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새벽도 비는 뿌렸습니다.
하지만 가는 세월은 이정표 정한 기차와도 같이
한 계절의 끝과 시작을 알리는 정거장을
이미 통과해 버렸습니다.
닫아버린 창문 틈에 서린 기운이 어제같지 않습니다.
덜 여문 창밖의 그림 속엔 어느새 추석이란 명절이 다가섭니다.
이때쯤이면 고향 떠난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마음은
고향을 향해 있기마련입니다.
저 역시도 고향을 떠난 지가 꽤나 되는 것 같습니다.
안양을 떠난 지 햇수로 20년이 넘으니...
흘러간 세월만큼 너무도 변한 안양!
이제 동구밖에 포도밭 고추밭 냇가가
그대로 있는 정감어린 안양도 아닌데
지금 이토록 애착을 느끼는 것은 내 삶의 깊이만큼이나
한편으론 속세에 찌든 병든 마음을
고향 땅의 흙 냄새로 치유받고
싶은 단순한 동심의 발로가 아닐까 싶은데
잡다하다 싶은 내 작은 기억들은 그림자조차도 너무도 희미해
모든 것이 아련할 뿐 자꾸 맘 속으로만 숨으려하니
안타까운 마음 그지 없을 뿐입니다.
그러기에 잊을 건 잊고 조용히 살다 때 되면 미련갖고
그리움만으로
예쁜집이나 짓다 허물어버리는 마음의 귀향으로
편안히 잠재워야 할 것 같습니다.
(비 오면)
비 오면 눈물이 납니다
쓸쓸함이 넘치는 거리에
추렷한 예전 모습만 출렁입니다
구시장,읍민관 화단극장,소골안,포도밭,수푸루지......
정오를 알리는 성당의 종소리는
십리밖을 넘어섰지요
이보다 큰 도시는 없었습니다
비 오면 떠나고 맙니다
번개,쌍개울,산본,평촌,인덕원,석수
하지만
더 이상 가난 심은 황토길은 없습니다
꼬방을 뒤져도 이젠 맘이 없습니다
온동네가 흔한 종소리입니다.
오지 않을 쓸쓸한 시간
흔적 남은 기차 소리로 그리움 마저 채우고
돌아섭니다
안양처럼 급속하게 발전한 도시는 우리나라에 몇 없을 것입니다.
안양에 서울에서 수원에 이르는 신작로가 나고 유원지가 있었어도
그렇게 발전이 빠르지는 않았는데
실은 군포쪽에 우리나라에서 내놓으라 하는
큰공장이 들어선 덕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수리산 끝자락에 잇는 병목안 깊숙히 자리하던
채석장하고 왜정시대부터 들어선
금성방직 전용 기차길이 안양역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그것이 시들해질 때 쯤
그러니까 천일포도주 공장이나
오리온 쏘세지가 뒤 처질 무렵 안양엔
국내에서 내노라하는 굵직굵직한 공장들이 들어섰습니다.
우리나라 경제개발5개년을 떠들던 60년대 말까지만해도 제지회사가
재계 서열 10위 안에 두세개 들어 갔었는데,
그 중에 하나인 한국특수제지가 안양역 바로앞에 있었고
삼덕제지등 골판지 만드는 회사가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국내 최초의 나일론공장인 한일나이론이
지금의 명학역 너머에 들어서고
이어서 군포쪽으로 금성전선 금성통신등이 생겨났습니다.
당시 기계를 전공한 똑똑한 젊은이들이 들어간 공장이 현대양행으로
박달동(지금의 만도기계)이나 군포(지금의 농기계를 제조하는 LG기계)공장에밀려 들었습니다.
그밖에도 동아제약을 비롯한 많은 제약회사와 페인트에 잉크등
만드는 화학공장이 안양유원지까지 파고들었는데 그때쯤 안양천은
제 색깔을 잃고 말았습니다.
