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 묘소 새롭게 이장한 단재 선생의 묘소. 사당과는 조금 떨어진 거리에 있으며 공터에 버려진 듯 쓸쓸해 보인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이렇듯 살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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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솟을 대문 단재 사당에서 바라본 풍경. 주변이 아늑하긴 하지만 선생이 거처하긴 답답한 공간이다. | ⓒ 강기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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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 그는 거목이었다. 그러나 그가 키운 거목엔 꽃은커녕 잎도 피어나지 못했다.
선생을 만나러 가는 길은 거친 숨을 몇 번이고 몰아 쉰 후에야 작심을 할 수 있었다.
지난 주 토요일(10일)이었으며, 낙엽이 길바닥을 휩쓸던 쓸쓸한 날이었다.
단재 신채호, 세상이 그에게 무심했던가
내가 무심했던가. 아니면 세상이 그에게 무심했던가. 그도 아니면 이 나라가 그의 이름이 존재하는 것조차 싫어하는가.
그 물음을 안고 단재 선생의 사당이 있는 충북 청원군 낭성면 고드미 마을로 갔다.
그날 오전만 해도 바람은 잔잔했다. 가로수로 심어진 은행나무들은 제 발등에 낙엽을 수북히 떨구었다.
점심 때를 지나면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고속도로에서 만난 차량들은 서로의 속도를 자랑하며 씽씽 지나오고 지나갔다.
지도책도 없이 떠난 길에서 단재 선생이 잠들어 있다는 고드미 마을은 멀기만 했다.
두어 시간이면 당도할 수 있으리라는 계산은 애초부터 빗나가고 말았다. 몇 번이고 길을 갈아탔다.
고드미 마을에서의 행사는 오후 3시. 오전 11시에 출발했는데도 시간이 빠듯했다.
국도에서 고속도로로, 고속도로에서 국도로, 국도에서 지방도로, 지방도에서 다시 국도로, 국도에서 마을 길로,
단재 선생의 사당에 도착하고보니 오후 3시 5분. 다행히 행사는 시작되지 않았다.
강원도 정선에서 고드미 마을까지 어떤 길을 달려 이곳까지 왔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담배 한 대를 피워 물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단재 선생의 사당과 묘소가 있는 주변은 가을빛이 완연했다.
싯누렇게 단풍이 든 낙엽송은 작은 바람에도 바늘 같은 잎을 우수수 털어냈다.
그날 준비한 행사는 한국문학평화포럼(회장 임헌영 문학평론가)에서 주최한 '단재 신채호 문학축전'이었다.
100여명 남짓한 문화예술인들이 찬바람이 쓸려다니는 공터에 자리를 잡았다.
행사에 참여한 문화예술인들은 원로 시인인 이시형 시인을 비롯해 김녹촌 아동문학가,
김창규·김이하·양문규·박운식·홍일선·이소리·김규철·윤일균 시인, 무용가 김기인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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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축전 단재문학축전에 참여한 문화예술인들. | ⓒ 강기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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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소가는 길 묘소로 올라가는 길. 낙엽이 깔려있다. 날 추워지고 다들 떠나면 이곳엔 선생 혼자 남는다. | ⓒ 강기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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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의 기조강연을 맡은 김삼웅 독립기념관장은
"조촐하지만 이렇게라도 단재 선생을 기억해주는 이들이 있어 반갑다"라고 소회를 피력했다.
단재 선생의 평전을 집필하기도 한 김삼웅 관장은 단재를 대접하고 있는 이 사회의 수준에 대해서도 말을 아끼지 않았다.
"친일파들의 이름을 건 문학상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상금도 어마어마 합디다.
처음엔 친일파들이 주는 상금이라 받네 안 받네 하더만 요즘은 넙죽넙죽 잘도 받아요.
하지만 단재 선생을 생각한다면 그런 일들 부끄럽지요. 단재 문학상이 그렇게 만들어진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하지만 단재 선생이 이렇게 고립무원의 땅에 갇혀 신음하는데도 세상은 그 소리를 듣지 않아요."
단재 신채호(1880~1936). 그는 언론인이자 소설가, 역사학자, 사상가, 독립운동가로 활동했지만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일이라면 어느 일이고 가리지 않고 앞장 섰던 선각자였다.
단재 선생은 아직 무국적자, 정부와 정치권은 '침묵 중'
그는 이 나라의 근대사가 배출한 거목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사상과 삶은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하거나 배제당했다.
