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작업
양태순
반구대 암각화 앞에 서면 '위대하다'는 말이 실감 난다. 외형적인 크기에 주눅 들어서만은 아니다. 오랜 세월 바위에 새겨져 있었을 누군가의 혼불이 읽히는 것 같아서이다. 수천 년 전 누군가로부터 시작되어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새겨진 그림을 보며 부족의 풍요를 기원하는 주술적인 의미라고 단정하고 싶지 않다. 그것만이라고 생각하기에는 그들의 노고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바위에 선을 그어 그림을 그리는 것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노동일 것이다. 오늘날의 도구와는 비교할 수 없는 돌칼을 가지고 면각, 선각을 활용하여 동물과 사람을 자유롭게 표현하여 보는 사람에게 이야기를 전한다. 손에 상처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테고 손톱이 빠지는 고통과 높은 곳을 치올려보며 하는 목의 통증을 견뎌내며 했을 작업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까. 족장의 명령으로 가능한 것일까.
우리는 잠시 천장을 먼지를 털어내고자 하는 동작에도 뻣뻣해오는 목 근육통을 참기 힘들다. 하물며 칠팔월 뜨거운 볕에 등을 맡기고 들숨 날숨으로 돌가루를 마시며 작업한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도리질을 하게 한다. 우리나라에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을 환쟁이로 무시하다 제대로 평가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때의 그들이 받았을 대우는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오늘따라 태화강 물결이 살랑이고 나는 자꾸만 생각의 늪으로 빠져든다.
팔천 년 전, 그들에게 부족을 뛰어넘는 것은 핏줄에 대한 애정에서 출발하지 않았을까. 암각화에 있는 많은 동물 중 서로 싸우는 모습을 그린 것은 없다. 새끼 고래를 태운 어미 고래, 사랑에 빠진 멧돼지, 엑스레이 화법으로 그린 그림 등이 있다. 또한 앞 사람이 그린 그림을 최대한 망가뜨리지 않은 것을 볼 때 후손들을 염두에 두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그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여기, 이 자리에 우리가 살았고 나의 피와 혼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달라는 행위라는 해석에 이르자 남실바람이 귓불을 만지는가 싶더니 저만치 달아난다.
핏줄이라는 것이 한 사람의 생에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옆집 아제는 그러했다. 그는 첩의 자식이었고 어미는 입에 담기 민망한 욕을 곧잘 하는 욕쟁이었다. 집성촌인 마을에서 양반과 상놈을 내놓고 구분하지는 않았지만 생활의 밑바닥에는 엄연한 경계가 있었다. 글을 배운다는 것은 상상을 못할 일이었고 대여섯 살 어린 사람도 너나들이를 했다. 집안의 대소사에서는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허드렛일을 도맡아 했고 여러 사람이 뜻을 모으는 일에서는 자신의 뜻을 내세우지 못하고 뒷전에서 어물쩍 따라가기 예사였다. 아제는 혼자 있을 때 어두침침한 얼굴로 반쯤은 멍한 시선을 멀리 두고는 했다.
아제는 나이 쉰을 넘자 갈 길을 정한 듯했다. 대동보를 만들겠다고 집안 어른의 허락을 받으러 갔다. 하지만 거절당했다. 이유는 요즘 시대에 필요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속 사정은 네까짓 게 나설 일이 아니다, 글을 모르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괜히 나서서 집안 망신시키지 말라는 무언의 훈계였다. 아제는 몇 번을 더 찾아간 끝에 허락을 받았다.
그날부터 아제는 홀린 듯이 대동보 작업에 매달렸다. 친척들이 마을을 떠나 도시에 보금자리를 마련한 뒤였다. 전화가 거의 없던 시절, 알음으로 주소를 찾아가면 이미 이사를 갔거나 사람이 없어 밥도 굵고 헛걸음을 할 때가 많았다. 버스를 타고 집집이 찾아가서 족보를 확인하는 일이 힘들었지만 그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있었다. 대동보를 만들려면 돈이 들었기에 넉넉지 않은 살림에 쉽게 돈을 내놓지 않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어둠살이 내리는 들길을 걸어오는 아제의 등 뒤로 노을의 기운이 따라왔는지 허청거리는 발자국에 붉은 물이 고였다.
아제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지친 기색은 있었지만 누구를 원망하는 일 없이 묵묵히 진척시키고 있었다. 운동화가 서너 켤레 닳을 때쯤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던 어른들의 입에서 격려의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사실 일자무식꾼이 일을 한들 제대로 하겠는가 싶어 낮잡아 보았던 그들이었다. 하지만 아제가 제대로 배운 적 없는 한자를 적어 와서 계보를 정리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움직였던 것이다. 그 뒤로는 일이 수월하게 진행되어 몇 년 만에 대동보가 완성되었고 거기에는 아제의 이름이 번듯하게 올라가 있었다. 그것을 껴안은 아제의 얼굴에는 햇살 한 줌이 내려앉았다.
그날 이후, 아제의 자세가 달라졌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언제나 뒷전에서 어깨너머로 기웃대던 목소리가 제대로 나왔고 문중 모임에서도 눈치 보지 않고 앞장서서 참여했다. 어른들을 만나면 움츠러들던 어깨가 엉덩이와 일자가 되었고 터벅거리는 발소리가 났다. 집에서도 번듯한 밥상을 요구하였다.
기록의 힘은 대단하다. 수만 마디의 말은 공기 중에 흩어지고 말지만 기록은 거의 영원성에 가깝다. 그로부터 한 세대가 지난 지금 그의 어머니는 잊힌 존재가 되었고 그의 자식들은 한 가문의 일원으로 당당하게 살아간다. 컴컴한 창고 틈에 스며드는 햇빛은 그냥 빛이 아니다. 그 안에 갇혀 있는 모두에게 다른 세상을 보여주는 일이다. 아제의 고단한 걸음이 자식에게 그 다음 자식에게 밝음을 선사한 것이다.
반구대 암각화에는 오래 기억되어 잊히지 않기를 원하는 바위새김이의 마음이 곳곳에 보인다. 고래를 잡는 도구, 갈비뼈, 심장, 배를 갈라 새끼를 꺼내는 모습을 최대한 자세히 그리려고 했다. 그것은 우리가 일기를 쓰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으리라. 일기는 쓰윽 훑어보면 별것 없는 것 같지만 한 문장씩 음미해 보면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묻어난다. 세대를 이어온 바위새김이는 자신의 인생을 건 신념으로 후대의 핏줄에게 작은 도움이 되고자 암각화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지 싶다.
'위대하다'는 수식어를 꼭 인류 발전에 공헌을 해야만 붙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길이 험난한 걸 알면서도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기꺼이 걸어가는 것, 자신의 인생을 걸 만큼 용기와 신념이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하지 않을까. 바위새김이의 염원이 손가락 끝에서 피워낸 암각화와 아제의 서러움이 엮어낸 신념으로 만들어 낸 대동보 앞에 '위대한 작업'이라 이름 붙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