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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의수로꾸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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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말씀 ♣ 복음묵상 스크랩 2008년 4월 27일 부활 제6주일
이대건안드레아 추천 0 조회 10 08.04.27 10:0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2008년 4월 27일 부활 제6주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 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요한 14,15-16)

 

 "If you love me,

you will keep my commandments.
And I will ask the Father,
and he will give you

another Advocate to be with you always,

 

 

 

말씀의 초대

 

스테파노의 순교 이후 선교는 방향을 바꾼다. 여기저기로 흩어진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필리포스 부제는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하였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기적의 은총을 베푸시며 함께하셨다. 사도들도 그를 지원하러 사마리아로 간다(제1독서). 베드로 사도는 박해 가운데에서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다. 박해자들의 질문에 온유하고 공손하게 대답하라고 당부한다.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많은 순교자가 성경의 이 말씀을 실천하였다.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하였던 것이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보내실 것”이라고 하신다. 그분께서는 진리의 성령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모르지만 믿는 이들은 알게 될 것이다. 성령께서는 이미 신앙인의 마음속에 와 계시기 때문이다(복음).

★★★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성령을 약속하십니다. 두려워하는 제자들이 마음에 걸리셨던 겁니다. 스승의 애정이 성령의 강림을 재촉하였습니다. 그러니 누구라도 예수님의 사랑을 받으면 성령께서 함께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이를 사랑한다고 하셨습니다. 용서와 자비의 생활이 성령 체험의 전제 조건인 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보다 사랑을 더 중히 여기셨습니다. 지키는 신앙에서 베푸는 신앙으로의 변화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실천이 중요합니다. 용서 역시 사랑의 결과입니다. 미운 마음을 버렸기에 용서가 채워진 것이지요. 내 것만 잡고 있으면 하느님의 것은 자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기도하고 있습니까? ‘오소서, 성령님. 오시어 우리를 채워 주십시오.’ 그러면서도 비우는 데 인색했다면 마음을 바꾸어야 합니다. 언젠가 끊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지금 끊어야 합니다. 때가 되면 포기할 것이라 여기는 것이 있다면 지금 포기해야 합니다. 그것이 비우는 행위의 출발입니다. 성령께서 함께하시면 소리 없는 변화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끝은 기쁨입니다. 망설일 이유가 없습니다. 

 

 

 

진리이신 성령이여, 오십시오

-양승국 신부-

 

언젠가 소년원에 미사를 봉헌하러 갔을 때 일입니다. 오랜 만에 만난 아이들이었기에 너무나 반가워서 서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꽃피는 봄날, 한참 꽃처럼 피어나야 할 아이들이 내면에 가득 차 있는 에너지를 발산하지 못한 채 힘겹게 살아가는 모습들을 보고 있노라니 가슴이 몹시 아파왔습니다.

그런가 하면 여전히 변화되지 않은 녀석들의 모습들, 미사 때도 전혀 협조하지 않고 옆 친구들과 티격태격하는 녀석들, 침까지 흘리며 곤히 자는 녀석들, 여전히 '쫀쫀하게' 간식 때문에 싸우는 녀석들 모습에 마음이 많이 무거워졌습니다.

겨우 겨우 미사를 끝내고 나서 자원봉사자 어머님들께서 정성껏 준비해온 간식도 맛있게 먹었습니다. 수사님들이 준비한 재미있는 프로그램에 몰두하다 보니 어느덧 작별 순간이 오더군요.

또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를 아이들이기에 아이들 한명 한명을 붙들고 이런저런 이야기라도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럴 형편이 못되었기에 집회시간이 끝난 후 저는 출입문 앞에서 섰습니다. 다시 생활관으로 돌아가는 아이들과 짧게나마 인사를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집회 시간이 많이 지체된 까닭에 프로그램이 끝나자마자 아이들은 동시에 우르르 출입문 쪽으로 몰려나왔습니다. 그 때문에 대다수 아이들과는 눈길도 한번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습니다. 단지 몇몇 아이들과만 인사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소년원 운동장을 걸어 나오면서 미처 인사를 나누지 못한 아이들 한명 한명의 얼굴들이 떠올라 아쉬움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일순간에 우르르 몰려나가는 바람에 미처 쓰다듬어주지 못한 많은 아이들의 머릿수, 그러나 중과부적인 두개뿐인 제 손을 생각하며 새삼 '협조자이신 성령'의 중요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언제나 아이들 한명 한명을 친자식처럼 여기고 그들과 진정한 부자(父子)지간처럼 지내고 싶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도저히 그럴 형편이 못됩니다. 그래서 필요한 존재가 협조자인 것입니다.

마찬가지 논리가 성삼위 안에서도 적용됩니다. 가슴마다에 깊은 상처 하나씩 안고 밀려드는 백성들의 수효를 예수님께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제 사명을 완수하신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존재가 바로 협조자이신 성령인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가장 첫째가는 협조자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손이 두개뿐인 관계로 예수님을 대신해서 우리 각자의 지친 인생길을 어루만져주시는 분, 우리 각자의 찢긴 마음을 싸매 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당신의 첫째가는 협조자 성령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당신이 비록 떠나가시지만,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들을 고아처럼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성령은 생명을 우리에게 부여하는 '하느님의 숨', '하느님의 입김', '하느님의 바람', '하느님의 힘'이십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힘은 또한 오랜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힘이자 예언자들을 움직이는 힘이었습니다.

또한 성령은 지상에서 예수님 삶 전체를 인도해주신 협조자이자 교회 탄생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우리를 하느님 아버지께로 인도해 주십니다.

오늘도 진리의 성령께서는 척박한 우리 안에 회심의 마음을 불러일으키며 사랑의 기적을 계속하고 계십니다. 구제불능처럼 보이는 인간 안에서도 결정적인 '삶의 전환', 하느님을 향한 '방향 전환'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예수님과 일심동체이시며 예수님의 또 다른 현존방식이신 성령이여, 오십시오. 오셔서 이 쓰라린 마음들과 방황하는 어린 영혼들을 위로하여 주십시오.

