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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 (35)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낙동강 종주] * 제14구간 (대구 강정보→현풍) ① [강정·고령보→ 사문진]
2020년 10월 31일 (토요일) [독보 27km]▶ 백파
* [대구 T,O,P 호텔]→ 성서산단역→ 대실역→ (택시)→ 강정보(도강)→ 고령 다산면 강둑길→ (대가야역사문화공원 길)→ 다산문화체육공원→ 사문진교(도강)→ 달성군 화원유원지(사문진 나루터)→ 강둑길→ 화원 수변야구장→ 강둑길→ 강변 팔각정 쉼터→ 길고 긴 억새꽃 수변길→ (광주-대구고속도로) 교각→ 고령교→ 달성 강변야구장→ 성산대교→ 달성보(정복순·류응하 마중)→ 두 친구의 환대(테크노폴리스 식당)→ 현풍 홍시호텔
* [북대구→ 달성군 화원읍 성산리] ← ‘금호강’ 합류(영천, 경산 경유 - 대구 북동방면)
오늘의 낙동강 종주 (1) ; 강정·고령보→ 고령 다산길→ 달성 사문진
오늘은 낙동강 종주 제14구간, 대구 ‘강정·고령보’에서 출발하여 고령군 다산면 제방 길을 걸어서, 사문진교를 건너 대구 달성군 화원유원지, 유서 깊은 ‘사문진나루터’를 탐방하고, 낙동강 좌안[東岸]으로 이어진 바이크로드를 따라 달성보까지 종주하는 코스이다. 그리고 달성군 현풍읍 숙소에 들 예정이다.
오전 9시 30분, 대구의 강정보에서 혼자서 트레킹에 들어갔다. 어제 왜관-강정보 구간을 함께 걸었던 이상배 대장은 오늘 특강이 예정된 양산으로 가기 위해 아침 대구 숙소에서 동대구역으로 갔다. 나는 숙소에서 대구지하철 2호선을 타고 대실역까지 와서 택시를 타고 강정·고령보이 이르렀다. 강정·고령보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죽곡리와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곽촌리 사이에 건설된 낙동강 보(洑)이자 교량이다. 4대강 정비 사업으로 건설된 전국의 16개 보 가운데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 강정·고령보는 상류의 안동댐에서 부산 하구둑까지의 낙동강 바이크로드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다.
[강정·고령보] — 디아크(The ARC)
강정·고령보에는 가까운 곳에 4대강 물[江] 문화관인 ‘디아크(The ARC)’가 있다. 디아크(The ARC)는 하늘, 지구와 문화에 대한 우아하고 기하학적인 접근과 강(江) 문화의 모든 것을 담는 건축물과 예술품으로서의 Architecture of River Culture 및 Artistry of River Culture를 의미한다. 디아크(The ARC)는 물이라는 공통적 주제 아래 관람객과 진화된 복합 연출공간이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완성되도록 구성되었다. 모던하면서도 심플한 디자인으로 구성된 내부 인터레어 컨셉과 어우러지는 지하1층의 전시공간과 아트 갤러리, 1,2층에 마련된 물을 테마로 한 거대한 서클영상 극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구(大邱)
대구는 북쪽으로는 팔공산 산맥과 남쪽으로는 비슬산 산맥으로 둘러싸인 평야지대이다. 그 유명한 분지 지형으로 시가지의 남과 북에 높은 산들이 가로막고 있다. 그래서 시가지가 북쪽 칠곡 개발 이후, 동과 서로만 계속 뻗어나가다가 현재는 더 이상 뻗어갈 데가 없는 상황이다. 동으론 경산시와 부딪히고 서로는 낙동강이 막아서 이제 남은 곳이라곤 저 멀리 남서쪽의 달성군 지역 정도다. 다만 현재 이전을 추진하고 있는 대구 공군기지가 이전한다면 동구 쪽에 상당한 개발지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유명한 수성구 역시 1970년대 이후 시가지가 동쪽으로 확장되다가 발전한 지역이며 동대구역 또한 1960년대 말 대구역의 역할을 분담키 위해 당시에 시가지 동쪽에 만든 철도역이다. 그런데 현재는 동대구역이 대구역보다 훨씬 크다.
국가 하천인 낙동강과 금호강이 대구 외곽을 흐르고 있으며, 달성군 가창면에서 발원한 신천이 대구 시가지 정중앙을 흘러 금호강과 합류한다. 또한, 신천 외에도 팔거천, 동화천, 달서천, 범어천, 매호천, 욱수천, 율하천, 진천천, 대명천 등의 도심 하천이 있다. 다만, 금호강~와룡산~앞산~두리봉~형봉·제봉으로 둘러싸인 본 시가지 내 도심 하천은 대부분 복개되었고, 신천만이 도심을 온전히 관통한다. 낙동강과 금호강의 합류 지점에 강정고령보·디아크가 금호강 하중도에 대규모 꽃밭이 조성되고, 4대강 사업의 일환으로 자전거도로가 생기면서 여기를 찾는 시민들이 늘고 있다. 도심을 가로지르는 신천에는 오래 전부터 수변공간이 활성화되어 시민들의 휴식처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팔거천을 비롯한 다른 도심하천에도 산책로가 조성되는 등 새로운 도심 속 수변공원이 개발되고 있다.
