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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결단
왕상 1:22-31
22 밧세바가 왕과 말할 때에 선지자 나단이 들어온지라
23 어떤 사람이 왕께 말하여 이르되 선지자 나단이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가 왕 앞에 들어와서 얼굴을 땅에 대고 왕께 절하고
24 이르되 내 주 왕께서 이르시기를 아도니야가 나를 이어 왕이 되어 내 왕위에 앉으리라 하셨나이까
25 그가 오늘 내려가서 수소와 살찐 송아지와 양을 많이 잡고 왕의 모든 아들과 군사령관들과 제사장 아비아달을 청하였는데 그들이 아도니야 앞에서 먹고 마시며 아도니야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하였나이다
26 그러나 왕의 종 나와 제사장 사독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와 왕의 종 솔로몬은 청하지 아니하였사오니
27 이것이 내 주 왕께서 정하신 일이니이까 그런데 왕께서 내 주 왕을 이어 그 왕위에 앉을 자를 종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나이다
28 다윗 왕이 명령하여 이르되 밧세바를 내 앞으로 부르라 하매 그가 왕의 앞으로 들어가 그 앞에 서는지라
29 왕이 이르되 내 생명을 모든 환난에서 구하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라
30 내가 이전에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가리켜 네게 맹세하여 이르기를 네 아들 솔로몬이 반드시 나를 이어 왕이 되고 나를 대신하여 내 왕위에 앉으리라 하였으니 내가 오늘 그대로 행하리라
31 밧세바가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내 주 다윗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하니라
왕상 1:22-31 / 밧세바가 왕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나단이 왕궁이 도착하였다. 23) 한 신하가 들어와 왕에게 `나단이 와서 지금 기다립니다!' 하고 아뢰자, 왕은 이미 밧세바의 이야기를 다 들었기 때문에 그녀를 나가 있게 하고, 나단을 들어오게 하였다. 나단이 왕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 얼굴을 땅에 대고 큰절을 한 뒤 24) 엎드려 왕에게 아뢰었다. `나의 주 임금님이시여! `내 뒤를 이어 왕좌에 앉을 사람은 아도니야!'라고 말씀하신 분이 바로 임금님이십니까? 25) 아도니야가 오늘 많은 소와 양과 살찐 송아지들을 잡아 큰 잔치를 베풀면서 자신이 왕이 되었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그 자리에는 왕자님들과 장군들과 제사장 아비아달까지 초대하였습니다. 그들이 지금 모두 아도니야 앞에서 먹고 마시며 `아도니야왕 만세'를 외치고 있습니다. 26) 그러나 임금님의 종인 저와 제사장 사독과 브나야 장군과 임금님의 슬기로운 아들 솔로몬은 그가 초대하지 않았습니다. 27) 이런 일이 모두 정말 나의 주 임금님의 지시로 되었습니까? 누가 임금님의 계승자가 되어 왕위에 오를 것인가에 대하여 이 종에게는 숨기셨습니까?' 28) [다윗이 또다시 맹세하다] 다윗왕이 나단을 내보내고 다시 밧세바를 불러들였다. 밧세바가 다시 들어와서 왕 앞에 서자, 29) 왕이 이렇게 맹세하였다. `나를 온갖 환난과 고통에서 건져내 주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분명히 맹세하지만 30) 당신의 말이 옳았소! 내가 당신의 아들 솔로몬만을 나의 계승자로 세워 왕으로 삼겠다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였소. 나는 이제 그 약속을 그대로 지키겠소' 31) 밧세바는 다시 엎드려 큰절을 하고 `나의 주 임금님, 만수무강하소서!' 하고 말한 뒤에 물러갔다.
나단 선지자의 계책을 들은 밧세바는 다윗 앞에 나아가 솔로몬이 왕이 될 것을 약속했던 다윗의 옛 맹세를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그때 나단 선지자도 다윗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하여 충언을 아끼지 않음으로써 다윗이 결단을 하게 합니다.
