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이 과연 자주적으로 군사주권 및 외교권을 행사하는 나라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제법상 주권국가란 영구한 주민, 일정한 영토, 실효적인 정부 그리고 제3국과의 자주적인 외교능력 보유, 최소한 이 4가지 요소를 갖추어야 한다. 그래서 국제법상으로는 위의 네 번째, 자주적인 외교능력이 없는 나라를 종속국 또는 피보호국이라고 한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 후의 대한제국과 1933년 이후의 만주국이 일본의 종속국이었던 것도 자주적 독자적인 외교·군사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1945년 2차대전 후 신생독립국이 외양상으로는 정치적 독립을 이루었지만 외교군사 주권은 물론이고 경제적으로도 과거 식민지 종주국에 여전히 종속되어 있다.
[ 우리 주권을 제약해 온 불평등 조약들 ]
한미간에 그 동안 한국의 군사주권을 제약해 온 불평등 조약 문제는 작전지휘권 이양 문제, 상호성이 결여된 한미방위조약의 문제, 불평등한 한미행정협정, 과다 방위비 분담 특별조치협정, 그리고 자주국방을 저해하는 한미 미사일각서, 이 다섯 가지로 집약된다.
1950년 7월 15일 이승만 대통령은 유엔군과의 통일적인 전략·전술의 조정을 위해 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유엔군 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에게 이양하는 내용의 공한을 보냈다. 맥아더 장군의 회신이 우리 정부에 접수됨으로써 국군에 대한 대통령의 작전지휘권은 교환공문의 형식으로 유엔군 사령관에게 이양되었다. 1954년 11월 17일 한미방위조약의 비준서 교환 당시 변영태 외무장관과 브릭스 주한 미대사가 「한국에 대한 군사 및 경제원조에 관한 한미간의 합의의사록」에 서명함으로써 국군 작전지휘권 이양은 다시 한번 명문화되었다.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은 이승만 대통령의 「작전지휘권 이양에 관한 공한」과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에 의한 '유엔군과의 관계에서의 작전지휘권'과, 「한미합의의사록」과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의해 주둔하는 '주한미군과의 관계' 등 이원적인 구조로 되어 있다. 작전권 이양은 대한민국과 유엔간에 이루어진 것이지, 대한민국과 미국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작전권 이양 기간에 대해서 「작전지휘권 이양에 관한 공한」에는 "현 적대행위의 상태가 계속되는 동안"으로 되어 있으나, 「한미합의의사록」에는 "대한민국의 방위를 위한 책임을 부담하는 동안"으로 되어 있다. 또한 유엔군과의 작전권 이양은 군 인사권을 포함한 작전지휘권(Operational Command)을 지칭한데 반해, 후자의 경우 군 인사권을 배제한 작전통제권(Operational Control)을 의미한다. 현재 미군이 갖고 있는 것이 바로 전시 작전통제권이다. 이러한 작전지휘권과 작전통제권의 이양은 주권의 양도이며, 남북 관계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이 대한민국에 있지 않다는 것을 근거로 북한이 한반도 군사문제 처리협상에서 대한민국은 당사자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완전한 작전지휘권 행사는 전시 작전지휘권 없이는 불가능하다. 특히 남북한 화해 협력의 장전인 남북기본합의서의 상호 불가침 약속을 실현하는 데서 군작전지휘권은 매우 중요하며, 나아가 민족문제를 남북이 주체가 되어 해결하는 데서도 군사작전지휘권 환수는 필수적인 요건이다.
1970년대 들어 한미 군사관계와 관련한 특기사항은 주한미군이 주한 유엔군사령부 휘하에서 벗어났다는 점이다. 즉 1975년 9월을 기점으로 한국전쟁 이후 주한 유엔군의 이름하에 주둔했던 미군이 명실공히 '주한미군'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도 사실상 주한유엔군이 아닌 주한미군이 행사하고 있다.