우리가 협조자이신 성령께 마음을 열어 비본질적이고 부차적인 가치관들, 육의 행실들을 포기하고 보다 본질적 가치들인 성령의 열매를 지속적으로 선택할 수 있도록 성령이여, 오십시오.

 

 

 성령의 약속 : “아버지께 구하면 성령을 보내겠다”

-허성 신부-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이별을 앞두고 그들에게 지극한 사랑과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해주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고,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 곧 진리의 성령을 보내주셔서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나는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로 돌아오겠다. 그날이 오면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과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숭고한 사랑일수록 상대방 위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간다. 사랑이 치열할 수록 상대방을 위해서 희생하고 봉사하고 자기가 갖고 있는 소중한 것들을 그것이 물질이건 명예건 정이건 몸마저 주고 싶어하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하므로써 보람을 느낀다.

아기를 낳아서 키워본 엄마들은 누구나 다 체험했을 것이다. 자기가 낳지는 않았지만 누가 문밖에 버리고 간 아기를 얼마동안 키우다가 홀트 아동복지재단에서 외국인에게 입양시키겠다고 아기를 데리러 왔을 때 그동안 정이 너무 들어 아기를 키우던 여인도 울고 아기도 가기 싫다고 여인을 붙들고 우는 모습을 텔레비전으로 보았을 때 나도 덩달아 울어버린 기억이 난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농촌에서 살았는데 5일마다 찾아오는 시골장날에는 아직 젖을 빨고 있는 송아지를 팔고 싶은 사람은 엄마소를 끌고 오면 송아지는 제발로 엄마를 따라 소시장으로 오곤 했다. 그러다가 누구엔가 송아지가 팔려 고삐를 매고 끌려갈 때면 엄마소도 울고 팔려가는 송아지도 몸부림치면서 우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 팔려간 후에도 며칠동안은 엄마소도 송아지도 계속해서 우는데 애처롭기 그지 없었다. 엄마소 생각은 송아지 뿐이고 송아지 생각은 엄마소 뿐이기 때문이었다.

『어미된 자로서 누가 자기의 젖먹이를 잊겠는냐? 설사 너희는 잊을지라도 나는 결코 너희를 잊지 않겠노라』고 하신 하느님께서는 사랑자체 이시기 때문에 우리 생각뿐이시다.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으면 당신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겠다고까지 하셨겠는가? 너희는 악할지라도 너희 자식들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아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너희에게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는 그토록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독생성자를 우리에게 주시기까지 하셨고, 예수께서도 그토록 우리를 사랑하셔서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고 하시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시어 당신의 아버지를 우리에게 주셨고, 십자가 위에서는 사도 요한을 통하여 당신의 어머니마저 주셨고, 당신의 몸과 피까지 우리의 먹이로 주셨을뿐 아니라 부활하신 후에는 다락방에 모여 있는 사도들에게 발현하시어 성령을 받으라 하시며 당신의 입김 즉 숨결을 불어넣어 주셨다. 또 오순절에는 협조자이신 성령을 태풍과도 같이 강하게 불혀와도 같이 뜨겁고 밝게 우리위에 쏟아 부으심으로써 당신의 신비체인 교회를 탄생시키셨다.

한 동네에 살면서 서로 서로 사랑은 하면서도 겉으로는 사랑한다는 내색 한번 해보지 못한채 마음에도 없는 다른 배우자와 결혼한 갑순이 머리속에는 갑돌이뿐이고, 또 갑돌이의 머리속에는 갑순이뿐이었기에 결혼한 첫날밤에 그토록 울었다지 않는가?

그렇다면 사랑이 당신의 본질이신 아버지의 마음은 당신의 자녀뿐일 것이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예수님은 아버지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아버지한테 보고 들은 것만을 가르치셨고 아버지께서 시키시는대로 따르셨고 아버지께서 좋아하시는 것만 하심으로써 예수님의 마음과 아버지의 마음은 완전히 하나가 되어버렸다. 따라서 우리도 예수님이 가르치신 가장 큰 계명인 사랑을 실천한다면 성부의 마음과 예수님의 마음과 내 마음과 성령께서 완전히 하나가 될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리되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내가 아버지안에 있다는 것과 너희가 내안에 있고 내가 너희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예전에 젤뚜르다 성녀께서 수녀님으로 생활하실 때에 많은 사람들이 수시로 찾아와 기도를 부탁하곤 하였는데, 기도해 주겠다고 약속만 해놓고 깜빡 잊고 못했는데도 기도를 부탁한 사람이 찾아와 기도해주셔서 일이 잘 풀렸다고 인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느날 기도중에 예수님이 환시로 나타나셔서 수녀님이 그동안에 있었던 일을 말씀드렸더니 예수님의 대답은 『네가 내뜻대로 살겠다고 결심한 날부터 나는 네뜻대로 살기로 결심했다』고 하시더란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이기양 신부-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1992년 10월 20일 서울 여의도 광장에는 경악할 일이 벌어졌었지요. 세상을 비관한 한 젊은이가 자기 혼자 죽기 억울하다고 차를 빌려서 여의도 광장을 마구 내달린 것입니다. 그 때 여의도 광장은 주말이면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도 타고 간단한 운동을 하며 여가를 즐기던 곳이었지요. 2명이 죽고 20명이 중경상을 입는 참상이 벌어져 온통 나라가 시끄러웠습니다.
 
그런데 몇 년 후에 기적 같은 일이 보도되었습니다. 여의도 차량 질주 사건으로 손자를 잃은 한 할머니가 그 범인을 양자로 삼았다는 뉴스가 보도된 것입니다. 인간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한 정신나간 청년의 만행으로 애지중지했던 손자를 잃었으니 그 누구보다도 범인을 미워하고 당장 사형 당하는 것을 지켜봐도 시원치 않았을 할머니가 교도소로 범인을 찾아가 용서를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양자로까지 삼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지와 감정을 넘어선 신비로운 신앙의 힘과 성령의 은총의 극점을 보여준 사건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 할머니가 범인을 용서했을 때의 삶과 일생을 범인을 증오하면서 사형선고를 받기를 고대하며 살았을 삶, 그 중 어떤 삶이 더 나은 삶이겠습니까? 지켜보지 않아도 알 수 있지요.
 