나단의 충언(22-27) 밧세바가 왕에게 아도니야 모반 사건을 이야기할 때 나단도 다윗에게 나아가 사건의 진상을 상세하게 진술하면서 밧세바의 보고를 확인시켰습니다. 또한 왕이 아도니야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말했느냐고 질문합니다. 이는 아도니야가 왕이 된 데에 대한 다윗의 강한 거부를 이끌어 내기 위한 역설적 화술이었습니다. 나단의 충언은 다윗이 알지 못하는 중에 아도니야가 왕이 된 것에 대한 일종의 책망이었고 솔로몬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뜻을 다윗에게 전한 선지자가 바로 자신인데 어떻게 자신에게 묻지도 아니하고 아도니야가 왕이 되도록 내버려 두었냐는 것이며 아도니야가 왕이 된 것은 하나님의 뜻도 아니고 다윗의 뜻도 아님을 인정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대로 솔로몬을 왕위에 계승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윗의 결단(28-31) 밧세바에 이어서 나단의 충언을 들은 다윗은 먼저 밧세바를 불러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며 이전에 솔로몬이 대를 이어 왕이 될 것이라고 약속했던 것을 그대로 시행하겠다고 선언합니다. 다윗은 여기서 “내 생명을 모든 환난에서 구하신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자신을 일생동안 지켜주신 하나님에 대한 맹세입니다. 또한 이는 하나님과의 언약이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일종의 서약이었습니다. 이렇게 아도니야의 반란이 저지되고 솔로몬이 왕위에 오르도록 다윗이 결단하게 된 것은 나단과 밧세바 두 사람의 계책과 행동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거기에는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구체적으로 성취된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루게 하기 위해 자기 욕망에 사로잡힌 아도니야를 들어 사용하신 것처럼 이번에는 나단의 입을 빌어 다윗을 깨우쳐 솔로몬을 왕으로 삼게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좌절되거나 변함없이 역사 속에서 온전히 성취됩니다.
적용: 하나님의 뜻은 놀라운 방법으로 성취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어떠한 일을 계획하고 있습니까? 어떠한 상황가운데서도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시며 그 뜻을 성취하실 것을 믿고 있습니까?
홀리데이 인의 클라이머 전 회장은 은퇴식 때 다음과 같이 연설을 합니다. “제가 운영하는 호텔에 카지노를 두지 않기로 하나님과 약속을 했습니다. 사람들간의 약속도 중요한데 하나님과의 약속은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제가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는 길은 회장직에서 물러나는 것뿐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저는 지금 마음이 무척 평안합니다” 직원들은 끝까지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킨 한 진실한 크리스천을 향해 뜨거운 박수를 보냈습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킨 사람은 회장직과 비교할 수 없는 영생의 면류관을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 설 교 >
사람의 뜻은 무너지고 하나님의 뜻만 이뤄집니다
열왕기상 1:28~53
교회사가인 필립 샤프(Philip Schaff) 박사는 “역사는 성경 다음으로 중요하며, 지혜의 가장 풍요로운 기초이자 가장 확실한 안내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왜? 역사가 성경 다음으로 중요합니까? 하나님의 뜻에 대한 계시는 성경책에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도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역사 가운데 계시고 역사 속에 개입하시고 적극적으로 역사를 주관하시면서 인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역사가 단순히 인간들의 선택과 결정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애굽에서 노예 백성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실 때 모세를 통해서 10재앙을 내리고, 홍해를 가르시고, 광야 길을 통과해서 시내산으로 인도하여 거기서 10계명을 주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현장에는 늘 하나님의 능력의 개입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만 이스라엘의 역사만이 아닙니다.
우리나라가 8월 15일 해방되기 전 8월 17일에 일제는 한국교회를 박멸하기 위해 자신들에게 협력하지 않은 저항하는 기독교 내의 모든 지도자들을 한꺼번에 참살하여 버릴 계획을 수립하였는데 밝혀진 바에 의하면 경찰의 목록에 기재되어 있는 약 1만 명의 교회 지도자들을 체포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전세가 불리해 연합군이 일본을 점령하게 되면 한국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모두 일어나 반일 항쟁을 주도할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계획이 거사되기 이틀 전에 일본천황이 항복함으로서 무효화 되었습니다.
