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0118. 묵상글 ( 연중 제2주간 목요일. - 사랑의 바다로. 등 )
----------------------------------------------------
240118. 연중 제2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사랑의 바다로
내가 하느님을 진정 사랑한다면 사람들이 내게 오지 않고 하느님께 몰려가도
조금도 슬퍼하지 않고 시기하지 않음은 물론 오히려 크게 기뻐할 것입니다.
내가 이웃을 진정 사랑한다면 그들이 나를 사랑하지 않고 하느님을 사랑해도
그를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잘하는 거라고 칭찬하고 여전히 사랑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을 묵상한 내용입니다.
복음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들고,
주님께서는 그들의 병을 모두 고쳐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 사랑의 업적을 숨기려고 하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사랑과 업적을 소문내지 말라고 엄명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왜 이러시는 겁니까?
꼭 이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이렇게 하심이 주님께서 겸손 떠시거나
당신을 더 높이시려는 인기 전술이거나
괜히 그러시는 것이 아니고 진심이라면
사람들의 사랑을 아버지께 돌리기 위해
당신께는 머물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신 사랑을 숨기는 이유는 사람들의 사랑이 당신께만 머물지 않게 하려는 것이고,
그 목적은 사람들의 사랑이 당신을 넘어 아버지 하느님께로 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절절한 예가 될지 모르겠지만
더 큰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정이 들었지만 좁은 고향을 떠나야 하고,
더 큰 스승을 만나도록 세례자 요한은 자기 제자들을 주님께 넘겨야 하며,
자식이 평생의 짝을 만나기 위해서는 부모 곁을 떠날 수 있게 해야겠지요.
그런데 만일 아들을 너무 사랑하여 마마보이가 되게 하고,
자기를 떠나지 못하게 한다면 진정 아들을 사랑하는 엄마가 아니겠지요?
만일 이렇게 한다면 아들을 사랑하는 것은 맞지만
아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것이며
결국 참사랑이 아니라 욕심이요 애욕이겠지요.
이런 애욕은 사랑하는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자기도 불행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그 사랑 안에 가둘 뿐 아니라 자기도 그 사랑에 갇히기 때문인데
그런데 이런 사랑만큼 지옥도 없습니다.
옛날 노래에 ‘창살 없는 감옥인가 만날 수 없네’라는 노래가 있는데
애욕이야말로 창살 없는 감옥이고 가장 고통스러운 지옥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무엘기는 또 다른 사랑 욕심에 관한 얘기입니다.
여인들의 사랑이 자기한테서 다윗에게로 향하자 사울이 시기 질투하는 얘기입니다.
어른이고 왕인 자기가 그 어린애를 두고 시기 질투하니
그런 자신이 얼마나 한심하고 그 마음은 얼마나 지옥이겠습니까?
그런데 그 감정이 오죽 복잡하고 지독하면 죽여야겠다고 마음먹기까지 하겠습니까?
요즘 데이트 폭력이니 스토킹이니 하는 말이 무성하고,
그런 사랑에서 비롯된 살인이 빈번한 것이 다 이런 사랑의 현상입니다.
애욕이란 시기 질투하게 하고 가질 수 없으면 죽여 없애버리게 하지요.
그런데 제 생각에 이것이 다 넓은 사랑의 바다에 도달하지 못한 사랑 때문입니다.
이런 사랑은 마치 사랑이 수족관에 갇힌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바다와 같은 하느님의 사랑에 도달하면
인간의 하찮은 사랑에 매이지도 갇히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 안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모두 사랑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니 나도 하느님 사랑에 도달하고,
너도 하느님 사랑에 도달하도록 우리는 사랑으로 서로 가두지 말 것입니다.
----------------------------------------------------
240118. 연중 제2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나를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마르 3,12 참조)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전해들은 이들이 온 유다뿐만 아니라 주변의 여러 곳에서 몰려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십니다. 그들이 치유를 받고자 몰려왔지만, 예수님의 참 모습을 알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작 악령들은 예수님을 보기만 하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마르 3,11)라고 외쳐댑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엄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마르 3,12 참조)
사실, <마르코복음> 곳곳에서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에게 뿐만 아니라, 치유 받은 이들과 제자들에게도 함구령을 내리시며 당신의 신원을 장막으로 가리십니다.