[강정·고령보] — ‘우륵교’
오늘은 시월의 마지막 날, 하늘은 더없이 푸르고 맑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서 눈부신 가을 햇살이 내리고 있다. 청신한 공기가 가슴에 스며든다. 하늘을 지붕 삼아 대지의 물길을 따라 걷는다. 참으로 신선한 아침이다. 이제 대구에서 고령으로 넘어가는 강정보(江亭洑) 위의 교량을 걷는다. ‘우륵교(于勒橋)’라고 이름 붙여진 보(洑) 위의 교량은 2차로의 도로지만 자동차 통행을 금하고 있다. 바이크로드와 인도로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강안에서 바라보는 강정보와 실제 다리 위에서 느끼는 보의 규모는 크고 완강했다. 전망대를 지탱하는 기울어진 주탑(柱塔)이 불쑥 멋대가리가 없지만, 전망대를 지탱하는 와이어가 거문고의 현을 연상하게 한다. 보 위에서 바라보는 상류와 하류의 강 풍경은 거대한 호수(湖水), 거리낌 없이 열린 풍경이다.
고령(高靈)
보(洑)를 건너오면,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이다. 옛날로 말하자면 신라(新羅)에서 가야(伽倻) 땅으로 넘어온 것이다. 고령군은 서쪽으로 미숭산 남서쪽에 만대산이 위치하여 경상남도와 도계를 이루고 동쪽은 낙동강이 관내 4개면을 우회하면서 달성군과 경계하여 흐르고 북은 의봉산과 가야산 줄기가 연결되어 성주군과 접하고 있다. 가야산 계곡을 상류로하는 회천과 소가천이 각각 운수, 덕곡면을 통과하여 대가야 읍 본관리에서 합류하고, 경남 가야산에서 쌍림면을 통과한 안림천과는 대가야읍 동남 하부지역에서 다시 합류, 낙동강으로 이어지고 있다.
고령은 경상북도의 최남서단에 위치하는 군으로, 옛날 가야연맹 시절에는 대가야(大伽倻)의 중심지였다. 인구는 2020년 2월 기준으로 32,220명이다. 동쪽으로는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대구광역시 달성군, 달서구와 접하고 서쪽으로는 경상남도 합천군, 남쪽으로는 경상남도 합천군, 창녕군과 접하며 북쪽으로 성주군과 접한다. 일명 대가야로 불리는 옛 반파국(伴跛國)의 중심지로서 16대 520년 간을 계승했다. 그러다가 신라 진흥왕 때 신라에 병합되었고 대가야군(大伽倻郡)이 되었다. 757년(경덕왕 16) 때 전국 지명 한화정책에 따라 현대에 사용하는 이름인 ‘고령군’으로 바꿨다. …2015년 4월 2일 고령읍의 명칭이 대가야읍으로 변경되었다. 지역을 통하는 철로는 없지만, 광주-대구 고속도로가 고령군 동서간을 관통(19.8Km)하고 중부내륙고속도로가 남북으로 이곳을 지나간다.
가야(伽倻)
기원 전·후부터 562년까지 낙동강 하류지역에 있던 여러 국가들의 연맹 왕국 또는 그 지역에 위치한 각 국가들의 명칭이다. 가야에 관한 역사책으로는 고려 문종 대 금관주지사(金官州知事:김해지역에 파견된 지방관)를 지낸 문인이 저술한 『가락국기』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 전하는 것은 이를 발췌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가락국기(駕洛國記)」뿐이다. 이 기록은 내용이 워낙 부족하고, 간략하기 때문에 가야사를 복원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아라가야(阿羅伽倻, 함안), 고령가야(高寧伽倻, 함창), 대가야(大伽倻, 고령), 성산가야(星山伽倻, 성주), 소가야(小伽倻, 고성), 금관가야(金官伽倻, 김해), 비화가야(非火伽倻, 창녕) 등의 명칭이 나오며, 특히 『삼국유사』기록은 대략 3세기 중반 이후에 변한지역의 12개국 가운데 일부 국가들이 가야연맹체를 형성하면서 가야라는 명칭을 사용하였음을 반영한 것이다.
가야(伽倻)에서는 낙동강 하류 지역의 기름진 평야를 바탕으로 벼농사가 발달했고, 품질 좋은 철을 생산해 중국과 왜(일본) 등지에 수출하기도 했다. 발달한 문물을 왜에 전해주었는가 하면, 바다를 주름잡는 해상 강국이 되어 신라를 위협하기도 했다.
