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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와 한일관계 역사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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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6백만 부 이상이 팔렸고 한국에서도 3백만 부 이상이 팔려 베스트 셀러가 되었던『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는 ‘한국어판에 부치는 저자의 말’에 이렇게 적었다.
“--- 무릇 이웃나라끼리는 사이가 나쁜 법입니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 사이는 불행한 과거를 갖고 있기 때문에 관계 개선이 더욱 어려워지고, 좋은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머리를 싸 쥐고 골치를 앓을 수밖에 없는 것이 현재 실정입니다. ---”
세계사를 살펴보면 시오노 나나미 작가의 말처럼 이웃나라끼리는 사이 좋은 나라가 별로 없다. 서로 역사적으로 앙금을 쌓아 놓아 오늘날 까지도 앙숙으로 남아 있는 경우가 국경을 맞대놓고 있는 유럽과 아시아 국가에 많다.
우리나라와 일본, 우리나라와 중국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한일 관계에 놓여 있는 갈등은 주로 고대사를 비롯한 역사해석의 문제, 일제의 침략전쟁에 대한 진정한 사죄의 문제, 정신대 할머니들에 대한 보상문제, 미래의 주인공을 가르치는 교과서의 사실 표기문제 등으로 집약되어 있다.
두 나라의 이러한 갈등을 제 3국의 입장에서 본다면 마치 이웃 사람들이 서로의 단점과 허물을 들추어내고 왈가왈부하는 모습으로 보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과 일본은 미래지향적인 입장에서 진실을 밝히고 올바른 역사를 미래의 주인공들에게 가르쳐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일본 고교 교과서에는 일본의 고대국가인 야마토(大和)가 한반도를 지배했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임나일본부설’은 일본 식민사관의 중심축이다.
지금까지 일본은 한반도 침략을 정당화 하는 역사적 근거로 이를 활용해왔다. 한반도는 본래 일본의 속국이었다는 주장을 계속하여 온 것이다.
한국 학계에서는 ‘임나일본부설’을 전면 부인하고 있다.
2회에 걸쳐 열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2007년 6월 출범 1010년 3월 최종보고서 발표)에서도 한반도 남부 가야지역을 일본인이 지배했었다는 ‘임나’의 존재는 역사적 실효가 없음을 공식화 했다. 일본의 양심적 학자들은 일본의 ‘가야지배설’을 더 이상 주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역사교육이 전혀 바로 잡혀지지 않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아직도 일본의 고교 교과서에서는 ‘임나일본부설’을 마치 정설처럼 표기하여 가르치고 있고, 일본학생들은 “옛날에 일본은 한반도를 지배했었다”라는 허위역사를 사실처럼 배우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본정부는 엄연한 대한민국의 영토인 독도를 자기나라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 문부성에서 감수하는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와 중고등학교 지리 교과서에도 독도는 일본영토라고 표기하여 미래 주인공들에게 세뇌 작업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우리나라 옛날 속담에 친구는 선택할 수 있어도 이웃은 선택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개인에게 친구가 있고 이웃이 있듯이, 나라에도 친구가 있고 이웃이 있다.
한국과 일본은 이웃나라이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일제가 만들어 놓은 식민사관에 대해서 잠깐 언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일제가 만들어 놓은 식민사관에는 몇 개의 이론이 있다. 이 이론들은 일본인 사학자들이 조선의 선비와 양반을 억지로 비틀기 위해 일부러 만들어 낸 이론이기 때문에 반드시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 반도적 숙명론.
지리적 결정론이라고도 말한다. 우리나라가 지형이 반도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종속성을 면할 수 없다는 숙명론이다. 반도는 대륙에 종속되어야만 하는 숙명론이기 때문에 아예 식민사관 이외의 어떤 사관도 가질 수 없다.
㉯ 사대주의론.
사대주의론의 주공격대상은 조선시대에 집중되어 있다. 조선은 중국에 무조건 사대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사대의 의미를 왜곡 한데서 비롯된 그릇된 단정이다. 원래 사대(事大)는 사소(事小)의 반대말이다. 큰 것과 작은 것을 가리키는 단어에 불과하다. 사대와 사소는 쌍방관계다. 이것은 전통시대에 존재한 큰 나라와 작은 나라의 외교질서다. 사대주의론 자는 조선이 중국의 책봉을 받아왔다는 것과 조공을 해왔다는 사실을 거론한다. 책봉은 당시 유교문화권의 외교관례로 큰 나라로부터 외교적 승인을 받아내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에도 지구촌에서 새로운 정권이 탄생하면 강대국인 미국의 승인을 먼저 받으려고 하는 것과 같은 정치적 외교관례인 것이다. 어느 나라가 미국의 승인을 받는다고 해서 미국의 속국이 되는 것은 아니다.