왜 일까요? 당신이 메시아임을 세상에 드높이 선포해야 함이 마땅할 터인데도, 왜 당신의 신원을 꼭꼭 감추실까요? 심지어는 당신의 가르침마저도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마르 4,12)라고 말씀하실까요? 사실, 야훼 하느님께서도 파라오를 마음이 완고하게 하셨고,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서는 “백성의 마음을 무디게 하고~ 돌아와 치유되는 일이 없게 하여라.”(이사 6,10)라고도 하셨습니다.
대체 왜 이처럼 알리지 못하게 할까요? 그것은 ‘때’가 아닌 까닭이었습니다. 곧 당신의 참된 모습이 드러날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눈이 가려져 있어, 아직 예수님의 진면목(참된 모습)을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마르코 복음>은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마르 1,1)이라는 말로 시작되지만,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진실한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는 곳은 엄밀한 의미에서 딱 한 군데 밖에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때 그곳’에서 비로소 예수님께서 함구령을 내린 그 신원이 밝혀질 것입니다.
‘그때’가 언제인가?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때’ 입니다. 그때, 마침내 십자가 아래에서 백인대장은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 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십자가’를 관상할 때라야 신앙의 눈이 열리고, 비로소 당신을 참되게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성전을 가리고 있던 ‘휘장’이 찢어지면서, 그 비밀의 신비가 드러납니다. 곧 성전을 가리고 있던 ‘휘장’이 찢어지듯, 우리 자신이 만들어 놓은 우상의 하느님이 부서지고서야, 비로소 예수님의 진면목(참된 모습)이 드러납니다. 그제야,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보고서야,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미사 중에, ‘휘장’이 찢어지듯 찢어진 그분의 살과 피를 마시며, 그 사랑 안에서 하느님의 아드님 우리 주님을 관상할 수 있는 은총을 구합시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당신을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마르 3,12)
주님!
저의 무지를 깨우쳐주소서.
당신의 참된 모습을 알아볼 수 있는 신앙의 눈을 열어주소서.
완고함의 장막을 부수소서.
십자가에서 드러내신 당신의 신비를 따라 살며
당신 십자가에 저를 매달고 사랑으로 살게 하소서. 아멘.
----------------------------------------------------
240118. 연중 제2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지금은 염불할 때입니다
“소문은 발 없이 천리를 간다.” 그리고 소문은 퍼지는 과정에서 불어나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소문이 널리 퍼져서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습니다. 그야말로 예수님의 인기가 대단하였습니다. 스스로 당신을 소문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알렸습니다.
그러나 일반 서민들로부터 많은 지지와 호응을 받았고 당시 유다의 지도자층에 속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 그리고 헤로데 사람들에게는 완강히 거부되었습니다. 심지어 악의를 품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없애버릴 방법을 모의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한적한 호숫가로 물러가셨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러 지역에서 모여들었습니다. 그야말로 ‘꿀과 향이 있으면 벌 나비가 모여드는 법’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습니다. 이제 군중과 일정한 거리를 두신 것입니다. 악령들은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보고서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지만, 일반 사람들은 자신들의 병 치유만을 바라며 몰려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욕심 때문에 예수님의 정체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으니, 예수님의 진면목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거룻배를 통하여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도 거룻배를 준비하는 몫은 당신을 추종하는 제자들에게 맡김으로써 그들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셨습니다.
