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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元曉, 617~686) 대사 이야기>
원효대사 초상화
‘원효(元曉)’라는 이름의 뜻에는 우리나라 불교의 첫새벽이 열렸다는 의미가 있다.
그의 이름처럼 원효 대사는 불교를 우리나라에 정착시킨 인물로 평가될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독창적이며 가장 위대한 사상가라 할 수 있다.
그의 수행력이라 할 수행계위는 제8지 보살에 해당됐다고 한다.
따라서 원효 스님에 대한 정확한 존칭은 ‘원효 보살’이라야 옳다.
현재 참고할 수 있는 원효 대사의 전기에 관한 주요자료는 다음의 세 가지다.
① 고선사서당화상비(高仙寺誓幢和尙碑)---이 비는 원효(元曉) 대사의 손자 설중업(薛仲業)이 각간(角干)의 벼슬에 있던 김언승(金彦昇)에게 건의해 신라 애장왕 때(800-808)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김언승은 훗날 헌덕왕(809-825)이 됐다.
옛 고선사(高仙寺)는 현재 경주시 암곡동 덕동댐
공사로 수몰 돼버린 곳에 있었던 절이다.
② 송고승전(宋高僧傳)---중국 송나라 승려 찬영(贊寧: 918-999)이 왕명을 받아 10세기에 30권으로 완성한 것인데,
이 가운데 원효전(元曉傳)
이 있다.
③ 삼국유사(三國遺事)---<삼국유사>는 고려시대 일연(一然: 1206-1283) 스님이 기록한 것으로, 이 가운데 ‘원효불기(元曉不羈)’ 편이 있다.
“원효 불기”란 원효 대사는 자유의지를 구속받지 않고 어떤 경계에도 메이지 않아 걸림이 없었다는 뜻이다.
➃ 기타---기타는 분황사 화쟁국사비편을 비롯해, 여러 다른 사람들의 전기에 언급된 내용, 일본에 전하는 상당수의 자료들, 다른 저서들에 부분적으로 담긴 내용 등이 있다.
이들 자료에 의하면, 속성은 설(薛), 법명은 원효, 아명은 서당(誓幢)이다. 압량(押梁: 경북 경산시)에서 태어났다(617, 진평왕 39년). 그때는 신라가 바야흐로 삼국의 주도권을 잡아가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원효의 어머니가 출산이 임박해 이웃 마을의 밤나무 아래를 지나다 갑자기 해산 끼를 느꼈고, 아버지가 옷을 벗어 나무에 건 다음 그 안에서 출생했다고 한다. 탄생 자체가 극적인데, 평생을 기층 민중과 함께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실천적 수행자였던 그로서는 그런 운명을 닮은 탄생이었다.
원효의 출가 동기는 알려진 게 없다. 15세 무렵에 출가해 황룡사(皇龍寺)에서 승려가 됐다. 자기 집안의 재산을 불문에 희사해, 초개사(初開寺)를 짓고, 자기 생가 터에 사라사(沙羅寺)를 세웠다고 한다.
원효 대사는 8세 아래인 의상 대사와 더불어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는데,
첫 번째는 34세 때인 진덕여왕 4년(650년)에 육로로 요동 근처까지 갔다가 고구려 순라군(국경경비대)에 잡혀 첩자로 오인 받아 좌절되고,
두 번째는 문무왕 1년(661년)에 다시 의상 대사와 해로로 당나라로 가기 위해 당항성(현 경기도 화성)에 이르렀는데, 비를 만났다.
그리하여 한 토굴을 찾아 들어가서 잠을 자다가 잠결에 목이 말라 어둠을 더듬어 바가지에 고인 물을 마신 후, 날이 새어 보니 해골에 괸 물이었음을 알고 토악질을 했다. 그 시원하고 맛있던 물이 이튿날 구역질로 변하는 것에서, 「바가지 → 해골」이라는 것 외에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는데 왜 구역질이 나는 것일까.
날이 밝았으나 비는 계속 내리니 어디로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어두워지기 전에 미리 빈 집을 한 채 물색해 들어가서 잠을 청했다.
그러나 밤이 깊어도 원효는 종내 잠을 이루 수가 없었다. 지난밤 토굴에서 자던 일이 자꾸만 떠오르고, 눈앞에 귀신의 눈동자가 자꾸만 오갔기 때문이다.
