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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블로를 옹호했던 이명박학력의 진실.뽕녀엄마의 수다
2010/11/04 15:33
http://blog.naver.com/khs11051105/140117581513
이명박은 고대를 나온게 아니고 자동학력세탁된 운좋은 케이스였군요.
동지상고 야간 출신이 우석대 다니다 졸업했는데 나중에 고대가 우석대를 사들이면서 자연스럽게 통합되어서 고대출신으로 탈바꿈.
그의 아들 이시형도 학력에 의문이 있대요. 고졸이라는 말이있는데 이유인즉슨, 연대분교를 다녔다는데 공부못해서 도피성유학을 갔다네요.그런데 거기서도 졸업하지 못하고 왔다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무슨 이름도 잘 생각안나는 칼리지를 다닌다고 들었는데 나중에 프로필보니 떡하니 펜실베니아주립대
경영학과를 다녔다고 되어있더라는 거죠.(이게 학력세탁과 관계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본인이 지금까지 거짓말 했던거 처럼말이죠. 한번이라도 이명박입에서 우석대얘길 들어본사람 있나요?
ㅎㅎ 그래서 이명박이 입학력은 안쓰고 졸업력만 썼다는데 이 역시도 졸업의혹이 있었죠.
이명박이 운동권으로 감옥에 들어가 있었던 기간과 졸업이 맞지 않는다는 거였어요.
그리고 그당시 정부의 쁘락치 노릇하지 않으면 운동권학생은 다 제적당해야 정상이거든요.
그런데 나중에 이 의혹의 실마리가 풀렸죠. 그당시 나는새도 떨어뜨린다는 안기부의 실세이후락부장의 총애로 박정희를 만났다는~ㅎㅎ
결국 쁘락치한거였더라구요. 같은 동료를 안기부에 팔아넘기고 그공으로 승승장구 한거죠.
저 아는 지인분도 고대 장학생이었는데 운동권하다가 제적당하고 그후 취직도 못했어요.
중소기업에서조차 받아주질 않았거든요. 암튼 어느정도 타블로 옹호하길래 알아봤더니 이런 비화가 있더군요.
하여튼 하나부터 열까지 믿을게 못되는 인간입니다. 초록은 동색이라~ ㅎㅎ 하여간 정치판은 생각하면 할수록 코메디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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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본교가 설립되자 곧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고, 설립자 이용익 선생은 해외로 망명하게 되어, 학교는 경영난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이 최초의 위기는 의암 손병희 선생이 경영의 책임을 이어받음으로써 해결되었지만 3·1운동 직후 손병희 선생이 일본 경찰에 피검되자 본교는 다시 난관에 봉착하였다. 그러나 다행히 1921년에 천도교와 김기태·김원배씨 등 많은 독지가들이 갹출한 거액의 기부금으로 본교 경영의 모체가 된 재단법인 보성전문학교가 설립되고, 다음 해 4월 조선교육령에 의한 전문학교의 인가를 받음으로써 본교는 경영의 재정적·법적 기반을 굳히게 되었다.
그 뒤 약 10년이 지나 1929년에 비롯된 세계적 경제공황의 여파로 재정이 충분치 못했던 본교는 다시 심각한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이 곤경으로부터 본교를 건져내고 또한 오늘과 같은 발전의 터전을 마련한 사람이 1932년에 본교 경영의 책임을 맡은 인촌 김성수 선생이었다. 당시 김성수 선생은 중앙중학교와 동아일보사를 경영하고 있었다.
3·1운동 직후 거족적으로 일어났던 민립대학 설립 운동이 일본의 압력으로 실패하자 김성수 선생은 자력으로라도 민립대학을 설립할 뜻을 품고 구미 각국의 저명한 대학들을 시찰한 바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때마침 본교가 경영난에 허덕임을 보고, 그의 생·양가의 부친인 김기중·김경중 두 분 선생이 설립하여 여러 해 동안 교육사업을 벌여 온 재단법인 중앙학원에 새로 거액의 재산을 기부함으로써 이 재단으로 하여금 재단법인 보성전문학교를 인수케 하였던 것이다. 이때부터 본교의 재정적 기초는 비로소 공고해졌다.