그는 임시정부가 만들어질 때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추대되자
이승만을 향해 "나라가 독립도 하기 전에 나라를 팔아먹을 사람"이라고 했다.
그의 말은 맞았다. 이승만은 해방 정국에서 미국을 등에 업고 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그 말이 빌미가 되었던가.
해방 후에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신채호를 공산주의자로 칭하며 철저하게 배격했다.
나라를 되찾기 전에는 절대 허리를 굽히지 않겠다며 선 채로 세수를 했던 단재 신채호.
해방된 조국에서 그는 아직 국적이 없다. 이 말에 누군가
"대한민국 사람이면서 국적이 없다는 게 말이 되는가?"라고 묻는다면 "말이 되는 나라"라고 대답해주고 싶다.
국가에서는 그를 독립운동가로 인정해 국가유공자로 예우해주지만 그의 국적은 회복시키지 않았다.
이런 일은 비단 단재뿐이 아니다. 빼앗긴 조국을 찾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국적을 찾지 못하고 있다 .
석주 이상룡, 여천 홍범도, 노은 김규식 등. 우리가 입버릇처럼 떠벌리던 독립운동가들이 다들 무국적 무호적 상태이다.
그 수가 300여 명이나 된다니 이 나라가 '제대로 된 나라'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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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소가 있던 자리 단재의 묘소가 있던 곳. 수맥이 지나가는 자리여서 묘소를 사진 뒷편의 공간으로 이장했다. 생전이나 사후나 단재 선생의 삶은 고단하다. | ⓒ 강기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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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재 묘소 터 묘소가 있던 자리는 석물과 비석만이 덩그러이 남아있다. 아래로 보이는 곳은 단재 사당. | ⓒ 강기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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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일제는 조선의 호적을 정리한다는 명목으로 '조선민사령'을 제정했다.
조선인 국적을 가졌던 단재는 일제의 호적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며 망명 길에 올랐다. 정처없는 망명 길이었다.
망명지에서 단재는 나라를 되찾는 길은 '강도 일본'에 폭력으로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사상은 '조선혁명선언문'에 잘 나타나 있다.
"최근 3·1운동 이후 수원·선천 등이 국내 각지부터 북간도·서간도·노령 연해주 각처까지 도처에 주민을 도륙한다,
촌락을 불지른다, 재산을 약탈한다, 부녀를 능욕한다, 목을 끊는다, 산채로 묻는다, 불에 사른다,
혹 몸을 두 동가리 세 동가리로 내어 죽인다, 아동을 잔혹하게 다룬다,
부녀의 생식기를 파괴한다 하여, 할 수 있는 데까지 참혹한 수단을 써서
공포와 전율로 우리 민족을 압박하여 인간의 '산송장'을 만들려 하는 도다.
이상의 사실에 따라 우리는 일본 강도정치 곧 이족(異族)통치가 우리 조선 민족생존의 적임을 선언하는 동시에,
우리는 혁명 수단으로 우리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을 죽여 없앰이 곧 우리의 정당한 수단임을 선언하노라."
(단재 선생이 쓴 '조선혁명선언문' 중에서)
단재 선생이 의혈단의 부탁을 받고 쓴 '조선혁명선언'은
100여 가지 독립선언서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쉽고 잘 쓰여진 문장으로 알려져있다.
일본을 '강도'라고 직접적으로 표기한 단재 선생의 선언문에는 일제의 패악과 매국노들에게 대한 경계가 잘 나타나 있다.
미완성인 <조선상고사> 완성은 살아남은 자의 몫
많은 독립운동가 중에서 단재처럼 뜨거운 가슴을 지닌 이도 드물다.
친미주의자인 이승만과의 대립으로 인해 후대에까지 그 이름이 성대하게 떨치지는 못했어도
역사적 평가는 그를 이승만보다 '큰 인물'로 인정하고 있다.
민중이 주인되는 무정부주의자를 자처했던 단재의 사당엔 그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단재신채호전집>이 봉헌되어 있다. 살아 생전 언론인으로 역사학자로 많은 글을 남겼던 단재의 사상과 역사가 전집에 들어있다.
아직 담기지 못한 원전의 대부분은 북한에 남아있다.
단재가 일본을 이겨낼 수 있다고 믿은 것은 왜곡된 역사가 아닌 '옳은 역사'였다.