조공(租貢)은 사여(賜與)의 반대어다. 조공과 사여는 세트로 연결되어 있다. 전통사회에서는 사신의 왕래가 외국과 교류하는 대표적 방식이었다. 사신은 규모가 작으면 300여 명 규모가 크면 700여 명이 국경을 넘나드는 정기적 왕래행사였다. 여기에는 당연히 물적 교류가 동반되었다. 자국의 특산물을 가져가는 것을 조공이라 하고, 조공품에 대한 답례품으로 받아오는 것을 사여라고 한다. 조공과 사여에는 동가동량의 원칙이 적용된다. 오늘날로 치면 수출과 수입을 하는 무역거래인 것이다.[1]
동아시아 유교문명권에서는 개인 사이의 예절을 중요시한 것과 마찬가지로 국가 간의 교역도 예의로서 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조정의 육조 중에서 예조가 사신과 무역을 담당하였다. 당연히 외국과의 거래도 예의를 갖추어 행하여졌다. 책봉과 조공은 일제식민사관이 단어의 의미를 왜곡하여 만들어낸 허구적 해석으로 조작된 사대개념이다.
㉰ 사색당파론(사색당쟁론).
사색당쟁론은 식민사관 중에서도 일본의 어용사학자들이 만들어 낸 가장 왜곡된 논리다.
일본 어용사학자들의 주장은 조선이 사색당쟁만 하다가 망했다는 것이다. (사실은 조선은 망하지 않았다. 대한제국이 망했다.) 조선이 전기에는 사화를 일으키고 후기에는 당쟁으로 점철된 싸움만 하다가 나라를 망하게 했다는 것이다. 먼저 사색당파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무엇보다 조선에는 동시대에 존재한 사색이 없었다. 학파의 학문적 차별성 때문에 붕당이 생기고 붕당은 정파가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한 정파가 여당과 야당역할을 하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조선은 2당 체제 또는 1당 체제는 있었지만 4당 체제는 한 번도 없었다. 시기적으로 차이를 두고 붕당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4당이 동시대에 존재할 수도 없었다. 사색이라는 용어는 일본인사학자가 결과적으로 생긴 네 개의 학파(남인, 북인, 노론, 소론)를 단순히 숫자만 세어보고 만들어낸 조어에 불과한 것이다.
조선의 학파성립은 16세기 말에 시작한다. 사림이 전국적으로 늘어나게 되자 학파가 정파로 전환된 것이 붕당인 것이다. 붕당 때문에 나라가 망하였다면 300여 년에 걸쳐 나라가 망하였다는 논리다. 세계사에서 나라가 망하는데 300여 년이나 걸린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하나의 나라가 성립하여 300여 년간 존속하기도 힘든 것이 세계사에 나타나 있는 일개 국가의 역사다.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중국 왕조의 평균수명은 100여 년도 못 된다. 15년에서 30년을 지탱하지 못하고 망한 나라들이 손꼽을 정도로 많다. 중국과는 반대로 우리나라에서는 나라가 세워졌다 하면 500년 이상 지속됐다.
조선왕조가 국학으로 삼은 성리학은 기본적으로 붕당을 인정하고 있다. 성리학을 개막한 시대인 송나라 때
조선에서 학파가 등장한 것은 사림 중에서 영남학파가 ‘동인’이 되고 기호학파가 ‘서인’이 된 것이 시발점이다. 그 후 동인은 퇴계 이황 계열의 ‘남인’으로, 화담
임진왜란이 종료된 후 광해군 시대에 소수의 야당이었던 ‘북인’(동인) 정권이 잠시 들어섰다. 임진왜란 때 북인출신 의병활동이 가장 눈부셨기 때문에 대의 명분을 얻은 ‘북인’(동인)들이 대거 출세를 할 수 있었다. 광해군 정권은 얼마 못 가 인조반정으로 무너진다. 정권에서 밀려난 ‘서인’이 다시 정권탈환을 주도하였고 인조반정(1623)이 성공해서 인조가 임금이 되었다. 인조반정으로 일거에 무너진 ‘북인’(동인)은 붕당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하였다. 이후 동인의 존재는 미미해지고 정권쟁탈전에서 사실상 사라졌다.