6.25 전쟁도 그렇습니다. 철저히 준비된 북한의 계획대로라면 이 전쟁은 한 달 안에 끝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UN 안전보장 이사국의 찬성과 함께 16개국의 참전으로 인해서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계획이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비사에 의하면 만약 UN 안전보장이사국이었던 소련과 중국이 반대했더라면 UN 16개국 참전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외교적인 실수로 소련이 반대하지 않고 통과된 것입니다. 거기에는 기적같은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우리가 역사를 연구해 보면 모든 것이 악인들의 원함대로 흘러가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2차 세계대전사에 길이길이 남을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도 아이젠하워 장군은 하나님께 무릎 끓고 기도하면서 이 전쟁에 하나님의 개입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불가능에 가까웠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함으로써 히틀러의 광기어린 정권이 몰락했습니다. 역사 속에는 하나님의 개입과 하나님의 사람들의 기도를 통한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습니다. 역사가 인간의 계획과 뜻대로만 완성되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사람의 뜻은 무너지고 하나님의 뜻만 이뤄집니다”입니다. 역사 속에서나 인생사에서 모든 일이 사람의 계획과 선택과 결정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잠언 말씀대로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십니다.”(잠16:9) 하나님은 저 멀리서 구경하시고 관찰하시는 무관심한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삶의 고통과 아픔을 보고 듣고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자신이 계시하시고 약속하신대로 역사를 합력하여 선으로 이끌어 내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을 믿을 때 성경에 약속된 말씀에 순종하여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삶의 기준으로 삼고 선택하고 결정하면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다윗의 왕위계승권 문제로 아도니야가 선수를 쳤는데, 다윗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솔로몬을 왕위계승자로 세우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실 아도니야는 당시 이스라엘에서 가장 실세라고 볼 수 있는 군대 장관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을 포섭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무엇보다 호위대도 있고, 솔로몬의 제외한 모든 왕자들도 끌어들였고, 유다지파의 유력자들을 지지자로 얻는데도 성공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도니아는 왕이 되기 위한 주요 멤버가 일차적으로 조직된 것입니다. 그러나 왕권을 세우기 위해 반드시 참여해야 할 사람들이 빠졌습니다. 성경은 ‘제사장 사독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와 선지자 나단과 시므이와 레이와 다윗에게 속한 용사들은 아도니야와 같이하지 아니하였더라’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아도니야의 왕위 즉위식에 다른 것은 다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 하나가 빠져 있었는데 그것은 다윗 왕의 허락과 축복이었습니다. 아도니야는 이 부분에서 중대한 착각을 한 것입니다. 그것은 다윗이 너무 늙어서 판단력이나 의지력도 흐려졌을 것이라도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압과 아비아달과 다른 왕자들의 동의를 얻어서 왕이 되고 난 후에, 떼를 써서라도 다윗 왕의 허락을 받아내면 될 것이라고 쉽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도니야가 생각한 대로 왕위 계승문제는 그런 인간적인 계산과 전혀 다른 문제였습니다. 아무리 아도니야가 인간적으로 다윗 왕가의 장자로서 혈통적으로 왕위 계승자로서는 손색이 없었지만 하나님의 허락과 하나님의 선택이 있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부분에서 아도니야는 신앙심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기도가 없었습니다. 진지하게 다윗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어떤 나라인지 배우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왕은 세상 나라의 왕처럼 권세를 휘두르고 자기 욕망대로 다스리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도록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왕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다스려야 합니다. 이것은 사울 왕에게서 잘 나타났습니다. 사울 왕이 초대 왕으로 세워졌지만 그가 하나님의 뜻을 불순종하고 자기 욕망대로 나라를 다스리자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페하시고 다윗을 기름부어 세우셨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위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너무나도 잘 알았습니다. 그는 사울 왕의 실수와 허물을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왕이 어떤 왕인지 너무나 깊이 산교육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늘 하나님 앞에서 겸허하게 이스라엘의 왕의 자리를 종의 자세로 감당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왕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아도니야는 이런 이스라엘의 왕위의 자리를 인간적인 계획과 생각으로 아버지의 허락도 없이 선지자의 축복과 기름부음도 없이 하나님의 축복도 없이 자신의 다윗 왕가의 장자라는 혈통적 신분만 믿고 왕위 즉위식을 인간의 방법으로 올려버린 것입니다.