그렇게 날이 샌 다음에야 원효는 탄식하며 의상에게 말했다.
“지난밤 잘 때는 비록 토굴이라도 편안하더니, 오늘은 잠들 자리를 제대로 잡았어도 귀신들 사는 집에 걸려든 것 같았네.
아, 마음에서 일어나서 여러 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토굴이나 무덤이나 매한가지.
또 삼계(三界)가 오직 마음이요, 모든 법이 오직 마음이니, 마음 밖에 법이 없는 걸 어찌 따로 구하리오. 나는 당나라에 들어가지 않겠네.”
원효 대사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큰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내 마음이 내 마음속에 있음이야.”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 것이다.
그리고 깨친 것이 사물 자체에는 정(淨)도 부정(不淨)도 없고,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음을 대오(大悟)한 것이다.
그리하여 원효 대사는 의상 대사와 헤어져 혼자 되돌아온 것이다.
그 후 분황사(芬皇寺)에서 독자적으로 통불교(通佛敎)를 제창, 불교 대중화에 힘썼다. 특정한 스승 없이 여러 교학을 편력해 혼자 수학했다고 전해진다.
요석공주(瑤石公主)와의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고, 그리하여 그는 설총(薛聰)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일화에 불과하다.
그가 평생의 과제로 느낀 것은 불교가 공인된 지 백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온, 일견 서로 모순된 듯이 보이는 불교이론들을 어떻게 정리하고 체계화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는 상호모순, 대립하는 이론들을 극복하는 데에 ‘화쟁(和諍)’이라는 자신의 독특한 개념을 사용했다.
우리나라 승려 중에서 세계적 수준에 이른 유일한 사람이 원효 대사였다.
원효 대사는 자신이 알고 있는 불교경전 대부분의 주석서를 썼고, 이는 중국과 일본에 전해져 읽혔다.
“원효는 동아시아 불교의 대표적인 주석가였고, 한문 불교 전통에서 최고 성과를 낸 인물로서, 체계적이지 못한 대승불교 경전을 주석을 통해 논리정연하게 이해시킬 뿐만 아니라 대승불교 전체와도 연결하는 것이 그의 뛰어난 점이다.” - 로버트 바스웰
저서에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보살영락본업경소(菩薩瓔珞本業經疏)>,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대승기신론별기(大乘起信論別記)>, <법화경종요(法華經宗要)>, <화엄경소(華嚴經疏)>,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 <미륵상생경종요(彌勒上生經宗要)>, <대승육정참회(大乘六情懺悔)>,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 등 다수가 있다.
그리고 최근에 일본에서 원효대사의 <판비량론(判比量論)>이 발견됐다. <판비량론(判比量論)>은 인명학(因明學)에 관한 저서이다.
인명학이란 고대 인도의 인식논리학을 말한다. <판비량론>은 당나라 현장(玄奘, 602~664)의 불교논리학, 그 중에서도 현장이 고안한 논증 방식인 '비량(比量:논리적 추론, 추리)'을 원효가 검증 비판한 논문이다.
특히 원효 대사는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
을 왕과 고승들 앞에서 강론해, 존경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저서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3권은 원래 소(疏)였지만 중국의 학자들에 의해서 논(論)으로 고쳐졌다고 한다.
보통 논서(論書)는 인도에서 마명(馬鳴)ㆍ용수(龍樹) 등과 같은 보살 급 고승들의 저술을 말하고, 가타 지역인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고승들이 지은 저술은 보통 ‘소(疏)’라고 하는데, 원효의 저술을 중국에서
<금강삼매경론>이라 한 것은 보살 급의 논서라 할 만큼 뛰어난 저술이란 의미이다. 이것은 원효 대사가 당시 동아시아 불교계에 미친 영향이 지대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이 위경으로 판명되면서, 이 경(經)의 저자 역시 원효 대사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것은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에서 주석한 내용이 <금강삼매경>의 저자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서술할 수 없는 깊은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금강삼매경>의 빛나는 가치는 신라 땅에만 머물지 않고 불교가 건너 왔던 길을 되돌아가서 중국과 티베트에까지 전해졌다.
