 때문에 자신 있다.

조광래 감독은 지난 나이지리아전에 소집한 어린 선수들 중 몇몇 선수를 탈락시켰다. 이번에 어필을 하지 않으면 10월 일본전에 자리가 보장되지 않을 것인데.

잘하는 모습보다는, 나이가 제일 어리니까 최대한 열심히 하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그래야 감독님께서 좋아하실 것 같다. 특히 그라운드 위에서는 즐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나뿐만이 아니라 경기를 보는 모든 사람들이 즐거워할 수 있는 플레이 말이다.

이번 합류로 네덜란드에서 성공적인 업적을 남긴 이영표, 박지성 두 선배를 만나게 된다. 네덜란드에서의 성공 노하우를 듣길 기대할 텐데?

당연하다. 특히 박지성 선배님의 경우는 네덜란드에서 힘든 시기를 넘어 좋은 시기를 맞이 했지 않나? 내게도 언젠가는 힘든 시기가 올 것이다. 그때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좋을 때는 어떻게 평정심을 유지하는 지를 꼭 듣고 싶다.

PART 2. 무모한 도박이 아닌 위대한 도전

나이 든 팬이나 기성 미디어에게 석현준은 아직 무명이라는 표현이 더 익숙한 선수다. 대부분의 팬들은 10대와 20대의 젊은 층이다. 인터넷에서 먼저 불어 닥친 석현준 열풍을 보며 일각에서는 ‘인터넷 스타’라고 폄하하기도 했다. 하지만 석현준이 영화 같은 이야기로 아약스 입단에 성공하고 1군 무대에 데뷔하면서 그는 한국뿐만이 아니라 유럽에서도 주목하는 선수가 됐다. 석현준은 “인터넷에서 나에 대한 스페샬 영상 같은 걸 볼 때마다 굉장히 큰 힘이 된다. 내가 저런 플레이를 할 수 있는 선수구나라는 자신감이 생긴다. 인터넷을 통해 응원하는 많은 분들로 늘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고 말했다.

석현준의 아약스 입단기는 그를 더 유명하게 만들어준 일화가 됐다 (사진 : 연합뉴스)

이제는 많은 이들이 알게 된 이야기지만 석현준은 아약스 입단은 다시 봐도 드라마틱하다. 처음 그가 유럽에서 두드린 무대는 잉글랜드였다. 하지만 첼시 입단 테스트가 좌절된 뒤 석현준은 네덜란드로 향했다. 막연하게 아약스 훈련장을 찾았던 그는 주차장에서 마틴 욜 아약스 1군 감독을 만나게 된다. 팬인 것처럼 사진촬영을 요청하던 그는 용기를 내서 “1분만 시간을 달라”고 했고 한국에서 온 축구 선수인데 테스트를 받고 싶다고 했다. 어이가 없어하던 욜 감독은 “보험은 들었냐”고 반문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매달리는 석현준을 보던 욜 감독은 다음날 연락하겠다며 그를 돌려보냈다. 거짓말 같이 다음 날 오전 석현준은 유소년 팀과의 경기에 나갈 수 있겠느냐는 연락을 받았다. 한 달음에 달려간 그는 전철에서 내린 뒤 비를 맞으며 2㎞를 전력질주했다. 그에게 주어진 건 연습 경기 2•3쿼터. 이 기회를 잡아 유럽에서 살아 남겠다는 정신력으로 뛴 그는 골을 넣으며 2군 감독이던 피터 하우스트라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이후 한국에 돌아와 아약스의 연락을 기다리다 지친 그는 J리그 오미야 아르디자 입단을 위해 출국하려 했다. 하지만 출국을 위해 공항으로 가는 그에게 네덜란드에서 연락이 왔다. “정식 계약을 하자.” 석현준의 모토인 죽기살기의 도전 정신이 아약스의 마음을 흔든 것이다.

석현준이라는 선수의 가치를 바꿔준 것은 역시 아약스라는 타이틀이다. 그리고 아약스에 입단하게 된 스토리가 어찌 보면 비현실적이었다.

