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였는데, 승지 채제공(蔡濟恭), 교리 홍명한(洪名漢) 등이 간하니, 중지하였다. 임금이 일어나 소차(小次)로 들어가 취해 드러누웠는데 가 다하도록 취타는 오히려 그치지 않았었다. 날이 샐 무렵에야 임금이 비로소 소차를 나와 취타를 그치게 하고, 갑주를 입은 채 환궁하였다.
살벌한 사화의 풍경이 그려집니다.
그런데 이후의 사태 수습과정에서 사도세자의 처신이 바로 세자의 운명을 결정하게 된다고 보여지는데
왕과 노론의 피바람을 잠재우려는 사도세자의 필사적인 저항의 흔적을 조선왕조 실록에서 볼수가 있습니다.
영조 83권, 31년(1755 을해 / 청 건륭(乾隆) 20년) 3월 4일(정축) 1번째기사
정언 송문재가 유봉휘·조태구 등의 노륙을 청했으나 왕세자가 불허하다
(유봉휘:소론 왕세제 책봉시 문제제기 조태구:소론 영수로 왕세제대리청정문제 반대)
영조 83권, 31년(1755 을해 / 청 건륭(乾隆) 20년) 3월 25일(무술) 6번째기사
사간 박치문이 상서하여 연좌된 죄인들을 친멸을 청했으나 왕세자가 불허하다
영조 84권, 31년(1755 을해 / 청 건륭(乾隆) 20년) 4월 2일(을사) 5번째기사
지평 홍양한이 상서하여 권두령 등의 국문을 청했으나 왕세자가 불허하다
영조 84권, 31년(1755 을해 / 청 건륭(乾隆) 20년) 4월 4일(정미) 3번째기사
사헌부에서 기언표·이양종 등의 엄중 국문을 청했으나 왕세자가 불허하다
(기언표:나주벽서 연루인물)
영조 84권, 31년(1755 을해 / 청 건륭(乾隆) 20년) 4월 9일(임자) 1번째기사
사헌부에서 박태신·김정 등의 노적을 청했으나 왕세자가 불허하다
영조 84권, 31년(1755 을해 / 청 건륭(乾隆) 20년) 4월 29일(임신) 6번째기사
김상로가 안복준의 처분을 청했으나 왕세자가 불허하다
영조 85권, 31년(1755 을해 / 청 건륭(乾隆) 20년) 6월 10일(임자) 1번째기사
심발이 신치운 등의 역률 시행, 조태억의 직첩 환수를 청했으나 왕세자가 불허하다
영조 85권, 31년(1755 을해 / 청 건륭(乾隆) 20년) 6월 10일(임자) 2번째기사
서유량이 상서하여 윤광소와 임상원의 찬축을 청했으나 왕세자가 불허하다
영조 85권, 31년(1755 을해 / 청 건륭(乾隆) 20년) 6월 11일(계축) 1번째기사
헌납 남학종이 상서하여 심발의 찬축을 청했으나 왕세자가 불허하다
영조 85권, 31년(1755 을해 / 청 건륭(乾隆) 20년) 7월 7일(기묘) 1번째기사
유생 장진욱 등이 상서하여 이광좌의 노적을 청했으나 왕세자가 불허하다
영조 86권, 31년(1755 을해 / 청 건륭(乾隆) 20년) 11월 17일(병술) 3번째기사
황해도 유생 이현백 등이 송시열·송준길 등의 종사를 청했으나 불허하다
영조 87권, 32년(1756 병자 / 청 건륭(乾隆) 21년) 1월 17일(을유) 2번째기사
관학 유생 유한사 등이 송시열·송준길의 종사를 청했으나 불허하다
송시열은 송자라 불리며 효종 현종 숙종 3대에 걸쳐 부침을 거듭하며 막후의 실력자로
군림했으나 숙종에 의해 사사된 노론의 거두임에도 이러한 노론의 입장을 거부한 사도세자는
과연 어떤 정치적 견해를 가진것일까?????
단지 정신병자???(다음글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