한미 군사관계와 관련한 또 하나의 중요한 변화는 1977년 7월 25일 서울에서 개최된 제10차 한미연례안보협의회 결과 서종철 국방장관과 브라운 미국방장관이 한미연합사령부 설치 합의내용을 담은 「한미공동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한미연합 사령관은 미군 대장이, 한미연합 부사령관은 한국군 대장이 각각 임명되며, 육군 구성군 사령관과 공군 구성군 사령관 역시 미군 장성이 맡았다. 군대의 조직원리상 군사령관에게 그 휘하의 군대를 지휘할 작전지휘권이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최근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에 따른 국군의 현대화와 자주국방화의 추진, 그리고 분단 한국의 자주통일 요청은 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의 환수를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1994년 11월 30일 평시작전권을 한미연합사로부터 환수했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이 평시 대간첩작전에 독자적으로 작전지휘권을 행사할 수 있는 정도에 불과할 뿐 다른 큰 의미는 없다. 오히려 미국은 이를 통해 한국의 정치 개입 의혹으로부터 발을 빼는 계기를 만들려고 했다. 완전한 작전지휘권 행사는 전시 작전지휘권 없이는 불가능하다. 특히 남북한 화해 협력의 장전인 남북기본합의서의 상호 불가침 약속을 실현하는 데서 군작전지휘권은 매우 중요하며, 나아가 민족문제를 남북이 주체가 되어 해결하는 데서도 군사작전지휘권 환수는 필수적인 요건이다.
[ 미군에게 대한민국보다 더 좋은 나라는 없다 ]
「한미상호방위조약」 제4조는 "상호 합의에 의하여 미합중국의 육군, 해군과 공군을 대한민국 영토 내와 그 부근에 배치하는 권리를 대한민국은 허여하며 미합중국은 이를 수락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 시설과 구역이 사유재산이든 지방자치 소유이든 국유이든, 토지소유자가 동의하든 안 하든 상관없이 무상으로 병력을 주둔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점은 다른 상호방위조약과 구별되는 것이다. 일본의 오키나와 기지의 경우 1953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발효 후 그 동안 점령지에서 무단 점거하던 군용지는 지주에 대해 미국 정부 사이에 임대차계약을 맺어 사용료를 지불하는 방식으로 전환되었다.
우리의 경우도 1953년 7월 정전협정 후 그 동안 무단점거했던 미군기지를 개별적으로 검토해 토지소유자와 미군당국 사이에 임대차계약을 맺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임대차는 고사하고 1967년까지 미군의 무상점거사용을 방치해 두다가 1967년 「한미행정협정」 제2조를 통해 소급 인정해서 합법화시켜 버렸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제6조는 그 효력기한을 무기한으로 규정하면서 어느 당사국이든지 타 당사국에 통고한 1년 후에야 본조약을 종료시킬 수 있다고 했다. 이러한 구조적 불평등관계가 종료되기 전까지는 주한미군의 법적 지위에 관한 대등한 정립은 잠정적으로 불가능하다. 「한미행정협정」 제31조는 상호방위조약이 유효한 동안 효력을 가진다고 명문화하고 있다. 반면 「미일안보조약」 제10조는 조약의 효력기간에 대해 10년간 유효하다고 규정함으로써, 일본의 협상력 제고에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주지할 만한다.
[ 미국이 일방적으로 중단한 「주둔군지위협정」 개정협상 ]
한미간 불평등의 상징인 「한미주둔군지위협정」의 개정 협상은 지난 95년 11월 제1차 협상을 필두로 96년 1월 말까지 종결하기로 예정되었다. 그러나 개정 협상은 97년 7월의 7차 협상을 마지막으로 미국측의 일방적인 통보에 의해 중단된 상태이다.
그 사이 98년 8월 31일 군산에서 달러상 할머니가 미군병사에 의해 면도칼로 잔인하게 살인당했다. 그러나 불평등한 협정 때문에 한국측은 미군 피의자를 제대로 초동수사조차 하지 못하는 현상을 되풀이했다. 현행 「한미행정협정」 제22조 5항에 의하면 "미군 신병이 미군당국의 수중에 있는 경우에는 모든 재판절차가 최종 종결되고 또한 대한민국 당국이 구금을 요청할 때까지 미군당국은 계속 이 구금을 행한다"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미군피의자가 대한민국 당국의 수중에 있는 경우조차도 최종재판이 끝날 때까지 미군이 요청하면 언제든지 미군신병을 인도해 주게 되어 있다.
