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에서는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소명을 받는 장면이 나오고, 2-3장에서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난 것을 엄중히 경고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그들의 회개를 촉구하며 몇 가지 권고를 하십니다.
이 권고의 말씀은 2000년대에 들어선 한국 백성들이 들어야 할 음성입니다. 우리나라는 해방 후 50년대부터 매 10년간 교회는 두 배로 성장해 왔습니다. 그 성장은 세계 교회사에 기록될 정도로 놀랄만한 고속 성장이었습니다. 세계가 놀랐고, 우리도 영적인 장자인 것처럼 자부심도 가졌었습니다.
그런데 90년대 들어와서 급속도로 교회성장은 위축되었습니다. 요새 신문 보도에 의하면 한국 교회에서 가장 교회수와 교인수가 많고 비교적 이미지도 좋은 교단들도 교인이 줄고 있다고 합니다. 보통 교인 통계를 잡을 때 통계 숫자보다 실질적인 교인수가 적다는 점에서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통계적으로도 교인수가 줄고 있다면 실질적으로는 훨씬 더 많이 줄고 있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에는 지금 심각한 영적 이탈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열심이 식어졌고, 감동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위기는 사회적 위기의 전조가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권고는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권고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과연 어떻게 하기를 원하실까요? 우리가 하나님께서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해서 그 의미를 5가지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1.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것을 버리는 삶
본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 네가 만일 나의 목전에서 가증한 것을 버리고....”
이 음성은 우리 교회에게 주는 음성입니다.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에게 돌아오라고 간절히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간절히 돌아오라는 하시는 대상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고, 오늘날로 말하면 교회요 성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그저 스쳐 지나가듯이 들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일을 버리지 못하면 우리는 반드시 불행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요새 러시아의 모스크바에 가본 사람들은 깜짝 놀란다고 합니다. 서울보다 더 많은 교회가 있고, 화려한 성당이 즐비합니다. 그런데 그곳이 얼마 전까지 공산주의의 대표적 도시가 되었었습니다. 그렇게 된 것에 대해서 러시아 정교회 지도자들이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러시아가 공산주의 종주국이 된 이유는 교회가 타락했기 때문이다.”
요새 사회가 어떻다고 탓할 일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가 바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고, 교회와 성도가 하나님 보시기에 바르지 못한 모습을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탓하기 전에 자기 자신을 탓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문제를 느낄 때마다 우리가 빛을 비추지 못한 것을 탓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거룩한 자리에서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2. 하나님 안에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삶
본문 1절 하반부 말씀을 계속해서 보십시오. “마음이 요동치 아니하며....” 본문에서 마음이 요동치 않는다는 말은 환경을 다스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환경에 지배되는 사람이 있고, 또 한 사람은 환경을 다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환경에 지배되는 사람은 행복과 불행을 자신에게서 찾지 못하고 환경에서 찾고 다른 사람에게서 찾습니다. 누가 나를 조금만 칭찬하면 힘이 솟지만, 반대로 조금만 헐뜯어도 기가 죽습니다. 그러므로 기쁨도 슬픔도 사실 자기의 것이 아닙니다. 항상 기쁨과 슬픔을 남에게서 빌려 옵니다. 이런 사람은 건강하면 웃고 병들면 웁니다. 사업이 잘되면 너무나 좋고 사업이 안 되면 신경질을 부립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는 사람은 환경을 다스립니다. 환경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내가 병들고 사업이 흔들려도,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환경이 나에게 영향은 미치지만, 내가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자리를 꾸준히 지킵니다. 그것이 얼마나 복된 삶인지 모릅니다.
역사상 위대한 믿음의 선진들을 보십시오. 하나같이 단호한 결단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과 쓰지 못하는 사람의 가장 큰 차이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 차이는 한번 좋은 결단을 하면 그대로 밀고 나가느냐 못하느냐의 차이입니다. 재능과 기술은 조금 부족해도 좋습니다. 좋은 결단을 한 후 끈기 있게 밀고 나가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3. 진실과 공평과 정의로 행하는 삶
본문 2절 말씀을 보십시오. “진실과 공평과 정의로 여호와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면....” 진실과 공평과 정의를 가지고 살겠다고 결심하는 것을 말합니다.
진실이란 ‘겉과 속이 같은 것’을 말합니다. 꾸준하고 기복이 없는 삶이 진실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공평이란 ‘높고 낮음이 없이 평등한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보다 넓은 의미의 공평은 공동체 정신을 가지는 것을 말합니다. 정의란 ‘바른 길을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정의는 꼭 사랑이 내포된 정의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회개는 단순히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 아니라 진실과 공평과 정의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4. 마음을 옥토 밭으로 만드는 삶
본문 3절 말씀을 보십시오. “나 여호와가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이같이 이르노라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 속에 파종하지 말라.” 어떻게 우리가 심령의 묵을 땅을 갈 수 있을까요? 역시 기도하는 일과 말씀을 가까이 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성령께서 역사해 주셔야 심령이 옥토 밭이 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옥토 밭은 네 가지 삶을 상징합니다.
1) 회개하는 삶을 상징합니다. 진정 용기 있는 사람만이 회개할 줄 압니다. 그리고 회개할 줄 아는 사람만이 참된 발전이 있습니다.
2) 순종하는 삶을 상징합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은 순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줍니다.
3) 반응하는 삶을 상징합니다. 감동을 잘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멘이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입의 아멘도 중요하지만, 행동으로도 아멘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4) 열매 맺는 삶을 상징합니다. 순종하고, 반응하고, 회개하면 틀림없이 축복의 열매가 맺어지게 됩니다.
5. 마음의 할례를 행하는 삶
본문 4절 말씀을 보십시오. “유다 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구약의 할례는 하나님 앞에 드려진 존재임을 상징하는 의식입니다. 구약의 할례가 신약시대에는 세례라고 말할 수 있는데 세례는 과거의 나는 죽고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을 상징합니다.
본문에서는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고 말합니다.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말은 세상적인 마음을 완전히 죽이고 하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거룩한 삶을 살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범사에 감사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위암에 걸린 어떤 분이 있었습니다. 병원에서 진찰을 받고 돌아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하나님! 하필이면 왜 제가 이 지경이 되어야 합니까? 제가 남보다 잘 살려고 노력했고 정말 악한 사람들 많이 있는데 왜 제가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합니까?”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는 원망의 기도를 듣지 않는다는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는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감사 쪽으로 방향을 돌리니까 감사할 일이 많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암에 걸렸다는 사실보다 그때까지 참아주시고 지켜주신 것을 감사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감사를 했더니 더 감사가 나오고, 그러자 스스로 마음이 감동되고, 성령의 충만함을 체험하면서 마음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지더니 결국 위암이 나았다고 합니다.
범사에 감사한 마음을 가진 것처럼 복된 삶은 없습니다. 우리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범사에 감사하는 길을 따라가면 하나님은 반드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시며 더 큰 감사거리를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런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