인기가 좋을 때 한발 물러서지 않으면 인기에 빠져 자기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따라가게 되며 자기의 본래의 모습은 어디 가고 껍데기만 화려하게 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거룻배를 준비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 안에 머무는 방법이었습니다. 인기란 믿을 수 없는 것이고, 믿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인기에 편승하면 그것은 자살 행위와 같습니다. 사실 인기가 결코 성공은 아닙니다. 따라서 한발 물러설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 정체성을 지키는 것은 깨어있는 사람이라야 가능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르3,12).하는 신앙고백이 사람들의 입에서 나와야 할 터인데 악령에게서 먼저 나왔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셨습니다”(마르3,12). 사람들이 눈을 떠 당신을 제대로 알아볼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악령은 자신이 보호받기 위해서 아부하고, 사람들은 자기 안에 갇혀 볼 것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욕심을 부리면 그분이 보이지 않고 은총의 열매에 매달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욕심을 버림으로써 은총의 열매보다도 언제나 은총을 베풀어 주실 주님을 제대로 만나야 하겠습니다. 사실 지금은 잿밥에서 눈을 돌려 염불할 때입니다. 군중을 모으는 것, 신자수를 늘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적으로 채워져서 주님의 뜻을 알아듣고 또 그대로 행하는 것이 필요한 때입니다. 거기에 향기가 있고 향기가 있으면 사람이 모이게 됩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곳에 주님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240118. 연중 제2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것은 남이 잘 되는 것을 함께 기뻐하지 못하는 사람의 심성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이런 심성을 ‘시기’라고 말합니다. 시어머니가 맏며느리를 예뻐했는데 둘째 며느리가 들어오자 둘째 며느리를 더 예뻐할 때 시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 했던 맏며느리는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이런 마음의 상태를 ‘질투’라고 말합니다. 시기와 질투는 비슷한 면이 있는 인간의 감정입니다. 시오노 나나미는 시기와 질투를 이렇게 구분하였습니다. “시기는 갖지 못한 사람이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는 것이고 질투는 가진 사람이 그것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시기와 질투에 대한 명언들이 있습니다. “시기는 증오보다 더욱 비타협적이다. 시기심은 살아 있는 자에게서 자라다 죽을 때 멈춘다. 우리들의 불행을 마음속 깊이 애통해 주는 사람은 단 하나뿐이지만, 우리들의 성공을 마음속 깊이 시기하는 사람은 몇 천 명이나 있다. 녹이 쇠를 좀먹듯이, 질투는 그것에 사로잡힌 영혼을 병들게 한다. 인간에게 보편적 특성이 있다면 그것은 성공한 사람에 대한 악의와 증오, 그리고 어떻게든 그를 정상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려 하는 열망이다. 질투는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도 올바로 보지 못한다. 질투는 휴일이 없다. 너희는 다른 신을 예배해서는 안 된다. 나의 이름은 질투하는 야훼, 곧 질투하는 신이다.”
아담이 ‘교만’함으로 하느님을 거스른 죄를 원죄라고 합니다. 카인이 ‘시기와 질투’로 동생 아벨을 죽인 것은 인간이 인간에게 범한 최초의 죄입니다. 그만큼 시기와 질투는 공동체를 갈라놓고, 분열시키는 힘이 강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스라엘의 왕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고 질투하였습니다. 다윗이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다윗이 이민족의 침입을 잘 막았는데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다윗의 친구이자 사울의 아들인 요나탄은 아버지에게 다윗을 죽이지 말아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사울은 아들의 말을 듣고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고 하지만 시기와 질투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사울의 시기와 질투는 사울의 비참한 죽음으로 끝을 맺게 됩니다. 부끄럽지만 저도 시기와 질투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저는 교구의 인사이동으로 본당을 옮겨 다녔는데 한 번도 강남으로 간적이 없었습니다. 중곡동, 용산, 세검정, 제기동에서 보좌신부로 지냈습니다. 모두 강북에 있습니다. 처음으로 본당 신부가 되어서 간곳은 경기도 파주에 있는 적성성당이었습니다. 동창 신부님들은 대부분 강남과 강북을 오가면서 사제생활을 했는데 저는 강남스타일이 아닌 것처럼 강북에만 있었습니다. 강남에서는 지내지 못했지만 미국 뉴욕에서 5년째 지내고 있으니 저는 뉴욕스타일이 맞나 봅니다. 시기와 질투보다 약한 것이 ‘부러움’인데 그 정도는 하느님께서도 애교로 봐 주실 것 같습니다.