하지만 신라와 백제가 세력을 넓히기 시작하자, 가야는 차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가야는 통일 국가로 성장하지 못한 채 여전히 작은 나라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힘이 약했던 것이다. 게다가 가야는 5세기에 백제, 왜와 함께 신라를 공격했다가,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은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아 세력이 크게 약해졌다. 결국 562년에 신라에 흡수되어 가야국은 한반도에서 사라졌다.
가야(伽倻)는 통일 왕국을 세우지 못한 채 각각 신라로 흡수되었다. 먼저 흡수된 곳은 여섯 가야 가운데 가장 힘이 강했던 금관가야(金官伽倻)였다. 532년에 금관가야가 신라와의 전쟁에서 패해 멸망한 뒤 차례차례 신라에 합쳐졌으며, 562년에 마지막으로 대가야(大伽倻)가 흡수되면서 가야는 완전히 사라졌다. 신라는 가야 유민들을 백성으로 받아들이고 왕족은 귀족으로 대접했다. 삼국 통일을 하는 데 큰 공을 세운 김유신도 금관가야 김수로왕의 12대손이며, 가야금을 전한 우륵도 가야 출신이었다.
* [네이버 지식백과] 가야-고대에 낙동강 일대에 있었던 6개 나라의 연맹 왕국 (한국사 사전 3 - 나라와 민족·기구와 단체·역사 인물, 2015. 2. 10., 김한종, 이성호, 문여경, 송인영, 이희근, 최혜경, 박승범)
다산제(堤)), 대가야 역사문화 공원 길
고령군은 대가야국의 중심이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매끄럽게 다듬은 자연석 빗돌에 “대가야국 역사와 문화가 살아서 숨쉬는 고령에 오심을 환영합니다” … 그리고 강둑을 따라 남쪽으로 뻗은 직선의 바이크로드가 이어진다. 고령군 다산면 (곽촌리—호촌리) 제방(堤防) 길이다. 그냥 스치는 길이 아니라 ‘대가야 역사문화공원’ [관광안내판]으로 꾸며놓았다. 제방의 길목의 오른 쪽 가장자리에 작은 빗돌이나 조형물을 통해서 가야의 역사, 유물, 명승 등을 소개하기도 하고, 또 건국신화. 고분 등 역사를 소재로 한 해설이나 조각상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특히 말을 타고 있는 장군의 위용을 형상화한 실물대의 기마상(騎馬像)은 생동감이 넘쳐흘렀다.
그리고 곳곳에 정감이 넘치는 현대시를 새긴 시판도 여러 편 세워 놓았다. 자전거를 타고 신나게 달리는 바이커들에게는 주마간산(走馬看山)일 뿐이겠지만 천지자연을 벗 삼아 걷는 낙동강 길손에게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작품들이었다. 걸음이 더디지만 처처에 발걸음을 멈추고 눈을 맞추며 유서 깊은 역사와 문화를 교감할 수 있었다. 밝은 햇살, 신선한 공기가 내리는 낙동강 연안은 다채로운 문화의 거리가 되었다. 더구나 오늘 시월의 마지막 날, 낙동강 나그네에게 마음에 감겨오는 시(詩)가 있다.
푸르른 날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 서정주
오늘 같이 푸르른 날, 멀고 먼 낙동강 물길, 그것도 가을 햇살이 고운 시월의 마지막 날이라는 아쉬움 속에서 무언가 가슴을 감겨드는 애틋함이 있다. 이 하늘 아래에서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리워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인가. 생각해 보면 세상 어느 것도 영원한 것은 없다. 무한한 시공 속에서 유한한 존재가 인간이다. 사실 너와 나, 우리는 모두 항상 죽음을 전제로 살아간다. 그래서 푸른 하늘 맑은 햇살이 내리는 지금 이 시간이 참으로 경이롭고 소중하다는 생각이 든다.
단순한 나그네의 감상(感想)이 아니다. 사랑하는 가족에 대한 애틋함, 항상 마음 든든하게 느껴지는 벗들에 대한 믿음, 같은 하늘을 공유하면서 내 인생과 동행하는 모든 분들에 대한 소중함, 한 시대 우리의 삶을 존재하게 하는 나라, 대한민국에 대한 걱정까지 … 오늘 같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자전거 라이딩, 그 청신한 바람을 가르는 …
오늘이 주말이어서 그런지 강변의 제방 길에는 라이딩하는 바이커들이 많다. 4대강 정비 사업 이후, 국토종주, 낙동강 종주 자전거 길이 만들어지면서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요즘 코로나 염병이 기승을 부리고 있는 상황에서 자전거 인구가 더욱 많이 늘었다고 한다. 바람을 가르고 달리는 그 속도감과 신선함이 라이딩[輪발]의 매력이다.