이런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의 뜻을 알고 나선 사람이 나단 선지자였습니다. 나단 선지자는 먼저 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를 찾아가서 이 문제를 의논했습니다. 그리고는 아도니야가 왕으로 즉위하려고 하니 당신이 지금 다윗 왕을 찾아가서 왕위 계승에 대한 과거의 언약을 떠올리게 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그러면 자신도 옆에 있다가 도와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결국 다윗은 밧세바와 나단 선지자의 중차대한 문제를 듣고는 신속히 결정합니다.
29~30절을 보겠습니다. “왕이 이르되 내 생명을 모든 환난에서 구하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라 / 내가 이전에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가리켜 네게 맹세하여 이르기를 네 아들 솔로몬이 반드시 나를 이어 왕이 되고 나를 대신하여 내 왕위에 앉으리라 하였으니 내가 오늘 그대로 행하리라”
다윗은 자식 문제에서 만큼은 늘 우유부단했습니다. 암논이 이복 여동생 다말을 근친강간 할 때도 화만 내고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압살롬이 장자 암논을 죽이고 외조부 그술 왕 달매에게 도망칠 때도 역시 속만 태우면서 과감한 결정을 하지 못하고 회개하지도 않는 압살롬을 3년 후에 예루살렘으로 부르고 맙니다. 또한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켜 아버지 다윗을 향해 칼을 겨눌 때도 압살롬만은 살려달라고 군장들에게 부탁하고 후에 요압이 압살롬을 죽이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내 아들 압살롬 압살롬아 외치면서 사태를 수습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보아온 아버지 다윗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은 전혀 다른 면모를 보여줍니다. 사실 아도니야는 지금까지 아버지 다윗으로부터 한 번도 “네가 어찌하여 그리 하였느냐”고 책망 받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귀하게 컸습니다. 또한 다윗은 아도니야를 끔찍이도 사랑했고 아켰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왕위 계승문제에서 만큼은 아도니야에 대한 인간적인 생각을 버립니다. 이 일은 아도니야가 죽을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인간적으로 자식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성취되도록 빠르고 과감하게 결정합니다.
무엇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가리켜 네게 맹세하여 이르기를 네 아들 솔로몬이 반드시 나를 이어 왕이 되고 나를 대신하여 내 왕위에 앉으리라 하였으니 내가 오늘 그대로 행하리라”고 결단하고 그 시간부로 왕의 계승을 이루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윗의 단호한 결단력을 보게 됩니다. 몸은 허약해지고 기력은 다 빠져나갔지만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결정하고 어떻게 역사가 진행되어야 옳은지에 대한 너무나도 분명한 기준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계시하시고 약속하신 말씀에 근거하여서 과감하게 결정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다윗의 흔들림없는 말씀 중심의 신앙을 보게 됩니다. 다윗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계시 해 주시고 말씀해 주신 것을 실행하는 것이 그의 왕으로서의 본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왕위 계승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하심에 대해서만큼은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그대로 실행하되 오늘 그대로 행하리라고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아도니야에 대한 일언반구의 자식에 대한 인간적 정을 개입시키지 않습니다. 반역한 장자 아도니야를 살려주라는 명령도 내리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세우고자 했던 솔로몬이 왕위의 계승자로 서서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신 순리대로 처리하도록 맡긴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말씀을 기준으로 사건을 분별해서 하나님의 뜻을 좇아 결정을 내린 다윗의 위대한 신앙심을 배우게 됩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마음에 깊이 새겨 늘 기억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모든 선택과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것은 이론적으로는 너무나 쉽고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상황과 현실 안으로 들어가면 그리고 그것이 내 삶에서 중요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방향으로 결정을 내린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저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선택하고 결정하고 따르기 위해서는 매일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 말씀을 내 삶에 적용하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습관화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출애굽 시켰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해서 훈련하고 그래도 안되닌까 또다시 40년 동안 훈련해서 그들 안에 심겨진 노예근성 애굽에서 배웠던 세속적인 삶의 본성을 뿌리 뽑아내는 것을 봅니다. 