불행은 불평의 문으로 들어옵니다. 원망은 오해의 문으로 들어옵니다. 욕심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 같습니다. 채우면 채울수록 더 큰 갈증이 생깁니다. 시기하고 질투하면 악의 세력이 자리를 잡습니다. 카인은 동생 아벨을 시기하고 질투하였습니다. 사랑하는 동생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사울은 충실한 다윗을 시기하고 질투하였습니다.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느님께 받은 축복을 잃어버렸습니다.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따르는 예수님을 시기하고 질투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새로운 가르침과 표징을 시기하고 질투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율법과 계명의 그물로 예수님을 가두려고 했습니다. 이런 일은 성서에만 있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있습니다. 많이 가진 사람도, 많이 배운 사람도 시기와 질투라는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는 걸 봅니다. 신앙인들도 쉽게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움켜진 손을 펴 주셨습니다. 우리는 많은 것들을 움켜쥐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시기와 질투, 명예와 권력, 자존심과 욕심’이런 것들을 움켜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움켜쥐면 쥘수록 우리는 세상에서 덮쳐오는 풍랑을 이겨내기 힘든 것이라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 주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가면 우리들 또한 풍랑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버리는 삶입니다. 주는 삶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
240118. 연중 제2주간 목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강원도 어느 산간 지역에 용한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을 만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병이 났고, 자녀들이 대학에 철썩하고 붙고, 사업이 번창한다고 합니다. 진짜 이런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그 사람을 한번 만나보고 싶지 않을까요? 그래서 내가 하는 고민을 다 들어달라고 하지 않을까요?
오늘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유다 지방에서부터 이방인들의 지역에까지 모든 사람이 사방에서 몰려듭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잡으려고 말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지극히 사람다운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 시대의 사람들에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기적을 바라십니까? 그러면 주님 시대의 사람들처럼 산을 넘어 강을 지나 사막을 걸어서 예수님께 오십시오. 주님을 찾아 나서십시오.
사람들은 주님의 소식을 사람들이 들었습니다. 그곳에 가면 기적이 일어나고 행복이 생기고 희망이 생긴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길을 떠납니다. 물 조금, 빵 조금을 가슴에 품고 길을 떠납니다. 들판을 지날 때도 예수님만을, 강을 지날 때도 예수님만을 사막을 지날 때도 예수님만을 생각합니다. 배고픔도, 추위도, 쉬고 싶은 것도 잊은 채 말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눈을 감고 기도합니다. 혹은 묵주 알을 굴리면 기도합니다. 그런데 잠시입니다. 우리는 유혹을 만납니다.
오만가지 생각, 걱정이 주님께 가고자 했던 우리의 마음을 가로막습니다. 그러고는 길을 잃게 만듭니다. 기도하면서도, 걷고 있으면서도 어디로 가는지 무슨 기도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없게 됩니다.
그렇게 순식간에 우리의 주님께 가고자 하는 마음은 세상 것에 빼앗기고 마는 것입니다.
주님을 찾아 나서십시오. 그분만을 바라보며 걸어가십시오. 그곳에 기적이, 평화가 있습니다. 아멘.
------------------------
보이스 피싱
어제는
오후 늦은 시간
직원분들과 간식을 먹었습니다.
그렇게 둘러앉아 간식을 먹으며 대화하던 중
‘보이스 피싱’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신의 체험담이 흘러나왔습니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경험담은 모두 달랐습니다.
이런 것도, 저런 것도, 이렇게도, 저렇게도 합니다.
직원분들이 퇴근하고 묵상 글을 쓰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이스피싱 이야기만 해도 수많은 이야기가 나오는데
우리의 영적인 유혹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놓으면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나올까?
영적인 유혹을 서로 이야기하는 피정을 해보면 어떨까?
그냥, 서로의 영적 여정을 들어주는 피정~^^
----------------------------------------------------
240118. 연중 제2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이라는 책을 보면, 20세기 초 황금기를 달리고 있던 미국으로 아메리칸드림을 가슴에 품고 성공을 바라는 청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미국행 배 승선권을 구입하려고 열심히 노동했습니다. 드디어 승선권을 사고서 배에 오른 그는 돈을 아껴야 했습니다. 더는 쓸 돈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돈을 아끼려고 식사 때마다 식당에서 사람들이 남긴 우유와 빵 그리고 치즈 조각을 모아서 끼니를 때우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 광경을 지켜본 식당 지배인이 그가 식사비를 아끼기 위해 그렇게 식사한다는 이야기를 알고는 직접 말해주었습니다.