골!(GOAL!)이라는 축구 영화 속 주인공 이야기가 나랑 닮은 거 같다. 나는 언제나 잘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아니, 유럽에서 성공 못하면 안 된다는 절박함이 컸다. 죽기살기로 도전해서 유럽에서 살아 남겠다. 죽어도 유럽에서 축구를 하다가 죽겠다는 각오가 있었다. 작년 7월 한국을 떠나면서 유럽에서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절대 한국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길거리에서 축구를 하며 버티더라도 유럽 팀과 계약을 하겠다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믿었고, 그 믿음 속에서 내가 가진 기량과 진심이 유럽에서도 통한 것 같다.

주차장에서 마틴 욜 감독에게 입단 테스트를 부탁할 때의 무대뽀 정신은 대단하다. 지금 그렇게 하라고 해도 다시 할 수 있겠나?

지금도 그렇게 할 거다. 그때의 감정을 잊은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런 상황이 다시 오지 않으리라 법은 없다. 만일 내가 앞으로 아약스에서 못하면 팀을 나갈 수도 있다. 다시 그런 상황이 온다 해도 똑같이 들이댈 거다.(웃음)

2010년 2월 3일은 석현준의 인생에서 잊지 못할 날이었다. 로다JC와의 홈 경기. 출전 명단에 포함된 석현준은 후반 30분 투입을 준비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5분 여 동안 몸을 푼 그는 욜 감독의 신호를 받고 마르코 판텔라치와 교체되며 1군 데뷔전을 치렀다. 유럽 최고의 경기장인 암스테르담 아레나에서 홈 팬들의 열광적인 박수를 받으며 투입된 그는 10여분이 넘는 시간 동안을 뛰며 아약스 선수로 공인을 받았다.

그 전에도 데뷔를 할 수 있었는데 욜 감독님이 출전시키지는 않았다. 팀이 순위 싸움에서 박빙이어서 아무래도 부담이 있었던 것 같다. 로다전에서 후반 30분쯤에 몸을 풀라고 지시가 들어왔다. ‘아, 오늘 뛸 수 있겠구나’라는 확신이 들었다. 잠시 후 유니폼을 입고 오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투입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순간에는 5만 관중이 외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경기에 들어갈 때면 항상 ‘다치지 말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는데 그때 암스테르담 아레나에 나 혼자만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라운드로 들어갔는데 서포터들이 불러주는 내 응원가와 함성을 들으면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사실 그날 잘한 건 아니었는데 열심히 하는 내 모습을 보고 팬들이 좋아해주는 걸 보며 만족할 수 있었다.

데뷔 이후 특별한 선물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선은 히딩크 감독과의 뜻밖의 만남이었는데.

그때가 페예노르트와의 원정 경기였다. 아약스와 폐에노르트는 역사적인 라이벌로 유명한데, 그때 엔트리에는 들어가지 않았지만 욜 감독님이 그 살벌한 경기의 분위기를 미리 경험해보라며 로테르담으로 데리고 가주셨다. 본부석에 혼자 앉아서 보고 있는데 우리 구단 직원들이 히딩크 감독이 방송 때문에 왔다고 하는 거였다. 그러면서 나를 갑자기 히딩크 감독에게 데리고 갔다. 한국 출신의 아약스 선수라는 점 때문에 방송에서 출연을 시킨 것 같았다. 히딩크 감독님이 이런 저런 얘기를 해줬는데 그때는 네덜란드어를 거의 못할 때였다. 사실 무슨 얘긴지 전혀 몰랐고 그냥 야, 야(예)라고만 대답했다.(웃음)

유벤투스를 상대로 유로파리그 경기에도 나섰다. 거기다 석현준을 마크한 수비수가 바로 지오르지오 키엘리니였다. 세계 최고의 수비수가 자신을 마크하는 기분은 어땠나?

TV로만 볼 수 있던 존경했던 선수들과 한 그라운드에 서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이전에 중계로 볼 때는 ‘아, 키엘리니 같은 수비수는 얼마나 잘할까. 분명 강하겠지, 내가 부딪히면 어떻게 뚫어야 할까’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막상 부딪히니까 그 선수도 똑같은 사람이더라. 너무 걱정을 많이 해서 그런지 할만했다. 한국에도 이만큼 잘하는 수비수가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오히려 내 입장에선 자신감이 붙는 계기가 됐다.

