士林文化 신문 제7호에 게재된 내용
추의군(秋義軍) 의병장 추연(秋淵) 우성전(禹性傳) 선생
우성전(禹性傳, 1542~1593)은 중종 37년(1542) 陰 8월 16일 한성부(漢城府) 낙선방(樂善坊)에서
우언겸(禹彦謙)과 연안김씨 부인(현감 金碩鱗의 딸)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위로는 맏형인
심전(心傳), 밑으로는 동생 도전(道傳, 字 景中, 사헌부 감찰)이 있었다. 그의 字는 경선(景中),
호는추연(秋淵)·연암(淵庵)이라고 하였다.
우성전의 본관은 단양(丹陽)으로, 시조는 고려 현종 때 정조호장(正朝戶長)을 지낸 우현(禹玄)이며
고려 말의 애국적인 무장으로 경상도원수(元帥)와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판삼사사
(判三司事)를 거쳐 조선 태종 초에 검교좌정승(檢校左政丞)을 지낸 우인열(禹仁烈, 1337~1403)을
분파시조로 하는 정평공파(靖平公波)의 17세손이 된다. 단양 우씨는 앞의 정평공 우인열 이외에
고려조에서 성균좨주(成均祭主)를 지냈고 한국 성리학의 개척자로서 경사(經史)와 주역(周易)에
통달했던 역동(易東) 우탁(禹倬:1263~1342), 우왕~공양왕 때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좌시중(左侍中)·
판삼사사를 지낸 단양부원군(丹陽府院君) 우현보(禹玄寶,1333~1400) 등 역사적 인물을 배출한 명문의
하나이다.
우성전의 직계 선조가 세거(世居)해 오고 그의 묘가 있는 수원부 호매절면(好梅折面) 외촌(현 화성시
매송면 어천리)은 바로 그의 선산이 있는 본향(本鄕)으로서, 추연의 증조가 되는 우수(禹樹,14세손:
延安府使 역임) 대에 이르러 그동안 세거해 오던 파주군 내포(內浦) 2리에서 이곳으로 이사온 것이
시초라고 한다. 추연의 선대는 대대로 학문을 숭상하고 관도(官途)에 나아가 비교적 현달한 가문이었다.
그는 우언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장성해서는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으로 대사성·대사간 등을
역임하며 동인(東人)의 영수로 명성이 높던 초당(草堂) 허엽(許曄,1517~1580)의 둘째 딸 허씨부인과
혼인하였다.
추연은 청소년시절부터 천자영매(天資英邁)하여 학문에 힘쓴 결과 20세가 되던 1561년(명종 16)에
진사시(進士試)에 입격하였고, 1564년에는 성균관 유생들을 거느리고 당시 명종의 모후 문정왕후
(文定王后) 윤씨의 비호 아래 정치에 깊이 개입하던 승 보우(普雨)를 참수할 것을 상소하여 사림
(士林)들의 주목을 받았다.
추연이 진사시에 합격한 이듬해인 21세 때 당대 최고의 석학 퇴계(李滉,1501~1570)의 문하에서 유학
(遊學)하여 성리학을 배우기 위해 예안(禮安, 지금의 안동)에 본격적으로 깊이 있게 연찬(硏鑽)하기
시작하였다.
추연이 1562년 퇴계의 문하에 유학할 때 동문·동갑의 유성룡(柳成龍,1542~1607, 호 西厓)를 만났는데,
그와는 뜻이 맞는 평생 친구이자 정치적 동지가 되었다.
서애는 “내가 용궁(龍宮)에 내려가서 외삼촌의 상례를 치를 때 경선(景善)을 만났으니, 수회촌(水回村)
여관방에서였다.
다음해에 경선이 한성부 낙선방의 집으로 돌아갔으니, 나와 함께 같은 곳에서 독서한 지가 그의 반년쯤
되었는데, 이때부터 우정이 돈독하였다.”고 추연과의 각별한 인연을 회고하였다. 고우(故友)에 대한
감회어린 서애의 회고로 미루어 두 사람이 도산서당에 머문 것은 약 6개월 정도의 기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도산서당에서 함께 수업한 동문 김성일(金誠一,1538~1594, 호 鶴峯)이 퇴계에게 “우성전과 유성룡이
이르기를 ‘주서(朱書)는 ’심경(心經)처럼 중요치 않다고 하니, 그 말이 어떠합니까?” 하였다.
24세가 되던 1565년(명종 19, 乙丑) 성균관에 재학 중이던 추연이 낙향한 퇴계에게 기준(奇遵,1492
~1521)의 저술 ‘덕양유고(德陽遺藁)’를 구해 보내드리면서 자신의 근황을 피력하자, 퇴계는 제자의
배려에 대해 감사의 마음과 함께 성균관생들이 요승 보우의 죄를 상소한 소식을 듣고, 당시 정국과
제자가 관련된 일에 대하여 우려의 뜻을 간략하게 피력하였다. 이로부터 몇 달 후인 이해 7월 추연은
스승의 역학(易學) 강론을 직접 듣기 위해 다시 도산서당을 찾았다.
이번 방문은 동문인 김성일과 함께 독서를 하면서 스승으로부터 직접 지도를 받는 기회였던 만큼 특히
학구열이 남다르던 그의 기대 또한 컸다.
