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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복음: 마태 10,7-15
가장 가난한 이웃들보다 덜 일하고, 덜 고뇌하고, 더 안락한 삶을 사는 것을 큰 죄악으로 여깁니다!
언젠가 장장 12~3년이나 되는 오랜 양성기간을 마무리한 형제들, 이제 곧 사제품을 받고 본격적인 사목 일선에 투입될 형제들을 대상으로 ‘한 말씀’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결코 만만치 않은 길이기에, 다양한 어려움이 곳곳에 산재한 십자가 길이기에, 선배로서 이런 저런 충고를 하다보니 말이 자꾸만 길어지더군요.
“잘 아시는 바처럼 사제품은 끝이 아니라 출발입니다.
여러분은 신입사원도 아니고 수습사원인 셈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궂은 일을 하는데 주저하지 말길 바랍니다.
만나게 될 신자들과 청소년들, 함께 일하는 직원분들 앞에서 한결같이 겸손한 자세를 유지해 주십시오.
‘내가 신부인데! 내가 시설장인데!’하는 말은 절대 금지입니다.
무엇보다도 머리둘 곳 조차 없으셨던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한평생 가난한 사제로 살아주십시오.
소임이동 때는 여행용 가방 두개면 충분합니다.
양손에 가방 두개 달랑 들고 고속버스 타고 이동해주시면 그 자체만으로 사제로서 성공한 삶입니다.”
오늘 마태오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사목 실습을 떠나는 제자들을 향해 저처럼 훈시 한 말씀을 건네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전도 여행 용 짐을 이런 식으로 꾸리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것이기에,
이를 ‘여장규범’이라고도 합니다.
여러 말씀 가운데 유독 다음의 말씀이 가슴이 꽂힙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마태오 복음 10장 8~10절)
돌아보니 저도 형제들에게 너무 무리한 요구를 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 요구는 무리한 요구를 넘어, 해도 해도 너무한 상상을 초월하는 요구였습니다.
짧지 않은 여행길이었을텐데, 적어도 갈아 입을 여벌 옷 몇벌, 그리고 옷을 넣을 보따리 하나 정도는 지니는 것이 기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여벌 옷도, 보따리도 챙기지 말라고 하십니다.
당시 여행 중에 강도나 산짐승들을 만날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방어용 지팡이 하나는 기본이었습니다.
그런데 최후의 생존 수단인 지팡이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긴 여행길에 많은 돈은 아니어도 만일을 대비한 비상금은 필수입니다.
그런데 비상금 한푼 조차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전도 여행길에 오르는 사도들에게 럭셔리한 부자의 모습이 아니라 가장 가장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떠날 것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전도 여행길에 오르는 사도들이 자신의 힘이나 세상의 힘을 믿기 보다는 주님 섭리의 손길에 맡기라고 당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여장 훈시와 유사한 말씀이 ‘열두 사도의 가르침’ 11장 6절에 제시되고 있습니다.
“사도가 떠날 때에는 다른 곳에 유숙할 때 까지 필요한 빵 외에 다른 것은 받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사도가 돈을 요구한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목자들이 교우들로부터 생활비를 지원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 자신은 스스로 천막짜는 노동을 해서 생활비와 전도 여행 경비를 마련했습니다.
부끄러운 마음으로 오늘 날 우리 교회와 수도회를 돌아봅니다.
예수님의 여장 훈시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모습의 부유한 모습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청빈의 삶, 무방비의 삶, 머리 둘곳 조차 없는 떠돌이로서의 삶을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철저히 정착하고 안주했으며, 충분한 기득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복음적 청빈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몇몇 수녀회 수녀님들을 바라보며 실낱같은 희망을 지닙니다.
그분들은 가장 가난하고 불우한 이웃들보다 덜 일하고, 덜 고뇌하고, 더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사는 생활을 큰 죄악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분들의 사목 활동 지역은 언제나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이 살아가는 거주 지역입니다.
그 지역이 개발되어 부촌으로 탈바꿈하면 아무 미련없이 또 다른 가난한 지역으로 떠나갑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나눌 줄 아는 자가 되기 위해 이 두 가지 훈련이 반드시 필요하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거저 받았으니 아끼지 말고 내어주라고 말씀하십니다. 내어줄 줄 모르는 이들은 탐욕에 사로잡혀 성령의 힘을 잃습니다. 곧 마귀도 쫓아낼 수 없게 되고 병을 치유하는 힘도 잃습니다. 그러면 내 안에 성령의 힘이 있음을 자신도 믿지 못하게 되어 하느님의 힘이 아닌 자신의 힘으로 영혼을 구원하려 하다가 지치고 쓰러집니다.
