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605
9월6일[연중 제22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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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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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QIAYx-GraPo
(이병호 세바스티아노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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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붙잡는 우리, 떠나시는 주님>
공생활 기간 동안 보여주신 예수님의 모습은 참으로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분의 일거수일투족은 군중의 마음을 한껏 사로잡고 가슴 설레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 발길이 닿는 곳 마다, 그야말로 인산인해였습니다. 수많은 군중이 몰려왔고, 그분이 선포하시는 희망과 위로의 말씀에 환호하고 박수를 쳤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따라다니는 광경은 장관이었습니다.
그런 군중의 환호와 박수갈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절대 한곳에 오래 머물러 계시지 않았습니다. 군중을 뒤로하고 또 다시 길을 떠나셨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그분을 붙들려는 군중을 진정시킨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붙잡는 우리 인간, 그러나 길 떠나시는 주님의 모습이 극명하게 대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뭐든 붙잡는데 이력이 난 우리 인간들입니다. 그 대상이 재물이든 자식이든 배우자든 상관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조차 꼭 붙들어 내 울타리 안에 가두어놓으려고 기를 쓰는 우리 인간의 모습 앞에 씁쓸함을 금할 길 없습니다.
그 어떤 대상이든 자유롭게 훨훨 날아갈 수 있도록 놓아주지 않고, 꼭 붙들어 새장 안에 가두어놓으려는 시도로 인한 부작용이 얼마나 큰 것인지 모릅니다.
자녀들만 해도 그렇습니다. 세상에 어떤 동물, 어떤 피조물이 자신의 새끼를 30년, 40년, 50년 동안 붙들고 있습니까? 사실 18년 세월이면 붙들어 놓는데 충분하고도 남는 긴 세월입니다. 고등학교 졸업하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놓아주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래야 그도 살고 나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어디 그런가요? 자녀들을 ‘어른 아이’로 전락할 때 까지 끝까지 붙들고 있는 부모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충분히 스스로 자신의 인생에 대해 결정권을 가질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진학할 대학교, 학과까지 부모가 나서서 다 결정해줍니다.
뭐 대단한 거라고 군부대 앞까지 따라가서 눈물을 닭똥 같은 눈물을 철철 흘립니다. 어련히 알아서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자녀 직장 상사들의 인사권에까지 개입하려 듭니다. 자녀 대신 사직서까지 대신 써줍니다. 더한 것은 그런 치맛바람을 보면서도 당연한 듯 바라보는 자녀들입니다.
더 한 것은 이런 붙듬이 피조물을 넘어 하느님에게까지 연장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지니신 가장 본질적인 측면이 어떤 것입니까? 그 어느 것에도, 그 어떤 혈연, 학연, 지연에도 묶이지 않는 자유로움입니다. 무한히 크심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무한히 크신 하느님, 바람처럼 자유로우신 하느님을 작은 울타리 안에 가둬놓으려 하니 그 얼마나 웃기는 일입니까? 그 크신 하느님을 나만의 하느님으로 축소시켜 독차지하려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이 땅에 오신 메시아 예수님은 나만의 구원을 위해 강림하신 작은 하느님이 절대 아니십니다.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작은 고을 나자렛, 작은 나라 이스라엘의 구원만을 위해 오신 메시아가 결코 아닙니다.
그분은 인류 전체,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의 구원과 행복을 위해 다가오신 크신 하느님이십니다.
혹시라도 그 크신 하느님을 나만의 하느님, 내 틀 안의 하느님, 내 방식대로의 하느님으로 가둬놓으려 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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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rOeDIOHGb7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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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는 새벽마다 삼고초려 하듯 기도해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가파르나움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느닷없이 다른 곳으로 떠나겠다고 당신을 찾는 군중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런 결정을 내린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가셨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외딴곳으로 가신 이유를 압니다. 바로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새벽 기도 안에서 오늘 당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결정이 된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만약 기도도 안 하고 떠나겠다고 하셨다면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변덕쟁이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정이 기도를 통해 듣게 된 하느님의 뜻임을 느끼면 그들도 수긍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듯 한 공동체를 이끄는 지도자는 자신보다 더 큰 힘에 의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공동체가 갈라지고 허물어집니다. 인간이 자신의 힘만으로 공동체를 이끌려면 공동체가 분열되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분열시켜 자기 자리를 유지하려 하기도 합니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2023)는 한겨울에 한 아파트만 빼고 모든 건물이 무너진다는 전제에서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그 유일한 아파트로 몰려와 몸을 녹이고 음식도 나누어 먹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아파트 주민들은 결국 이병헌을 중심으로 그들을 몰아내고 자신들의 생존권을 지키려 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병헌도 그 아파트 주민이 아니었습니다. 주민에게 꾼 돈을 받으러 왔다가 그 사람을 죽이고 자신이 주인 행세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파트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곧 굶어 죽고 얼어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병헌은 자신이 아파트 주인인 것처럼 보이려고 도를 넘으며 행동하다가 결국 대표에까지 올라가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아파트 주민이 아닌 사람들을 밖으로 내몰고 자신들만의 천국으로 만들어갈 때쯤 이병헌이 아파트 주민이 아님을 아는 한 여자아이가 들어옵니다. 그렇게 공동체는 의심으로 분열됩니다. 나중에 자신이 아파트 주민이 아닌 것이 들통나자 이병헌은 그 아이를 절벽에서 떨어뜨리며 그 아이가 모든 것을 망쳤다고 다시 일치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미 늦어버렸습니다. 공동체는 와해하고 밖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빼앗겨버립니다.