65세의 퇴계가 맏손자 이안도(李安道, 호 蒙齋 당시 25세)에게 보낸 이해 8월 1일자와 8월 3일자,
그리고 11월 하순의 서간 ‘안도에게 보낸다(安道寄書)’에 의하면, 이때 추연은 학봉과 함께 계재에
머무면서 스승의 지도하에 정지운(鄭之雲,1509~1561) 소장의 ‘역학계몽(易學啓蒙’2책을 강독하는데
깊이 잠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추연 우성전은 학봉 김성일· 서애 유성룡과 함께 퇴계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스승의 기대를 모운 3대
수제자의 한사람이었다.
추연은 27세가 되던 1568년(선조 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가 예문관
검열(檢閱)·봉교(奉敎), 홍문관 정자(正字)·수찬(修撰)등을 역임하였다.
35세가 되던 해(선조9)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수원현감(水原縣監)으로 나가 재임하는 동안 선정을
베풀어 그가 이임할 때 당시 주민들이 지방관으로서 추연의 업적을 칭송하는 거사비(去思碑)를 세웠다.
정계에서 실세한 추연은 선산이 있는 수원부 호매절면 외촌에 퇴거하여 학문에 전념하던 중 1592년
(선조 25) 4월 임진란이 일어났다. 왜란의 발발로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게 되자 그는 자신의
향촌이자 한 때 현감으로 재임한 바 있는 연고지 수원을 중심으로 수 천 명의 의병(義兵)을을 모집,
대규모 의병부대인 추의군(秋義軍)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나주에서 북상한 의병장 김천일
(金千鎰) 휘하의 의병부대와 함께 연합작전을 펴면서 강화에 들어가 도처에서 활약하여 크게 전공을
세우게 된다.
추연이 국가의 위기를 구하고자 분연히 몸을 던져 대규모 의병부대 추의군을 결성, 왜적과 항전하여
큰 전과를 거두자 그는 마침내 다시 서용(敍用)되어 1592년 7월에 인천도호부사(仁川都護府使),
9월에 봉상시정(奉常寺正)에 이어 포상과 함께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에 특진 되었다.
추연이 임란 직후 경기지역에서 의병을 초모(招募)하여 결진한 추의군의 군세는 왜란 중 중부지역에서
활동한 가장 규모가 크고 대표적인 의병부대였다.
당시 활약한 추의군의 군세와 활동에 대해서 ‘선조실록’ 선조 25년 10월 기사에는 ... 임금이 김천일의
군사는 어떠한가 하고 묻자, 박충간(朴忠侃)이 대답하기를, “천일의 군사는 태반이 유생이라서 누차
패하여 유명무실했하오나, 우성전이 거느린 군사 추의군은 매우 출중합니다.”라는 기록과 전승기에는
3천여명의 대규모 전투병력을 헤아린 것으로 미루어, 추의군은 다른 의병부대보다는 그 조직과 전력이
비교적 우세하고 왜군에 대한 여러 전투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음은 특기할 점이다. 권율의 관군과
김천일의 의병부대가 수원 독성산성에서 왜장 우끼다(宇喜多秀家)부대의 공격을 받자 관군과의 연계
(連繫)작전으로 전승을 거두었을 때, 우성전의 추의군은 의병을 힘써 지원했던 것으로 추측되며, 또
삼봉면 저수지 남쪽에 위치한 ‘삼천병마골(三千兵馬洞)’은 임란 당시 삼천병마가 매복해 있었다는
전설적인 전승지(戰勝地)로 알려져 있는데 이 전투에도 추의군이 참여하여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추연의 추의군은 왜군이 평양으로부터 폐퇴하자 한강에서 이를 맞아 크게 무찔렀고, 그 외에도
퇴각하는 왜군을 멀리 경상도 의령까지 추격하면서 여러차례 큰 전공(戰功)을 세웠다.
그러나 돌아오던 도중 추연은 마침내 과로로 병을 얻어 선조 26년(1593) 7월 19일 향년 52세를 일기로
부평(富平)의 노상에서 별세, 당쟁의 와중에서 기복과 파란으로 점철된 불우했던 그의 삶을 마감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지 7년 후인 1600년(선조 33) 5월 친우 서애 유성룡은 생전에 보여준 추연의 고고한
인품과 절조, 그리고 29대 초 이후 퇴계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관직생활을 함께 하면서 나눈 각별하고도
도타운 우정을 “나와 경선은 동년으로 토계선생의 문하에서 유학할 때 뜻이 맞는 친구가 되었다. ·····
대각(臺閣)에 있을 때엔 언론과 처사가 비롯 모의하지 않아도 거의 부합되었고, 세로(世路)에 막힘이
많아 부침(浮沈)은 서로 같지 않았지만, 평소 좋은 뜻은 하루도 처음과 다르지 않았다. 경선은 눈이 높아
세간의 사람들을 인정해 줌이 적었고····· 죽은 후에도 오히려 삭탈관직의 화까지 입었으니 슬프다.
“ 서애의 비감어린 회고다.
임진란 의병활동에 큰 공을 세우고도 현재 그 전공을 세인이 잘 모르고 있는 의병도대장 송암 김면
(고령) 선생과 추의군 추연 우성전 선생은 임진년 7주갑을 맞아 온 국민이 되새겨봐야 할 역사적인
의병장이라 생각된다.
南齋 김재호
秋淵 先生 諡狀







첫댓글 감사합니다. 좋은자료, 잘 활용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탁할아버지 생몰년은 1262-1342년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는 책들이 있는데 바르게 고쳐주세요~
안타갑습니다 항일 극일 인사는 이렇고 친일 인사는 떵떵거리고 잘살고 뭐가 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