왜? 2세대들은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그 땅에서 살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으로부터 반복된 광야 훈련을 받음으로 해서 그들안에 있던 죄성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선택하고 결정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훈련을 통해서 우리의 이기적 본성을 죽이고 또 죽이면서 뼈 속까지 말씀이 새겨지고 순종이 새겨질 때 다윗과 같은 결단을 힘있게 내릴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깊이 있게 깨달을 수 있는 한 가지 영적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솔로몬이 마침내 다윗 왕의 계승자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반대로 혈통적으로는 장자의 명분을 가졌고 계략에 있어서는 솔로몬을 능가했지만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인생은 한 순간에 무너진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다시 한 번 3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내가 이전에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가리켜 네게 맹세하여 이르기를 네 아들 솔로몬이 반드시 나를 이어 왕이 되고 나를 대신하여 내 왕위에 앉으리라 하였으니 내가 오늘 그대로 행하리라”
다윗 왕이 솔로몬을 왕위 계승자로 세우고자 뜻을 세우고 분명하게 결정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과거에 하나님께서 미리서 ‘네 아들 솔로몬이 반드시 나를 이어 왕이 되고 나를 대신하여 내 왕위에 앉으리라’는 약속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솔로몬이 왕의 계승자로 낙점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혈통적으로 보면 솔로몬의 인간조건은 아도니야보다 훨씬 더 열등합니다. 왜냐하면 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는 헷 사람의 우리아의 아내로 있었다가 다윗과 불륜관계를 맺고 후에 다윗의 첩이 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의 태생 자체가 정통성이 없습니다. 반면에 아도니야는 정통성 있는 다윗의 정실 부인으로서 태어났고 압살롬의 죽음 이후에 다윗 왕가의 정식적인 장자의 명분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아도니야 보다 솔로몬을 택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너의 후계자는 솔로몬이다. 그가 나를 위해서 성전을 건축할 것이다고 미리서 하나님의 계시된 약속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역사는 혈통과 인간조건으로 계승되지 않습니다. 메시야 가문의 족보에 들어온 여성들 중에 “다말, 라합, 룻, 밧세바”는 한결같이 흠이 많은 여성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정통 유대인의 혈통을 가지지 않은 가나안 여인 모압여인 창녀 불륜녀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영적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께 중심을 드림으로서 하나님의 구속 역사 속에 쓰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역사에 쓰임 받은 사람들은 인간적인 실력이나 혈통이나 인간조건이 개입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이 먼저이지만 늘 하나님은 선택된 자들 안에 깊이 감추어진 그들의 중심을 보셨습니다.
왜? 에서가 아니라 야곱입니까? 왜? 사울이 아닌 다윗입니까? 왜? 아도니야가 아닌 솔로몬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은 버리시고 또 어떤 사람은 선택하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약속이 있는 인생이고 어떤 사람은 아무런 약속이 없는 인생이기도 합니다.
우리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가 봅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살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하나같이 약속된 구원의 복음을 믿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지 않습니다. 도덕적으로 인간적으로 아주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교양도 있고 매너도 있고 나름대로 성실하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 안에 하나님의 약속이 없습니다.
때로는 아도니야처럼 세상적으로 혈통적으로 좋은 조건의 사람들이 승리하고 성공하는 인생을 선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살고 있지만 영~ 별 볼일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사는 사람이 승리합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하신 일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요셉의 인생가운데 계획된 하나님의 약속과 비전을 누가 막을 수 있습니까? 요셉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꿈을 누가 찢을 수 있습니까? 아무리 형들이 시기심을 가지고 죽일려 해도 죽을 수 없고, 애굽의 노예로 팔아도 그는 총무가 되고, 보디발 여사가 강간범으로 옥에 가두워도 요셉은 총리가 됩니다. 그것이 요셉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아도니야가 아무리 솔로몬을 누르고 선수쳐서 왕위 즉위식을 올려도 하나님의 약속이 보장된 솔로몬의 왕위 계승권을 빼앗을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오늘 본문에 다시 확인하는 것입니다.