그렇습니다. 용서는 은총입니다. 용서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은총을 받은 사람이지요. 이렇게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 하느님의 성령으로 가능해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당신의 몸과 피를 내주신 예수님께서 또 한 가지 우리들에게 약속하시는 것이 있지요.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요한 14,16-17).
 
협조자이시고 지혜 자체이시며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진리의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성령하면 많은 사람들이 '내가 언제 성령을 받았나?' 갸우뚱거리며 성령세미나를 하는 사람들이나 열심히 기도를 해서 받는 것쯤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이끌어 주시며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리스도 신자 중에 첫 번째 순교자는 스테파노입니다. 예수님을 증언하다가 돌에 맞아 죽었지요.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 7,60).
 
스테파노는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자기를 돌로 쳐 죽이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며 그 죄조차 묻지 말아달라고 기도합니다. 인간의 경지를 뛰어 넘은 모습이지요. 도대체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스테파노는 성령이 충만하였다. 그가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니,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예수님이 보였다"(사도 7,55).
 
성령이 충만했다는 표현이 그 답이지요.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인간의 의지를 뛰어 넘는 불가능한 차원의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진리의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 주시겠다는 약속을 오늘 예수님께서 하고 계신 것입니다. 누군가에 대한 미움으로 괴로울 때, 앙갚음하고 싶을 때, 또 친구나 남편 아내, 직장 동료의 배신으로 불신과 미움이 가득 차 있을 때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됩니다. 진리의 성령께 기도하십시오. 나의 의지와 감정을 넘어서는 힘을 달라고 끊임없이 청하십시오. 새로운 차원의 삶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 인간의 의지와 욕망을 넘어서서 세상이 줄 수 없고 인간이 찾을 수 없는 지혜와 은총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십니다. 지금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은총 속에서 힘든 삶을 의탁하며 새로운 차원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진리의 성령이 오시기를 기도하며 나의 의지나 지식이 아닌 성령의 이끄심이 내 삶을 끌어가시기를 기도하는 한 주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 때 우리 삶에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가 깃들고 우리는 현존하시는 주님을 체험할 수 있는 은총을 받게 될 것입니다.

 

협조자 성령의 약속

-조욱현 신부-

 

 이 주일에는 성령에 관한 주제가 나타나고 있으며 성령강림을 예고해주고 있다. 그리고 성령의 주제와 더불어 2독서와 복음에서는 빠스카에 관련된 주제들과 우리의 자세라든지, 또 주님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신 후에 더 크게 나타나는 그분의 친밀한 사랑에 참여함으로써 체험할 수 있는 ‘기쁨’에 관한 내용들이 언급된다.

제2독서: 1베드 3,15-18: 언제나 깨끗한 양심을 지니고 사십시오

제2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신자들에게 어떤 박해에도 굴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한다. 그 ‘시련’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진정 하느님께 바칠 수 있는 가장 참된 ‘예배’이며 진실한 찬미의 행위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몸으로는 죽으셨지만 영적으로는 다시 사셨습니다”(18절). 이 옛 신앙고백에서 빠스카적 배경이 드러나고 있다. 이 내용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성령’의 힘에 의한 그분의 부활 사이의 대립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 성령은 우리의 부활도 이루어주실 것이다(로마 8,11 참조). 이 ‘육적인’ 죽음과 ‘영적인’ 삶 사이의 고무적이면서도 고통스러운 변증법적 논리는 그리스도교 신자가 매일매일 자신 안에서 되풀이하는 체험이다. 이것이 그가 세상에 설명해 주어야 할 ‘희망’의 신비이다. 그러기에 박해 속에서 박해자들에게까지도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태도”(16절)와 “그리스도를 믿는 착한 행실”(16절)로 참된 승리자는 자신임을 입증하여야 한다. 사랑은 적개심이나 중상모략보다 훨씬 더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사람들에게 그의 삶과 그 삶을 드러내는 모든 외적 표현을 통해 “그가 간직하고 있는 희망”(15절)에 대해서 답을 해 주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부활에 대한 신앙을 생활 전체로써 선포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죽여 죽음의 어둠 속에 영원히 매장하려 했지만, 그분은 그 죽음의 감옥을 막았던 바윗돌을 굴려내셨다. 그리스도인들은 여기서부터 ‘희망’의 선포자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내어 주셨듯이 하느님과 형제들에 대한 봉사를 위해 자신을 무상으로 내어주는 사랑의 ‘힘’에 맡길 수 있다면 불의, 부정, 폭력, 고문 그리고 죽음까지 모든 것이 변화될 수 있을 것이다.

복음: 요한 14,15-21: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다

오늘 복음은 ‘위로’의 내용이 계속되지만, 사랑의 주제로 시작하여 사랑의 주제로 끝나고 있다. 예수께서는 사도들에게 당신이 떠나시는 것에 대해 ‘걱정 할’(14,1) 필요가 없다고 하시며, 위로를 주시고 계시다. 즉 그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당신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겠다고 하셨다(21절 참조). 그분을 사랑하는 것은 행동을 통하여 입증되는 참된 것이라야 한다. 즉 계명을 지킴으로써 이다(15절. 21절). 그분의 계명이 실현됨으로써 바로 그분이 현존하시며, 그분이 더욱 친밀하게 드러나고, 그분이 계신 곳에 ‘아버지’도 함께 계시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을 것이다”(21절). 그러므로 하느님과 그리스도께 가까이 있는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더 많이 ‘알고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분들을 더 ‘사랑하고’, 그분들의 뜻을 즉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사람들이다. 이것을 우리가 너무 소홀히 하기 때문에, 그분과의 신비로운 만남을 갖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예수께서는 당신을 ‘드러내 보여주시는 것’ 외에 또한 성령의 ‘선물’을 약속 하신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곧 진리의 성령이시다”(16절). 그러나 세상은 그 성령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분을 보지도 알지도 못하기 때문이다”(17 절). 요한복음에서 ‘보다(theorein)라는 동사의 의미가 현상을 넘어 하느님의 현존의 표지를 알아보는 의미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부활대축일 낮미사 강론 참조). 세상은 이러한 자세를 갖고있지 못하다. 빛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장님과 같다. 빛을 보려면 먼저 눈이 치유를 받아야 하듯이, 세상이 성령을 받아들이려면 ’세상‘이기를 그쳐야 한다. 빛과 어둠의 대결에 대한 사건이 요한복음 전체를 덮고 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1,5).