망명 길에 오를 때 단재의 괴나리봇짐에는 안정복의 <동사강목> 한 질이 들어있었다고 한다.
비록 나라는 잃었지만 역사만큼은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는 게 그의 신념이었다.
망명 길에 오른 단재는 직접 발로 뛰며 우리의 역사를 썼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역사서로 인정하지 않았던 단재였기에
사대주의 사관에서 벗어난 우리만의 역사를 만들기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렇게하여 만들어진 것이 <조선상고사>였다.
애초 <조선사>였지만 미완성이기에 <조선상고사>가 된 <조선상고사>는 우리가 곁에 두고 읽어야 할 역사서임에 틀림없다.
이제 <조선상고사>를 완성할 일은 현재를 살아가는 역사가의 몫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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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재 묘소 새롭게 이장한 단재 선생의 묘소. 사당과는 조금 떨어진 거리에 있으며 공터에 버려진 듯 쓸쓸해 보인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이렇듯 살았으리라. | ⓒ 강기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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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재기념관 수 많은 활동과 저술을 남긴 선생의 생애를 기념하기엔 공간이 너무 좁다. 대륙을 가슴에 담았던 선생의 삶이 이렇듯 보잘 것 없었던가. | ⓒ 강기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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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의 한 생애가 이리 쓸쓸해서야 되겠는가
단재는 1936년 뤼순 감옥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벽초 홍명희는 그런 단재의 죽음을 접하고 '곡 단재'에 이렇게 썼다.
사람 중에는 "살아서도 귀신이 되는 사람이 허다한데 단재는 살아서도 사람이고 죽어서도 사람이다"라고 단재를 평했다.
지금 이곳은 누구의 나라인가
일제의 발톱이 움킨 매국의 계절에
손가락을 자르고 떠나 버린 조선의 사나이
없는 나라마저 팔아먹은 부정한 정부를 버리고
입을 다물고 행동으로 떨쳐 일어나
누를 수 없는 북받치는 정열을 한 자루 붓에 맡겨
민족의 심장을 쳐 움직인 사나이
그가 돌아올 수 없는 이곳은 누구의 나라인가
중국 땅, 연해주, 만주를 떠돌며 온몸으로 혁명을
민중의 혁명을 꿈꾸며
미리를 무찌르던 그의 손가락은 아홉 개
그러나 그가 고개를 꺾어야 할 나라는
오지 않았는가, 아직도 끝나지 않은 매국의 계절에
이제는 전쟁으로 두 동강나고
결국은 한 동강마저 글로벌 자본에 목이 졸린 나라
그는 올 수 없는가, 민중의 굴레인
북곽같은 정치와 법률과 윤리와 도덕과 종교
노예의 근성, 그 모든 것 다 버리고
오로지 민중이 주인인 무정부의 조선을 찾아 떠난 외길
매국의 走狗는 아직도 천지에 깔렸고
1936년 이후 한사코 혼으로 떠돌고 싶었던 사나이
태백산 같은 백골탑도 못 쌓고 쟁기도 녹이 슨 지금
그 혼은 아직도 멀리 계신가
어서 오시라, 그 한마디 구천에 뿌릴 수 없는
지금 이곳은 누구의 나라인가
- 김이하 시 '어느 무정부의자의 망명' 전문
단재는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고 있다. 나라는 해방이 되었다고 하나 두 동강이 났고,
반쪽의 나라는 여전히 친일파들의 후손들이 득세를 하고 있다.
역사를 바로잡겠다는 정부가 있었으나 그 의지는 득세자들로 인해 번번이 좌절되었다.
단재가 외쳤듯 민중혁명이 일어나기 전에는 이러한 상황이 나아질 것 같지도 않다.
그러나 혁명의 시대는 그야말로 유물이 되어버린 나라 대한민국.
신채호는 모르지만 체 게바라는 알고 있는 웃지 못할 요즘의 시대에서 참된 역사라는 것이 얼마나 헛헛한 것인지.
국립묘지에 안장되어도 속이 풀리지 않을 단재는 오늘도 찬바람을 맞으며 고드미 마을을 굽어보고 있을 뿐이다.
국적도 없이 잠들어 있는 한 독립운동가의 생애가 이리 쓸쓸하고 허접하게 대접받아도 되는 것인지
해답을 만들어야 할 이들은 여전히 침묵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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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재 사당 단재 신채호 선생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 ⓒ 강기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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