아도니야의 모반은 오히려 솔로몬의 왕위를 계승하는데 촉진제 역할을 하게 될 뿐입니다. 세상의 모든 역사는 사람들의 야망과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듯 보여도, 결국에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저는 이것을 확신합니다. 저는 이런 영적인 역사의 법칙을 믿습니다. ‘사람의 뜻은 무너지고 하나님의 뜻만 이뤄집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어제 T.V에서 ‘풍문으로 들었소’ 드라마를 보았습니다. 한국사회 1%에 해당한 최상류층의 며느리가 된 서봄이라는 서민층 자녀가 결국은 이혼이라는 절차로 버림받아가는 것을 봅니다. 세상의 질서와 구조에서 보면 갑이 을을 지배하는 구조입니다. 결코 서민층은 1%의 상위층인 갑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질서요 구조입니다. 참으로 마음에 씁쓸함이 남았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구조는 세상의 갑과 을의 질서를 깨뜨립니다. 라합과 같은 창기가 메시아의 족보에 이름을 올립니다. 영원히 이스라엘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저주받은 모압 여인 룻이 다윗 가문의 조상이 됩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며,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며,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을 통하여 있는 것들을 폐하시는 분이십니다. 결국 하나님 약속이 있고 뜻을 따라 사는 자들이 세상의 강한 것들을 이기고 세상의 갑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 말씀을 따라 뜻을 따라 사는 자가 승리의 면류관을 씁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지 않고 인간적인 야심과 욕심을 가지고 왕위계승자가 되려던 아도니야편에 선 사람들의 결말이 어떠합니까?
49~50절을 보십시오. “아도니야와 함께 한 손님들이 다 놀라 일어나 각기 갈 길로 간지라 / 아도니야도 솔로몬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가서 제단 뿔을 잡으니” 아도니야 편에 선 사람들이 솔로몬이 왕위 즉위식을 가졌다는 소식을 듣자 다 놀라 일어나 각기 갈 길로 갔습니다. 그들은 순식간에 흩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매이지 못하고 이해관계로 모이는 이익집단은 하나님께서 흩으십니다. 바벨탑을 무너뜨리고 언어를 혼잡케 해서 사방으로 흩으시던 하나님이셨습니다. 사람의 뜻과 계획이 서지 못하도록 하나님은 때가 되면 흩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대적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약속을 가진 사람들이 때가 되면 역사의 전면에 나섭니다. 역사의 무대에서 주연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향해 매 순간 결단하고 나가야 합니다. 때로는 외롭고 힘든 순간도 있습니다. 포기하고 싶은 고난의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약속을 붙잡은 사람이 최후승리를 거둡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면류관을 쓰는 것입니다. 마지막 나팔 소리가 날 때 그리고 주님이 재림하실 때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의 편에 섰던 자들이 혼비백산하여 흩어질 것입니다. 들로 산으로 동굴로 바위틈으로 숨을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얼굴을 뵈옵기를 두려워할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 헌신하고 순종하고 따랐던 자들은 나팔 소리와 함께 홀연히 변화되어 왕으로 오시는 주님을 맞으로 공중으로 들림 받을 것입니다.
이 지상에는 많은 나라고 있지만 실제적으로 세상나라와 하나님 나라만이 존재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떤 나라에 살고 있는가? 어떤 왕의 다스림을 받을 것인가? 우리가 따라야 할 자리, 서야 할 자리, 앉아야 할 자리, 잘 분별해야 합니다. 아도니야가 초청하는 자리 함부로 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분별하여 앉고 서고 따라야 할 자리를 잘 분별해서 선택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서고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는 역사의 도구로 쓰임 받읍시다. < 김성철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