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엠마오 3 -
☆ 2016년 다해 3월30일 수요일 [(백)부활 팔일 축제 내 수요일]
[수도회] 영혼의 불을 지피는 사랑의 동행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사도 3,1-10
† 복음 루카 24,13-35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형태로 우리 곁에 오십니다. 바로 말씀
안에서 현존하시는 것입니다. 그분과의 만남은 신기한 현상을 통해서,
숭고한 모습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알아보지도 못한 분이지만
그분이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말씀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동안 일어난 일에 대해 설명해 주시면서 하느님의 신비한 구원 계획을
알려 주십니다. 곧 십자가는 파국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길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위로와 희망의 말씀은 지금도 교회 안에서 울리고 있으며, 특히 전례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빵을 쪼개는 그 안에 현존하십니다.
이 순간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이해했으며, 그리스도의 현존으로 심장이
타오르는 것을 느낍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걸었던 신앙의 길은 우리가 걷는 길이기도 합니다.
주님 없이 사는 삶은 절망적인 삶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모셔 들이지 않는
한, 그분은 언제나 낯선 이로 남아 계실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분을
만나는 것은 그분을 보거나 만지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듣고 성찬의 식탁을 나누는 데서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주님께서는 우리 마음 안으로 오시고, 우리가 빵을 떼어 함께 나눌 때 우리는
주님을 형제들 안에서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 매일 미사 -
◈ [인천] 믿음의 눈만이
2016년 다해 3월30일 부활 축제 내 수요일
제1독서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3,1-10
복음
<빵을 떼실 때에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4,13-35
종종 냉담 중에 있는 신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도 나름 예전에는 열심히
했었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어렸을 때에는 복사도 했었다, 성당 단체에
가입해서 봉사활동도 열심히 했었다, 주일미사에 빠진 적이 없을 정도로
신앙생활도 열심히 했었다... 등등의 말씀을 하시면서 예전에는 주님
보시기에 떳떳했었음을 자랑하듯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지금은 여러
가지 상황 때문에 도저히 나갈 수 없다는 것이지요. 직장의 일로 인해 너무
바쁘고 피곤해서, 성당 안에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생겨서, 성당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잘 사는 것 같아서, 죄를 너무 많이 져서 감히 성당을
다닐 수 없었다는 이유들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참으로 조금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이유로 냉담을 시작하시는
분들의 대부분이 점차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부정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도대체 어디 계시는지 모르겠다고 하고, 세상 일이 먼저이지
어떻게 하느님의 일이 먼저가 될 수 있느냐고 하면서 자신의 지금 모습이
옳다는 말씀들을 하십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하느님을 몰랐던 사람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이제는 그저 왕년에 열심히 다녔었던 그리스도인일
뿐으로 전락합니다.
이렇게 신앙적으로 주님을 떠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문득 엠마오로
향하던 제자의 모습이 떠올려집니다. 그들은 엠마오로 가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주님의 부재로 인한 걱정과 어려움, 실망 등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계셨던 예루살렘을 등지고 엠마오로 향하게 했던
것입니다. 이 모습처럼 많은 현대인들도 삶에 대한 걱정과 어려움, 실망 등을
토로합니다. 그리고 똑같이 주님을 등지고 세상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세상이 그 걱정과 어려움, 실망 등을 해결해주었을까요?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 역시 자신들이 가지고 있었던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문제의 해결은 주님을 받아들이고 대화를
나누면서 비로소 가능해졌습니다. 여기서 인상적인 부분은 예수님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떠난 지 딱 3일밖에 되지 않았는데
예수님을 못 알아볼 뿐만 아니라 이방인 취급을 하는 것입니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일까요? 바로 주님을 떠나면 곧바로 잊어버리고 나와 상관없는 사람
취급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인 것입니다. 냉담자들이 이제 과거의
한 사건 정도로만 취급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면서 대화를 나눕니다. 이를
통해 그들은 마음이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눠주시는 빵을 받았을 때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이제
세상의 눈이 아닌,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의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른
방향을 바꿔서 다시 주님을 향해야 합니다. 주님과의 대화인 기도를 통해,
또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성경을 통해서, 주님께서 직접 제정해주신 미사를
통해 우리들은 세상의 눈에서 벗어나 믿음의 눈을 갖출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의 눈만이 주님을 진정으로 알아보고, 이를 통해서만 큰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내 안에 빛이 있으면 스스로 빛나는 법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내부에서
빛이 꺼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일이다(알버트 슈바이처).
엠마오에서의 예수님과 제자.
