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을 사랑하는 근본은 아껴쓰는 데 있고, 아껴쓰는 근본은 검소하게 말하는 데 있다. 검소한 연후에나 능히 청렴할 수 있고, 청렴한 연후에나 능히 자애로울 수 있으니, 검소한 자가 되는 그 자체가 백성을 다스리는 수장의 의무다.
이 편지가 번화가에 떨어져 나의 원수가 펴보더라도 내가 죄를 얻지 않을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써야 하고, 또 이 편지가 수백 년 동안 전해져서 안목 있는 많은 사람들의 눈에 띄더라도 조롱받지 않을 만한 편지인가를 생각해야 한다.[3]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
법학, 철학, 통치학부터 과학, 실용학까지 '높은 수준'으로 '다양한 것들'에 몰두했던 조선 역사상 손꼽히는 천재
조선 전기의 퇴계 이황, 율곡 이이에 이어,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학자
조선의 문신(文臣)이자 학자. 1762년[4] 경기도 광주부 초부면 마재리(現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나주. 자 미용(美鏞)·송보(頌甫). 초자 귀농(歸農). 호 다산(茶山)·삼미(三眉)·여유당(與猶堂)·사암(俟菴)·자하도인(紫霞道人)·탁옹(籜翁)·태수(苔叟)·문암일인(門巖逸人)·철마산초(鐵馬山樵) 등이 있다.
나라에서 내려준 시호는 문도(文度).박사
마침내 178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등용되었으나 가톨릭교인이라 하여 탄핵을 받고 해미에 유배되었으나 10일만에 풀려난다. 1792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거중기를 개발하여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성제와 기중가설을 지어 올려 축조 중이었던 수원화성 수축에 기여하였다. 단순한 유학자를 넘어 당시로서는 매우 수준높은 기계공학자이기도 하다. 보통 산업혁명 이전시대의 철학자들이 공학자이기도 한 경우가 제법 많았다. 아리스토텔레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등도 있다.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경기도 관찰사 서용보, 연천 현감 김양직의 비리를 고발하여 파직시키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7] 허나 이 일은 후에 그의 발목이 잡히는 큰 계기가 된다. 서용보는 이 때 파직되었음에도 화려하게 부활하여 후에 44세의 젊은 나이로 우의정(즉, 삼정승)의 반열에까지 오른다. 순조와 정순왕후 김씨의 총애가 깊어 이를 기반으로 권세를 휘두른다고 당대 유생들에게 비난을 듣기도 했다. 훗날 정조의 실록을 편찬하는 편찬위원에까지 참가하게 된다... 그리고 말 그대로 죽을 때까지 정약용을 괴롭힌다.
이후에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801년(순조 1) 신유박해 때 그의 두 형과 함께 장기에 유배되었다. 노론에서는 정 씨 형제들을 제거하려 했으나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만 순교를 택하고, 정약전과 정약용은 배교하여 사형에서 유배로 감형되었다. 유배지는 경상도 장기현(현재 포항시 장기면)이었다. 이후 정약용의 큰형 정약현의 사위인 황사영이 일으킨 황사영 백서 사건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이 강진이 그의 외가가 있는 지역이었고, 외가의 장서량이 상당했기에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할 수 있었다. 정약용의 외가는 해남 윤씨다. 해남에 있는 녹우당이 해남 윤씨의 종가로, 자체적으로 장서를 수집해 만권당이라는 장서각을 지어놓았다. 바로 이 집안이 고산 윤선도와 공재 윤두서의 종가다. 따라서 신위를 불태워 순교한 윤지충 바오로, 권상연 야고보는 정약용과 먼 외가 친척사이가 된다.
처음에는 정치제도를 새롭게 수립하는 방례초본을 만들었으나, 자신의 처지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근본적 제도개혁은 포기하고 기존 제도의 개정을 논하는 <경세유표>를 썼다. 목민심서는 지방관이 부패하지 않도록 권고하기 위한 책이고, <흠흠신서>는 공정한 재판을 논한 책이다. 실학뿐만 아니라 조선의 유학 전체를 아우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18년이라는 오랜 기간동안 유배되어 그동안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당연히 연구의 성과가 나타나는 유배 후반기에 탈고된 것이 많다. 그를 공격한 노론 벽파가 몰락했지만 당시 정국에는 한바탕 평지풍파가 일어났었기에 조정에서는 정약용의 유배를 잊어버리고 석방하지 않았다. 아들들이 가끔 석방을 위해 격쟁 즉, 왕의 행차에 꽹과리를 치면서 왕에게 억울함을 호소한 기록도 있고, 그의 죄안을 삭제하려다가 도리어 공격당하는 기록도 있다.