아약스 팬들이 1군에 올라온 지 불과 2개월도 안 된 선수에게 응원가도 만들어줬다.

내가 교체로 들어가기 전에 기다리면 내 성을 따 ‘숙(SUK), 숙(SUK), 숙(SUK)’하면서 이름을 연호해준다. 경기를 잘할 때면 나오는 응원가가 있는데 예전 PSV 시절 박지성 선배님의 응원가와 비슷하다. ‘뚜르뚜르뚜뚜’ 하면서 이름을 반복해서 불러주는 거다. 막 엔도르핀이 솟는다.

PART 3. 네덜란드 적응과 아약스 프라이드

아약스 선수들은 네덜란드 최고의 클럽이라는 자긍심을 갖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아약스는 유럽에서도 특별한 클럽이다. 바르셀로나의 유소년 시스템의 모태가 아약스라고 할 정도로 그들이 구축한 시스템은 유럽 축구의 모범적 사례로 꼽힌다. 아약스가 강조하는 육성 철학인 ‘TIPS=Technique(기술), Insight(직관력), Personality(인성), Speed(속도)’같은 육성 철학이나 '아약스 패스포트(선수 생활, 경기기록부)' 등의 독특한 관리 방식은 이제 국내 지도자들 사이에서도 유명하다. 석현준이 아약스 내부에서 체험한 훈련 방식 역시 국내에서 받던 것과는 차별화돼 있었다.

일단 아약스는 체력 훈련이 거의 없다. 아약스의 축구는 뭘 하든 공과 함께 하고 경기 위주로 훈련을 한다. 경기 안에서 자신의 모든 걸 쏟아내는 거다. 정말 좋았다. 따로 체력 훈련 없이 경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체력이 유지되고 경기력이 올라온다는 사실이. 그래도 아약스는 네덜란드에서 늘 우승을 놓고 경쟁을 한다. 그 방식이 옳다는 얘기다.

아약스 출신들은 다른 클럽이든, 대표팀에서든 그들만의 커뮤니티를 구성한다고 들었다. 최근 즐라탄이 인터뷰에서 한국 선수가 아약스에서 뛴다고 하니 굉장히 큰 관심을 보일 정도였다. 아약스 프라이드라고 해야 할까?

아약스 선수는 다른 클럽에 대한 얘기를 해도 전혀 놀라지 않는다. 설령 첼시 같은 강팀을 만나도 걱정하지 않는다. 누구를 만나든 자신감이 있다. 네덜란드 내에서는 최고의 자부심으로 무장해 있으니까 늘 공공의 적이다. 다른 팀 팬들은 아약스가 우승하는 것을 자신들이 우승하지 못하는 것보다 더 싫어하고 아약스가 지면 자신들이 져도 좋아한다. 나도 그런 분위기에 취하게 돼서 이제는 2군 경기에서는 상대가 누구든 전혀 걱정이 안 된다.

미니홈피를 보니 해외 원정 시 아약스 전용기를 타고 가는 것 같던데 선수 지원 수준이 굉장한 것 같다. 팬들이 놀랄 만한 아약스만의 지원을 설명해준다면?

비행기 안 의자부터 먹는 것까지 모두 아약스 마크가 붙어 있다. 암스테르담 아레나에서 선수단 버스가 출발하면 공항 수속을 거치지 않고 바로 비행기 앞에 가 내려 선수들이 탑승을 한다. 네덜란드 내에서 원정 경기를 가면 선수단 버스 1km 앞에 오토바이 경찰이 있고 버스 바로 앞에 경찰차가 간다. 좌우에는 버스를 탄 경찰이 있고 뒤에 또 경찰차가 붙는다. 오토바이 경찰은 앞에 있는 모든 차들을 비키게 하는 역할을 하는데 그러면 아약스 선수단 버스는 신호도 받지 않고 정체도 되지도 않고 그 속도 그대로 쭉 달려가는 거다.