“손님, 승선권에 식당 이용권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셨어요?”
이 청년은 배에서 굶주림과 싸워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알기만 했다면 그럴 필요가 없었겠지요. 사서 고생한다는 말도 있지만, 굳이 당연하게 누릴 수 있는 것을 누릴 수가 없었습니다. 알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함께함 그 자체로 주님의 축복은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그러나 이를 알지 못하면서 주님과 온전하게 함께하지 못합니다. 당연히 주님의 축복도 깨닫지 못합니다.
주님의 자녀가 됨은 큰 은총과 주님의 큰 사랑을 받게 됩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주님을 아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주님과 함께하는 길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이를 주님께서는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고 또 보여주셨던 사랑은 ‘악’과 타협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철저히 사랑에 집중하면서, 사랑의 삶을 살 때 우리는 주님의 축복 안에서 살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로 많은 사람이 몰려왔습니다. 특히 병자들과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들이 몰려왔지요. 그들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외면받을 수밖에 없었지요. 죄의 결과로 병에 걸린 것이고,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 역시 공동체에서 함께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즉, 사랑에서 제외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은 항상 우리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병을 고쳐 주시고, 더러운 영을 쫓아주셨던 것입니다. 사랑의 삶을 다시 살 수 있도록 이런 은총을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께 다가서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 앞으로 나아가 주님과 함께 살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을 더 알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주님의 은총 안에서 우리 모두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사랑하는 친구들의 기억이 마음속에 있는 한 나는 인생이 좋다고 말할 것이다(헬렌켈러).
----------------------------------------------------
240118. 연중 제2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리의 모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님 만세!”
-오늘 지금 여기 지상(地上)에서 천국(天國)을 삽시다-
여러 단상들로 오늘의 강론을 시작합니다. 수도원의 식사는 대부분 침묵중에 말씀을 들으며 이뤄집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찾는 이들은 거룩한 침묵과 고독을 사랑하고 아끼고 소중히 여깁니다. 수도규칙 독서중 마음에 새롭게 와닿은 다음 구절입니다.
“모든 이는 모든 일에 있어 규칙을 스승처럼 따를 것이며, 아무도 이것을 경솔하게 위반하지 말 것이다. 아무도 수도원 안에서 사사로운 마음의 뜻을 따르지 말아야 한다.”(성규3,7-8)
규칙을 스승처럼 따르라는 말씀이 참 귀하고 아름답습니다. 잘 들여다보면 사랑의 규칙이요 규칙중의 규칙이, 영원히 살아 있는 규칙이, 우리 모두의 중심이신 주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규칙의 준수를 통해 사랑의 주님을 만납니다. 우리는 교회 공동체에서 이런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살아갑니다. 오늘 새벽에 읽은 두 성인의 말씀도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현재의 교회는 미래의 교회가 생겨나기 전까지 고난과 역경 속에서 살 것이며, 의로운 이들은 그 안에서 믿음으로 살 것입니다.”-아우구스티누스
“초기 교회는 영원한 본향을 늘 목말라하며 절제된 삶을 살아갔으며, 마음을 흩어놓는 온갖 세속적인 것들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와 내밀하게 하느님의 법을 날마다 묵상하면서 살았습니다. 이 시기를 기억하여 우리도 우리의 집을 떠나, 다시 말해 세상의 관심사들과 즐거움을 포기하고, 천막에 살아야 합니다.”-존자 베다
일상의 내 삶의 꽃자리에서 평범한 성인이 되어 살라는 말씀입니다. 이제부터는 성인이 되어야 비로소 살 수 있는 날로 거칠고 험한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막의 오아시스같은 성인의 삶입니다. 2024년 2월호 생활성서의 특집은 “옆집의 성인들”이었습니다. 사소한 일을 거룩하게 여기며 이웃의 아픔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는 우리 가까이 살고 있는 옆집 성인들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몇해 전 누구나 옆집의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교황 문헌을 발표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즐겨 행하는 인사말이 있습니다.