1932년 6월부터 김성수 선생은 몸소 본교 교장의 임무를 맡았고, 1934년에는 안암동 1번지에 위치한 63,000여평의 넓은 대지에 현재의 본관을 신축하였으며, 1937년에는 전국의 많은 유지들이 발기한 보성전문학교 창립 30주년 기념사업으로 착공한 도서관을 준공 개관하였다. 이어 다음해 7월에는 당시 동양에서도 손꼽히던 대운동장을 완성하여 캠퍼스의 위용을 갖추었다. 그 뒤 김성수 선생은 초지를 굽히지 않고 1940년경 본교를 한국 최초의 민립대학으로 승격시키려 애썼으나 오히려 일제의 탄압만 더해 갈 뿐이었다. 그 후 제2차 세계대전이 말기로 접어든 1944년 4월에는 드디어 학교 이름마저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로 변경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이른바 해외 개척을 위한 실과교육을 강요당하기까지 하였다.
창립 이래 이와 같이 가혹한 일본의 식민정책 아래 갖은 압박과 고난을 겪으면서도 본교는 끝까지 교육구국의 건학정신을 굽힘이 없이 조국의 광복을 기약하고 굳건한 자세를 유지하였던 것이다.
광복 후 김성수 선생의 오랜 숙원은 마침내 달성되어 보성전문학교를 기초로 하여 1946년 8월에 정법대학·경상대학 및 문과대학의 3개 단과대학으로 편성된 종합대학으로 ‘고려대학교’를 새로 창립하고, 초대총장에 현상윤씨가 취임하였다. 이로써 민족을 위한 민족의 대학을 설립한다는 그의 오랜 꿈이 마침내 실현된 것이다. 그리고 안암동의 광대한 산림과 전답을 사들여 학교의 대지를 크게 확장하였으며, 1949년 6월에는 고려대학교 제1회 졸업생을 내었고, 그해 9월에는 대학원의 개설을 보게 되었다.
6·25 사변 중에는 현상윤 총장이 납북되고 학교도 잠시 그 기능을 잃었으나 1951년 9월 피난지 대구에 가교사를 마련하고 유진오씨가 총장서리에 임명되어 다시 수업을 시작하였다. 피난중에도 본교는 이학계의 학과와 농과대학을 신설하여 기구를 확장하였고, 1953년 8월 환도한 뒤부터는 종합대학으로서의 기구와 내용 확충에 본격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1955년 4월과 1959년 4월의 두 차례에 걸친 단과대학 및 학과의 개편 또는 신설을 통하여 본교는 대학원과 법과대학·상과대학·문리과대학·농과대학 및 정경대학의 5개 단과대학을 두게 되었다.
1961년 6월에는 현재의 서관이 준공되었고, 연달아 부속 박물관·농산가공실험실·온실 및 그 밖의 부속건물을 신축 준공하였으며, 11만여평의 실습농장과 168만평에 달하는 연습림도 확보하였다. 한편 이공 계통의 학과에 많은 실험기구를 설비함으로써 시설을 크게 확충시킨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그리하여 1963년 12월에는 이공대학이 신설되고,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경영대학원이 창설되었다.
1965년에 본교는 창립 60주년을 맞이하였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성대한 기념식과 각종 행사를 거행하고 ‘고려대학교 육십년지’ 및 기념논문집을 간행하였으며, 부설 아세아문제연구소 주관으로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하였고, 교우들의 도움으로 교문과 호상을 건립하였다. 동년 10월에는 유진오 총장이 퇴임하고 이종우씨가 제5대 총장에 취임하였다.