여기서 성령은 ‘협조자’(Paraclito)라고 한다. 이는 요한복음사가의 고유의 용어이다(14,16.26; 15,26; 16,7 참조). 본래는 변호사를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신앙인들을 도와주는 기능으로 사용되고 있다. 즉 ‘기운을 돋우어 주다’, ‘협조하다’의 의미가 생기게 된다. 그러기에 성령은 우리가 어려움에 부딪치게 될 때, 위로해주고 보증해 주시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성령은 그리스도의 일을 계속하는 ‘협조자’이다. 지금까지는 예수께서 친히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맡기신 사람들을 ‘지켜주셨고’(17,12) 그분이 떠나가시면 성령께서 그 양떼를 보호해 주실 것이다. 이제 성령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께 충실할 수 있도록 내면으로부터 그들을 도와주고 위로해 주신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스도인들이 진리를 터득하도록 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진리’를 더 잘 깨달을 수 있게 한다. 사도들 역시 자신의 힘으로 하느님의 신비를 깨달은 것이 아니라, 성령이 임하신 다음에 완전히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의 교회도 성령의 빛을 충만히 받아들여야만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된다. 그 진리는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진리이다. 새로운 것이 아니다. 즉 성령은 그리스도를 더 잘 인식시키고 보다 강렬하게 그리스도의 더욱 친밀해진 새로운 현존을 생활화하도록 도와줄 뿐이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나는 너희를 고아들처럼 버려두지 않겠다”(18절)고 하신다. 왜냐하면 그분의 죽음을 넘어 여전히 그분을 뵙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살아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터이니 너희는 나를 보게될 것이다”(19절).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신앙을 통하여 느끼는 것은 실제적 접촉과 같이 강한 것이다.

부활은 단순히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항상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다. 그래서 교회는 부활 낮미사의 입당송에서 “나 부활하여 지금도 당신과 함께 있나이다. 알렐루야!” 하고 기쁨에 차서 찬미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확신에 근거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 날’이 오면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과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20절). 이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신적 개입이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이루어지고 있다. 믿는 이에게는 ‘매일매일’이 모두 ‘그 날’일 수 있으며 또한 ‘그 날’이 되어야 할 것이다.

부활시기를 지내는 우리는 이제 진정, 세상에 ‘희망’을 전할 수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본받음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매순간마다 우리의 삶이 부활을 체험하는 삶이 됨으로써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우리 신앙인들에게 바라시는 것이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배광하 신부-

 

 보호자이신 성령

어릴 적 초등학교 곁에는 고아원이 있었습니다. 저희 반에도 고아원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고아원 친구들은 한결같이 머리를 빡빡 깎았으며 반 친구들은 그 같은 고아원 친구들을 놀려댔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못된 행동이었습니다. 고아원 친구들은 함께 놀다가도 늘 기가 죽게 마련이었고 힘이 없어 보였습니다. 특별히 소풍을 가거나 학교 운동회 때에 다른 친구들의 부모님들이 오시면 그 같은 슬픈 모습이 더욱 확연히 드러나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때에는 고아원 친구들이 많이 불쌍하다거나, 내게는 부모님이 계셔서 크게 감사하다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아주 가끔 그때의 고아원 친구들을 생각하면 그들의 슬픈 뒷모습만 떠오를 뿐입니다.

사제가 되어 결손 가정의 아이들이나 부모님들이 멀리 떠나있는 아이들을 볼 때, 고아원 친구들을 생각해 봅니다. 정말 그들은 얼마나 고독해 하였을까? 얼마나 많이 그들을 버리거나 잃어버린 부모님을 그리워하였을까?

감히 비교가 될 수는 없겠지만 명절 때든, 대축일 미사가 끝나고 그 많던 교우들이 일순간 사라져 버리고 텅 빈 사제관에 홀로이 있게 될 때 저도 가끔은 고아가 된 심정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자주 고독을 견디지 못하고 신자들을 부를 때가 많았고, 기도가 아닌 세상일로 혼자임을 잊을 때도 많았습니다.

양로원의 어르신들의 가장 큰 고통은 고독이라고 합니다. 미움보다 더 큰 죄는 무관심이라는 말도 소외와 고독이 주는 고통의 다른 표현일 것입니다. 인간이 홀로 무인도에 버려진 잊혀진 존재, 무서운 고독의 엄습에서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시겠다는 예수님 인간 사랑의 열망은 성령의 약속으로 현실이 됩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요한 14, 18)

예수님의 이 같은 희망의 약속에 우리가 어둔 밤길에서도, 폭풍이 몰아치는 바닷가에서도, 아무도 내 곁에 없는 홀로인 방에서도 혼자가 아님을 느끼며 삶에 위안을 얻는 것입니다.

가끔은 우리가 그 같은 약속에 위로 받지 못하고 휘청거릴 때, 주님께서는 희망을 잃을까 또다시 강조하여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요한 14, 16).

사랑의 성령께서는 진정 우리 곁을 떠나지 않으시는 우리 보호자입니다.

진리이신 성령

참으로 많은 지식인들이 세상이 주는 그릇된 지식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을 떠나고 있습니다. 실로 세상은 온갖 현혹된 지식들로 가득 차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같은 지식은 더욱 교묘히 위장하여 우리를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도록 유혹하며 무신론을 합리화 시키려 듭니다.

많은 부모님들로부터 당신의 자녀들이 고등학교까지는 성당에 열심이었는데, 대학에 가서부터 성당을 멀리 한다는 아픈 마음을 듣곤 합니다. 학문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하느님과의 거리는 그만큼 멀어지는 현실에 가슴 답답해질 때가 많습니다.