이후 1818년 8월에 18년동안의 귀양살이를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저술 활동에 힘쓰며 여생을 보내다 1836년 2월 22일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74세. 여담으로 정약용이 사망한 날은 다름 아닌 60주년 결혼기념일(회혼일)이었다고. 정약용이 죽은 2년 후에 부인도 세상을 떠났다.
그를 괴롭혔던 서용보는 영의정까지 올랐으며 정약용이 석방되자 일부 대신들이 벼슬을 주어야 한다는 것을 결사반대했다. 순조에게도 총애를 받던 터라 권세를 휘둘렀다가 1824년 66세로 사망했다.
3. 사상과 학문[편집]
그는 유학자 겸 실학자 겸 정치가 겸 법과 형사재판, 그리고 법의학에도 일가견이 있으며 지리학과 의학에도 손을 댔으며 언어학자, 아동교육학자, 필력 좋은 작가 겸 시인, 건축가, 이하 다수라고 할수 있겠다. 그야말로 만능 프로페셔널.
3.1. 유학[편집]
기본 베이스가 유학자인만큼 사서 육경에 관한 해석들이 있다.
경세유표 (1808년) : 정조를 성인으로 여기며, 그와 같은 시대에 태어난 것에 대해 감사해했던 사람이 정약용이다. 그런데도 그는 이 책에서 규장각, 장용영, 초계문신의 존재를 모두 비판한다. 특히 초계문신의 경우에는 자신의 경험을 살려, 학문과 정치의 자유로운 소통을 막는 제도라고 혹독하게 비판한다. 이렇듯 그는 사사로운 인연에 얽매이지 않고, 성역없이 비판했다
국가 행정론, 목민심서는 지방 행정론으로 관리가 백성을 다스릴 때 취해야 할 자세를 적었다.
마과회통 (1798년) : 종두법에 대해 다룬 의학서다. 엄밀하게는 마과회통의 주 내용은 마진, 즉 홍역에 대한 연구를 다룬 의학서이며 이 책에 부록으로 박제가와 같이 연구했던 종두법이 수록되어 있다. 이 뒤에는 자식들을 천연두로 잃은 안타까움이 서려 있다. 정약용 본인부터 어릴 적에 천연두를 앓다가 당시 천연두 치료로 이름이 드높았던 이헌길의 치료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오른쪽 눈썹에 마마 자국이 남아 눈썹이 셋으로 나뉘어 훗날 '삼미(三眉)'라 불리었고, 6남 3녀를 뒀는데 4남 2녀를 잃었다.
타맥행(보리타작노래) : 국어 부문에서도 이름이 종종 보인다.
3론 : 나라의 근본은 백성이라는 주장도 펼쳤다. 현대에 와서 당연하지만 옛날로서는 조금 위험하다는 발언도 있는데 옛날부터 그랬다. 맹자의 역성혁명도 관계있다.
흠흠신서 (1822년) : 형조 계열의 작품으로 형리에게 공명정대한 판결을 위해선 뭘 해야하는가에 대해 조언했다.
아방강역고 (1811년-1813년) : 지리서. 한국의 역대 강역에 대한 연구서이다.
아언각비 : 국어 연구 계열 작품으로 출처가 모호하거나 와전된 언휘 200여 개를 정리한 것으로 거의 박물지 수준이라고 칭해진다.
아학편 : 천자문이 어린이들한테는 어렵다 싶어서 쉽게 볼수 있는 사물 관련 어휘 2,000개를 상 하로 나누어서 만든 어린이용 한자단어책이다.
정약용은 유학자 중에서도 주자의 사서집주를 주체적으로 비판하기도 하여 보통 실학자로 분류된다. 그러나 성리학을 근본으로 부정한 인물은 아니다. 다산의 저서의 내용 자체가 성리학의 기본적인 전제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 책도 안 읽어보고 지레짐작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