1966년 이후 이공대학·농과대학의 학과 증설과 교육대학원의 신설, 그리고 많은 부속·부설기관의 설립으로 대학기구의 커다란 발전을 이룩하였으며, 시설면에서도 이공대학 및 그 부속건물·농과대학 부속건물·교양관·홍보관 등의 신축 또는 증축으로 크게 확충하였다.
1970년 9월에 이종우 총장이 퇴임하고 동년 10월에는 김상협씨가 제6대 총장에 취임하였다.
1970년에 시작된 장기발전계획에 따라, 1971년 12월에는 학교법인 우석학원을 합병하여 우석대학교 의과대학·문리과대학·법경대학 및 병설 의학기술초급대학과 부속병원 등을 흡수하였다.
1972년 6월에 상과대학과 경영대학원의 종합교사인 경영관이 준공되어 경영교육의 충실과 향상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으며, 동년 12월에는 사범대학을 신설하였다.
1975년 4월에 김상협 총장이 퇴임하고, 차낙훈씨가 총장서리로 임명되었다가 동년 6월에 제7대 총장에 취임하였다.
1976년 12월에 상과대학을 경영대학으로 개칭하였다. 1977년 1월에 식량개발대학원이 설치 인가되었고, 동년 12월에는 이공대학을 이과대학과 공과대학으로 분리 개편하였다. 1977년 6월에 차낙훈 총장이 퇴임하고 동년 8월에 김상협씨가 제8대 총장에 재취임하였다.
이에 앞서 1973년 10월에 확정된 서독정부의 무상원조에 의한 농과대학 발전계획에 따라 농과대학 캠퍼스가 준공되어 1977학년도부터 사용하고 각종 새로운 실험기기와 시설을 갖춤으로써 동 대학의 획기적인 발전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지난 1975년 5월에 맞이한 창립 7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에 착공했던 중앙도서관 신관이 준공되어 1978년 3월에 개관됨으로써 본 대학교의 도서관은 장서량뿐만 아니라 시설에 있어서도 국내 최고 수준의 대학도서관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고, 1978년 5월에 착공한 기숙사가 1979년 11월에 준공되어 1980년 3월에 개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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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수도권의 인구소산과 지방의 고등교육 향상을 도모하는 당국의 시책에 따라, 충남 조치원읍 서창동에 학교 부지를 확보하고 분교 설치를 계획 추진하여 1980년 3월에 조치원 분교를 개설하였다.
1982년 6월에 김상협 총장이 퇴임하고, 동년 7월에 김준엽씨가 제9대 총장에 취임하였다.
또한 1982년 10월에는 조치원 분교를 문리대학과 경상대학으로 편제를 개편하였다.
1983년 1월에 장기발전계획의 일환으로 행정기구 개편을 단행하였다. 즉 기획처·교무처·학생처·총무처·관리처 등 5개처와 12개과의 편제는 대학의 양적 팽창에 따르는 부수적 업무수행과 업무분담의 전문화를 기했다.
그리고 7월에는 의과대학 부속병원의 직제를 의료원 체제로 승격·개편하고 혜화병원·구로병원·여주병원·안산병원을 그 산하에 두었다.
또한 9월에는 과학도서관이 과학기술 연구와 학술정보센터로서 교내의 최대 매머드건물로 개관하였다.
아울러 1983년중에 법과대학 교사 신축 기공(4월)을 비롯하여 정경대학 교사 신축 기공(6월)과 안산병원을 기공(9월)하였으며, 1984년중에는 조치원 캠퍼스 제5교육동의 기공(6월)과 체육생활관의 기공(9월)이 있었다. 또한 1984년 5월과 8월에 법과대학과 정경대학의 두 신축건물이 준공됨으로써 각 단과대학은 제각기 독립된 건물을 갖게 되었다.