조선의 17세기는 수적으로 많은 ‘서인’이 여당을 하고 수적으로 열세인 ‘남인’이 야당의 역할을 하는 체제였지만 서인의 독주체제가 형성된다. ‘서인’은 쇄국을 주장하는 집단으로 강력한 집권체제를 구축하였고, 서구문물을 받아들여 실학을 주도한 집단인 ‘남인’은 ‘서인’조정의 탄압을 받아18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단 한 사람도 정승진출을 하지 못했다. 200여 년에 걸친 ‘서인’의 독주체제는 결국 조선의 침체와 <대한제국>의 멸망으로 치닫게 된다. ‘서인’은 1687년경 숙종 때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한다. ‘노론’은 조선후기 200여 년 간을 사실상 지배해온 독주체제의 붕당이다. 따라서 조선은 남인, 북인, 노론, 소론이 공존하면서 사색당쟁을 한 사실이 전혀 없는 것이다.
유대인이 일본인을 평하기를 “일본은 정의가 없는 나라다” 라고 평가한다.
필자가 생각하기에도 ‘일본제국’과 ‘일본정부’에는 정심(正心)이 없는 것 같다. 적어도 일본의 정치적 리더들에게는 정심이 없다. 어제의 행적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침략하여 한반도를 지배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한국의 역사부터 왜곡하고 조작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우선 한국의 고대사인 단군조선을 부인했다. 일본보다 한국의 역사가 너무 길다는 것이 이유였다. 또 중국의 한(漢)나라 시대 지방통치기구로 존재했던 한사군(漢四郡: 낙랑ㆍ진번ㆍ임둔ㆍ현도)의 위치를 한강 이북 부근이라고 억지 주장했다.
중국의 역사서인 『수서 隋書』에 의하면 이 지역은 모두 만주의 서북쪽에 있는 지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지역이 만주의 요하 강 서북쪽지역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조선의 학자 성호 이익, 적주
오늘날 중국의 동북공정은 일본의 식민사관이 주장한 것을 반추하고 있는 모습이다. 중국은 고구려는 물론 고조선도 자기들의 역사로 편입시켜서 중국의 변방 위성지역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한사군의 위치가 한반도 안에 있었다고 주장한 일본식민사관자들의 주장을 줄기차게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뿐인가? 일본은 한반도의 남부에는 일본의 해외식민통치기구인 ‘임나일본부’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남의 나라 역사를 마음대로 조작하고는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일명: 조선사 편수회)를 만들어 조직적으로 유포시켰다.
그뿐이 아니다. 일제는 1912년 언문철자법을 새로 제정하여 훈민정음의 표기법을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훈민정음해례본’에 실려 있는 총 28자의 글자 중 4개를 임의로 없애버렸다. 현행 한글맞춤법통일안은 일제가 만든 24개의 자모만 그대로 인정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영어의 R과 L, P와 F, B와V 발음을 구별할 수 있는 자모를 모두 없애버렸다. 이렇게 훈민정음의 표기법을 왜곡하여 조작해 놓고 일어를 국어로 부르게 했고 일문(日文)을 한국에서 국문(國文)으로 호칭하게 했다.
일본은 5천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한국이나 중국의 역사를 보고 그들의 역사를 늘일 수 있는데 까지 늘이는 작업을 시도하였다. 일본역사 교과서에 기록한 역사는 약 2천6백여 년 정도다. (주: 1대 진무 천황-BC660즉위-에서 현재의 125대 헤이세이 천황-1989즉위-현재) 그러나 이것은 신화시대의 허구적 천황계보를 억지로 짜맞추어 넣어 만든 의도적인 위장역사를 포함했을 경우에 가능하다. 중국과 한국 등 이웃국가의 역사문헌에 남아 있는 일본국가의 실제 역사는 약1천7백여 년 정도라는 게 연구자들의 정설이다.
한국의 고대사 연구에도 민족의식이 강하게 작용한 연구실적이 있다. 『한단고기』에 의하면 한국의 역사는 약 9천 여 년에 달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교과서에 이것을 기록해서 가르치지는 않는다. 사학계에서는 우리나라 국가역사를 약 5천 여 년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3]
역사는 문헌학, 고고학, 문화인류학 등의 삼박자로 검증이 이루어지는 학문이다.