뿐만 아니라 <금강삼매경>은 당나라시대의 불교 문제점을 모두 소화해 내면서 가장 중국적 불교일 수 있는 선종(남종선)의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이와 같이 <금강삼매경>이 위경임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 불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방대한 지식을 배경으로 한 통찰력으로 경전의 오의를 명확히 천명한 원효 대사의 <금강삼매경론> 저술의 공덕에 힘입은 바 크다.
원효 대사는 <금강삼매경론>을 통해 자신의 핵심사상인 일심(一心)법과 중도(中道)와 화쟁(和諍) 논리를 토대로 대승교학과 그 실천에 대한 것을 완벽하게 나타냈다.
그리고 원효 대사가 지은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가 <대승기신론>을 해석한 여러 논문 중에서 최고라고 한다.
특히 불교 유식학이나 논리학 등에 있어서 그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
원효 대사의 불교는 중국 종파불교와는 달리 통합불교적인 경향을 보여, 중관학(中觀學)과 유식학(唯識學)의 대결, 그에 따른 각 종파의 대립을 회통해 부처님 본래정신으로 되돌아가야 함을 강조했다.
그의 일미(一味)ㆍ화쟁(和諍)사상은 이러한 견해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원효는 불교교리의 화해뿐만 아니라 삼국이 갈라져 분열됐던 국민정신을 통합하기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했다. 그것은 전국 곳곳에 남겨진 그의 발자취를 통해서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는 만년에 참선과 저술로 보내다가 686년 70세에 혈사(穴寺)에서 입적했다. 뒤에 고려 숙종이 대성화정국사(大聖和靜國師)라는 시호를 내렸다.
일본에 전하는 원효대사 초상화
다음은 원효의 주요사상 및 업적이다.
• 일심사상(一心思想) - 인간 각자에 있는 ‘일심(一心)’은 계기에 따라 여러 심리적 행동으로 나타나지만 그렇다고 인간본성 자체에 어떤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봤다.
단지 계기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 심리적 갈등과 고뇌에 사로잡혀 본래의 일심을 깨닫지 못함으로써 일심의 주인 노릇을 못하고 자아를 상실하고 있다고 봤다.
그러므로 그의 사상은 일심의 회복에 목적이 있었다.
도(道)는 모든 존재에 미치지만, 결국은 하나의 마음근원(一心之原)으로 돌아간다는 것으로, 인간이 온전한 삶을 누리지 못하는 까닭은 마음이 온전히 하나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즉, 하나인 마음(一心)으로 돌아가서 모든 생명에 이로움을 주는 삶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 일심사상이다.
그리하여 원효 대사는 <기신론소>에서 일심(一心)이라고 이름 한 이유에 대해서,
“더러움과 깨끗함의 모든 법은 그 본성이 둘이 없어, 거짓과 참됨의 두 문이 다를 수 없기 때문에 ‘일(一)’이라 이름 하는 것이다.
이 둘이 없는 곳이 모든 법 가운데의 실체이나, 허공과 같지 않아서 본성이 스스로 신령하게 이해하기 때문에 ‘심(心)’이라고 이름 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나아가서,
“바람 때문에 고요한 바다에 파도가 일어나지만 파도와 바다는 둘이 아니다. 우리의 일심(一心)에도 깨달음의 경지인 진여(眞如)와 무명(無明)이 동시에 있을 수 있으나 이 역시 둘이 아닌 하나”라고 했다.
일체 경계가 자신의 마음과 다를 바 없는 일심을 깨달아야, 주객이 한 몸인 줄 알고 자비의 마음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일심(一心)을 대승의 유일한 법으로 세웠다는 말이다.
일심(一心)이라고 이름 한 뜻은 진여가 일체법의 본질이지만, 분별심이 없고 신령한 작용을 일으키는 마음을 중심으로 말하기 때문에 일심이라고 이름 지어 부른다는 것이다.
• 화쟁사상(和諍思想) - 원효 대사는 대승불교 주요경전 전체를 섭렵한 후, 어느 한 종파에 치우치지 않는 통효(通曉)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원효 대사가 주장한 화쟁사상은 당시 종파주의적 방향으로 나가던 불교이론을 특정 종파에 연연하지 않고 전체불교를 회통(會通)케 하고, 일승불교(一乘佛敎)로 귀결시켜 자기분열이 없는 불교의 사상체계를 정립하고자 했다.