이 영화는 사람들에 의해 어떤 자신들보다 초월적인 능력이 있어야 공동체의 지도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자신들과 다를 바가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때 그는 지도력을 잃게 되고 그러면 공동체가 분열되고 와해합니다. 이병헌은 자기 능력으로 공동체를 이끌려 하다가 결국 망하게 되는 지도자의 역할을 맡았습니다.
왜 정치인들이나 기업인들이 새해만 되면 용하다는 무당을 찾을까요? 왜 예전에 모든 왕이 자신들은 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려 했을까요? 자기 힘만으로는 공동체를 이끌 자격이 없음을 스스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삼국지』에서 유비는 시골 흑수저 출신에서 초나라를 세운 임금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관우와 장비, 조자룡 등과 같은 충신들이 있었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들과 함께 싸우며 50이 넘도록 도망 다닐 때는 그의 지도력이 오직 그의 덕에만 의존하였습니다. 그를 따르던 이들도 끊임없는 패배 속에 지쳐가고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초자연적인 능력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인간의 한계를 넘는 능력을 지닌 자의 뜻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러한 능력을 갖춘 이가 제갈공명이었습니다. 작지만 한 나라를 세우려는 이가 시골 선생인 공명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세 번이나 찾아갔다는 유명한 고사성어가 ‘삼고초려’입니다.
유비는 이렇게 천체의 신비까지 읽을 줄 안다는 제갈공명을 전략가로 삼아 그의 뜻을 따랐습니다. 그러자 그를 따르는 모든 이가 힘을 낼 수 있었고 그 이전까지 두 번 싸워 한 번 이기고 한 번 지던 것이 이젠 승률이 80%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결국 공동체가 하나가 되려면 같은 지향과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기찻길의 두 선로가 목적지까지 함께 이어질 수 있는 이유는 목적지가 같기 때문입니다. 그 지향과 목표는 분명 한 사람에게서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란 자신들과 같은 부족한 인간의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얼마나 많은 결심을 하며 얼마나 많은 약속을 어깁니까?
예수님께서 새벽마다 기도하시는 모습을 제자들도 보고 군중들도 보았습니다. 이것은 일부러라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한 인간으로 보이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이 당신의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으로 여겨집니다. 이렇게 되어야만 공동체에 분열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일치의 중심이 나여서는 안 됩니다. 모두에게 나를 보내신 분의 뜻으로 여겨져야 합니다. 그 경외심이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사제가 새벽에 기도하면 신자들은 어느 정도 경외감을 가지게 됩니다. 분명 주님의 뜻을 묻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사제의 결정에 반감을 품는 사람이 줄어듭니다. 그렇게 본당에 일치가 이뤄집니다. 그러나 사제의 결정이 자신의 생각인 것처럼 여겨지면 공동체가 분열됩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가 먼저 새벽에 기도하고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그래야 아내도 따르고 자녀도 따릅니다. 일치의 중심을 나로 삼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도 아버지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만나고 있음을 아침부터 보여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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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4,38-44: 시몬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심
복음에서 병의 치유는 하늘나라의 삶을 이 지상에서 이미 조금 체험하게 하여 주시고, 당신이 참된 구원을 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분임을 알려주시는 행위이다. 예수께서는 시몬의 집에 가셔서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있는 것을 보셨다. 예수께서는 가까이 가셔서 열을 꾸짖으시자 열이 가셨다고 한다. 이것은 예수께서 하느님으로서 모든 것을 주재하시고 다스리신다는 증거이다. 우리도 모두 죄의 열병을 앓고 있다. 성내는 열, 죄악과 불륜이라는 열병의 종류도 많다. 이러한 열병들을 주님을 가까이하면서 치유 받을 수 있다.
예수님을 모시고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십사고 간청하자. 그러면 우리의 열병이 곧 가실 것이다. 우리가 머리와 가슴으로 그분을 모시면 그분은 우리 안에 있는 쾌락의 열을 식혀주실 것이다. 그런 다음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고, 당신을 기쁘게 해드릴 일을 할 수 있도록 영적인 것들도 강하게 만들어 주실 것이다. 예수님의 손을 잡도록 하자. 그분 손이 우리를 마음의 병과 마귀의 사나운 공격에서 해방해 주시기를 청하자. 베드로의 장모는 예수님의 명으로 병이 완치되었다. “그러자 부인은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39절) 자신의 병이 예수께서 베푸신 은혜로 낫게 되자, 즉시 일어나 예수님과 주위 사람들에게 봉사했다. 하느님께 은혜를 입는다는 것은 우리가 더욱 봉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부인은 건강의 회복이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일에 자신이 쓰이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았다. 부인은 즉시 실행에 옮겼다. 부인의 행동은 깊이 새겨들어야 할 것임을 명심하여야 한다.