특히 고대사 연구는 주변국들의 통합적이고 유기적이며 전체적인 연구가 따라주어야 사실성이 강해진다. 유적이나 유물은 현대사회에 들어와서까지도 계속 발견, 발굴되고 있기 때문이다.
고조선의 ‘요하문명’이 중국의 ‘황하문명’보다도 1천여 년이나 앞서 만주대륙에 존재했었다는 문헌이 있고 문화인류학적 자료도 있었지만, 고고학적 증명을 할 수 없었다가 20세기 말에 들어와서 요하유역의 아파트단지개발에 의해 그와 관련된 유적, 유물이 발굴됨으로써 고대문화사에 새롭게 입증되어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 사학계의 실정이다.[4]
일본이 총 한방 쏘지 않고 대한제국을 집어삼킬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 있었기에 가능했을까? 그것은 일본의 부국강병정책과 그에 따른 외교력이었다.
일본은 당시의 강대국 미. 영. 러 와 각각 동맹조약, 또는 강화조약을 속속 체결했다.
대한제국의
이로써 미. 영. 러. 일의 실질적 동맹관계가 수립되고 대한제국은 국제사회에서 완전히 고립되고 말았다.
이제 본론인 독도문제에 관하여 얘기해 본다.
독도는 512년 이사부 장군이 우산국을 정벌한 이래로 대한민국 땅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분명히 한국땅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우리나라의 고지도에 우산국과 우도 등으로 명료하게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일본의 고지도에도 조선 울진군 소속으로 명료하게 표기되어 있는 것이 독도이다. <에도 막부> 시절 일본의 어부가 독도에 무단 상륙했다가 남의 나라 땅에 허가 없이 들어갔다는 이유로 처형시킨 기록도 있다.
일본의 역사학자 나이토 세이추 교수는 그의 저서 <일본외무성의 다케시마 비판>에서 “일본정부가 독도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전혀 근거 없는 억지다”라고 정면 비판한 양심적인 학자다. 그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일본이 독도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1695년이 처음이다. 돗토리번이 에도막부정부에 낸 질의서에 처음 언급이 되었고, 그 해 12월 막부정부는 “독도가 일본령이 아니다”라고 명백한 결론을 냈다는 것이다. 또 1877년 메이지 정부 때도 조사한 뒤 “독도는 일본과는 무관한 섬”이라는 결정을 내린 기록이 있다.
독도는 한반도 동쪽 끝에 위치한 동도 와 서도 두 개의 섬이지만 89개의 크고 작은 바위들로 이뤄져 있고 대한민국 천연기념물 제336호 이다.
이렇게 분명히 한국 땅이지만 일본은 엉뚱하게 자기 땅이라고 주장한다. 문제는 이런 일본의 허위주장에 동조하는 나라가 지구촌에 너무 많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단적으로 오늘날 일본의 외교력이 100여 년 전처럼 한국의 외교력보다 훨씬 우세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일본은 한국땅인 독도를 초 중 고교 교과서에 “다케시마(독도의 일본명)는 일본 땅인데 한국이 강제점령하고 있는 섬이다.” 라고 표기하여 독도는 일본의 섬이라는 것을 어린이와 청소년 학생들에게 강력하게 세뇌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거짓 홍보물을 지속적으로 지구촌에 뿌리고 있다.
일본이 독도를 언제부터 빼앗으려 했는지 잠깐 고찰해 본다.
100여 년 전으로 돌아가서 1905년 일본은 대한제국을 차지하려고 러시아와 전쟁을 하고 있었다. 일본은 동해(실제 전투는 동남해)에서 러시아 해군과 싸울 때 독도의 위치로 보아 중요한 군사시설로 이용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 때 일본은 독도를 손에 넣기 위해 지방정부인 시마네현 고시 40호를 일방적으로 작성해서 발표하게 된다. 즉시 독도를 다케시마로 칭하고 일본으로의 영토편입 고시를 발표해 버린다.
대한제국은 을사늑약으로 이미 외교권을 일본에게 빼앗겨 버린 후였다. 독도는 일제가 우리나라 영토를 빼앗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희생된 우리나라 땅이다. 이후 1910년 한일병합으로 대한제국의 전 국토는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간다.