따라서 화쟁사상의 궁극 목적은 일승불교의 구현에 있었다. 그 일승불교의 이념이 바로 통불교(通佛敎)다. 이 통불교의 이론체계가 곧 화쟁사상이다.
원효 대사는 불교 안의 여러 사상과 주장들을 모두 ‘한마음(一心)’의 발현으로 보고, 그 발현의 여러 양상들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통합하려 했다. 그것이 화쟁사상이다.
모든 논쟁을 조화시키려는 불교사상으로 신라시대 원광(圓光) 법사와 자장(慈藏) 율사에 의해 비롯된 후 원효(元曉) 대사에 의해 집대성됐다.
원효 대사의 화쟁사상은 이론상의 집착에서 벗어나 부정과 긍정의 극단을 버리고 논쟁(諍)과 조화(和) 양면성을 인정하면 경전에 대해 보다 폭넓은 이해를 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상호대립적인 쟁론을 지양할 수 있다고 봤다.
그리하여 화쟁사상으로 반야와 유식의 대립을 넘어섰으며, 화쟁사상의 근본원리는 극단을 버리고 화(和)와 쟁(諍)의 양면성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출발하고 있다.
따라서 원효 대사의 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화쟁사상(和諍思想)이다. 12세기에 들어와서 고려 숙종은 원효 대사를 기려 화쟁국사비(和諍國師碑)를 세우도록 왕명을 내렸다고 한다.
이러한 화쟁사상은 중국과 일본 불교에도 큰 영향을 끼쳤으며, 특히 고려의 의천(義天)과 지눌(知訥) 및 중국의 법장(賢首法藏, 643~712) 등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의천과 지눌도 원효 대사를 높이 숭앙했으며, 당시 대립적인 위치에 있던 선(禪)과 교(敎)를 회통시키기 위해 의천은 교관병수(敎觀幷修)를, 지눌은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장함으로써 화쟁정신을 이어갔고, 조선시대에는 함허(涵虛)와 휴정(休靜)으로 이어져 한국불교의 뚜렷한 특징을 이루었다.
화쟁은 여러 사상과 논쟁 가운데 그 핵심을 파악해 곡해와 대립을 낳고 있는 부분을 서로 통하게 해 원융을 이루는 사상체계이다.
이러한 화쟁의 원리는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ㆍ<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등의 저서에 잘 나타나 있으나 <십문화쟁론>은 현재 전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이해가 가능하다.
• 원융회통(圓融會通) - ‘원융’이란 원만해서 막힘이 없는 것이며, ‘회통’이란 대립과 갈등이 높은 차원에서 해소된 ‘하나(通)로의 만남(會)’을 말한다.
따라서 원융회통사상은 대립과 갈등관계에 있는 사상과 논리를 보다 높은 차원에서 조화롭게 수용하고 무리 없이 통합하면, 그들 사상과 논리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고 보는 조화적인 통일논리를 가리킨다. 이러한 원융회통(圓融會通)이 곧 화쟁사상의 핵심이기도 하다.
• 민중불교(民衆佛敎) - 원효 대사는 신라 불교가 호국불교라는 미명 하에 이론적 관념적인 왕실불교, 귀족불교가 돼 지배층에만 이용되고 민중을 도외시하는 병폐를 낳는데 아픔을 느껴 이에 반발해서 민중을 위한 대중불교화에 앞장섰고, 정토교(淨土敎)의 선구자로서, 정토사상을 보급하기도 했다.
“환속한 원효 대사는 저자거리에 조롱박을 두드리고 노래하고 춤췄다. 당시 그의 절친이었던 대안(大安, 571~644) 대사와 더불어 일체의 걸림이 없는 무애행(無碍行)을 했었다. 이런 원효 대사를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一然) 스님은 ‘불기(不羈)의 자유인’이라고 표현했다.
굴레가 없고 매인 곳이 없다는 뜻이다. 조롱박을 가지고 천촌만락(千村萬落)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고 돌아다녔으며,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무리들까지도 모두 부처님의 이름을 알게 하고, 모두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했다.
입으로 부처를 부르고 귀로 부처를 듣는 것, 그것이 염불이다. 염불은 사람들이 부처님과 직접 만날 수 있는 비법이었다. 원효는 사람들이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며 정토에 왕생하기를 발원했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