길은 직선으로 아득하게 뻗어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직선의 제방 길이다. 숙명(宿命)처럼 걷는 것이 낙동강 나그네의 과업이다. 맑은 하늘 아래 낙동강의 물길을 따라 것는 참으로 은혜로운 시간이다. 고개를 돌려보니 지나온 강정보가 멀어져 가는데, 강 건너 편에는 독특한 형상의 디아크 건물 옆으로, 낙동강에 유입되는 금호강의 지류가 시야에 들어오기도 했다. 실제 금호강 본류는 이보다 아래쪽에 있는 달성구 화원, 사문진나루터 위쪽에서 낙동강에 유입된다.
대구 금호강(琴湖江)
금호강(琴湖江)은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죽장면 상옥리의 가사령(佳士嶺, 500m)과 기북면 성법령(省法嶺, 709m)에서 발원하여 대구광역시 달서구 성서 및 달성군 다사읍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강이다. 총연장 116km 이며 유역면적은 2,087.9㎢에 이른다. 금호강 유역은 낙동강 전체 유역면적의 약 9.2% 정도를 차지하며 동서로 걸친 장방형 형태를 이루고 있다.
금호강 수계(水系)는 북쪽으로 팔공산(八公山, 1,192m)·화산·보현산(普賢山, 1,124m)·문봉산·구암산을 분수령으로 군위로 흐르는 위천 유역과 경계를 이루며, 남으로는 삼성산·용각산·대왕산·구룡산을 분수령으로 밀양강 수계와, 그리고 동으로는 기계천 수계와 경계 지어진다.
금호강(琴湖江)은 포항시 북구 죽장면(竹長面) 북부에서 발원한 ‘자호천’이 영천호를 경유, 남서쪽으로 흐르다가 ‘고촌천(古村川)’과 ‘신령천(←고현천)’이 영천시에서 합류하고 경산시 하양에서 ‘오목천’과 ‘남천’이 합류하여, 대구 북쪽 팔공산에서 발원한 ‘동화천’이 우안으로 합류하고 다시 좌안에서 ‘신천’을 합하는 등 여러 지류들을 합쳐져서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구라리에서 낙동강 본류로 흘러든다. 하도(河道)의 평균경사는 1:105이다. 유역에 동서로 긴 띠 모양의 금호평야가 펼쳐졌는데, 낙동강 연안에 남북으로 펼쳐진 평야와 이어져서 ‘丁’자형을 이루는 대구분지의 일부가 된다.
대구·경산·영천의 금호강 유역은 유명한 대구사과 산지의 핵심부를 이루며, 대구선이 금호강과 병행하여 뻗어 있고, 경부고속도로가 금호평야를 통과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대구읍지』에 "금호는 … 발원하는 곳이 두 곳이다. 하나는 영천(신령) 보현산(普賢山, 1,124m)이고, 다른 하나는 모자산(母子山)에서 나온다. 영천에 이르러 합쳐지므로 쌍계(雙溪)라고도 한다. 서쪽으로 흘러 사문진(沙門津, 낙동강)으로 들어간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금호강의 '금(琴)'은 금호강 주변의 갈대들이 바람에 흔들리면서 나는 소리가 마치 가야금을 뜯을 때 나는 소리와 같다는 의미이다. '호(湖)'는 금호강의 지세가 낮고 평평하여 이곳을 흐르는 금호강이 마치 호수처럼 잔잔하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금호(琴湖)라는 지명이 생겨났다.
금호강의 상류와 중류에는 경산시, 영천시 등의 소도시가 위치하고, 하류 부분에는 대도시인 대구광역시가 위치해 있다. 금호강 유역에 발달한 금호평야는 경상북도 남부에서 가장 넓은 평지로 대구·영천·경산 등의 대도시가 발달하여 있다. 최근 금호강은 포항제철의 용수공급을 위해 1980년에 영천댐이 조성되면서 금호강의 물줄기가 약해지고 대구 주변지역의 인구증가에 따른 도시화 현상으로 오염이 가속화되고 있어 지역 내의 중요한 환경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영천 정몽주 생가와 임고서원
금호강의 상류에는 경상북도 영천(永川)이 있다. 영천 자하천의 중류, 영천댐과 영천시 사이 임고면에는 포은 정몽주의 생가(生家)와 임고서원(임고면)이 있다. 정몽주 선생이 태어난 곳은 경상북도 영천군 임고면, 금호강의 지류인 임고천에 있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정몽주 선생의 탄생지가 세인의 머리에서 잊혀졌고 한때는 영천과 포항에서 서로 선생의 탄생지를 주장하였으나, 1530년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과 1580년 간행된 『포은문집』등에서 ‘포은 정몽주 선생은 영천 동쪽 우항리에서 태어났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정몽주의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오포에 있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정몽주(1337(충숙왕 복위 6)~1392(공양왕 4)는 고려 충숙왕 때 뛰어난 외교가이자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로 평가받은 고려 말기의 충신이다. 자는 달가, 호는 포은(圃隱)이며 영일 정씨이다. 1367년 성균관이 중영되면서 성균박사에 임명돼 <주자집주(朱子集註)>를 유창하게 강론, 당시 유종으로 추앙받던 이색(李穡)으로부터 우리나라 성리학(性理學)의 시조로 평가받았다. 얼마 후 왜구가 자주 내침해 피해가 심해지고 화친을 도모하기 위해 보내진 나흥유(羅興儒)가 투옥됐다 돌아오자, 보빙사로 일본에 보내져 국교의 이해관계를 잘 설명해 일을 무사히 마치고 고려인 포로 수백 명을 구해 돌아왔다.