이런 면에서 사제나 신자들의 청빈은 매우 중요합니다. 무조건 가난해지라는 말이 아니라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이라는 믿음으로 필요에 따라서는 다 내어줄 줄 아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내어놓을 줄 아는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훈련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습관이 덕이 되고 덕이 본성이 됩니다. 오랜 습관이 나를 변화시킵니다. 한두 번의 선행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힘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본성의 변화가 요구됩니다.
1800년대 후반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여성이 해티 그린(1834-1916)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같은 속옷을 50년간 입을 정도로 검소를 넘어선 구두쇠였습니다. 오죽하면 그녀의 아들이 다리가 아팠을 때 가난한 행세를 하고 동네 보건소에 가서 치료하였을까요? 결국 아들은 감염이 심해져 다리를 절단해야 했습니다. 그녀 자신도 나이가 들었음에도 탈장 치료비를 아끼려 복대를 하고 다닐 정도였습니다.
해티 그린이 이렇게 구두쇠가 된 이유는 어렸을 때의 교육 탓입니다. 그녀의 집은 부유했습니다. 글을 알게 되자 아버지에게 신문을 읽고 받은 돈을 쓰지 않고 저축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또 할아버지에게 경제나 주식에 대한 정보를 읽어주며 용돈을 받았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나누는 게 아니라 모으면 내 것이 된다는 교육을 받은 것입니다. 단 한 번도 나눔을 통한 즐거움, 하느님께 봉헌함을 통한 자유로움을 느껴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부모로부터 막대한 유산을 받았을 때도, 그것을 투자하여 어렸을 때부터 깨우쳤던 경제 관념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을 때도 그 돈은 여전히 자기 돈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돈을 제대로 한 번도 써보지 못하고 외롭게 죽고 말았습니다.
반면 록펠러는 십일조는 내었지만, 가난한 사람은 도울 줄을 몰랐습니다. 어느 날 병원에서 죽음을 기다리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는 성경 말씀을 보고 한 여자아이의 수술비를 지원해 주게 됩니다. 그녀로부터 받은 감사의 편지는 그의 일생을 바꿔놓았습니다. 나눔의 행복을 알게 된 것입니다. 먹어보지 않고 어떻게 그 맛을 알겠습니까? 해보지 않으면 그 행복을 알 수 없어서 습관은커녕 그것이 고통인 줄 알고 할 용기를 낼 수조차 없게 됩니다.
반면 성 빈센트 드 폴은 가난하게 태어났지만, 가톨릭 집안에서 자라면서 모든 것은 주님께서 섭리해주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부모는 힘든 상황에도 자녀교육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쳤고 신학교에 들어갈 때는 부자가 그 교육비를 전액 지원해 주었습니다. 그래도 모든 것은 주님께로부터 받는 것임을 온전히 깨닫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하느님은 그가 해적선에 납치되어 노예로 팔리는 경험을 하게 만드십니다. 그는 자유인이 되어 정말 모든 것을 거저 받았음을 믿게 됩니다. 그 이후로 가난한 이들을 위해 나누어주는 삶을 살게 되고 지금도 전 세계에서 그가 세운 수도회와 수많은 시설에서 가난한 이들이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김범석 교수의 책에 죽어가던 한 암 환자가 임종 직전에 인사라도 하러 찾아왔을 때 “내 돈 2억 갚아라, 임마!”라는 마지막 말을 하고 죽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내어주는 것도 배우지 않으면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아이들에게 먼저 100원을 주면 10원은 하느님께, 10원은 가난한 이웃을 위해 쓰게 교육해야 합니다. 해봐야 행복을 알고 행복해야 계속할 수 있고 그래야 내어줌이 나에게 덕이 되고 본성이 될 수 있습니다. 십일조와 가난한 이들을 위한 나눔은 매달 반드시 나에게서 일어나야 주님께서도 악령을 쫓는 능력과 병을 치유하는 능력이 사라지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태 10,7-15: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예수께서는 하늘나라를 선포하라고 권능을 주시어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우선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8절) 하신다. 주님께서 지니신 모든 권능이 사도들에게 주어졌다. 한때 세속적이던 이들이 이제 하늘 중심의 사람들이 되었다. 그들은 하늘나라를 선포하고 병든 이를 고치고 죽은 이를 되살리고 악마를 쫓아낼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모습이 되도록 거저 받은 것을 거저 주리고 하신다. 만일에 그들이 보상을 바라고 영적인 선물을 베푼다면 그것을 더럽히는 것이므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탐욕을 단죄하셨다. 주님께서 그 권능을 제자들에게 거저 주셨으니 제자들도 그 복음의 은총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9절) 라고 하신다. 보수를 바라지 않는다면 금과 은과 돈을 지닐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잘못해서 그들이 하는 선교 활동이 인류 구원이 아니라, 경제적 이익을 위한 일로 보여서는 안 된다. 사도들은 하느님의 섭리를 가르치면서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걱정하지 않았다.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10절) 이는 세속의 물건에 관심은 버리고, 참된 보물을 찾으라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라는 옷만 있으면 된다. 마음의 악행 때문에 이단 같은 다른 옷을 걸쳐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다.