1985년 3월에 김준엽 총장이 퇴임하고 이준범씨가 제10대 총장에 취임하였다. 또 5월에 본교는 개교 80주년을 맞이하였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성대한 기념식과 각종 기념행사를 거행하고 ‘사진으로 본 고려대학교 80연’ 및 기념논문집 등을 간행하였으며, 아세아문제연구소와 민족문화연구소의 국제학술회의와 노동문제연구소, ‘보성전문학교의 법학·경상학 교육과 한국의 근대화연구위원회’의 학술세미나가 개최되었고, 교우들의 힘과 정성으로 체육생활관이 준공되어 모교에 봉헌되었다.
또 4월부터 진료를 개시한 안산병원의 개원식이 5월에 있었으며, 6월에는 조치원캠퍼스의 제5교육동이 준공되었다. 또 7월에 낙산 수련장을 기공하여 12월에 준공하였다.
1986년 3월에 교직원 및 학생 복지시설의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개선을 통한 쾌적한 교육환경 조성을 위해 후생복지부가 신설되었고, 11월에는 국제교육을 강화하고 활발한 국제교류를 통한 국제협력체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국제교육원을 설치하였으며, 사회과학의 이론과 실제를 더욱 심오하게 연구·교수함으로써 국가 사회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춘 유능한 인재의 양성을 목적으로 정책과학대학원을 신설하였다.
1987년 3월에 예비군항정과를 비상계획과로, 서창캠퍼스의 서무과를 총무과로 명칭을 변경하고, 5월에 고려대학교 장기발전계획의 일환으로 녹지캠퍼스 토목공사, 의과대학 및 부속병원 신축공사를 기공하였고, 8월에 연건평2,400평 수용인원 720명의 서창캠퍼스 기숙사를 기공하였으며, 10월에는 서창캠퍼스의 문리대학을 인문대학, 자연과학대학으로 개편하고 자연과학대학에 정보공학과와 식량공학과를 신설하였다.
11월에는 대학과 산업계 간에 연계체제를 이루어 고도산업사회를 주도할 고급 전문기술인에게 이론적 지식을 부여하고, 창의적 능력을 산업계에서 발휘케 할 목적으로 산업과학대학원을 신설하였고, 조치원캠퍼스의 정식명칭을 서창캠퍼스로 제정하였으며, 국제교환학생협의회(I.S.E.P.)에 가입하였다.
1988년 2월에는 서창캠퍼스의 하부조직을 신설, 부총장을 두고, 행정관리부서로서 교학처 및 사무처를 두었다.
1988년 6월에 서창캠퍼스 부속 전자계산소를 설치하고 10월에는 문과대학의 사학과를 한국사학과·동양사학과·서양사학과로 분과하고 서반아어문학과를 서어서문학과로 개칭하고 언어학과를 신설하였으며, 농과대학의 식물보호학과를 농생물학과로 개칭하였고, 사범대학에 미술교육과, 서창캠퍼스의 인문대학에 고고미술사학과, 자연과학대학에 제어계측공학과·환경과학과·보건과학과·사회체육과학과, 경상대학에 경영정보학과를 신설하였다.
11월에는 서창캠퍼스에 서창도서관을 기공하고, 지역 및 산업개발에 관한 이론과 그 응용방법을 교수·연구하고, 지도적 인격과 독창적 능력을 갖춘 전문요원을 육성하여 지역사회개발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지역사회개발대학원을 신설하였다.
12월에는 서창캠퍼스 서창기숙사 기구를 신설하고 1989년 1월에 인촌기념관을 기공하였으며 2월에는 서창기숙사를 준공하였다.
3월에는 이준범 총장이 11대 총장으로 취임하였으나 학내소요로 말미암아 6월에 총장직을 사퇴하고 총장서리에 김진웅씨가 임명되었으며 8월에는 부총장제도를 실시하여 부총장에 김희집씨를 선임하였다. 9월에 비상계획과를 폐지하고 직장예비군에 연대본부를 설치하였고 총무과 분실을 과로 승격시켜 총무처에 자연계 캠퍼스 서무과를 신설하였다. 11월에 서창캠퍼스에 자연과학동 토목공사를 기공하였으며 12월에는 서창건설현장사무소를 폐지하고 서창사무처에 서창시설과를 신설하였다.