정몽주는 조준(趙浚), 남은(南誾), 정도전(鄭道傳) 등이 이성계를 새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눈치채고 이들을 제거하고자 했다. 그러던 중 명에서 귀국하는 세자 석(奭)을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낙마 사고를 당해 벽란도에 머무르며 치료를 받게 되자 정몽주는 이성계의 오른팔인 조준(趙浚)을 먼저 제거하려고 했다. 그러나 낌새를 알아차린 이방원이 아버지 이성계를 하루 먼저 개경으로 귀환시켰고, 정몽주는 이성계를 문병하고 돌아가는 길에 이방원이 보낸 자객에게 피살되었다. 이곳이 선죽교(善竹橋)이다. 원래는 선지교(善地橋)라고 불린 이 다리에서 정몽주가 피살되자 참대가 솟아나왔다고 하여 이름을 선죽교로 고쳐 불렀다는 일화가 전한다.
영천 임고서원(臨皐書院)
임고서원은 고려 말기의 충신 정몽주(鄭夢周)를 추모하기 위하여 1553년(명종 8)에 노수(盧遂), 김응생(金應生), 정윤량(鄭允良), 정거(鄭琚) 등 향내 유림들이 임고면 고천리 부래산(浮來山) 아래 창건을 시작하였다. 1554년(명종 9)에는 명종으로부터 사서오경과 많은 위전(位田)을 하사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이 사액 된지 불과 5년 만에 임고서원이 사액되었으므로 초기 서원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이 때 역사가 깊은 이 서원이 훼철 된 것은 개경에 있는 숭양서원(崧陽書院)에서 포은 선생을 향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19년 존영각(尊影閣)을 건립하여 포은 선생의 영정만 모시고 향사를 지내오다, 1965년에 다시 복원하여 위패를 모셨으며, 1980년에 보수정화 하였다. 이곳에 임고서원이 들어서게 된 것은 포은 선생의 부모 묘가 서원 뒤편 부래산에 있기 때문이다. 부래산 기슭에는 포은 선생의 부 일성부원군 운관(云瓘) 묘와 어머니변한국부인 영천 이씨 묘가 함께 있다. 그리고 서원 바로 옆에 묘소를 지키는 계현재(啓賢齋)가 있다.
회재 이언적과 옥산서원(玉山書院)
옥산서원(玉山書院)은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에 있는 서원(사적 제154호)이다. 낙동정맥의 동쪽 형산강 상류에 위치해 있다. 옥산서원은 자옥산을 마주하고 있는데 자옥산은 낙동정맥의 산봉이다. 임고서원은 낙동정맥의 서쪽 금호강 상류에 있다. 낙동정맥은 금호강과 형산강의 분수정맥이다.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덕행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1572년(선조 5) 경주부윤 이제민(李齊閔)이 지방 유림의 뜻에 따라 창건했다. 1574년 사액 서원이 되었다. 1871년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 훼철되지 않고 존속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경내의 건물로는 정문인 역락문(亦樂門), 이언적의 위패를 봉안한 체인묘(體仁廟), 화합·토론 등 서원 내의 여러 행사 때 사용하는 강당인 구인당(求仁堂),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실(祭器室), 유생들이 거처하면서 학문을 닦는 곳인 민구재(敏求齋)·은수재(誾修齋), 유생들의 휴식공간인 무변루(無邊樓), 이언적의 신도비(神道碑)를 모신 신도비각, 내사전적(內賜典籍)과 이언적의 문집 및 판본을 보관하던 경각(經閣)·판각(板閣) 등이 있다.
구인당(求仁堂)의 정면에 걸린 '옥산서원(玉山書院)' 편액(扁額)은 원래 이산해(李山海)의 글씨였으나, 1839년 불에 타버린 구인당을 새로 지으면서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다시 썼다. 구인당 안 대청마루에는 한호(韓濩)가 쓴 '求仁堂'(구인당) 편액이 걸려 있다. 서원에 보관되어 있는 김부식(金富軾) 원저 『삼국사기(三國史記)』완본 9책이 국보 제322-1호로, 이언적의 수필고본이 보물 제586호로, 1513년 간행된 활자본 『정덕계유사마방목(正德癸酉司馬榜目)』이 보물 제524호로, 『해동명적(海東名蹟)』 2책이 보물 제526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원에서 서북쪽으로 700m 정도 떨어진 곳에는 이언적이 퇴거하여 수도하던 ‘독락당(獨樂堂)’이 있는데, 보물 제413호로 지정되어 있다.