일본이 시마네현 고시를 근거로 걸핏하면 독도를 일본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독도를 국제분쟁지역으로 만들기 위함이다. 일단 국제분쟁지역으로 만들어 놓으면 그 다음에는 국제상황과 국력에 따라 미래의 판단이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국제무대는 힘의 세계다.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라도 그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이 많으면 그 역사적 사실이 뒤집힐 수도 있는 것이 지구촌의 현실적 구도이다.
일본정부는 국가의 손익차원에서 자신들에게 불리한 역사적 사실은 믿지 않으려고 온갖 새로운 자료를 만들어 왜곡해 왔다. 일본은 독도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논리를 세울 때 진실을 추구하기 보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자료를 왜곡, 조작하는 수법을 잘 쓴다. 일제 강점기 때 조선총독부가 만들어 가르친 한국의 역사교과서에 왜곡, 조작된 기록이 많은 것도 일본인이 ‘정심’으로 일을 하지 않고 일본정부에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성의’로만 일을 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지도자들은 정치적인 목적이 있을 때 마다 역사왜곡을 서슴지 않았다. 일본의 <고사기> <일본서기>에 왜곡된 기록이 많은 것도 동일한 이유 때문이다. 일본의 고대사는 왜곡투성이다. 일본이 만든 독도자료들도 왜곡투성이다. 일본의 지도자들은 왜곡된 자료라도 그것을 믿어주는 사람이 많으면 그것이 사실이 될 것이라는 것을 믿고 있는 사람들이다.
사실 독도문제는 한국인에게는 큰 문제이다.
한국의 영토주권에 해당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인에게는 별로 큰 문제가 아니다. 원래 일본의 영토가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제삼국의 사람에게는 독도가 한국의 영토이든 일본의 영토이든 전혀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일본은 독도가 원래부터 자기의 영토가 아니었으나 국제적으로 유리한 입장을 쟁취해 놓으면 실익을 챙길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고 판단한다. 독도의 해저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유익한 해저자원이 많기 때문이다.
일본정부는 각국의 국가지리원, 지리담당국, 지리관련학회, 도서관의 지리분류 담당자, 그리고 각국의 교육청, 초, 중, 고교들에게 일본측이 만든 자료를 장기간에 걸쳐 면밀히 제공해왔다.
독도가 일본 섬이라는 일방적 주장을 홍보하는데 앞장서왔던 것이다. 자료를 받는 각국의 담당자 입장에서는 매년 새로운 데이터를 친절하게 보내주는 일본정부가 고맙기만 하다. 자료가 오면 그것을 기본 자료로 자국에서 사용할 세계지도를 만들면 되기 때문이다.
일본은 미래에 대비하여 초장기적으로 치밀하게 독도에 관하여 국제분쟁권을 노리고 있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다케시마는 분명 일본의 섬인데도 한국이 강제 상륙하여 실효적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논리를 만들어서 가르치고 있는 이유이다.
한국인은 연역적으로 일하기를 좋아한다. 즉 ‘톱 다운’ 식이다. 일본인은 귀납적으로 일하기를 좋아한다. 즉 ‘바틈 업’식이다.
한국인은 감정발산에 유능하고, 감정억제에는 무능하다. 일본인은 감정억제에 유능하고 감정발산에는 무능하다.
한국인 욱하고 핏대를 잘 세운다. 그러면서 뒤가 없다. 일본은 욱하지 않고 핏대도 세우지 않는다. 그러면서 반드시 뒤가 있다.
한국인은 순발력과 진취력이 강하고, 일본인은 인내력과 절제력이 강하다.
한국인은 열정과 집중에 강하고, 일본인은 분석과 정리에 강하다.
한국인은 서생적 대의와 명분의식이 강하고, 일본인은 상인적 이익과 현실의식이 강하다.
한국인은 의냐 불의냐 따지는데 강하고, 일본인은 이냐 손해냐 따지는데 강하다.
한국인은 핫하고 일본인은 쿨하다.
조선의 선비는 대의에 어긋난다 싶으면 핫하게 붓을 들었고, 일본의 사무라이는 이익이 된다 싶으면 쿨하게 칼을 들었다.