오늘의 복음에서 이것을 배울 수 있다. 자신이 역경을 딛고 지난날보다 더 나은 생활의 처지, 학식이나 재능, 지위에 있어 더 나은 상태가 되었다면 그것은 세상에서 자기 자신이 편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더 크게 봉사하기 위해서 주어진 은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베드로의 장모에게서 우리는 그 표양을 본받아야 한다. 이것이 우리 신앙인의 모습이며 신앙이다. 우리의 삶이 이웃을 생각하고 더 나은 처지가 되었을 때 진심으로 봉사하며, 이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 신앙인,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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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1998년 여름입니다. 보좌신부에게 여름 행사는 연중 가장 큰 행사입니다. 초등부, 중고등부, 청년 여름 캠프는 준비만 6개월 이상 걸리는 행사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장소’입니다. 거리는 2시간 내외이면 좋습니다. 다음은 시설입니다. 숙소는 깨끗한지, 수영장은 안전한지, 음식은 적당한지를 살피게 됩니다. 답사를 3번 정도 가면서 꼼꼼하게 프로그램을 챙깁니다. 당시만 해도 아직 학생들이 많을 때이고, 교사들도 열정이 많았습니다. 공고를 내면 학생들은 신청하였고, 사목회를 비롯해서 어른들은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습니다. 트럭에 물품을 가득 실고 캠프장으로 떠나려 할 때입니다. 비가 오고 있었고, 태풍 소식도 있었습니다. 늘 그렇듯이 비가 올 때를 대비한 프로그램도 있고, 캠프장은 높은 지대에 있어서 비가 온다고 해도 안전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본당 신부님이 저를 불렀습니다. 비가 이렇게 오는데 꼭 가야 하는지, 캠프장은 안전한지 물었습니다. 저는 신부님께 캠프장은 안전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안전하게 잘 다녀오겠다고 하였습니다. 본당 신부님은 걱정하는 눈빛으로 저를 보셨지만 잘 다녀오라고 허락하였습니다. 저를 믿고 여름 캠프가 잘 진행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신부님께 지금도 감사드립니다. 학생들과 교사들에게 내리는 비는 결코 장애가 되지 않았습니다. 내리는 비도 한 여름밤의 추억이 되었습니다.
뉴욕에 살면서도 한국의 뉴스를 보곤 합니다. 한 군인의 기자회견을 보았습니다. 실종자 수색작업 중에 해병대 병사가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대통령께서는 엄정하게 수사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수사단장은 해병대 병사의 영정 앞에 철저한 수사를 다짐했다고 합니다. 군에서 발생한 사망사고는 군에서 조사를 하지만 수사는 경찰이 하도록 법이 개정되었다고 합니다. 군 자체만의 수사는 때로 은폐와 조작 그리고 축소가 있었고, 이로 인해 억울한 죽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수사단장은 적법한 절차에 따라서 보고서를 작성했고, 결재를 받아서 경찰에 서류를 인계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문제가 종결되었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수사단장은 인계하는 과정에서 외압을 받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철저하고, 엄정하게 수사했던 수사단장은 ‘항명’ 죄가 적용되어서 보직 해임되었고, 오히려 군 검찰 때문에 수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수사단장은 기자회견에서 군 검찰을 믿을 수 없다고 하면서 제3의 기관에서 수사를 받게 해 달라고 군 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에게 청원하였습니다. 만일 수사단장이 상부의 의견을 들어서 수사기록을 수정했다면, 경찰에 인계하지 않았다면 수사단장에게는 보직해임이라는 불이익은 없었을 것입니다. 군 검찰에 항명이라는 죄명으로 수사를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수사단장은 왜 상부의 의견을 따르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이제부터 시작되는 수사로 밝혀질 것입니다.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억울한 군인이 없도록 공정한 수사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번 뉴스를 보면서 문득 베드로 사도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 그때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비록 사람의 일이라고 하지만 베드로 사도는 그 결과를 충분히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는다면 구심점을 잃어버린 제자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질 것입니다. 제자들 또한 박해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베드로라는 반석위에 세운 교회도 사라지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님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저는 수사단장도 충분히 결과를 예상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군이라는 거대한 조직에 맞서는 것은 감당하기 힘든 고난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군을 명예롭지 않게 떠나야 할 것도 알았을 것입니다. 항명이라는 죄가 확정되면 감옥에서 지내야 하는 것도 알았을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 홀로 있었던 예수님처럼 인간관계도 단절되고 고독하게 지내야 하는 것도 알았을 것입니다. 가족들에게도 큰 시련이 닥칠 것 또한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군인이 사람의 일을 선택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에게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저 역시도 사람의 일을 선택했을 것 같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사람의 일을 선택한 사람들도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2000년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박해가 있을지라도, 시련과 고통이 있을지라도, 억울한 죽임을 당했을지라도 ‘하느님의 일’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일을 선택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그 은총을 우리가 사랑하는 동료 종 에파프라스에게 배웠습니다. 그는 여러분을 위하여 일하는 그리스도의 충실한 일꾼이며,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여러분의 사랑을 우리에게 알려 준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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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가셨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어서, 사람들이 그를 위해 예수님께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루카 4,38-39)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병을 지배하는 주님이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의사가 병을 잘 고치는 것과 주님께서 병을 지배하시는 것은 완전히 차원이 다른 일입니다. 예수님은 병자가 건강을 되찾을 수 있도록 치료를 통해서 도와주시는 분이 아니라, 병에게 떠나라고 명령하심으로써 병자를 병고의 억압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분입니다. “열을 꾸짖으시니”라는 말은, 뒤의 7장에 있는 어떤 백인대장의 말에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가셨다. 그런데 백인대장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르셨을 때, 백인대장이 친구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아뢰었다.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루카 7,6-7)
여기서 ‘말씀만 하시어’는 ‘병에게 떠나라고 명령하시어’입니다. 백인대장은 예수님이 병을 지배하는 주님이시라는 것을 이미 믿고 있었고, 예수님께서 ‘병이라는 것’에게 떠나라고 명령하시면 곧바로 병자가 병고에서 해방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 믿음은 사실상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믿음입니다. 백인대장이 한 말은 ‘신앙고백’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백인대장을 칭찬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루카 7,9) 예수님께서 그를 칭찬하신 일은, 그의 믿음이 올바른 것임을 확인해 주신 일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라는 말씀은, 그 백인대장이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은 첫 번째 신앙인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 믿음을 공적으로, 또 명시적으로 고백한 첫 번째 신앙인은 토마스 사도입니다.(요한 20,28)>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을 앓는 이들을 있는 대로 모두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 주셨다. 마귀들도 많은 사람에게서 나가며,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꾸짖으시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당신이 그리스도임을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루카 4,40-41)