신발은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처럼(탈출 3,5 참조) 거룩한 땅에서는 맨발로 확고히 서서 그리스도께 받은 것 말고는 어떤 신발도 신지 말아야 한다. 지팡이는 외적인 힘을 도구로 사용하거나 자격도 없이 권위를 사용하려는 모습을 말한다.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10절) 필요한 음식과 옷만 받으라고 하신다.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11절) 사도들이 묵는 집은 사람들의 평판이 좋은 집에 머무르라고 하신다. 나쁜 평이 도는 사람이면 자칫 말씀이 더럽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존경하는 사람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거기에 머물렀다.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12절) 평화를 빌어주라고 하신다. 그러나 평화를 누리기에 합당하지 않은 집에는 평화가 내려서는 안 된다고 하신다. 하늘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자들은 우선 평화가 주는 혜택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고 그들의 끝은 멸망이라는 것이다. 그들 앞에 발의 먼지를 털어버리라고 하신다.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종종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을 때, 스마트폰을 뒤집어 찍는 분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를 물으니 그래야 키가 커 보이고 날씬하게 찍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뒤집어 찍으면 자연스럽게 카메라 렌즈가 아래에 위치하게 되어서 그렇다고 합니다. 어디에 렌즈가 위치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집니다. 하긴 한 때 얼짱 각도라는 것이 있어서 셀카를 찍을 때 팔을 45도 정도 올리고 나서 15정도 몸을 틀어서 촬영하는 것이 인기였지요. 이 역시 시선의 차이를 이용한 것이었습니다.
이를 생각해 보니 우리 세상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즉, 우리의 시선에 따라 세상도 다르게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시선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세상이 또 상대방이 잘못된 것으로 착각합니다.
나의 시선이 중요했습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는 시선을, 특히 사랑을 담은 시선을 가져야 했습니다.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결과물을 얻고자 한다면 나의 시선을 바꿔야 합니다. 그래야 후회의 삶이 아닌 기쁨과 희망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바라는 우리의 시선은 어떤 것일까요? 이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는 장면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라고 하시면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고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어떤 대가를 바라고 병자를 고쳐 주고, 마귀를 쫓아내는 것이 아닌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마음으로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시지요. 그리고 사람들에게 인사하는 것은 평화였습니다. 단순히 입으로만 평화를 비는 정도가 아닌, 사람들이 평화를 느낄 수 있는 말과 행동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하시는 명령이 아닐까요? 이런 시선을 가지고서만 하느님 나라를 세상에 선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만을 쫓아서는 하느님 나라를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은 곳이고, 대신 사랑과 평화만이 필요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될지를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라는 말씀으로 전해주십니다. 사랑과 평화를 받아들이지 않고, 또 그런 말도 듣지 않으면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 발에 먼지를 털어 버리라고 하십니다. 아무런 미련 없이 떠나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평화를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우리가 그 사랑과 평화를 사람들에게 전해주기 위해서는 먼저 그 사랑과 평화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제대로 된 우리의 시선입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때, 우리 혹은 타인의 삶에 어떤 기적이 나타나는지 아무도 모른다(헬렌 켈러).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복음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네.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들이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그리고
복음은 또
우리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네.