팬들 사이에선 석현준이 베르캄프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느냐를 놓고 화제가 되기도 했다. 본인도 아약스 입단 당시 베르캄프로부터 배우고 싶다고 했는데, 만날 기회가 있었나?

만나긴 자주 만난다. 그런데 그냥 인사만 하고 지나간다.(웃음) 훈련을 같이 할 순 없다. 지금 베르캄프는 12세 선수들을 가르치고 있다. 아약스의 시스템 상 아무리 화려한 현역 생활을 보낸 선수라 해도 바로 1군 코치로는 올라오지 못한다. 밑바닥부터 시작해야 하니까 천하의 베르캄프도 어린 선수들을 가르치고 있다.

팀에 녹아 드는 데 있어 언어의 중요성은 더할 나위 없다. 어학 공부에 열중인 것으로 아는데 네덜란드어나 영어 실력은 많이 늘었나?

영어 공부는 아직 안하고 네덜란드어만 공부하고 있다. 네덜란드어와 영어를 같이 하면 헷갈려서 안 는다고 한다. 지금은 네덜란드어만 6개월 째 하고 있는데 많이 는 것 같다. 처음엔 발음 배우는 데만 3개월이 걸렸다. 네덜란드 발음이 굉장히 어렵다. 제일 많이 쓰는 표현은 땅큐 뷀(dank u wel, 고맙다).(웃음) 동료들과도 적극적으로 대화를 하려고 한다. 판 데르 비엘이 가장 잘 받아준다. 그 친구는 내가 아약스 버스에 처음 탔을 때도 자기 옆에 앉으라고 하면서 관심을 보여줬다. 그 뒤로 많이 친해져 지금은 가장 편한 사이가 됐다.

네덜란드가 그렇게 활력 넘치는 기후나 분위기의 나라는 아닌데, 어린 선수 입장에선 홀로 지내는 것이 굉장한 고역일 수 있지 않나?

지금까지는 축구에만 온통 신경이 써 있었다. 나는 축구를 하러 네덜란드로 간 거고, 네덜란드에서 축구 하는 건 정말 즐거운 일이니까 아직은 힘들다고 느낄 부분이 없다.

PART 4. "숙, 너는 아약스의 미래가 되어야 한다"

"2년뒤 석현준은 아약스의 코드가 될것이다"-마틴욜

월드컵을 국내에서 본 걸로 안다. 루이스 수아레즈(우루과이), 그레고리 판 데르 비엘, 마르턴 스테켈렌뷔르흐(이상 네덜란드) 같은 동료들이 나란히 큰 성공을 거두는 모습을 보며 기분이 남달랐을 것 같은데.

나와 함께 훈련하는 동료들이 4강, 결승까지 가는 걸 보면서 내 일처럼 기분이 좋았다. 네덜란드는 한국 다음으로 가장 응원했던 팀이었다. 수아레즈는 동료지만 내가 늘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지켜보는 선수다. 이번 월드컵을 통해 네덜란드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통한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판 데르 비엘은 정말 잘했으면 좋겠다고 응원했었다. 경기에서 실수할 때마다 내 일처럼 안타까웠다.

사실 석현준에게도 남아공 월드컵 출전의 기회는 있었다. 당시 대표팀의 정해성 수석코치가 월드컵을 앞두고 직접 네덜란드로 넘어가 석현준을 관찰하려고 했다. 촉박한 시간과 일정의 문제로 정해성 코치의 방문은 무산이 됐다.

수아레즈가 한국의 골망을 흔들며 결승골을 넣는 모습을 보면서 기분이 묘했을 것 같다.