마귀들은 병을 퍼뜨리는 ‘병균’과 같은 존재입니다. “많은 사람에게서 나가며”라는 말은, 뜻으로는 “많은 사람에게서 쫓겨나면서”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마귀들에게 침묵을 지키라고 명령하셨다는 것입니다. 마귀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꾸짖으시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당신이 그리스도임을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는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이 당신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입니다.> 그것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잘 알고 있었지만, 예수님을 믿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을 섬기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방해하기만 하는 것들입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는 마귀들의 말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 말이 아니라,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서 한 말입니다. <그 말을 하는 존재가 마귀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마귀들의 말은 모두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말은 신앙을 방해하는 말이 될 뿐입니다.>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가셨다.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여러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셨다.”(루카 4,42-44)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복음을 독점하거나 감추지 마라.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 주어라.”라는 가르침입니다. 아무도 예수님을, 또 예수님의 복음을 독점할 수 없습니다. 온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 주어야 합니다. 이리 떼 가운데로 들어가는 양들 같은 처지가 되더라도,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박해를 받더라도, 우리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을 멈추거나 피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마태 10,27)
세상에서 떨어져 있으면서, 또는 세상을 향해 담을 쌓아 놓고서, 잘 아는 사람들과 친한 사람들끼리만 모여서, 자기들끼리만 생활하면 편안하게 살 수 있겠지만, 그 모임은 공동체가 아니라 집단일 뿐이고, 그 믿음은 신앙이 아니라 기복신앙일 뿐이고, 그 편안함은 ‘예수님의 참 평화’가 아니라 ‘세상의 거짓 평화’일 뿐입니다. 만일에 ‘기쁜 소식’이 울타리 안에 갇혀 있다면, ‘기쁨’은 점점 희미해지다가 사라지게 되고, 그 ‘소식’은 더 이상 소식이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사람들에게 아무런 기쁨도 희망도 주지 못하는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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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예수님의 일과는 어떠하셨을까요? 루카 복음서는 그분께서 카파르나움에서 보내신 하루를 소개합니다.(4,31-44 참조)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가시어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때마침 회당에는 더러운 마귀에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시자 그분에 대한 소문은 삽시간에 주변으로 퍼집니다.(어제 복음)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향하신 예수님께서는 심한 열에 시달리던 그의 장모를 고쳐주십니다. 해 질 무렵이 되자,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병을 앓던 이들을 모두 그분께 데려갑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어 그들을 고쳐 주시고, 마귀 들린 이들도 해방시켜 주십니다. 그러고 나서 날이 완전히 어두워져서야 고을 밖 외딴곳으로 향하시는데, 군중은 그곳까지 예수님을 찾아가 자기들을 떠나지 마시라고 애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다른 고을에도 복음을 전하여야 할 사명을 밝히시며 그곳을 떠나십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기적을 행하시는 등, 카파르나움에서 보내신 하루와 비슷한 일상을 보내셨을 것입니다.
이처럼 바쁜 일정을 보내셨던 예수님께서는 제대로 음식을 드실 겨를조차(마르 6,31 참조), 편안히 쉬실 겨를조차 없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한 당신의 처지를 두고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 9,58) 무엇을 위하여 그토록 열심히 사셨을까요? 복음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고, 사람들을 살리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분께서 가시는 곳마다 많은 사람이 그분을 믿고, 치유되며, 해방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심지어 안식일에도, 곧 유다인이 일하여서는 안 되는 그날에도 열심히 일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신 예수님을 못마땅해하는 유다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하느님께서 일하고 계시다.’는 표현이 무척 감동적으로 들립니다. 오늘도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일하고 계실 아버지 하느님과 아드님 예수님을 기억하며, 우리의 하루는 어떠한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날마다 좀 더 보람되고 가치 있는 일, 특히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는 일들을 하며 살아가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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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열병을 앓는 시몬의 장모를 낫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이 끝나는 저녁부터 많은 병자에게 손을 얹어 병을 고쳐 주시고, 마귀 들린 사람들에게서 마귀를 쫓아내시어 그들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가셨다.”라고 전합니다.
예수님께 ‘외딴곳’은 지친 몸을 쉬게 하는 장소이고, 소외가 아닌 고독의 공간이며, 하느님 아버지를 찾아 만나시는 기도의 장소입니다.
인간의 구원사 안에 계신 성자께서는 ‘외딴곳’에서 성부와 사랑의 일치를 이루시며 성령과 함께 하나가 되십니다.(루카 복음 5장 16절 / 마르코 복음 1장 45절 참조)
우리는 살면서 ‘좀 더 잘 할 걸.’이라며 스스로 책망하기도 하고, 인간 관계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에 쉽게 후회하며,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인 ‘외딴곳’이 아닌 ‘어두운 동굴’로 숨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자신에 대한 걱정과 고민으로 어두운 동굴에 숨어 나오고 싶어 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곳은 빛도 하느님도 없는 막다른 골목과 같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인 우리는 어려울 때일수록, 지칠 때일수록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를 찾아가야 합니다. 자신의 삶에서 하느님을 찾는 시간을 만들고, 하느님 안에서 숨 쉬고자 노력한다면,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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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사실 나는 복음을 전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에페소서, 필립비서, 필레몬서와 함께 ‘옥중 서간’으로 분류되는 콜로새 서간은 사도 바오로가 옥에 갇혀있는 동안에 (콜로새서 4장 3절.10절.18절) 썼던 것입니다.