지난 96년 3월 미군당국이 동두천 광암동 쇠목마을의 길목에 사격장을 재개하려고 하자 주민들은 주민 생존권의 박탈 및 사유재산권 침해를 들어 강하게 반발하였다. 토지소유자 대부분 이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는 자신의 토지가 공여지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 해 4월 23일 동두천 미군 2사단 훈련장에서 발사한 유탄이 산불을 일으켜 7명의 한국 젊은이들이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 한국인은 접근할 수조차 없고, 미군측만이 기지를 관리하도록 되어 있는 허술한 행협 규정이 사고의 큰 원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96년 9월 7차 한미행협 협상 타결내용에는 이렇듯 중요한 시설 및 구역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이는 한미행정협정의 협상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동안 한미행협은 부분적으로는 개선되었지만 불평등의 상징인 부속문서 「합의의사록」은 전혀 손조차 대지 못했다. 그래서 1991년 2월 1일 개정된 한미행협은 여전히 불평등한 요소를 지니고 있어 4년 6개월 만에 다시 개정협상에 들어간 것이다.
현행 한미행협은 형사관할권 행사에서 미군 피의자에게 지나친 권리를 부여하고 있으며(제22조), 민사청구권 행사에서도 절차가 복잡해서 한국인 피해를 구제하기 쉽지 않다는 문제점(제23조)을 갖고 있다. 미군부대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노무자들에 대해 국내 노동법이 적용되지 않는 문제(제17조)와 협정 해석시 영어본을 우선하는 문제, 그리고 미군시설과 기지 사용으로 인한 환경문제 및 사유재산권 침해 등도 여전히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 일본보다 4배나 많은 주한미군 지원비용 ]
더 큰 문제는 미군기지를 무상으로 제공하는 것을 넘어서 미군의 주둔비용까지 방위비 명목으로 지원하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는 1990년에 6월 용산기지 이전 비용조차 한국정부가 부담한다고 약속한 것이다. 「한미행정협정」 제5조 1항에 의하면, "합중국 군대의 유지에 따르는 모든 경비는 합중국이 부담한다"는 합중국 부담의 원칙 조항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측이 미군당국에 직간접적으로 지원하는 비용은 87년 당시 19억6백만달러, 우리 돈으로 약 1조4천억원에 이르고 있다. 한국정부는 이러한 문제점을 해소하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법적으로 제도화시켜 버렸다. 1991년 2월 21일 발효된 「대한민국과 아메리카합중국 간의 상호방위조약 제4조에 의한 시설과 구역 및 대한민국에서의 합중국 군대의 지위에 관한 협정 제5조에 대한 특별조치에 대한 대한민국과 합중국간의 협정(이하 '제1차 방위비 특별협정')」에 의하면, "대한민국은 이 협정의 유효기간 중 주둔군 지위협정 제5조 2항에 규정된 경비에 추가하여 주한미군의 한국인 고용원의 고용을 위한 경비의 일부를 부담하며, 필요하다고 판단될 경우, 다른 경비의 일부를 부담할 수 있고"(제1조), "대한민국은 매 회계년도마다 대한민국이 부담할 경비의 실제액수를 결정하여 이를 신속히 미합중국에 통고하도록"(제2조) 하고 있다. 이 협정은 행정협정 제5조 1항에 모순되는, 행협의 개악이다. 21세기 평화통일시대를 대비한 바람직한 한미관계는 내부적으로는 역사를 올바로 세우고, 대외적으로는 자주적인 주권국가의 면모를 회복하는 일이다.
주한미군 지원비용은 한국의 경제능력에 비해, 또 타국에 비해 지나치게 맣은 것이다. 실제로 지난 1995년도 한국의 주한미군 방위비 직간접비 총 분담금은 약 17억2천3백52만달러였다. 이 분담금은 우리보다 경제력이 11배인 일본의 4.2배, 경제력이 4.5배인 독일의 6.8배에 달하는 것이었다.
이제 주한미군은 과거 냉전시대와는 달리 순수한 한국방위만의 이해를 넘어 동아시에서의 미국이 국제정치적 이해를 위해 주둔한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이것은 이미 미의회 보고서에서도 인정되고 있는 사실이다. 탈냉전 후 주요한 세계 무기시장으로 남아 있는 한반도는 미국 군수재벌의 압력으로 미국이 결코 물러서기 어려운 시장이다. 더구나 한국정부가 무상으로 제공하고 있는 사유지에 대해서조차 방위비 분담금으로 산정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미국은 당해년도 예산에서 공유지 임차표를 지불하는 일본에 대해서는 방위비 분담금으로 평가하고 있다.