마음마저 전염되면...(박재규, 내 삶의 힌트 중에서)
걱정이 가득한 사람과 있으면 걱정이
불평이 가득한 사람과 있으면 불평이
불만이 가득한 사람과 있으면 불만이
전염되고,
웃음이 가득한 사람과 있으면 웃음이
열정이 가득한 사람과 있으면 열정이
사랑이 가득한 사람과 있으면 사랑이
전염된다.
멋있는 시인 것 같습니다. 정말로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다른 사람에게
전염시킬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어떤 것을 전염시키고
있습니까? 혹시 나만 가지고 있는 것이 억울하다면서 나쁜 것만 전염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 각자가 좋은 것만을 전염시키기 위해 노력한다면 어떨까요? 그래야
이미 왔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가 비로소 완성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엠마오라고 추정되는 라투룸의 경당.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부활 팔일 축제 내 수요일
2016년 다해 3월30일 부활 팔일 축제 내 수요일
오늘은 ‘빈 무덤’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무덤에서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다락방’에서
보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보았습니다. 어떤 이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부할 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렇다면 ‘빈 무덤’은 무엇일까요 내가 주님을 보지 못할 만큼 영적으로
메마른 것은 아닐까요 내가 신앙인이라고 하면서 세상의 것에 마음을
빼앗기는 병에 걸린 것은 아닐까요
공주병과 왕자병에 걸린 사람은 이웃의 모습에 있는 하느님의 모상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흔히들 말하는 ‘갑질’을 하곤 합니다. 이병은 많은 배운
사람, 많이 가진 사람들에게 자주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마르타 중독증입니다. 활동을 할 때는 성당에 잘 나옵니다. 구역장, 반장을
하고, 레지오 단장을 하고, 사목위원을 하고, 주일학교 교사를 하는 중에는
잘 나오지만 활동을 멈추면, 이사를 가면 잠수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마리아처럼 주님의 발치에서 머물지 못하였기 때문에 활동이 멈추면
신앙도 식어버리곤 합니다.
남들에 대한 험담과 비난을 즐겨하는 병입니다. 이 병은 성직자와
수도자들도 잘 걸리는 병입니다. 사랑을 말하면서 사랑을 실천하지
못합니다. 겸손을 말하면서 대접을 받으려고 합니다. 희생과 봉사를
말하면서 행동으로 옮기지 못합니다. 자신의 지식을 포장해서 남을
비난하는 사람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빈 무덤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내 마음이 빈 무덤이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볼 수 없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예수님을 보려는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처럼 회개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처럼 주님께로 마음을 열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열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알에서 깨어나는 병아리의 모습에서도, 봄에
피어나는 새싹에서도, 어린아이의 맑은 얼굴에서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가까이 갈 수 있고, 그들의 모습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 부활의 참된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하늘만 보아서는 부활의 의미를 찾을 수 없습니다. 마음이 빈 무덤이어서는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복음 3덕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길이기 때문입니다. 복음 3덕은 정결,
가난, 순명입니다.
독신은 단순히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있는 것입니다. 혼사 살면서 권위적이고 교만하며 자신 밖에
모른다면 그것은 참된 독신이 아닙니다. 가정을 가졌어도 하느님이 삶의
중심에 있다면 정결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혼자 사느냐가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가난은 영혼을 맑게 만드는 ‘향기’와 같습니다. 교회가 부유해지면, 사제의
삶이 부유해지면 그리스도의 향기는 사라지게 됩니다. 사제는 병든 이,
가난한 이, 외로운 이, 장애인, 독거노인, 냉담자를 우선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모든 것을 가지셨지만 스스로 가난함을 선택한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순명은 좋은 것만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도 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 가셨듯이, 고난의 잔을
마셨듯이 나쁜 것도 괴로운 것도 주님을 위해서 따르는 것이 참된
순명입니다. 신자들 때문에, 주교님 때문에, 시간을 잘못 만나서, 친구들
때문에 핑계를 대는 것은 참된 순명이 아닙니다. 사제는 언제 어디서나
주님의 부르심에 ‘예’라고 응답해야 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벅찬 감동을 얻어서
주님과 함께 지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은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가는 길과 비슷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에게 엠마오는 더 이상 의미도
가치도 없어졌습니다. 그들에게는 이제 예수님께서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라면 그곳이 언제 어디서이든지 엠마오가 되는 것입니다.
본당 신부로 있어도, 학교 교수 신부로 있어도, 교구청에 있어도, 병원의
원목으로 있어도, 교포사목을 해도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는다면 그곳은
엠마오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듣고 변화된 삶을 살아간다면
그곳은 바로 엠마오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추구하는 하느님 나라도
어쩌면 그와 같을 것입니다. 돈으로, 명예로, 권력으로 가는 곳이 아닙니다.