사도 바오른 그의 곁에 있던 티모테와 함께 공동체 교우들에게 인사하며 서간을 보냅니다. 콜로새서는 4장으로 되어 있는 비교적 대부분의 다른 서간들에 비해 짧은 서간이지만 인사(콜로새서 1장 1절-2절)와 끝인사(콜로새서 4장 7절-18절)로 되어 있는 서간형식을 갖추고 짜임새가 있고 내용이 풍부하다고 하겠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 공동에 간 적은 없지만 (콜로새서 1장 4절 / 2장 1절) 그가 에페소에 머무는 동안 그의 제자 에파프라스가 그의 고향인 이곳에 공동체를 세웁니다.(콜로새서 4장 12절) 수인이 된 바오로는 에파프라스 편에 골로새 공동체의 어려운 처지의 소식을 전해 듣고 티키코와 오네시모스를 그곳으로 보냅니다.
여기에서 보듯 바오로는 콜로새 공동체를 직접 세우지는 않았지만 감옥에 갇혀 있는 자신의 처지를 알리며 두 사람을 보내어 그들을 가르치고 격려를 하려고 편지를 쓴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 공동체가 구체적으로 어떤 어려움에 처해 있는지에 대해서 알려주지 않습니다. 다만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나타나는 이단, 유다 그리스도인들 중에 예수님의 메시아를 부인하는 가르침과 천사들에 대한 갖가지 상상, 금욕주의, 계율실천 강조고 있었습니다.
또 다르게는, 당시 이미 체계화 되고 만연되어 있던 그리스도의 육체를 부인하는 영지주의 (그노시스)의 주장들을 미루어 보아 콜로새 공동체도 흔들어 놓았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비록 자신이 수인의 몸으로 그 공동체에 가지는 못해도 어려움에 부닥쳐 있는 공동체를 위해서 특별한 애정과 함께 그 공동체를 위해서 하느님께 기도하며 자신이 제자 에파프라스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그 은총을 우리가 사랑하는 동료 종 에파프라스에게 배웠습니다. 그는 여러분을 위하여 일하는 그리스도의 충실한 일꾼이며,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여러분의 사랑을 우리에게 알려 준 사람입니다.“(콜로새서 1장 7절-8절)
예수님의 복음선포가 갈릴래아 지방에서 시작 됩니다. 오늘은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그리고 시몬의 집에서 치유를 베푸십니다. 우리는 베드로 가정에 대해서 심지어는 그의 부인과 가족에 대해서 알 수는 없지만 루카는 시몬의 장모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시몬의 장모는 열병에 걸려 시달리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그 열을 가시게 해주십니다. 그녀는 일어나 예수님 일행을 위해 시중을 드십니다. 예수님 한 분도 아니고 그 일행을 위해 식사 준비에서부터 시중을 든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 소문을 듣고 사람들은 주위의 아픈 사람이나 마귀들린 사람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오지요. 예수님께서 손을 얹어 그들을 고쳐주십니다.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 외딴 곳으로 가십니다. 소문을 듣고 몰려온 군중은 주님을 찾아 다니다가 그분이 계시는 곳을 찾아내어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달라고 주님을 붙잡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선포를 위해서 비록 그곳이 정 들고 편안하기에 한 곳에 오래 머물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카 복음 4장 43절) 주님께서는 유다의 여러 회당을 다니시며 그곳에서 복음을 선포하며 그들을 가르치십니다.
우리는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복음의 씨가 뿌려진 공동체를 생각하며 애정의 마음으로 편지를 쓰는 사도 바오로의 복음선포에 대한 열정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는 그의 생명이 다 하는 날까지 로마에서 ‘달릴 길을 다 달린 사도’였습니다. 그가 여러번 고백했듯이 예수님이 그의 삶의 전부였습니다. 그분에 대한 사랑과 희망이 그렇게 무한한 열정을 주었으리라 우리는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외딴 곳까지 찾아 온 군중을 보시고도 그곳에 머무르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소명이 한 곳에 있지 않고 세상을 향하는 것입니다. 복음선포의 가장 큰 걸림돌은 아무래도 한곳에 정착하고 그곳에서 누리는 삶을 사는 것이겠지요.
예수님의 가르침을 삶으로 철저하게 실행한 분 중에 사도 바오로가 꼽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주저앉고 세상과 타협하려는 나약함을 딛고 복음선포의 소명을 매일 새롭게 하며 우리도 나의 가정뿐 아니라 공동체, 그리고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향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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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떠날 때를 안다는 것>
“사랑을 받게 되면 버림받을 때를 생각하고 편안하게 있을 때는 위태로움을 생각하라.”(명심보감)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자기의 때를 알고 준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어떤 것에 연연해하면 결국은 버림을 받게 됩니다. 버림받기 전에 떠나면 그를 기리고 아쉬움도 남는 법인데 그때를 못 맞춰서 결국 명예도 잃고 추하게 됩니다. 아쉬움이 남을 때 그때야말로 떠나야 할 때임을 잊지 맙시다. 칭찬받을 때, 그때가 떠나야 할 때입니다. 칭찬은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독이 되기 쉽습니다. 영국 속담에는 “바보를 칭찬해 보라. 그러면 훌륭하게 쓸 수 있다.”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칭찬받은 사람은 하나같이 바보처럼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자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달라고 붙들었습니다.”(루카4,42) 치유와 말씀에 사로잡혀 예수님과 오래도록 머물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쉬움을 남긴 채 떠나십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카4,33). 하시며 현실에 안주하지 않으시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찾으십니다. “성인은 언제나 깨어 있어서, 하늘이 명하는 바를 알고 그것을 따르는 사람이다”(이현주).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아버지의 뜻 안에 계셨습니다. 인기에 매몰되지 않고 한적한 곳을 찾고, 이른 아침 고요한 곳을 찾아 기도한 덕분입니다.