마지막으로
독도문제는 오랫동안 잠잠해 있다가 왜 최근에 와서 일본정부가 강력하게 언급하느냐에 관한 의문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왜냐하면 일본이 일본남부 오가사와라 군도를 1862년에 미국으로부터 일본영토라고 공인 받을 때 근거로 내놓은 지도가 <삼국접양지도 프랑스어 판>이었는데, 이 지도에 독도와 대마도가 한국영토로 표기되어 있다는 것을
일본이 노골적으로 독도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한 것은
앞으로 독도 문제는
대한민국정부 공무원의 일하는 자세와 일본정부 공무원의 일하는 자세 차이에 의해 지구촌 각국의 실질적 인식차이가 형성될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김진수 씀 /선비리더십 아카데미 회장)
[1] 조선의 외교는 명ㆍ청과는 사대(事大)하고 일본ㆍ유구 등과는 친한 이웃으로 지내는 교린(交隣)정책이 핵심이었다. 이 사대교린(事大交隣)은 굴욕외교가 아니다. 조선에 실질적 이익을 안겨준 실용외교정책이었다. 중인출신 역관(譯官)들이 쟁쟁한 사대부 가문들을 제치고 조선의 최대갑부가 될 수 있었던 배경도 여기 있었다. 명나라는 삼 년에 한번 조공하는 ‘삼년일공’(三年一貢)을 주장한 반면 조선은 1년에 세 번 조공하는 ‘일년삼공’(一年三貢)을 주장했다. 무역을 많이 할수록 조선이 유리했기 때문이다. 조공무역(朝貢貿易)은 이때 생긴 말이다. 조공은 일방적 행위가 아니라 교역품을 맞바꾸는 행위였다. 조공품과 사여품을 맞바꾸는 것이 공무역(公貿易)이라면 사행(使行)을 따라간 역관들의 상행위는 사무역(私貿易)이다. 조선은 역관들에게 여비를 지급하는 대신 인삼 팔포(八包)를 가져갈 수 있는 무역권을 주었다. 역관들은 중국의 지배층에게 인삼을 팔고, 그 돈으로 조선지배층이 선호하는 비단, 금은 세공품 등을 가져와 이중으로 이익을 남겼다. 역관들은 명ㆍ청과 일본 사이의 중개무역도 했다. 청나라 중기까지는 해금(海禁)정책을 썼기에 일본은 청과 직접 무역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역관들을 상역(商譯) 또는 역상(譯商)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조선은 사대교린이라는 외교정책으로 평화를 유지하면서 막대한 국제무역의 이익도 취했다.
[2] 기축옥사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인 1589년에 발생했다. 1575년 선조 때 선비들은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섰다. 동인의 방장이 경복궁의 동쪽에 살고 있어서 동인이라 했고 서인의 방장이 경복궁의 서쪽에 살고 있어서 서인이라 불렀다. 동인이었던 정여립이 왕의 미움을 받고 하직하여 고향으로 내려가 대동계를 조직하여 후학을 양성하고 있던 중 역모를 꾀했다는 서인들의 변고로 정여립은 쫓기다가 자결하고, 그와 친교가 있던 많은 선비들이 죽임을 당했던 사건이다.
『선조수정신록』 은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백성은 항심(恒心)을 잃어버리고, 군사는 장부에만 기재되어 있었으며, 안으로는 저축이 바닥났고, 밖으로는 변란이 잇따랐으며, 선비들의 여론은 분열되었고, 기상은 무너졌다.” 정여립은 서인이었던
[3] 1911년 『한단고기』를 편찬한
[4] 20세기 말 중국 북만주 지방의 요하 유역에서 주거단지 조성공사를 실시하다가 고조선의 유물과 고대 문화유적이 대거 발견되었다. 하지만 중국정부는 이 지역을 차단조치하고 한국인의 방문을 일체 금지시켰다. 그러나 중국정부당국이 발표한 제한된 일부 자료만으로도 한국고대사의 요하문명 유물임이 틀림없다는 연구자들의 주장이 나왔다. 오늘날 중국의 내몽골 지역, 산동반도 지역, 동북3성 지역, 러시아 연해주 지역 등은 고조선 광역도에 들어 있는 지역이다.
첫댓글 조공무역에 대한 말씀과 근세조선 사색당파론의 불가론...
그리고 일본이 독도영유권을 주장하게 된 경위까지 논문형식이 글 잘 보았습니다.
풍류도인님은 글은 깔끔하고 명료하게 쓰십니다.^^
이글은 모자란 구석이 한두가지가 아니군요. 뉴라이트 색깔이 명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