그런가 하면 세상이 주는 안락한 배부른 빵의 유혹, 권력의 유혹, 자기중심적인 유혹은 하느님을 끝내 볼 수 없도록 만듭니다.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들도 그 같은 유혹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고 있음은 다른 평신도들과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하느님을 보지 못하게 막고, 알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 같은 믿음의 의혹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또다시 희망이신 성령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요한 14, 17).

우리는 때때로 세상의 여러 잡다한 일들에 얽매여 가장 소중하신 주님의 현존을 잊고 살았습니다. 세상 것이 전부인 양 살면서 고통을 잊으려 하였는데, 그리고 하느님을 떠나 세상의 자유 속에 살려 몸부림쳤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마음 한 편의 공허감을 떨쳐내지 못하고 늘 비어있는 외로움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떠난 가련한 자녀들에게 또다시 기쁨의 성령을 약속하십니다. 그 성령께서는 진리의 영이시며, 진리의 영께서 우리 곁에 머무를 때 비로소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 32)하시며 참된 진리의 자유 안에 우리를 이끄시고 초대하십니다.

끝내 죄 많은 인간을 내치지 않으시는 지극히 애절한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는 이 같은 성령의 약속 안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하느님 인간 사랑의 결정체이십니다.

 

 

 역동적인 삶을 살아가게 하시는 성령

-안병철 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께서 협조자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는 언약의 내용을 전해 주고 있고, 제1독서인 사도행전에서는 그 언약이 실현되고 있는 생생한 모습을 전해 줍니다. 한편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당신께서 주시는 계명들을 충실하게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하지 않으면서 그분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위선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면서 그를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두드러진 특성들 가운데 하나가 상호간의 충실성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에 대한 사랑을 항구하게 보여 주셨으므로 그 사랑에 대한 인간의 응답 역시 항구성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충실하게 계명을 지키는 삶이야말로 하느님 사랑에 대한 충실성의 표현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예수께서는 당신께서 요구하시는 당신의 사랑에 대한 충실성과 당신께서 보내 주시겠다고 언약하신 협조자 성령과의 관계를 설정해 주십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성령님을 ‘변론자’ 또는 ‘협조자’, ‘위로자’라고 부릅니다. 그 성령께서는 예수께서 전파하신 가치들을 지켜 주십니다. 그분께서는 그 가치들을 우리 안에서 내면화시키고 심화시켜 주십니다. 우리 모두를 그리스도의 참다운 제자가 되게 하시는 분이 바로 그 성령님이십니다. 나아가 그분께서는 우리 안에 심어진 희망을 구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과 우리의 이웃들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당당하게 증언케 하는 힘을 주십니다. 그래서 초기 교회 공동체는 역동적인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고아들’로 남겨 두시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다시 말해서 그분께서는 우리가 그분께로부터 전해 받은 메시지를 마음대로 해석하여 행동하거나 또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우리를 연약한 상태로 놓아 두지 않으십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시 오시지만’, 성령께서는 ‘우리 곁에서만’ 머물러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머물러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우리 안에 살아 계시며,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에 충실하게 응답함으로써 하느님을 사랑하는 모습으로 살아가도록 촉구하십니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충실성은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우리에 대한 충실성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보내 주실 협조자 성령께서는 우리 모두가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게 하시고, 우리 모두가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게 하십니다.

우리는 그러한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부활의 증인이 되는 삶입니다. 사랑의 길에 들어선 연인들이나, 사랑의 결실을 맺은 부부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얼마나 생동감 넘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런 모습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서공석 신부-

 

오늘 복음은 지난 주일에 이어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신앙인들과 어떤 관계 안에 계시는 지를 말합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이 하시던 실천을 배워서 행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하신 실천들이 하느님의 생명을 원천으로 한 일이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같은 실천으로 같은 하느님의 생명을 살아서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고 믿습니다. 그 믿음을 요약하여 오늘 복음은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은 그분이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는 말이기도 하고,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 안에 예수님이 하시던 실천이 살아났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 안에 모습을 드러낸 하느님의 생명이, 그분의 죽음 후, 많은 사람들 안에 확산되어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하느님은 “다른 협조자를 보내 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게 하실 것이다. 그분은 곧 진리의 성령이시다.” 성령이 오셔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안에 예수님이 실천하신 삶이 나타나게 하고 그것이 우리 삶의 진리라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또 말합니다. “나는 너희들을 고아들처럼 버려두지 않겠다. 너희에게로 돌아오겠다.” 제자들의 실천 안에 예수님이 돌아오신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게 되겠지만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터이니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세상은 알아보지 못하지만, 제자들은 봅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살아서 그분의 일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느님 생명의 일이었다는 것을 아는 제자들입니다. 그 제자들은 신앙인의 실천 안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일을 알아본다는 말입니다.

동물은 먹이를 얻어서 자기 개체를 유지하고 또한 종족을 유지합니다. 그들은 그것을 위해 무자비하고 포악해도 비난 받지 않습니다. 그들은 약육강식의 질서 안에 삽니다. 인간도 동물의 한 종이기에 같은 질서 안에 살 수 있습니다. 어느 동물학자는 인간의 동물적 생태를 기술하면서 인간을 ‘털없는 원숭이’라고 불렀습니다. 인간에게 동물 본연의 질서만 있다면 당연한 이름입니다. 인간 사회는 법을 만들어서 인간의 동물적 약육강식과 포악함에서 인간을 보호합니다. 그러나 법에 저촉되지 않으면서 약육강식하고 포악할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강자가 약자를 무자비하게 지배하고 각종 횡포를 하는 것, 서로 권력을 잡겠다고 상대를 중상하는 것, 돈 몇 푼을 위해 인색하고 사람을 기만하는 것 등은 ‘털없는 원숭이’들의 합법적 약육강식의 포악한 모습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포악함으로 인간은 인간다워지지도 않고, 인간다운 사회가 되지도 않습니다. 인간은 비록 자기 한 사람 희생하더라도 더 큰 진실을 위해 헌신할 때 인간으로서 보람을 느낍니다. 종교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순교자들이 있고, 민족과 국가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 순국선열들이 있습니다. 그 외에도 우리가 고개를 숙이고 엄숙할 수밖에 없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생존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녀를 위한 부모의 사랑도 일종의 살신성인입니다. 모든 부모가 다 하는 일이라 대수롭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 된 사람들의 희생이 있어서 인류역사 안에는 아름다운 인간 사랑이 지속됩니다.