‘네가 아니면 안 된다.’라고 할 때, ‘네가 꼭 필요하다고 할 때’ 주님이 무엇을 바라시는지를 헤아려야 합니다. 그 얘기가 진심으로 하는 얘기인지, 아니면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인지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가 떠난 자리가 빛나고 아름답습니다. 어디에든 연연해 하지 말고 단순하게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주시길 기도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세상을 즐기고 싶은 유혹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요한 세례자를 기억해 봅니다. 그는 인기가 참으로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제자들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말합니다. ‘나는 작아져야 하고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한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분수를 알고 뒤에 오실 분을 위해 자리를 뜨게 됩니다. 바로 우리가 드러내야 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재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 증거됩니다. 그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의 모범과 표양을 통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많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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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남을 도우며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순히 사랑을 실천하라는 예수님 말씀을 따르기 위한 것일까요? 함께 사는 세상 안에서 서로 도우며 살아야 한다고 배워왔기 때문일까요? 언젠가 어느 신자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다른 본당에서 어렵다고 모금을 나와도 절대 도와주지 않습니다. 몇 년 전, 어느 성당에서 성당 건축을 위해 모금을 와서 우리 본당도 어렵지만 훨씬 더 어려운 것 같아서 공동체가 함께 도와줬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그 본당에 갔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 본당은 낡은 오르간인데, 그 본당에는 파이프 오르간이 있더라고요.”
어쩌면 자기보다 못한 사람만 돕겠다는 마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기 본당보다 더 멋진 모습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도움을 꼭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만 주는 것일까요? 더군다나 도움받은 본당 사람들도 자기들이 받은 도움을 기억하면서, 다른 이에게 많은 나눔을 실천하게 될 것입니다. 함께 사는 멋진 세상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또 도움을 주는 것은 상대방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아일랜드 리머믹대학교 크리벤 박사 연구팀이 봉사활동과 정신 건강의 관계를 살피기 위해 설문 조사를 시행했습니다. 2만 7천301명을 대상으로 평소 봉사활동을 자주 하는지와 우울증을 겪고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 결과 봉사활동을 자주 하는 사람일수록 우울 증상이 적게 나타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자기 건강을 위해서라도 도움 주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봉사활동은 곧 나를 위한 영양제와 같은 것입니다. 여러 이유를 들어 영양제를 먹지 않는 어리석음을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시몬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십니다. 시몬의 장모는 열이 가시자마자 즉시 일어나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시중을 들었다고 복음은 전해줍니다. 이 장면을 묵상해 봅니다. 사실 사위가 가정을 책임지지 않고 밖으로만 돌아다니는 모습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화병‘이 난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 치유를 받게 되지요. 정신적인 치유인지, 육체적인 치유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던 상태에서 해방됩니다. 그 이후 장모의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곧바로 일어나 시중을 든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게 되거나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처음에 감사했던 마음을 곧바로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님께도 간절히 기도했다가 문제가 해결된 후에는 새하얗게 잊어버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곧바로 행동했다는 것이지요.
사랑의 실천은 어떤 상황에서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나만 잘되면 그만이 아니라, 부족한 사람만 돕겠다는 생각도 아니고, 곧바로 일어나 주님을 섬기는 행동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사랑이신 주님과 함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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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지금 내 곁의 그대>
루카 4,38-44 (시몬의 병든 장모를 고치시다, 많은 병자를 고치시다, 전도 여행을 떠나시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가셨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어서, 사람들이 그를 위해 예수님께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을 앓는 이들을 있는 대로 모두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 주셨다. 마귀들도 많은 사람에게서 나가며,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꾸짖으시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당신이 그리스도임을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가셨다.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여러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셨다.
<지금 내 곁의 그대>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 주셨다.”(루카 4,40)
지금
내 곁의 그대
있어도 좋고
없으면 그만인
사람이 아니랍니다
주님께서
지금 내 곁에
그대를 두셨으니까요
지금
내 곁의 그대
다른 누가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랍니다
주님께서
당신 모습으로 지으신
그대는 오직 하나이니까요
지금
내 곁의 그대
바로 지금 오직 내가
뜨겁게 사랑해야 할
사람이랍니다
지금 아니면 다른 때
내가 아니면 누군가
사랑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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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완전한 믿음>
“우리는 여러분을 위해 기도할 때면 늘 하느님께 감사 드립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여러분의 사랑을 우리가 전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과 사랑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마련되어 있는 것에 대한 희망에 근거합니다.
사실 악마를 믿는다면 모를까 하느님을 믿는다면서 내게 믿음은 있지만 사랑은 없다고 말할 수 없다는 취지의 얘기를 지난주 테살로티카서를 묵상하며 한 바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으면서 이웃 사랑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믿음이 거짓이거나 불완전하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오늘 바오로 사도는 콜로새 신자들이 주님께 대한 믿음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칭찬하고, 이 주님께 대한 믿음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천국의 희망에 근거한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 신앙의 모범이라고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 세상과 저세상을 아우르는 참신앙이요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실로 신앙이 아예 없는 사람도 있고 사랑이 뭐냐며 사는 사람도 있으며, 신앙과 사랑이 있더라도 이 세상용 믿음과 사랑만 있거나 저세상용 믿음과 사랑만 있는 사람이 참 많기 때문입니다.
