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설날을 맞이합니다.
분주함이 아니라, 감사가 넘치는 명절이 되게 하옵소서.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편협하고 부정성이 가득한 자가 오늘도 주님의 보혈을 구하고 의지합니다.
정결한 마음이 되어 주시는 말씀을 받아 먹게 하옵소서.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28.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
29.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3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31.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32.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33.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34.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35.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36.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37.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본문 주해)
28~32절 : 무화과나무에 싹이 나면 여름이 가까워져 옴을 알듯이 앞에서 언급한 여러 종말의 징조가 나타나면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것 즉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할 것을 알라고 말씀하신다.
30절의 ‘이 세대’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다.
유대인을 포함한 모든 인류가 생존하는 기간, 유대 민족이 존속하는 기간, 예수 당시의 사람들이 이 지상에 머무는 기간 등이다.
그러나 ‘이 세대’란 종말이 가까운 모든 시대를 뜻한다.
그것은 모든 시대에 걸쳐 그리스도인들은 종말론적인 사고를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베드로후서에도 이 종말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벧후3:10)
이렇듯 하늘과 땅이 사라져도 예수의 말씀, 곧 종말의 교훈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날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천사가 모르는 것은 당연하고, 아버지와 한 몸이신 아들조차 모른다고 하신 것은 종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아들이 모든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 한 분뿐이심을 나타내시는 말씀이다.
33~37절 : 이어서 예수께서는 종말의 때를 추측하거나 계산할 것이 아니라, ‘깨어 있으라’는 종말 신앙의 교훈을 말씀하신다.
이 교훈은 주인이 여행을 떠나며 자기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서 각 사람에게 할 일을 맡기고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명령하신 것과 같다.
‘주인’은 ‘다시 오실 주님’이며, ‘문지기’는 ‘교회 공동체’를 상징한다.
교회 공동체는 주님의 재림 날짜를 추측하고 계산하는 이단들의 미혹에 빠져서는 안 된다. 교회는 임박한 재림을 온전히 믿되 주께서 각자에게 명하신 일에 충성을 다해야 한다.
그래서 주님이 홀연히, 갑자기 오셔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고 말씀하신다.
또한 ‘깨어 있으라’ 하시는 종말 신앙의 이 교훈은 지금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네 명의 제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이라고 하신다.
(나의 묵상)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안드레에게 하시는 오늘 이 말씀이 내게도 하시는 말씀이시다.(37절) 주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신앙은 깨어 있는 신앙이라고.
복음을 알지 못했을 때, 나는 주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을 깨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교회의 모든 일에 빠지지 않고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 열심이 마다가스카르 3년의 평신도 선교사역까지 하게 한 것이다.
그런데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입으로 찬양은 했지만, 마음 깊은 곳에 주님의 재림에 대한 기다림은 없었다. 내가 죽거나, 내가 살아있는 동안 주님 다시 오시거나, 어쩔 수 없이 맞이하겠지만 간절한 기다림은 없었던 것이다.
복음을 알고 매일 말씀 앞에 나아가는 기쁨을 알게 된 이후, 주님과의 이 교제야말로 나를 깨어 있게 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말씀으로 주님을 알아가니 전과 달리 주님의 재림에 대한 기다림의 마음이 생기게 되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육체로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심으로 죄범벅이 나를 구원하여 주시고, 그것을 믿는 내게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이 땅을 살아가는 나의 구원의 완성은 주님 다시 오실 때이니 그날이 기대가 되는 것이다.
이 땅의 삶이 고통스러워서 차라리 주님 빨리 오심이 좋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지금도 충분히 기쁘고 감사하지만, 그날의 기쁨에 대한 기대가 점점 커지기 때문이다.
주님과 말씀 교제도 이토록 기쁜데, 정말 주님을 대면하면 얼마나 기쁠 것인가?
그러니 나는 분명 주님을 기다리며 사는 자인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구원의 감격과 영생을 누리는 기쁨 가운데 애통하는 마음이 점점 커짐을 느낀다.
무엇에 대한 애통인가?
말씀으로 산다고 하면서도 주님을 너무도 닮지 않은 내 모습이다.
닮기는커녕 사사건건이 생각이 다르다. 다른 정도가 아니라, 정반대라고 하면 딱 맞다.
여전히 이기적이며 부정성이 가득한 자요, 자비와 사랑이 없는 메마른 자이다. 그래서 ‘아하, 나는 이런 존재구나....’를 매일 확인하지 않을 수 없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
왜 위로를 해 주시는지를 이제야 알게 된다.
그것은 이러한 죄인인 내가, 나의 상태를 알면 알수록 더욱 십자가로 가까이 나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니 ‘깨어 있음’은 애통하는 마음, 자신을 슬퍼하는 마음인 것을 생각한다.
나 자신에 대한 애통이 없다면 십자가로 나아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로 위로해 주시는 주님을 알게 되었다!
어제도 오늘도 애통하는 마음으로, 내일도 그 마음으로 주님을 더욱 간절히 기다린다.
십자가에 온전히 연합되기를 기도하며 주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날은 주님께서 나를 온전하게 하시는 날, 슬픔은 하나도 없고 기쁨만이 가득한 그날을 사모하며 기다린다.
(묵상 기도)
주님,
과거에는, 이단인 자들만 주님의 재림을 말하는 줄 알았습니다.
이 아름다운 신앙의 고백이 이상한 사람들의 전유물처럼 된 것이 안타깝습니다.
오늘도 주님 다시 오심을 기다립니다.
주님께서 하게 하시는 모든 것들을 성실히 행하며 그날을 사모합니다.
오늘 죽는 자처럼, 또한 영원히 사는 자처럼 주님을 사모합니다.
저 자신에 대해 애통함으로 깨어 있게 하옵소서.
성령님, 의지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첫댓글 아멘!
주여, 제게도 이런 애통함이 있나이다.
불쌍히 여겨주소서.
신실한 나눔 감사드려요.
명절 잘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