옥산서원은 2019년 7월 6일, 제43차 유네스코 (UNESCO) 세계유산위원회에서 16~17세기에 건립된 다른 8개 서원과 함께 오늘날까지 한국에서 교육과 사회적 관습 형태로 지속되어온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이며 성리학 개념이 여건에 맞게 바뀌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의 14번째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날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9개 서원은 소수서원(1543년 건립), 남계서원(1552년 건립), 옥산서원(1573년 건립), 도산서원(1574년 건립), 필암서원(1590년 건립), 도동서원(1605년 건립), 병산서원(1613년 건립), 무성서원(1615년 건립), 돈암서원(1634년 건립)이다.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우리나라 동방오현(東方五賢) 중 한 사람인 이언적(李彦迪)은 조선 역사상 정치적 파란이 가장 심했던 16세기 사화기에 일생을 보냈다.
외가인 경주 ‘양동마을’ 월성 손씨 대종가에서 태어난 이언적은 24세에 문과에 급제한 후 벼슬길에 올랐으나, 1531년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했다가 탄핵을 받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1532년 안강읍 옥산리 자옥산 계곡에 독락당(獨樂堂·보물 제413호)을 짓고 자연을 벗 삼으며 은둔했다.
자계옹(紫溪翁)·자옥산인(紫玉山人)이라 자처했던 이언적(李彦迪)은 독락당을 둘러싸고 있는 낙동정맥의 산에 도덕산(道德山), 무학산(舞鶴山), 화개산(華蓋山), 자옥산(紫玉山) 등의 이름을 붙였다. 자계(紫溪)로 불린 계곡의 다섯 군데 바위는 관어대(觀漁臺), 영귀대(詠歸臺), 탁영대(濯纓臺), 징심대(澄心臺), 세심대(洗心臺)로 이름 짓고 무위자연의 삶을 살면서 성리학에 몰두했다. 옥산서원은 세심대 옆에 자리하고 있다. 세심대 암반에는 이황 글씨 '洗心臺'가 해서체로 새겨져 있어 눈길을 끈다.
회재 이언적은 1537년 다시 벼슬길에 올랐고, 1538년에는 청백리(淸白吏)에 올랐다. 그러나 1546년 모함을 받아 관직을 삭탈 당하고, 1547년에는 훈구파가 사림의 잔당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되어 평안도 오지인 강계로 유배됐다. 6년 후 1553년 유배지에서 숨을 거뒀다. 이언적(李彦迪)은 『구인록(求仁錄)』,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 등을 남겼다. 이언적은 학문과 인품이 고절하고 생애가 청렴하여 생전의 퇴계 이황도 존경했다.
다시 직선의 제방 길, 다산 호촌제(堤)
디아크 건물의 옆 낙동강에 유입되는 금호강을 바라보면서 그 상류에 위치한 영천의 임고서원과 포은 정몽주 선생을 생각하고, 영천의 낙동정맥 너머에 있는 옥산서원과 회재 이언적 선생을 추모하였다.
이제 길은 직선의 바이크로드, 그 바닥에 낙동강 종주의 여정(旅程)이 표시되어 있다. ‘↑낙동강 하구둑 201km ↓안동댐 184km’ —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멀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표시 놓은 이정(里程)이 다르다. 길 바닥에 표시 해 놓은 것과 길가의 원주의 이정표에 표시해 놓은 이정이 다르다. 아마 이것을 시설한 기관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길의 좌측은 너른 둔치를 사이에 두고 저만치서 낙동강이 유유하고, 길의 오른쪽은 고령군 다산면의 황금들판이 펼쳐지고 있다.
직선의 제방 길이 오른쪽으로 휘어진다. 그리고 그 길은 자동차 도로이다. 길가에 자동차들이 여러 대 주차해 있다. 바이크로드는 곧장 강안의 둔치공원으로 내려간다. 길 왼쪽의 곱게 잔디가 깔린 너른 둔치는 파크골프장이다. 따사롭고 맑은 햇살이 내리는 공원에는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파크골프를 즐기고 있었다. 참으로 한가롭고 평화롭기 이를 데 없다.
그리고 둔치에 이어지는 길, 바이크로드 2차로에 인도 1차로의 너른 길이 탄탄대로로 뻗어있다. 길의 좌우에는 뽀얀 억새꽃이 군락을 이루어 가을의 서정을 느끼게 한다. 둔치의 공원과 바이크로드가 조화를 이루는 아늑하고 평화로운 풍경이다. 둔치의 공원을 숲으로 가꾸고자 하는 시인의 글도 있고, 국토대종주 자전거 길의 안내도로 설치해 놓았다. ‘고령숲’이라는 제하에 예쁜 입간판에 ‘낙동강을 젖줄로 살아온 고령이니 / 나무 심고 희망 담은 고령숲 이루어 / 자랑스런 조국과 후손에게 바치노니 / 강이여 도도히 흘러 푸름으로 영원하라 / 2011.3.22 / 글쓴이 문무학 시인’이라고 적어 놓았다. 고령 사람들의 낙동강에 대한 감사와 애정이 스며 있음을 본다.