우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단톡방)
우리가 누군가에게 평화를 빌어 주고
그를 축복해 줄 때
그의 삶 또한 성장합니다.
축복의 말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누군가에게 평화와 축복을 빌어 줄 때
그 사람 안에 있는
두려움과 불신이 사라집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빌어 주는 평화와 축복은
상대방을 자유롭게 해 줍니다.
이처럼 세상을 치유하는 힘은
우리 안에 있는 사랑입니다.
제가 넘치는 사랑을 주님께 받고 있고
주님의 축복 속에 살고 있으니
제가 받은 사랑과 축복을
부족함 없이 나누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07.11.목.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 8)
늘 먼저
내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거저 받은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 외에
더 바랄 것이
없는 우리들의
삶입니다.
거저 받은 것을
거저 주는 것이
우리의 참된
행복입니다.
거저 받았기에
생색낼
그 무엇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착취와 독점을
무색하게
만듭니다.
공동체를
살리는
나눔입니다.
가난한
가운데서도
나누게 되는
나눔입니다.
나눔은
공동체 의식을
바탕으로
성장합니다.
공동체 의식이
분명해야
거저 받은 것을
거저
줄 수 있는
실천의 힘도
생깁니다.
이것이야말로
세속에 물들지
않는 평화의
길입니다.
참된 평화는
나눔으로
이어지며
우리의
개인적 이기와
집단적 무지를
꾸짖습니다.
평화를
빕니다.
거저 받은 것을
기쁘고
반갑게 만나는
평화의 날
되십시오.
거저 받은 것을
나누는 평화가
먼저입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님
<성 베네딕도 아빠스 기념일>(7.11)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마태10,9)
'하느님의 힘으로!'
오늘 복음(마태10,7-15)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말씀인 '열두 사도를 파견하시는 말씀'입니다.
'열두 사도들은 예수님으로부터 특별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최측근으로 선택된 사람들,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일'은 하늘 나라를 선포하고,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고,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는 일입니다.
이 일이 열두 사도들에게 사명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거져 받았으니 거져 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마태10,8ㄷ-10)
예수님의 이 말씀(마태10,9-10)을 그대로 실행하려고 애썼던 성인이 바로 '생태계의 주보성인이신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서방 수도 생활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성 베네딕토'입니다.
성 베네딕토는 이탈리아 수비아코라는 곳에서 '고행과 기도의 은수 생활'을 했습니다.
"Ora et Labora!"
이는 성 베네딕토 수도회의 모토인데, '기도하고 일하라!'는 뜻입니다. '아무 것도 지니지 마라.'는 말씀은 '기도하라!'는 의미, 곧 주님께 의탁하라는 의미, 하느님의 힘으로 일(구원의 일)을 하라는 의미로 들려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일은 '너를 살리는 일'입니다. 가진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는 나눔과 그들을 위한 희생과 봉사는 '내 힘이 아니라, 하느님께 의탁하면서 하느님의 힘으로 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들려옵니다.
먼저 기도하고, 기도의 힘, 하느님의 힘으로 겸손하게 예수님의 일을 합시다!
복음말씀
제1독서
<내 마음이 미어진다.>
▥ 호세아 예언서의 말씀입니다.11,1-4.8ㅁ-9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이스라엘이 아이였을 때에 나는 그를 사랑하여
나의 그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2 그러나 내가 부를수록 그들은 나에게서 멀어져 갔다.
그들은 바알들에게 희생 제물을 바치고 우상들에게 향을 피워 올렸다.
3 내가 에프라임에게 걸음마를 가르쳐 주고 내 팔로 안아 주었지만
그들은 내가 자기들의 병을 고쳐 준 줄을 알지 못하였다.
4 나는 인정의 끈으로, 사랑의 줄로 그들을 끌어당겼으며
젖먹이처럼 들어 올려 볼을 비비고 몸을 굽혀 먹여 주었다.
8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
9 나는 타오르는 내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고
에프라임을 다시는 멸망시키지 않으리라.
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나는 네 가운데에 있는 ‘거룩한 이’
분노를 터뜨리며 너에게 다가가지 않으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0,7-15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7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8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9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10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11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12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13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14 누구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