일단 내가 한국인이니까 그 장면은 슬펐다. 승렬이 형이나 보경이 형 같은 학교(신갈고) 선배들이 있었고, 한국이 이왕 올라간 김에 8강 이상까지 갔으면 하고 바랬다. 하지만 수아레즈가 그 장면에서는 워낙 잘했고, 비록 졌지만 한국 선수들도 전체적으로 경기를 잘했으니까 담담히 결과를 받아들였다. 나중에 아약스가 재소집 되고 수아레즈를 만나 “2골이나 넣으면 어떡해”라고 얘기를 하니까 남미 특유의 장난끼 섞인 얼굴로 “한국 상대로 골 넣기 쉽던걸”이라고 하는 거다. 내가 화난 표정을 하니까 그제야 진지한 얼굴로 “농담이고, 너희 정말 강하더라. 패스도 좋고 움직임도 좋아서 지는 줄 알았다”며 엄지손가락을 들더라. 박지성 선배랑 박주영 선배에 대해 특히 좋은 얘길 많이 하더라.

오프시즌 동안 좋은 성과를 거뒀다. 특히 첼시전 득점이 눈길을 모았다. 원래 첼시 입단을 노렸던 걸로 아는데 감회가 남달랐을 것 같다.

일단 많은 사람들이 내가 첼시 입단 테스트를 받았다고 잘못 알고 있는데, 첼시 구단 입구에도 못 가봤다. 당연히 첼시 관계자들 앞에서 공도 못 차봤고 첼시 선수도, 감독도 못 봤다. 테스트를 하러 갔는데 나를 원하던 첼시의 코치가 로베르토 디 마테오 감독을 따라 웨스트브롬으로 가면서 그 얘긴 없던 게 됐다. 그래서 크리스탈 팰리스 팀에서 3주간 적응 훈련을 했다. 다른 입단 테스트를 기다리다 영국에선 도저히 안될 것 같아 네덜란드로 넘어가게 됐고 아약스와 인연이 닿은 거다. 친선전 때는 상대가 첼시라서 더 잘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리고 카를로 안첼로티 감독이 내 활약을 보고 이름을 기억해주길 원했다. 여전히 내 축구인생의 종착점으로 삼는 팀은 첼시니까.

마틴 욜 감독이 잉글랜드(풀럼)로 간다는 루머가 나왔을 때 기분은 어땠나? 욜 감독은 어쨌든 한국 선수에 대해 인식이 좋고 자신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특히 동양인 선수의 경우 감독에 따라 팀 내 입지가 확 변할 수 있지 않은가?

그렇게 날 잘 봐주는 감독님인데 당연히 안 갔으면 했다. 결국 안 가서 다행이었다. 그 당시엔 구단 안에서도 욜 감독님이 떠난다고 비상이 걸렸었다. 그래서 욜 감독님이 선수 영입을 잔류 조건으로 내걸었다. 아약스가 시즌 준비를 할 때는 돈이 없다고 선수 영입을 못 한다고 했었다. 그러자 욜 감독님이 ‘선수 영입도 안 되는데 내가 여기서 계속 해야 할 이유가 뭐냐’고 했다. 결국 구단이 입장을 바꿔 자금을 풀었고 엘 함다우이와 미도가 오게 됐다.

욜 감독의 잔류는 석현준에게 분명 플러스 요인이었지만 마이너스 요인이기도 했다. 욜 감독의 잔류와 동시에 아약스는 공격 부문에 전력 보강을 했다. 노장 공격수 판텔라치가 떠났지만 엘 함다우이와 미도가 합류했고 이적설이 무성하던 주전 스트라이커 수아레즈고 결국 잔류했다. 미도와 엘 함다우이의 합류는 결국 석현준을 벤치 워머로 만들 가능성을 높이게 했다는 점에서 욜 감독의 잔류는 양날의 검이 된 것이다. 하지만 석현준은 “나보다 지명도 높은 새 공격수들의 합류가 신경이 안 쓰일 순 없다. 그러나 나는 당장 성공하고 싶지 않다. 차근차근 단계를 올라가야 하고 욜 감독님도 그걸 원하신다”며 자신이 맞은 상황을 냉철히 분석했다.

경기력 향상과 꾸준한 출전을 위해서라면 타 클럽으로의 단기 임대도 생각하고 있나? 이적 시장 마감을 앞두고는 빌렘II가 석현준을 원한다는 보도도 있었다.