향후 주한미군 분담금 협상에서 정부는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협상을 한미행정협정의 개정, 무역역조, 경수로지원 등 전반적인 한미관계와 연계하면서 한국정부가 사실상 주한미군에 지원하고 있는 부동산 무상지원을 비롯, 카투사 등 각종 인력지원비, 면세혜택 등 제반 간접 지원경비까지 포함하는 포괄적 방위비 분담금 산출방식을 미국에게 당당하게 요구해야 할 것이다.
[ 자주 국방 저해하는 한미 미사일각서 ]
한국의 군사적 주권을 제약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1982년에 체결된 「한미미사일각서」다. 한국은 이 각서에 따라 지금까지 사정거리 1백80km 이상 미사일의 개발에 제한을 받아왔다. 그 동안 미국은 이 각서에 따라 한국군이 사정거리 1백80km 이상의 지대지 미사일을 독자 개발하지 못하도록 하였고 민간로켓 개발까지 제한했다.
미국은 지난 96년 6월 미사일각서 개정을 합의하기로 구두로 약속하고도 지금까지 기술개발과 연구결과의 타국이전금지를 보장하는 보장양해사항이라는 부대조건을 제시하면서 그 개정을 미루고 있다. 99년 7월 초 미국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은 5백km 미사일 연구개발 문제를 미국측에 제안한 바 있다. 쟁점은 어느 수준으로 연구개발을 하느냐의 문제이다. 또 95년 국내 방산업계는 총 3억7천만달러의 무기류를 제3국으로 수출하기 위해 미국의 동의를 요청했다. 그러나 미국이 동의해 준 수출허락 실적은 총 10만달러로 고작 0.03%에 불과했다. 한국의 자주국방을 위해서는 향후 「한미미사일각서」처럼 한국의 방위산업을 제약하는 제반 협약을 폐기하는 것은 물론 한국의 군현대화와 자주국방을 저해하는 미국의 관행을 고쳐나가야 할 것이다.
21세기 평화통일시대를 대비한 바람직한 한미관계는 내부적으로는 역사를 올바로 세우고, 대외적으로는 자주적인 주권국가의 면모를 회복하는 일이다. 특히 국제법상 주권국가란 자국 내에서 법질서를 위반하는 자에 대한 형사재판 관할권을 온전히 행사할 수 있어야 하고, 군 작전지휘권과 자국의 영토, 영해, 영공에 대한 완전한 주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군사적 자주성 회복에 대한 노력은 군 작전전 지휘권 환수와 더불어 구조적으로 불평등한 한미방위조약, 한미행정협정의 개정, 과다한 방위비 분담 특별조치협정의 폐기, 그리고 미일 미사일각서 폐기 등 한미간의 불평등한 조약의 시정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현재로서 지난 96년 9월 11일 7차협상이 결렬된 지 거의 2년 9개월이나 흘렀는데도 행협 개정 재개는 오리무중이다. 국민의 정부조차도 출범이래 불어닥친 IMF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미국의 협조를 구하고 눈치를 보느라 대미외교가 너무 종속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런 점에서 한미우호관계의 걸림돌인 불평등한 협정들의 개정은 동북아질서와 한반도 정세의 전환기에 한미간 이해를 현명하게 조율하고 관리하기 위해서도 매우 필요하다.
이제 21세기의 한미관계는 과거같이 일방적 특혜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필요로 하는 동반자 관계이며 또 그렇게 발전되어 가야 한다. 따라서 국제적 차원에서 한국의 세계화는 과거 제국주의시대, 냉전시대에 그리고 정부의 정통성이 없는 시대에 불평등하게 체결된 조약의 개정작업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이것을 통한 우리정부의 외교·군사적 자주성 확보는 남북기본합의서를 충실하게 실천하게 만들 것이며, 나아가 북한을 우리의 대화 테이블에 돌아오게 할 것이다. 『말』지 9월호에서 발췌이장희 교수는 1950년 경주에서 태어나 고려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외국어대 법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공동대표, 경실련 통일협회 이사, 민화협 정책위원장 등을 맡으며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저서로는 『나는야 통일1세대』, 『전환기에 선 한국 법치민주주의』, 『환경보호와 국제법 질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