사문진교
밝은 햇살을 온몸에 받으며 넉넉한 마음으로 한참을 걸어내려 갔다. 저 앞에 콘크리트 교량이 강을 가로질러 간다. 내가 건너가야 할 사문진교이다. 달성보까지 21.3km 바이크로드 이정표가 있다. 강정·고령보에서 3km 내려온 지점이다. 사문진교 가까이의 둔치는 체육문화공원, 오늘따라 어떤 학교 체육행사를 하고 있었다. 중학생인듯 남녀 학생들이 각종 경기를 하며 운동회를 벌이고 있다.
사문진교에 올라서서 낙동강을 건넜다. 이제 고령군 다산면에서 대구시 달성군 화원읍으로 건너가는 것이다. 옛날로 말하자면 가야에서 다시 신라 땅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사문진교 중간 바이크로드 바닥에 ‘고령 / 달성’의 경계를 표시 놓았다. 다리위에서 바라보는 낙동강은 상류 쪽이건 하류 쪽이건 모두 거대한 호수(湖水)를 이루고 있었다. 저 아래 달성보로 인하여 물이 가두어져 있기 때문이다. 다리를 건너 좌측으로 내려가 사문진나루터와 화원유원지를 둘러보았다.
사문진(沙門津) 나루터
[사문진 나루터의 역사]▶ 달성군 화원읍 사문진은 오랜 동안 낙동강 수운교통의 중심지였다. 사문진의 지명의 유래는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인흥마을’에 있었던 인흥사(仁興寺)라는 큰 절로 가는 관문이기 때문에 절 ‘사(寺)’자를 사문진(寺門津)으로 불렀다는 설과 ‘이곳 낙동강 가의 모래가 많아’ 모래 ‘사(沙)’를 써서 사문진(沙門津)으로 불렀다는 설이 전해 오고 있다. 지금을 주로 ‘사문진(沙門津)’을 쓰고 있다. … 사문진 나루터는 조선 세종부터 성종 때까지 대일무역의 중심지로 일본물품의 보관창고인 왜물고가 있었으며, 낙동강 물자 수송의 중심지 역할를 하였다.
현재 사문진나루터 주막촌의 명물인 수령 500여년으로 추정되는 ‘팽나무’ 주위에는 과거 ‘나루장’이라는 장이 열려 다끼파(고령군 다산면에서 생산하는 파), 참외, 수박 등이 거래되었으며, 홍수 때에는 배를 묶어 놓는 선착장 구실을 하였다. 정부의 4대강 사업으로 팽나무가 사라질 위기에 있었으나 달성군과 주민으로 노력으로 보존하게 되었다. 2013년 옛 주막촌을 복원하고 일대를 아름다운 화원유원지 공원으로 조성하여, 시민들의 멋진 휴식 공간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사문진(沙門津)은 조선 시대 전기 낙동강과 금호강을 연결하는 하천 교통의 요지이자 대구로 통하는 관문 역할을 하는 나루였다. 화원 사문진 나루 위쪽에 금호강의 본류가 낙동강에 유입한다. 낙동강은 일본 무역상들은 물론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상인들의 대표적 물품 수송로이기도 하였는데, 낙동강과 금호강이 합류하는 현재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성산1리와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호촌2리를 잇는 사문진이 가장 번창해 1486년(성종 17년)까지 대일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해방 이후까지 부산의 구포와 경상북도 안동시 지역을 오르내리는 낙동강 뱃길의 중간 기착지 역할을 해 왔다.
1940년 초까지 사문진을 통하여 전국의 물자들이 대구로 운반되었으며 고령군 다산면 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이 사문진을 통해 대구 지역 재래시장에 판매되었는데 이를 위해 2척의 배가 하루 70회 정도 오갔었다는 기록이 있어 많은 이들이 이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름철이면 대구 주민들이 고령 쪽 낙동강 모래사장을 찾았는데 다산면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1978년 8월에는 모래찜질이나 목욕을 하기 위해 사문진을 이용한 사람이 8,0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때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 덕분에 화원동산도 유명해졌고 금복주에 의해 유원지가 조성된 것이다. 하지만 경부선 철도 개통 후 사문진은 대구 이출입 화물을 철도 편에 빼앗겨 예전과 같은 대구와의 관계는 끊어지게 되었고 1993년 7월 1일 사문진교가 개통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여기 사문진 나루뿐만이 아니라 낙동강 모든 옛 나루터에 현대식 교량이 건설되어 있다.
사문진 나루의 피아노
[대구 화원유원지]▶ 사문진 나루터는 대한민국 최초로 피아노를 운반해 온 곳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화원유원지 입구 주변에 피아노 조형물과 유원지 안에 사문진 피아노계단도 설치해 놓았다.