또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있지만 이웃 사랑은 없으며 하느님을 믿는 것도 이 세상에서 자기에게 복을 주시기만을 바라며 믿기에 매우 이기적이고 현세 구복적인 신앙생활을 하다가 복은커녕 화가 미친다고 생각되면 그 신앙마저 그만두는 사람도 꽤 있지요.
물론 천국의 행복만을 바라며 이 세상에서의 행복은 포기하고, 가족도 포기하고 재물도 사이비 교주에게 갖다 바치는 그래서 이 세상에서도 저세상에서도 불행한 신앙인도 꽤 많습니다. 신앙은 있는데 정신이 병이 든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의 믿음은 희망에 터하고 사랑과 행복으로 증명되는 완전한 믿음을 살아야 하는데 이것을 콜로새 신자들에게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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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길을, 희망을, 빛을, 진리를, 중심을 잃은 병든 사회”>
- 답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뿐이다 -
한 밤중 기상하여 수도원 자비의 집 숙소를 나서면서 우선 바라보는 수도원 배경의 하늘과 불암산입니다. 그리고 집무실 안에 들어서면 십자고상과 그 바로 아래 태극기를 바라보며 성호경과 영광송을 바친후 만세오창, 기도를 합니다. 언제까지 지속될지... 속히 안정되어 만세오창도 그만뒀으면 좋겠지만 전망할 수 없는 암울한 현실입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요셉 수도원 만세!”
하늘과 산을 바라볼 때 마다, 주님과의 관계가 날로 깊어지기를 바라며 읊는 제가 아끼는 대표적 자작시 “하늘과 산”입니다. 늘 인용해도 언제나 새롭습니다.
“하늘 있어
산이 좋고,
산 있어 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
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
예나 이제나 반복되는 인간 무지의 현실입니다. “이것이 나라입니까?” 현수막 글씨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나라대신 무엇을 다 넣어도 통하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이것이 가정입니까?
이것이 교회입니까?
이것이 사회입니까?
이것이 학교입니까?
이것이 수도원입니까?
이것이 사람입니까?
정의롭지 못한, 공정하지 못한, 평화롭지 못한 현실을, 공동체를, 개인을 암시한, 참으로 회개를 촉구하는 말마디입니다.
사람이라 다 사람이 아니라 괴물같은 사람도 곳곳에 넘칩니다. 주님을 떠나면 바로 그 자리가 지옥이요 괴물의 출현입니다. 주님께서 공생애 시작전 자신의 사명을 만천하에 선언한 장엄한 출사표같은 이사야서를 인용한 말씀이 생각납니다.
이어지는 오늘 복음은 이 말씀의 실현입니다.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시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주님을 만날 때 무지의 어둠으로부터 해방이요 희년의 실현이자 자유인으로서 참삶의 실현입니다. 비단 예수님뿐 아니라 세상에 파견되는 우리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가 또 하나의 예수님입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답은 예수님뿐입니다. 마음 깊이에서는 예외없이 길을 찾는, 빛을 찾는, 희망을 찾는, 진리를 찾는, 중심을 찾는 인간입니다.
그러나 길을 잃은, 빛을 잃은, 희망을 잃은, 진리를 잃은, 중심을 잃은 병든 사람, 병든 사회, 병든 세상, 병든 지구입니다. 개인이든 사회든, 지구든 곳곳에서 병든 징후가 드러납니다. 어제 소개된 신문에서 읽은 에세이집, “강남은 거대한 정신병동이다”란 말마디가 충격이었습니다.
“돈과 물질을 숭배하는 풍조가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 서울 강남은 명실상부 ‘욕망1번지’다. 거리에는 집 한 채 값에 달하는 외제차가 즐비하고, 자정이 넘어서도 클럽과 유흥주점의 네온사인이 불을 밝힌다. 대치동 학원가에는 ‘내 새끼는 명문대에 가야 한다’는 부모들의 맹목적인 신념으로 지친 아이들이 ‘학원 순례길을 걷는다.”
얼마나 깊이 병든 사회인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그대로 지옥도의 풍경 묘사같습니다. 이래서 거대한 정신병동이라 하는 겁니다. 아니 강남만 그렇습니까? 정도의 차이일뿐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며칠전 몽골 사목 방문후 기내 회견중 교황은 교회내 세상내 이념들에 대해 경고했습니다. 영어 말마디 이데올르기가 이념입니다. 이념전쟁이 치열하게 펼쳐지는 우리의 현실에 주는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88세 노령의 교황의 총명함이 빛나는 대목입니다.
“그들의 이념들을 주입하고 싶어하는 것이 제국주의다. 문화가 증류될 때 이념들이 될 때, 그것은 독이다. 문화는 소비되고 이념으로 증류된다. 우리는 어떤 철학자들이나 정치가들에서 나타나는 이념들로부터 사람들의 문화를 구별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누구에게나 교회에게나 말한다. 교회내에도 종종 뿌리로부터, 위로부터 분리시키는 이념들이 있다.