인류역사 안에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그리스도 신앙이라 부릅니다. 그 신앙은 하느님의 힘을 빌려서 자기 한 사람 더 잘 되겠다는 약삭빠른 수작이 아닙니다. 한 번씩 나타나는 종말에 대한 광신도 집단의 주장과 같이 이 세상을 성공적으로 빠져나가, 내세에 가서 잘 살겠다는 수작도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본다는 말은 예수님의 실천 안에 인간 삶의 최종적 보람을 본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아닌 다른 것 안에서 보람을 찾는 존재입니다. 재물을 많이 쌓아 놓는 데에 보람을 느끼는 사람도 있고, 큰 권력을 잡아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데에 보람을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녀를 훌륭하게 키워 놓은 부모의 흐뭇한 보람이 있고, 제자를 아끼고 사랑해서 유능한 인재로 키운 스승의 보람이 있습니다. 사업이나 자기 직장에 충실해서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준 사람이 느끼는 보람도 있습니다. 자기가 아닌 다른 것 안에 삶의 보람을 심는 노력을 우리는 헌신이라 부릅니다. 하느님에게 헌신할 수도 있고, 하느님이 아끼시는 인간 생명에 헌신할 수도 있으며, 재물 혹은 권력을 위해 헌신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는 신앙인은 예수님의 헌신이 하느님 생명의 일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하실 수 있는 헌신을 모든 순간에 하신 분이었습니다. 병자를 만나면 병자를 고쳐주고, 죄인이라 소외당한 사람을 만나면 죄의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가난한 이, 우는 이, 진리를 위해 헌신하는 이들이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을 염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 누구도 버려지거나 불행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재물과 권력을 위해 헌신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헌신은 인간생명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헌신은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아서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이는 일이었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생명을 아끼고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었습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이 실천하신 헌신을 보면서 그것이 그분 안에 계셨던 하느님의 생명이 하신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본받아서 발생하는 모든 헌신의 삶 안에 하느님의 생명을 봅니다. 그 생명을 성령이라 부릅니다. 오늘 복음은 아버지께서 “다른 협조자인 진리의 성령을 보내 주셔서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신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협조자”라는 말은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깨닫는데 먼저 예수님의 역할이 있었고, 그 다음에 성령의 역할이 있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진리의 영인 것은 헌신이 하느님 생명의 진리이고, 성령은 그 헌신의 진리가 우리 안에 발생하도록 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일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우리 각자의 능력과 여건은 다릅니다. 우리 각자가 할 수 있는 헌신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도 당신이 처한 여건에서 최대의 헌신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가신 길이었고, 그분을 따르는 우리가 가야 하는 길입니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다.” 신앙인의 삶 안에 그분의 일이 보인다는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오소서 성령님!

-유영봉 몬시뇰-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안다".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야고2,1) 주님께서는 "내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14,21)라고 하신다. 협조자이신 성령께 우리를 열고 그분께 의탁해야 한다.

1.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권력형비리가 터지고 줄줄이 쇠고랑을 차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의 현대사 안에는 대통령 아들들의 불행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마약을 끊지 못해 다섯 번이나 감옥을 들락거리는 대통령의 아들, 소통령이라고 불리며 권력을 휘두르다 아버지 재임 기간 중에 쇠고랑을 찬 아들, 그 다음엔 세 아들이 모두 비리에 연루되어 노벨상을 탄 아버지의 얼굴에 먹칠을 한 아들들이 있었다. 입만 열면 나라와 국민을 위한다던 자들이 알고 보면 자기 주변 하나 반듯하게 정리하지 못하고, 개인 치부(致富)와 탈법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할 때, 국민들의 허탈감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게 된다. 누가 진정으로 국민을 위하는 참 정치인인지 알기란 쉽지 않다. 마찬가지로 경건하게 성당에 앉아 기도를 할 때면 모두 열심한 신앙인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누가 참 신앙인인가를 알기란 쉽지 않다.

우리나라엔 성당 공사를 하려고 하면 주변의 사람들이 공사를 방해하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교회가 이웃의 아픔이나 기쁨을 함께 나누는 참 신앙인의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안다."는 말은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야고보 사도는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음 믿음이다."(야고2,17) 라고 하셨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내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고 말씀하신다. 그렇다. 신앙은 입술로나 겉모양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다. 얼마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느냐가 참 신앙의 척도이며, 기준인 것이다.

2. 계명을 지키되 사랑으로 지켜야

열매가 중요하다. 그러나 한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 현대인들은 매사에 그 지향이나 목적의 순수성을 문제삼지 않고, 겉으로 드러나는 실적(實績)만을 전부인양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 속담에는 "모로 가나 기어서 가나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이 있다. 이는 목적의 순수함이나 과정과 방법의 올바름에 대해서는 문제삼지 않겠다는 말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속마음을 보시는 분이시다. 계명을 지키되 참으로 사랑으로 지켜야 한다. 제2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여러 분은 깨끗한 양심을 지니고 사십시오. .... 선을 행하다가 고통을 당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악을 행하다가 고통을 당하는 것보다야 얼마나 낫겠습니까?"(1베드3,17)라고 하신다. 우리가 선행을 하고, 계명을 지키되 할 수 없이 하거나 장사꾼 적인 이해 타산으로 한다면, 그것은 가치 없는 일이다. 주일을 지키고, 교무금과 헌금을 내고, 교회 활동을 하면서도, 이런 일을 소홀히 하면 혹시 벌(罰)이라도 받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한다면 그것은 자녀다운 자세가 아니라, 노예적인 태도이다. 사랑으로 계명을 지킬 때 모든 일은 구원적인 가치를 지닌다.