지금 세종대에 있는 친구놈 일가는 고등학교다니는 시기
영락교회 앞에서 빵집을 했습니다.
신림동 호박밭을 팔아 당시로는 번화가로 이사를 와서
그 돈 가지고 자식들
공부도 하고 그렇게 잘 살았다는 얘기인데
나중에 보니 골치아픈 공부 관두고 똥 푸며 호박밭 일구었다면
만나기 어려웠을 거라고 한 소리가
장난이 아니라는 걸 안양의 변모를 그대로
보아와서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의 안양 전화국자리 맞은 편 중심에 위치한 결혼예식장은
친구 00이네 옛날논,거화예식장은 풍년원 포도밭집,
태평방직하고 교화동 사이에
포도밭은 00이네 땅, 지금의 남부 순복음 교회 자리는
우리집 고구마밭이었는데
정말 흔적도 없이 너무 달라져 버렸습니다.
저 넘어 근명여중 밑 호박밭은 주인이 끈질기게 갖고 있어서,
결국 아들인 권00씨가
덕보고 국회의원도 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해서 돈번 졸부도 생겨나고 했다고 하지만
순진했던 안양사람들은
발전도 되기 전 서울 사람들한테 거의 다 땅데기를 팔아버리는 바람에
돈방석에 앉아 있는
안양사람 소린 들어보질 못했습니다.
안양이 양적으로 팽창한 건 가만히 따져보면,
일차적으론 안양국민학교를 가로질러
지금의 평촌신도시와 인덕원을 향한
비산동을 연결시킨 고가도로가 생긴 이후고,
이차적으로는 북부동지나 석수를 향한
안양대교가 생기고 난 후에 1977년도 큰 물난리를 겪고 난 후
안양에 전체적인
도시정비가 이루어진 후 일이었습니다.
하여튼 너무도 많이 변모한 안양!!
답답도 하긴 하지만 그래도 미련을 갖고 그리워하는 것은
정감 넘치던 그 옛날이
아직도 맘속에 남아 외로울땐 나를 솔솔 부르고
과거를 어렴풋 기억하는 따스한 친구들이 아직도
그곳에 많이 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인데 늙으막해서 힘 없어지면 수리산 옆으로 가서 살면
어떨까싶은데
산중턱까지 치고 들어온 아파트가 마냥 원망스럽기만 합니다
(2003 9 9)
첫댓글 전, 1980년 삼원극장에서 영화 많이 보았는데.... 중앙시장에서.... 지하상가에서... 스쳤을 구름나그네님.
석수동유원지 유유산업은 아직도 그대로 있는지 박달동 망해암에서 바라보던 저녁노을 병목안 수리산 계곡에서 물장구치고 놀던일. 안양은 제게도 지울수 없는 어린날의 추억을 안겨주었읍니다.
ㅎㅎㅎㅎㅎ구름나그네님 글을 읽으면서 조 밑에 분명 돌골님이 오셨을거야 했는데...역시나입니다.
안양...학교에서 취업 소개를 받아서 안양에 갔더랬는데 가보니 생산직 직원모집이었습니다. 연수기간을 거친다나...소개했던 선생님은 노발대발하셨고 기숙사 방에서 하룻밤을 자면서 고민하다가 다음날로 보따리를 쌌습니다. 두고 온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아하, 고향이 안양이시구나. 그나저나 기억력도 대단하시네, 전 모든것을 그냥 건성으로 보아 40년을 마포에서 살았으나 뭐하나 남아있는게 없습니다. (메일보듯이 글을 거꾸로 읽어내려가는 고미)
돌골님저번관악산행때유원지로내려왔는데유유가 유유히사라진것같더군요망해암은여전하구요전삼원에서처음본영화가중학때러브스토리단체관람배꽃님도안양을다녀가셨던적이짜곰님은마포가장친하다할다섯중둘이마포중출신인데요마포종점은방울자매가사들으면영등포여의도기억이.전내일불암산으로해서수락산그리고안양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