“성화되십시오.”
“성인이 되십시오.”
성인이 없다 탄식할 것이 아니라 내가 성인이 되는 것이 더 빠를 것이요 지혜로운 대책이 될 것입니다. 성인중의 성인이, 성인들이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 예수님입니다. 어제 미사시 입당성가 61장도 새로웠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바꿀수는 없네. 이세상 부귀영화와 권세도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신 예수의 크옵신 사랑이여,
세상 즐거움 다-버리고 세상 명예도 버렸네.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바꿀수는 없네, 세상 어떤 것과도.”
어제 오랜만에 병상에서 일어나 공식 집무를 시작한 어느 정치인의 환한 얼굴로 수없이 고백했던 “새롭다”란 소박한 말마디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따라 닮아가는 성인들의 삶이라면 날로 새로워져 늘 새하늘과 새땅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제가 즐겨 늘 자주 고백하는 고백기도중 일부입니다.
“예수님, 당신은 저의 모두입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바로 이런 예수님을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만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미사중 우리가 모시는 분과 똑같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혼신을 다한 사목현장을 만나는 기분입니다. 군중이 호숫가 예수님께 모여드니 새삼 세상 모두의 중심이 되신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도대체 이런 예수님이 부재한 인류요 세상이라면 그 어둠은 얼마나 짙겠는지요!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는 그리스도의 빛입니다.
길을 잃어,
방향을 잃어,
목표를 잃어,
빛을 잃어,
희망을 잃어,
중심을 잃어,
진리를 잃어,
생명을 잃어
무지와 죄악의 어둠중에 병들어 망가지고 무너져가는 사람들입니다. 예나 이제나 반복되는 똑같은 악순환의 현실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이렇게 살 수는 없습니다. 길을 찾는, 방향을 찾는, 목표를 찾는, 희망을 찾는, 중심을 찾는, 진리를 찾는, 빛을 찾는 영혼의 근본적 욕구요, 이를 일거에 충족시켜 주실 분은 단 한 분 예수님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병고에 시달리던 이들은 그분을 만나 치유를 받았고, 더러운 영들은 예수님만 보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고백하며 달아납니다. 인기의 절정에 있지만 예수님은 이를 지극히 경계하십니다. 적대자들이 호스탐탐 자신의 목숨을 노리기 때문이며, 군중들이 미몽에서 깨어나 참된 메시아이신 당신을 만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이 없는 메시아가 얼마나 위험스러운지 깨달았기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침묵을 신신당부합니다. 더러운 영들의 고백이 진짜가 아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백인대장의 고백을 통해 입증됩니다. 감동적인 대목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예수님을 마주 보고 서 있던 백인대장이 그분께서 그렇게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하고 말하였다.”
이처럼 우리가 고백하는 메시아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입니다. 참으로 삶의 현장에서 최선을 다해 분투의 노력을 다하시는 파스카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에게는 영원한 감동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예표와 같은 제1독서 사무엘 상권에서 고군분투하는 다윗의 삶도 인상적입니다. 충천하는 인기와 더불어 사울의 정적으로 부각되니 그 생명이 위태롭습니다. 흡사 복음의 예수님을 연상케 합니다.
“사울은 수천을 치시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네.”
사울은 강력한 라이벌로 부각한 다윗에게 쫓기는 기분이었을 것이며 그의 시기와 질투도 걷잡을 수 없이 불타올랐을 것입니다. 이런 와중에도 최선을 다한 다윗 곁에는 하느님이 예비하신 사울의 아들 요나단 친구가 있었습니다. 당신의 사람들을 살리시는 하느님의 구원 섭리가 참 오묘합니다. 오늘날도 여전히 길이 회자되는 요나단과 다윗의 아름다운 우정입니다.