욜 감독님은 챔피언스리그에도 나가게 됐으니 아약스에 남으라고 하셨다. 지금은 임대를 가는 것보다 아약스 축구를 더 배우는 게 좋을 거라는 게 감독님 조언이었다. 당장은 경기에 나서지 못하지만 올 하반기, 다음 시즌을 생각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임대 얘기는 예전부터 있었다. 2군에서를 나를 지도했던 피터 하우스트라 감독이 그로닝겐의 감독으로 부임한 뒤 계속 날 임대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빌렘II 얘기는 모르겠다. 기사를 보고 처음 알았다. 솔직히 경기를 뛰지 못하고 벤치에만 있을 때는 임대에 대한 유혹도 든다. 하위권 팀이라도 그 곳에 가서 뛰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다. 하지만 나도 지금은 아약스의 좋은 축구를 배우는 게 내가 발전하는 데 더 큰 효과가 있을 거라 믿는다. 욜 감독님이 나를 잘 봐주고 “2년 뒤 너는 아약스 코드가 될 것이다”며 내 미래에 기대를 건다.

리그 우승도 탈환해야 하고 챔피언스리그라는 큰 기회도 있다. 조별리그에서 무려 레알 마드리드, AC밀란을 만났다. 레알이야 말할 것도 없고 밀란에는 당신의 우상인 즐라탄이 새로 합류했다.

처음에 조 추첨 소식을 듣고 ‘야, 장난 아니네’라고 생각했는데 팀에 가 보니까 동료들은 전혀 개의치 않고 오히려 재미있을 것 같다고 하더라. 그때 다시 느꼈다. 아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은 아약스고, 나는 특별한 팀의 일원이다라는 걸. 즐라탄은 꼭 그라운드 위에서 만나고 싶지만 현실적으론 쉽지 않을 것 같다. 전반기에는 배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임하려고 한다. 경기에 뛴다면 더 없이 좋겠지만 내 욕심을 내세우기 보다는 욜 감독님의 계획에 따라 미래를 만들고 싶다.

월드컵 기간 동안 올림픽 대표팀에 합류했었다. 본인 입장에선 아시안게임과 올림픽도 중요한 목표인데, 홍명보 감독과 좋은 교감을 나눴나?

홍 감독님에게 내 모습을 다 보여주진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감독님이 날 좋게 봐주고, 대표로도 뽑아주는 걸 감사히 생각한다. 감독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그러기 쉽진 않아서.(웃음) 앞으로 자주 뵙고 대화를 나누고 싶다. 네덜란드에서 열린 국제청소년대회에서는 매 경기 후회 없이 최선을 다했다. 결국 올림픽 대표팀이 하나의 성과(우승)를 냈기 때문에 뿌듯했다.

아시안게임에 출전을 하려면 소속팀으로부터 양해를 구해야 한다. 아약스가 11월에 23세 이하 팀 차출을 허락할까?

아마 욜 감독님도 이해해주실 거다. 과거 이영표 선배님을 데리고 있어봤기 때문에 군 문제와 관련한 한국의 특수한 상황을 아실 테니까 배려해주시리라 생각한다.

최근 팬들의 큰 관심 중 하나가 석현준과 지동원의 비교다. 동갑내기이고 각급 대표팀에서도 함께 생활했다. 라이벌 의식이 존재하나?

라이벌 의식에 대한 얘기가 많이 있는데, 동원이는 우선 내게 좋은 친구다. 같은 나이기 때문에 대표팀에 가면 늘 만날 수 밖에 없었다. 친하게 지내서 큰 라이벌 의식을 표출하진 않는다. 물론 속으론 서로 견제하겠지만 그것이 나쁜 건 아니고, 선의의 경쟁을 위한 생각이라고 본다.

석현준은 무모해 보이는 도전을 통해 모두가 부러워하는 결과를 냈다. 도전을 두려워하는 젊은 친구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자신을 믿으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면 자신감이 생긴다. 믿음이 있다면 부딪히려고 하는 대상이 무엇이든 멋지게 도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젊다면 두려움 없이 멋진 도전을 했으면 좋겠다.

[라mrPARK]

동기부여가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