신앙적인 면에서 볼 때 어떤 일의 크고 작음이나 가치는 그 일의 외양(外樣)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하는 지향에 있다고 하겠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하느님과 인간을 위한 사랑으로 할 때, 그것은 크고 가치 있는 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제품을 만들고 활동을 할 때도 거기에 사랑이 스며들어야 한다. 사랑으로 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것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다.

3. 내 힘으로가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기적인 목적이나, 장사꾼 적인 계산이나, 노예적인 두려움으로가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한다. 어떤 일에나 인간적인 계산이나 욕심으로 할 때는 거기에 항상 악(惡)이 스며들게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하느님께로 향하고 있어 성령께서 함께 하시면 매사에 하느님과 인간을 위한 사랑이 스며들게 되고 하느님의 기운이 넘치게 된다. 우리는 다음 주일 승천 축일을 지내고 그 다음 성령강림 대 축일 맞게 된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모님과 사도들이 기도 중에 성령을 기다렸듯이 성령강림 전 9일기도를 해왔다.

성령은 간절히 기다리는 자에게 오신다. 예수님은 "너희를 고아들처럼 버려 두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요한14,15-16) 고 하셨다. 주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열린 마음으로 "오소서 성령님!", "주님 이끌어주십시오" 하며 성체성사로 오시는 주님께 나의 영적 가난을 고백하고 성령의 오심을 간절히 청하자.

 

 

 주님의 강열한 사랑이 있기에!

 -안병철 신부-

 

"저의 남편은 외교관이었습니다. 어느 날, 다들 부러워하는 외국공관으로 발령을 받았을 때에는 가슴 터질 듯 기쁘고 행복했지요. 아들 하나 데리고 남편을 따라 나서던 그 날이 생생하게 떠오르네요. 참 행복했었지요.”

그렇게 말하는 스텔라 자매님의 얼굴에 왠지 모를 우수가 서려 있었습니다.

“딸이 하나 생겼어요. 얼마나 가슴조리며 기다려 왔었는지요! 그런데 기쁨도 기다림도 잠시 뿐…. 가슴 벅찬 기쁨을 안겨 준 딸아이는 심각한 장애를 안고 태어났답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지요.

그런데 그 때까지는 가정 일에 소홀하기만 했던 남편이 그 날부터 다른 사람으로 변하기 시작했어요. ‘우리의 사랑 없이는 이 아이가 살아갈 수가 없어.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해 이 아이에게 사랑을 쏟아 부읍시다’라고 말하는 남편의 얼굴엔 왠지 모를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는 듯했습니다. 생명을 갖게 된 첫 순간부터 혼자의 힘으로는 일어설 수 없는 이 아이에게 누구보다 부모의 사랑이 절실하게 필요할 것이라 여긴 남편은 과감하게 외교관직을 내 놓고 온 정성으로 딸아이를 돌보기 시작했지요. 고국에 가서는 이 아이가 장애아라는 이유로 살아가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고는 외국에 남아 살기로 하고 수년 간 살았습니다. 하지만 비록 이웃 사람들의 냉소와 무관심이 있더라도 내 나라 내 땅에서 키워야겠다는 생각으로 용기 있게 귀국하게 되었고 오늘 처음 성당에 온 것입니다.”

그 자매님의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넘실거리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로 인해 사랑이 무엇인지 알았고, 가족의 소중함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었으니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 아이는 장애아가 아니라 우리에게는 사랑과 축복 그 자체랍니다.”

그렇게 말하는 부모의 얼굴은 행복하게만 보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아버지 하느님께 성령을 청하시겠다는 모습을 전해 줍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고아들처럼 버려두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또한 그분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으로 살아가야 할 우리가 우리 멋대로 살아가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으십니다. 그분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시 오십니다.’ 그런데 그 성령께서는 ‘우리 곁에서’가 아니라 ‘우리 안에’ 머무십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우리 안에 살아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 그분께서 명하신 계명들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다름 아니라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께서는 믿는 모든 이들이 계명을 지킴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그래서 활기차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그러니 ‘믿는 사람이란 행복한 사람’이라고 어찌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아이는 장애아가 아니라 우리에게는 축복과 사랑 그 자체랍니다’라고 한 그 부모의 말처럼, 우리가 바로 하느님께는 ‘축복과 사랑 자체’인데 무엇을 더 두려워해야 하겠습니까?

 

 늘 함께 하시는 성령

-신동철 신부-

 

 며칠 전에, '백악관을 기도실로 만든 대통령 링컨'이란 책을 읽어보았습니다. 링컨이 10살 되던 해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상을 떠나면서 "너는 늘 성서를 부지런히 읽어라"라는 유언과 함께 자기가 생전에 읽던 성서를 링컨에게 유물로 남겨 주었습니다. 링컨은 어머니의 유언을 지켰습니다. 링컨은 대통령 취임 석상에서 낡은 성서 한 권을 들고 나와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이 낡은 성서는 바로 어머니께서 저에게 물려주신 것입니다. 저는 성서야말로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값진 선물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하느님의 선물인 성서의 보물을 캐기 위해 늘 성서를 묵상해 왔습니다. 저는 성서의 말씀대로 이 나라를 통치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링컨은 초등학교를 9개월 밖에 다니지 못하였으며, 안 해본 것이 없었습니다. 농부, 뱃사공, 막노동, 장사, 군인, 우체국장, 측량사, 변호사, 주 의원, 하원의원, 대통령. 그 자신의 고백처럼 그의 실패와 어려움, 기쁨과 성공에 함께한 것은 다름 아닌 '성서'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협조자', '진리의 성령'을 약속해 주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 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요한14, 16), "그 분이 곧 '진리의 성령'"(요한14, 17)이라고 알려주십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예수님의 약속을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그 사실자체를 잘 모르는 이도 있습니다. 화끈하고 확실하게 성령체험을 얻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불같이 뜨거운 체험을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부부가, 가족이 함께 매일 살아가듯이 성령께서도 그냥 그렇게 우리들 안에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링컨의 인생살이에 늘 함께 한 것이 '성서'였던 것은, 링컨이 성서를 가까이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늘 성서를 읽고 묵상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께서 약속하신  '협조자', '진리의 성령'께서 우리들의 생활 안에 언제나 함께하신다는 것을 의식하고 느껴야합니다. '진리의 성령'은 우리가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깨닫도록 합니다. 우리가 더욱 더 깊이 하느님을 깨닫게 되고 하느님께 나아가도록 만듭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떠나지 않고 살고 있는 그 자체가 바로 성령께서 함께하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신앙생활에 필요한 정도의 체험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가족을 통해서든지, 이웃을 통해서든지, 좋은 일을 통해서든지, 안 좋은 일을 통해서든지 간에,.....
성부 따로, 예수님 따로, 성령 따로가 아니라고 우리는 배워서 알고 있습니다. 한 하느님이십니다. 예수께서 약속하신  '협조자', '진리의 성령'역시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을 믿고 사는 우리들의 신앙생활이 바로 성령 안에 사는 삶이고, 성령체험입니다.