적대자들의 끊임없는 생명의 위협중에도 그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예수님과 다윗의 삶이 감동적입니다. 평생 고난과 시련중에도 좌절하지 않고 힘차게 살아가신 두분 예수님과 다윗과 모든 성인들이 우리 삶의 귀감이 됩니다. 온실속의 화초같은 삶을, 평탄한 꽃길같은 삶을 살았던 성인은 결코 없었습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다시 한 번 영적 전의(戰意)를 새로이 하고 거칠고 험한 광야(廣野) 지상 삶중에도 주님과 함께 천국(天國)을 사시기 바랍니다. 바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좌우명 고백기도 마지막 두연처럼 사시기 바랍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여기 주님의 집 교회에서
주님의 전사(戰士)로,
주님의 학인(學人)으로,
주님의 형제(兄弟)로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이기적인 나와 싸우는 주님의 전사로
끊임없이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주님의 학인으로
끊임없이 주님의 가정 교회에서 주님의 형제로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
240118. 연중 제2주간 목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참사람>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마르 3,8)
참사람을 모으니 참사람이요
참사람이 모으니 참사람일세
참사람이 따르니 참사람이요
참사람을 따르니 참사람일세
참사람을 품으니 참사람이요
참사람이 품으니 참사람일세
참사람이 믿으니 참사람이요
참사람을 믿으니 참사람일세
참사람이 바라니 참사람이요
참사람을 바라니 참사람일세
참사람이 사랑하니 참사람이요
참사람을 사랑하니 참사람일세
참사람을 살리니 참사람이요
참사람이 살리니 참사람일세
----------------------------------------------------
240118. 연중 제2주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또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마르 3,110
사랑 없는 악마의 고백
악마도 신자도 그리스도를 고백합니다. 베드로도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고 말했고, 악마도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넘이신 줄 압니다”(침조 마르 3, 11; 루카 4,41)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똑같은 고백을 듣지만, 똑같은 사랑을 발견하지는 못합니다 베드로에게서는 사랑을 보지만, 악마에게서는 두려움을 봅니다. 그분께 사랑을 느끼면 자녀이지만, 그분이 무서우면 자녀가 아닙니다.
-아우구스티누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2
창조 – 밖으로 흐르되 안에 머물기
말씀을 선포하시오(2티모 4,2).
하느님은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 만큼, 우리가 하느님을 이해하는 만큼, 하느님은 어디에도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영혼 안에 계시고, 여러분이 바라기만 한다면, 천사들 안에도 계십니다. 하느님은 영혼의 가장 내밀한 곳, 영혼의 가장 높은 곳에 거주하십니다. 여기서 “가장 내밀한 곳”은 가장 높은 곳을 뜻하고, “가장 높은 곳”은 영혼의 가장 내밀한 곳을 뜻합니다. 영혼의 가장 내밀한 영역과 가장 높은 영역 - 이 두 영역은 하나입니다. 시간이 결코 틈입하지 못하는 곳에서, 이미지가 전혀 이채를 발하지 못하는 곳에서, 영혼의 가장 내밀하고 가장 높은 곳에서, 하느님은 온 우주를 창조하십니다. 6천 년 전에 창조하신 모든 것과, 이 세계가 오래 지속된다면 수천 년 후에 창조하실 모든 것을, 하느님은 영혼의 가장 내밀하고 가장 높은 곳에서 창조하고 계십니다. 하느님은 과거 · 현재 • 미래의 모든 것을 영혼의 가장 내밀한 곳에서 창조하십니다. 하느님은 모든 성도들 안에서 행하시는 모든 것을 영혼의 가장 내밀한 곳에서 행하십니다. 아버지는 영혼의 가장 내밀한 곳에서 아들을 낳시고, 여러분을독생자와 똑같이 낳으십니다. 내가 아들이 될 수 있으려면, 나는 독생자와 똑같은 아들이 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내가 인간이 될 수 있으려면, 나는 동물과 같은 존재가 되어서도 안 되고, 인간이 되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나는 인격을 지닌 인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이 특별한 인격이 될 수 있으려면, 나는 이 특별한 인격의 존재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1요한 4,4)라고 요한은 말합니다.(104)
✝️ 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4장 오직 고통뿐
애매한 본당 신부의 태도
파티마의 본당 신부는 자신이 담당한 교구의 아이들이 질문을 받고도 공손하게 대답을 하지 않는 탓으로 외부에서 오는 사람들이 퍽 불만스러워한다는 말을 듣고 불쾌했다.