그들은 교회를 성령의 영향으로부터 분리시킨다. 이념은 육화될 수 없다. 그것은 하나의 이념일뿐이다. 이념이 자배하고 정책이 될 때, 그것은 독재가 된다. 그렇지 않은가? 그것은 대화에, 문화들로 나가는데 무능력하게 된다. 제국주의가 이것을 한다. 제국주의는 언제나 이념으로부터 출발하여 굳혀버린다.
우리 역시 교회내에서 이념으로부터 교의를 구별해야 한다. 참된 교의는 결코, 결코 이념적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들 안에 뿌리내리고 있다. 그대신 이념은 실재로부터, 사람들로부터 이탈시킨다. 답이 됐는지 모르겠다.”
이념의 우상에 미치면 광신狂信에는 백약이 무효입니다. 답이 없습니다. 이념의 악령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념을 믿는게 아니라 복음의 예수님을 믿습니다. 온갖 악령들이 발호하는 시절입니다. 이에 대한 답은 예수님 하나 뿐입니다.
길이요 희망이요 빛이요 중심이요 진리이신 주님을 잃었기에 병든 개인, 병든 세상입니다. 이런 주님을 만날 때 비로소 참삶의 실현이요 전존재의 힐링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어제의 마귀 축출에 이어 주님은 오늘은 시몬의 병든 장모를 고쳐주시고, 병을 앓는 많은 이들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주십니다. 여기서 주목할 장면이 있습니다. 치유받은 시몬의 장모는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합니다. 치유와 동시에 주님 중심의 공동체에서 섬김의 활동이 뒤따라야 함을 배웁니다. 참으로 영육의 온전한 치유와 건강에 섬김과 나눔의 사랑이 제일임을 깨닫습니다.
마귀들 역시 주님을 고백하며 달아납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온전한 치유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영혼치유와 건강에, 정신치유와 건강에 주님과의 만남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다음 장면이 우리에게는 참 좋은 가르침이 됩니다. 날이 새자 외딴곳으로 가셔서 아버지와의 깊은 내적 친교 시간을 갖는 주님이십니다. 이어 주님은 집착하는 제자들을 단호히 내치시며 복음 선포에 전념하십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이런 복음 선포와 더불어 영육의 전인적 치유요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그 좋은 본보기가 바오로가 감사기도를 드리는 제1독서의 콜로새 교회 신자들입니다. 참으로 영육의 건강에 신망애의 삶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배웁니다. 콜로새 신자들의 우리 주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성도들을 향한 사랑에 감사하는 바오로입니다. 이어 바오로는 이 믿음과 사랑은 하늘에 마련되어 있는, 진리의 말씀 복음을 통하여 들은 희망에 근거함을 밝힙니다. 그러니 하느님 희망에 뿌리내린 믿음과 사랑의 복음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이 복음이 우리 안에 열매를 맺으며 끊임없이 성장할 때 참 자유롭고 건강한 복음적 삶의 실현입니다. 복음의 성장! 얼마나 멋진 말마디인지요. 길이자 희망이자 진리이자 빛이자 우리 삶의 중심이신 주님과의 부단한 만남과 더불어 치유되는 영혼들에 복음의 성장이요, 충만한 신망애 삶의 실현입니다. 그대로 날마다 외딴곳에서 거행되는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길을, 희망을, 빛을, 진리를, 중심을 잃은 병든 사회에 유일한 치유의 힐링은 예수님뿐이요 이 거룩한 미사은총뿐임을 깨닫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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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카4,43)
<예수님의 땀!>
오늘 복음(루카4,38-44)은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시는 말씀과 많은 병자를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땀(수고)'에 대한 묵상입니다.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신 후 갈릴래아에서의 전도를 시작으로 예수님의 공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공생활은 예수님의 땀, 수고 그 자체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많은 병자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밀려오는 많은 사람들 때문에 제때에 식사하시지도, 쉬시지도 못하셨습니다. 기도도 밤중이나 새벽에 하셨습니다.
'옴니부스 옴니아(Omnibus Omnia)', 이는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신 예수님을 가리키는 언어'입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되었다."(루카4,43)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모두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이 되셨습니다.
하느님 감사!
예수님 감사!
성령님 감사!
그러니 이제는 우리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감사의 보답을 드려야 할 차례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우리가 예수님을 대신해 너의 구원을 위해 땀(수고)을 흘려야 합니다. 그러니 이제는 나를 통해 기쁜소식(복음)이 너에게로 전해져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일을 하도록 파견된 자들입니다.
"믿음과 사랑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마련되어 있는 희망에 근거합니다."(콜로1,5)
우리의 희망인 영원한 생명을 그리워하면서 오늘도 코이노니아(Koinonia), 곧 우리에게 주어진 예언직 사명인 선교 사명에 충실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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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egvVggIRUj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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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루카 4, 43)
기쁜 소식이
우리를
찾아왔다.
아픔과
두려움을
함께 나눈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아픔을
걷어내시는
기쁜 소식의
주님이시다.
생생한
삶의 현장에
예수님이
계신다.
기쁜 소식은
기쁨으로
살게하는 기쁜
만남이다.
주님 친히
기쁨이 되시어
함께
우리 곁에서
기쁨으로
생활하신다.
기쁨을
몸소 실천으로
옮기신다.
기쁨은
뜨거운
사랑이 되어
다가온다.
소란스러워도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일을
하신다.
우리를 향한
연민의 마음은
숨길수 없다.
기쁜 소식은
이론이 아니라
뜨거운 실천이다.
오늘
우리는 어떤
실천을 하고
있는지를
성찰하게 된다.
삶의 소명은
복음이다.
복음은
우리의 모든
시간을
깨어나게 한다.
우리의 시간에
이미 와 있는
복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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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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