오늘 내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변화된 삶을 산다면 내가 있는 이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여러분 가운데 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예수님의 부활이 핵심주제
2016년 다해 3월30일 부활 팔일 축제 내 수요일
예수님의 부활이 핵심주제
옛날이나 지금, 아니 지금은 더 많이들 속고 살아서 믿음이 굼뜹니다.
예수님을 믿는 핵심주제는 부활입니다. 그 외 전부는 다 안내입니다.
구약성경 방향이나 성탄 기적 가르침 수난 등 모두 향(向)부활입니다.
창조 후 종말까지 인간 중에 예수님 딱 한 인물뿐 전혀 없을 겁니다.
성경도 예술(음악 미술)도 서력기원도 인간 존엄성도 주님부활 때문!
주님부활향이면 평화이고 아니면 인류역사는 물욕전쟁뿐 확실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루카 24,25~26)”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도회] 영혼의 불을 지피는 사랑의 동행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3월30일 부활 팔일 축제 내 수, 루카 24,13-35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시자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루카 24,30-31)
영혼의 불을 지피는 사랑의 동행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에 이르는 수난 사건에 대하여 얘기하며 엠마오를
향해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들은 메시아라고 믿어왔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것을 보자 허망함과 당혹감, 깊은
실망과 좌절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수난의 현장인 예루살렘을 떠납니다. 인류 구원을 위한 죽음의
뜻을 깨닫지 못한 그들은 주님의 죽음을 실패라 여기며 거기서 떠나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포기와 체념과 절망을 안고 엠마오를 향해 걸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는 하느님에 대한 그리움과 예수님 없는
외로움이 더 짙게 깔려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이 다가오시어
허망함과 절망의 길을 함께 걸으시려고 다가가십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눈이 가려져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가난한 이와 병든 이를 고쳐주실 때나
수난하시고 죽으시어 부활하신 뒤에도 늘 변함없이 나에게 다가오시어
함께 해주십니다. 일상의 삶, 인생 여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세 걱정과 근심, 인간적인 감정들, 세상의 가치 기준, 물질에 대한
탐욕과 이기심, 명예욕, 고통 등에 매여, 다가오시어 부르시고 함께하시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24,26)고 하시며 성서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설명해주십니다. 그제서야 제자들의 마음이 뜨거워집니다(24,32).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희망과 사랑, 참 평화가 깃든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준비를 시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시어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시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봅니다(24,30-31). 그들은 길에서 말씀으로 마음을 타오르게 하신 분이
바로 부활하신 주님임을 깨닫고 영혼의 어두운 터널을 벗어나 이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우리도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처럼 수난에 배어있는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을
깨닫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곁에서 늘 함께 하시며 사랑해주시고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어주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함께해주시며 나의 고통과 절박한 죽음의
상황에서도 힘을 주시고 희망의 빛을 비춰주심을 믿어야겠습니다.
나의 삶은 인간적 약함과 죄성 때문에 엠마오를 향한 길일 수 있으나 그곳이
종착점은 아닙니다. 함께 해주시는 주님 때문에 엠마오는 예루살렘을 향한
은총과 축복의 길, 사랑과 희망의 길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무엇이든 ‘내가
한다’는 착각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지금 당장, 그리고 눈에
보이는 현상 속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찾으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하루 내 삶의 엠마오에서 주님의 사랑을 떠올리고, 하느님의 눈으로
고통과 불의와 비인간적 상황을 바라보았으면 합니다. 아픔과 슬픔,
억울함과 좌절을 안고 엠마오길을 걷고 있는 이웃에게 다가가 따뜻한 미소,
애정어린 말, 관대한 배려로 동행하며 함께 예루살렘으로 되돌아
가야겠습니다. 알렐루야!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3월30일 부활 팔일 축제 내 수요일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루카 24,32)
오늘날 교회 안에 냉담자가 엄청 많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접하고 감동하고 또 가톨릭 교회와 신앙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었는데
언젠가부터 신앙생활에 회의가 오고
성직자, 수도자, 교우들의 삶도 알아갈수록
더 실망하게 되면서 냉담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이들을 어떻게 다시 아름다운 신앙생활로 되돌아오게 할 수 있을까요?
우리 교회 구성원 모두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엠마오의 두 제자가 그 답을 제시해 줍니다.
엠마오의 제자들이 바로 한때 열심히 예수님을 따랐지만
예수님께서 힘도 못쓰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자
실의에 빠져 고향으로 내려가던 사람들입니다.