“그 아이들은 손님이 오셨는데 침대 밑에 숨었는가 ? 그런 예모 없는 짓을 할 턱이 없는데"
이 본당 신부는 그들이 누구에게나 싫증을 내지 않고 손님의 인품을 잘 구별하며 상대에 따라서는 신학적 지식으로 대답하는 것까지를 아이들에게 바라고 있었다. 더구나 많은 동료 사제들의 방문에는 언제든지 대변하려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이 본당 신부는 발현이 세상에 알려진 때부터 여러 가지 일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발현에 열중한 무리들은 사제가 취하는 중립적 태도를 오해하여 과격당원과 내통한다고 비난하였다. 그 중상은 8월 13일의 쓰라린 사건을 계기로 집요하게 퍼부어졌다. 독자는 군수가 아이들을 납치해 가기 전에 본당 신부께 물어 보아 달래야겠다면서 사제관으로 유인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그 유괴 사건은 아이들이 사제관에 있을 동안 일어났었기에 군중은 틀림 없이 본당 신부가 ‘대장장이’의 음모에 가담한 것으로 의심을 갖게 된 것이다.
그래서 마누옐 마르크스 페레이라 본당 신부는 자신의 변명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1917년 8월 15일 리스본 시의 신문 ‘아 올템’지에 성명을 발표했다. 그 성명에 따르면 아이들의 납치 사건과 여기에 관련하여 자신에게 퍼부어진 비방으로 이성을 잃은 군중 때문에 8월 13일에는 신부의 생명이 위기에 처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 신부는 13일에 고바 다 이리아에 가지 않았던 이유도 해명하였다.
--만일 발현이 초자연적인 것이라면 자기같은 사람이 그곳에 있었던들 무슨 소용이 있겠으며 그것이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라면 그런 장소에 간 것이 교회의 원수들에게 좋은 공격 재료를 제공하는 것뿐이라고.(134)
----------------------------------------------------
240118. 연중 제2주간 목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옵니다.
북쪽 끝 티로와 시돈에서부터
남쪽 끝 이두매아까지
이스라엘 전지역에서 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들어서
예수님께 몰려왔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신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예수님의 소문이 벌써 이스라엘 전지역으로
퍼졌습니다.
그들은 병을 치유해 주신 이야기와
더러운 영을 쫓아내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특히 안식일과 관련해서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논쟁하신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기다려온 메시아가 아닐까
생각했을 것입니다.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컸던 만큼
사람들은 예수님께 몰려오게 됩니다.
자신들이 들은 이야기를
직접 보고 경험하고 싶었습니다.
반면 오늘 이야기는
치유나 구마를 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오히려
사람들에게서 멀어지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복음을 시작하면서
예수님께서 호숫가로 물러가셨다는 표현이 나오고
중간에서는 군중에게서 떨어지려
거룻배를 타시려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당신이 누구이신지
직접 말씀해 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
그렇게 사람들의 기대를 채워주실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오히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더러운 영이 말하는 것도
하지 못하게 막으십니다.
더러운 영들은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섣부르게 당신을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작은 행동에도
사람들은 크게 반응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과장되게 받아들이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 당신의 원래 모습을
사람들이 객관적으로 볼 수 있고 알 수 있을 때
당신을 드러내시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대를 예수님께 투사해서
예수님은 이런 분일 것이라고 상상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자신들의 기대가 깨질 떄 실망하게 되고
그 실망의 원인을
자신이 잘못 생각한 것에서 보지 않고
예수님 탓으로 돌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대와 맞지 않는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 박게 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 많은 관계를 맺습니다.
관계는 나를 알아가고 상대방을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상대방의 정확한 모습을 찾아가려는 노력보다
내가 상상하는 모습을 그 사람 안에서 찾으려는
실수를 범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런 관계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처음부터 온전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상상하고 기대하는 모습만 고집한다면
결국 우리는 고립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힘들더라도
객관적으로 나를 보고
상대방을 보려는 노력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