오늘 하루를 보내면서 우리가 하는 말과 행위 안에, 하느님께서, '진리의 성령'께서 함께하심을 의식하며 지내봅시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강지숙(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을 전하는 공관복음에 비해 요한복음은 그분의 신원과 구원 활동에 관한 깊은 신학적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 스스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신다는 점이 독특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같은 말씀입니다. 무려 다섯 장에 걸쳐 서술한 고별 담화(13-­17장)는 공동체의 일치와 형제애를 유별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곧 닥쳐올 이별을 앞두고 세상에 남아 있을 제자들에게 굳건한 믿음과 기도로 변함없는 사랑을 기약하신 예수님은(14,1-­14), 또 다른 희망을 약속하십니다. 제자들을 지켜주고 올바른 길로 인도할 성령을 보내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당신이 겪으실 일도 보통 일이 아닌데 두고 가는 제자들 걱정으로 애간장을 태우십니다. 젖먹이를 떼어놓는 어머니 마음 같습니다. 다른 어느 대목 못지않게 예수님과의 긴밀한 친교를 느낄 수 있는 애절한 말씀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15절)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는 이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감상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책임이 따릅니다. 진정한 사랑이라면 그 효력은 계명 실천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여기서 ‘지킨다’는 것은 유의하여 마음에 깊이 새긴다는 뜻입니다. 공동체를 유지하고 성장시키는 데 계명이 필요합니다. 사랑에 관한 예수님의 계명은 단지 의지로 완성할 수 있는 윤리적 요구가 아니기 때문에 성령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계명을 잘 지킨다는 조건 아래 성령이라는 선물이 주어집니다.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16절) ‘보호자(pa?vklhto")’는 네 복음서 가운데 요한복음에만 네 번 나오는 낱말입니다. ‘다른 보호자’라면 예수님 말고 또 다른 보호자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곧 우리가 울 때, 남에게 비난받을 때, 인생 밑바닥까지 떨어져 절망할 때 함께해 줄 협조자 성령을 말합니다. 또한 제자들의 믿음을 키워주고 제자들의 임무 수행을 위해 협조할 것입니다. 고별 담화 내내 강조되는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연대성은 사랑과 믿음을 뿌리로 하여 성령의 도움으로 강화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17절) 진리를 증언하고 제자들을 진리로 이끈다는 점에서 예수님과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진리를 세상에 계시하는 것도 성령의 몫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진리는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6절). 예수님은 아버지께 건너가시더라도 성령을 통해 계속 활동하시고 제자들과의 친교도 지속하고자 하십니다. 차마 영영 못 떠나시고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머무시려 하십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17절). ‘세상’이란 예수님을 배척하고 알아보지 못하는 무리를 대표합니다. 성령으로 인해 믿음의 공동체와 세상이 갈라집니다. 세상은 진리의 영을 받아들일 능력조차 없으니, 세상과의 갈등은 피할 수 없습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18절) 스승 없는 제자들은 고아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게 못내 아쉬워 발길을 떼지 못하십니다. 스승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승 없이도 씩씩하게 살아남는 법, 곧 닥칠 위기에 맞서는 법, 믿음의 공동체를 계속 꾸려가는 법을 터득해야 할 때입니다.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19절) 여전히 예수님을 배척하는 세상과 믿음의 공동체를 구분하십니다. 제자들은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성령을 알아볼 것입니다. 조금 있으면 다시 예수님을 뵙게 되어 죽음도 예수님을 붙잡아 둘 수 없음을 목격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제자의 긴밀한 유대 관계는 죽음으로 끊어지지 않습니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19절) 죽음으로 끝나지 않음을 굳게 다짐하십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겨내십니다.
재차 반복해서 새 계명을 예수님에 대한 사랑에 연결하십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21절)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사람을 사랑해야 하고,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건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21절) 하느님과 예수님, 예수님과 사람, 하느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의 사랑으로 맺어진 복잡한 인연은 이토록 강하게 얽히고설켜 있습니다. 부활 이후 공동체는 사랑을 바탕으로 세워진 공동체요 사랑에 힘입어 성장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을 통해 인간에게 가까이 오셨고,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 인간 안에 머무십니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이 인간의 마음에 머무시도록 마음의 문을 열어주시고 내적 힘을 주시는 협조자입니다. 성령에 힘입어 우리는 참된 자아를 찾게 됩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인 사람만이 성령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아직 미숙한 제자들을 두고 떠나시는 예수님의 애타는 심정이 구구절절 묻어나는 본문입니다. 믿음과 사랑과 계명으로 단단히 무장시키고 또 시키십니다. 제자들이 남아서 할 일들이 예사롭지 않을 뿐더러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똑같이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당신 대신으로 성령을 보내시면서도 다짐을 당부하십니다. 제자 교육에 마지막 열정을 다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바람직한 공동체 모습을 선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짝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이제 작별의 순간이 왔습니다. 제자들이 홀로 설 때입니다. 사랑으로 똘똘 뭉쳐 예수님의 뒤를 따라야 할 때입니다. 그분의 짝사랑에 보답할 때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만이 그들이 세상과 맞서 싸울 힘의 원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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