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분노해야 할 것은 잊어버린 것은 아닐지
내가 독일에서 유학할 때 이야기이다. 유학 당시 나의 신학적 입장은 민중신학, 해방신학에 가까웠다. 나는 박사 논문을 쓸 때, 독일어 문장의 수정을 위해서 은퇴하신 독일인 목사님을 파트너로 만나고 있었다. 준비된 논문의 초안을 가지고 함께 토론하던 어느 날, 내가 “목사님은 너무 보수적입니다”라고 다소 냉소적으로 말했다.
그때까지 조곤조곤 말씀하시던 그분의 언성이 약간 높아지면서 그분은 나의 표현에 대해서 두 가지를 문제 제기했다. 첫째 보수적인 것이 무엇이 문제인가였고, 둘째 보수적이라는 틀에 자신을 가두지 말라는 것이었다. 나의 보수와 진보에 대한 기존의 편견이 산산조각으로 깨지는 순간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보수와 진보에 대해 보다 객관적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 보수가 강조하는 자유도, 진보가 강조하는 평등도, 인간 삶의 공동체에 모두 요청되는 삶의 중요한 가치라는 것이다. 좋은 가치를 지키자는 보수도, 나쁜 제도를 개혁하자는 진보도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진보라서 보수를 폄하(貶下)하거나 보수라서 진보를 배제하기보다는 정의와 평화, 인권과 생명을 위해서 보수와 진보가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진영 논리가 참 강하다. 자신과 다른 진영일 때 용납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쌍둥이라도 동일한 사람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인격인 것처럼, 한 사람 안에 각각의 우주가 있으니, 백 사람이 모이면 100개의 진영이 존재하는 셈이다. 우리가 우주를 담고 있는 다른 진영을 존중하지 않으면, 민주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없다. 우리의 문제는 진영이 아니라 부정과 부패, 불의와 불법, 불공정과 내로남불이 아닌가.
진영 논리와 함께 우리 사회에 편만한 것이 있다면, 우꼴(우파 꼴통)과 좌빨(좌파 빨갱이) 논리이다. 상대를 일순간에 무너뜨리려는 우꼴좌빨의 논리는 건강한 토론에 이를 수 없다. 여기에는 전부를 취하거나 전부를 버리는 모 아니면 도만 있다. 우리 정치가 건강한 타협에 이르지 못하고, 난투적인 몸싸움으로 이어지는 것 역시 상대를 부정하고 자기만 주장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념 대립과 전쟁 중의 분단 상황에서 빨갱이 논리는 우리 사회에서 전가의 보도처럼 먹혀들었다. 일단 빨갱이로 규정되기만 하면, 옴짝달싹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진정한 진보가 존재하지 못하고, 중도 보수와 극우, 두 축만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동안의 우리 사회를 돌아보면, 민주 진영의 대통령들 가운데서 빨갱이라 규정되지 않은 분이 없었다. 특히 대통령 선거 전후해서 흑색선전하거나 집권한 민주 정부를 비난하려는 세력은 빨갱이 논리로 상대를 악마화했다. 그런데 6.15 선언과 함께 금강산 관광을 실행하며 한반도의 평화를 만들고자 했던 김대중 대통령이 빨갱이였나. 10.4 선언을 통해 개성공단을 운영하며 남북의 상호 공존과 상호 번영을 도모하고자 했던 노무현 대통령이 빨갱이였나. 9.19 군사 합의로 전쟁의 공포를 해소하고 폭넓은 교류를 하고자 했던 문재인 대통령이 빨갱이였나. 그들이 정말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에게 대한민국을 통째로 바치려고 했던가.
오히려 내란 수괴 윤석열이야말로 북쪽과 내통해서 전쟁조차 일으키려 하지 않았던가. 아니 김대중을 빨갱이라고 했던 박정희야말로 진짜 남로당 출신이 아니었나. 아직도 빨갱이 논리가 먹혀든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시대착오적이다. 우리 민주 국민의 수준을 우습게 보는 것이다. 세계 13위의 경제력과 세계 6위의 군사력을 지닌 대한민국 국민 가운데서 어느 누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민처럼 살기를 원하고 있는가.
인간은 살아 있는 생명체이다. 끊임없이 성장하고 쇠퇴한다. 변화가 불가피한 존재이다. 변화하지 않는 것은 죽은 것이다. 정당 역시 유기체적 존재이다. 시대 상황과 국민의 요구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다. 시대 상황과 국민의 요구를 무시하거나 거부하는 정당은 존재 이유가 없다. 아니 국민의 선택에서 배제되어 도태하거나 소멸할 것이 분명하다. 이제 우리는 보수냐 진보냐, 우파냐 좌파냐를 묻기보다는 자유와 평등과 연대의 민주적 가치를 존중하고 있느냐, 국민의 생명과 국가의 주권을 지켜내고 있느냐, 정의와 평화와 인권을 추구하고 있느냐를 물어야 할 것이다.
첫댓글 둘 다 중요한 가치일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