오늘날의 냉담자들이지요.
그런데 이 에피소드의 결론은 이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으로 기쁘게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며 함께 대화했습니다.
그런 대화 가운데 예수님께서 동행하시며 개입해 주십니다.
그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성경구절들을
들려주시며 묵상하여 깨닫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빵을 나눌 때 눈이 열려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고 기쁨과 뜨거운 열정에 사로잡히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다른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체험을 나눕니다.
그렇습니다. 말씀과 성체를 통해서만
깨달음을 얻을 수 있고 믿음의 눈이 열릴 수 있습니다.
오늘 미사성제를 봉헌하면서 냉담자들을 기억합시다.
그들이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함께 대화로 나누며
말씀과 성체를 나눔으로써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나뵙고
신앙의 기쁨을 회복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루카 24, 29)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다해 3월30일 부활 팔일 축제 내 수요일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루카 24, 29)
예수님의 부활은 소박한 방문자같은 소박한 일상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엠마오 제자들처럼 따뜻한 마음으로
초대하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부활의 방문객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일상을 더욱
아름답게 변화시켜 주십니다.
부활을 통해 알게된 것은 일상이라는 엄청난
신비에 눈 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믿음과 일상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결합체입니다.
믿음이란 선물은 예수님을 통해 타오르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어떤 마음으로 우리가 먹고 마시고 대화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시간은 전혀 다르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부활은 추상적인 것이 결코 아닙니다.
부활의 선물은 언제나 지금 이순간입니다.
빵을 떼어 나누는 식탁에서 말씀을 들려주시는
길위에서 부활은 구체적인 지금 이순간이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라면 언제나 불타오를 수 있는
우리의 시간이며 우리의 일상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하나로 모으십니다.
부활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이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우리의 일상안에서 만나는
뜨겁고 따뜻한 하루되시길 기도드립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청주] 그분이 열어 주신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다해 3월30일 부활 축제 내 수요일
<빵을 떼실 때에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 루카 24,13-35
그분이 열어주신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는 것은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무슨 특별한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나를 위한 사람이 내 옆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감사할 뿐입니다. 마음에 있는 얘기는 기회가 되면 할 것이고 지금은
묵묵히 있는 것이 좋습니다. 큰 일을 치루고 난 후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침묵 속에서 주님의 뜻을 찾는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지금은 입을 다물
때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오늘은 할 말을 잃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무기력하게 죽었으니 모든 기대와 희망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러니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참히 돌아가시고 더더욱 그
시신까지 없어졌으니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은 더 이상 예루살렘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늘과 같은 스승이 힘없이 사라졌으니
거기에 있다가는 어떤 불똥이 튀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서둘러 그
자리를 떠야 했습니다. 사실 무덤이 비었다는 것은 ‘고난을 겪은 다음에
자기 영광 속에 들어가리라’는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말해
주었지만 그것을 알기까지는 아직 눈이 뜨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큰
실망과 좌절만이 더하였습니다. 실망이 큰 만큼 기쁨이 크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동행하시면서 성경 말씀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마음에 뜨거운 감동을 일으키고 결정적으로
제자들은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자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습니다. 지금 당장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지만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깨우침이 남아있었는가 봅니다. 나그네를
묵어가라고 붙들었으니 말입니다. 일찍이 ‘아브라함은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천사를 대접’(창세18,1-15)하는 기쁨을 차지했습니다.
제자들은 마침내 나그네와 함께 식탁에 앉게 되었고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알아보기가 무섭게 그들에게서 사라지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이 알 것을
알았으니 더 이상 거기 남아계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또한 제자들도 가던
길을 되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하였고
거기서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 뵙게 된 일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결국 주님께서 먼저 알려 주셔야 그분을 알 수 있고, 우리도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눈이 뜨인다는 깨우침을 얻게 됩니다. 성경 풀이를 듣고
가슴이 뜨거워졌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또한 나그네를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가? 를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삶의 절망 한가운데에서도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하였던
제자들처럼 주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시련과 고통의 어두움 속에서도
주님께서는 우리와 동행 하십니다. 다만 내 아픔이 커서 그분을 알아보지
못할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나와 동행하시면서 마음을 열어 주시고
뜨겁게 해주시지만 지금 당장은 눈이 가려져서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꼭 붙잡으십시오. 어둠 속에서도, 절망 가운데에서도
주님을 붙잡으십시오.
주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붙잡기만 하면 언제든지 함께
묵으십니다. 예레미야 예언자의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 주리라”(예레1,8).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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