1990년 6월에는 김진웅 총장서리가 퇴임하고 김희집씨가 12대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8월에는 서창캠퍼스에 서창도서관을 준공하였으며 10월에는 서창캠퍼스 학생들과 교직원들의 후생복지 증진에 대한 요구를 능동적으로 수용하기 위하여 서창캠퍼스에 서창 후생복지부를 설치하고, 서창캠퍼스에 과학관을 기공하였다. 또한 식량개발대학원을 자연자원대학원으로, 지역사회개발대학원을 경영정보대학원으로 개칭하였으며, 학과로서는 농과대학의 농학과를 식량자원학과로, 임학과를 산림자원학과로, 원예학과를 원예과학과로, 자연과학대학의 환경과학과를 환경공학과로, 보건과학과를 의용전자공학과로, 사회체육과학과를 사회체육학과로 개칭하였다.
또한 11월에는 대학원에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와 학·연 과정을 설치하였다.
1991년 3월에는 교무처에 연구과를 신설하고 전략광물자원연구센터를 설치하였으며 교원연구년제도를 시행하였다. 또한 의과대학이 명륜동시대를 마감하고 안암동 신축교사에서 개강함으로써 자연계열 캠퍼스가 모두 한 장소에 모여 서로 유기적인 협조체제를 갖춘 안암동 시대가 개막되었다.
5월에는 제1회 “고대인의 날” 항사를 개최하였고 러시아공화국의 모스크바대학과 학술교류협정을 조인하였으며 8월에는 낙산수련관을 기공하였다.
10월에는 착공 4년여 만에 안암병원의 신축공사가 준공되어 개원함으로써 양질의 의료서비스와 심도있는 의학연구 발전에 새로운 장을 열었으며 이와 함께 의무부총장제도를 실시하였다.
이건 청와대 주소. 들어가시면 이명박 약력 있구요.
동지상고 야간 졸업이 60년이고
고대 졸업이 65년이예요.
[입학]력은 쓰지 않고 [졸업]력만 썼으니 다들 속죠.ㅉㅉ
http://www.cwd.go.kr/
고대 나왔다고 엄청 자랑하던 먼 친척이 있었는데 주변분들이 대학입학을 한적이 없는데 어느날 2년만에 고대나왔다고 ... 연고전이 어떻고 우리 고대가 어쩌구 하면서 자랑하던데 나중에 알고보니 우석대를 들어가자 마자 합병으로 졸업장은 받었다나봐요. 그런데 졸업앨범에 따로 나오는군요. ㅎㅎㅎ 10.04.21 00:53
참고로 말씀드리면, 지금 전남에 있는 [우석대]는 1979년도에 [우석여대]로 출발한 학교라, 이명박이 입학했던 [우석대]와는 다른 곳이랍니다.
[출처] 타블로를 옹호했던 이명박학력의 진실.|작성자 뽕녀엄마
첫댓글 사연이 참 많은 분입니다.
어쨌든 학력위조가 아니라 자동적으로 우석대가 고대가 된 케이스군요.
선악 구분이 다소 애매한 이런 문제까지 들추는 것은 무슨 대단한 정의를 구현하려는 목적보다는 좀 애매한 허물까지 파헤쳐 조롱하려는 목적으로 비치거나 정말 반대해야 할 정책에 반대하는 다른 정당한 발언들까지 감정적 공격으로 비치게 만들 우려가 있습니다. 타블로 일도 그렇고 시간과 정열을 쏟아 남의 사적인 허물을 파헤치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는 분들은 좀 천적 성향과는 거리가 있는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