미국의 선교사였던 리차드 사이드보텀(Richard H. Sidebotham, 1874~1908)[사보담] 부부는 우리나라 최초로 피아노를, 이곳 사문진 나루를 통해 들여왔다. 사보담 부부는 피아노를 미국 동북부에 위치한 미시간주에서부터 달성군 화원의 사문진 나루[船着場]까지 배로 운송하고, 여기서 대구의 종로 집까지는 1900년 3월 26일부터 28일까지 3일간 16km를 짐꾼들을 동원하여 육로로 운반했다.
1900년 3월 26일 이른 아침 포장한 피아노 1대를 인부 30여 명이 소달구지에 옮겨지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나무토막 안에 죽은 귀신이 들어 있어 괴상한 소리를 낸다며 '귀신통'이라고 부르며 신기해 했다고 한다. 사문진 나루를 통해 대구로 운반된 피아
노의 주인은 동산의료원을 세운 우드브리지 존슨(Woodbridge O. Johnson)의 아내 에디드 파커(Edith Parker)였다.
국내 첫 피아노, 사문진 나루터로 어떻게 들여 왔을까?
First piano in Korea, How did he get into the crossroads?
당시 무거운 짐들은 부산에서 낙동강을 타고 사문진나루[선착장]으로 들여오는 길을 주로 이용하였다. 사보담은 피아노가 도착하기 전인 1899년 12월 29일 자신이 생활하게 될 집에 관한 내용에서 피아노가 놓일 자리를 기록했으며 피아노를 들여온 전 과정을 미국에 있는 부모님께 보낸 편지에 상세히 기록을 남겼다.
* [1899년 12월 29일](준비기간) 춥고 불편한 한국집 숙소에 대한 상황과 한국어 학습과정 및 성취에 대해 적었다. 특히 피아노를 출입문 오른쪽 탁자와 의자가 있는 곳에 둘 수밖에 없다. ... * [1900년 3월 26일 월요일] 아침 일찍 사문진 선착장에 도착해 보니 피아노는 낙동강변에 놓여 있었다. 20명의 짐꾼들이 모여 밧줄을 만들고 대구에서 가져온 상여용 막대 2개를 피아노 양 옆에 매어 운반도구를 완성하였다. .... * [1900년 3월 27일 화요일] 20여 명의 짐꾼이 피아노를 들어 대구로 출발했다. 주변의 집에 부딪히기도 하고 보리밭은 지나 논-산길-경사도-도랑-연못을 어렵게 지나며 진행하였다. 앞으로 대략 5km정도 남았다. .... * [1900년 3월 28일 수요일] 드디어 피아노가 대구의 남문 영남제일관까지 도착했다. 남문을 통과해 집 마당까지 도착하였으나 집의 문이 피아노보다 6cm가 좁아 문을 파내고 피아노를 들여놓을 수밖에 없었다.
달성 습지(達成 濕地)
화원유원지의 위쪽, 낙동강과 금호강, 진천천과 대명천이 합류하는 곳에 형성된 광활한 하천습지로, 총면적은 약 2㎢에 이른다. 과거에는 범람원(홍수로 인해 하천이 거듭 범람하여 퇴적, 생성된 토양)이었으며, 현재는 개방형·폐쇄형·수로형 습지로 이루어져 있다. 달성 습지(達成濕地)는 달성군 화원읍 구라리 일대를 포함하여 대구광역시 달서구 파호동,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호촌리 일대에 걸쳐 있다.
금호강 최하류의 제내지(堤內地)[둑 안에 있는 땅]에 해당하는 대구광역시 달서구 지역은 성서 공단으로 조성되었으며, 그 제방에 10차선 도로가 구축되어 있다.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호촌리 일대 넓은 면적에는 논농사와 비닐하우스 등 집약 영농이 이루어진다. 달성 습지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천연기념물이자 국제 보호 조류인 흑두루미 수천 마리가 찾는 철새 도래지이었으나 지금은 보기 드문 일이 되었다. 요즘에는 황로·왜가리를 비롯한 백로류 등 여름 철새와 고니·홍머리오리·청둥오리 등의 겨울 철새가 찾아든다.
한편 달성 습지와 인근 대명천 유수지는 환경부 2급 보호 동물인 맹꽁이의 최대 서식처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노랑어리연, 기생초 등 습지 식물이 자생하는데 봄에는 노란 꽃이 피는 갓, 여름에는 기생초, 가을에는 억새와 갈대가 습지 주변을 가득 메운다. 달성 습지는 국제자연보호연맹에 달성 습지라는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고, 람사르 등록 습지인 경상남도 창녕군 소재 우포 늪에 비교하여도 서식하는 동식물의 개체수가 떨어지지 않는 자연 내륙 습지로서 보존 가치가 있다. 지방 자치 단체 지정 습지로 대구광역시는 생태 관광 개발을 위하여 2007년 습지 보호 지역 및 야생 동식물 보호 구역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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