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강경성결교회 예배당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에 있는 일제강점기의 건축물이다.
2002년 9월 13일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제42호로 지정되었다.
한식목구조 건물로 현존 유일의 개신교 한옥교회 장방형 평면 등 초기 기독교 한옥교회 건축양식이다.
명칭 변경
동양선교회(성결교회)에 의하여 1924년에 건립된 ‘강경 성결교회’는
신사참배 거부운동으로 1943년에 총독부의 해산명령을 받고 폐쇄된 이후
감리교회에서 교회 건물을 구입하여 감리교 소유가 되어
2002년에 등록문화재로 등록(명칭 : 강경 북옥감리교회)되었다.
1924년 건립당시의 강경성결교회가 본래의 이름이며,
현 소유자도 성결교회유지재단이므로 '구 강경성결교회 예배당'으로 명칭을 변경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되어 2015년 2월 27일 구 강경성결교회 예배당으로 문화재 명칭이 변경되었다.
충청남도 논산시 구 강경성결교회 예배당은 1919년부터 신축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1919년 3월 현지답사에 나섰던 영국인 존 토마스 선교사가
일제 경찰로부터 심하게 맞아 중상을 입는 사건으로 영국과 일본 사이에 외교 문제로까지 비화하였다.
구 강경성결교회 예배당은 우여곡절 끝에 1924년 완공되었다.
정사각형 평면의 한옥으로 지어진 예배당은 건축학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특이한 사례로 꼽힌다.
강경성결교회의 교인들이 관련된 1924년 강경공립보통학교 교사와 학생들의
신사참배 거부 운동은 한국교회사의 중요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강경성결교회는 1930년대 충청남도의 대표적 성결교회였다.
1919년 3월 20일 당시 성결교단의 감독이었던 존 토마스(John Thomas) 선교사가
새 교회 자리를 답사하기 위해 강경을 찾았다. 부지를 살펴보려는 토마스 선교사 일행 옆으로
한 무리의 청년이 “만세”를 외치며 지나갔다.
강경의 3.1 만세 시위는 3월 12일 시작된 상황이었다.
경찰은 선교사 일행을 시위 무리로 여겼다. 선교사가 여행 증명서를 보여주었으나,
일경은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나서 연행했다.
토마스 선교사는 20여 곳을 크게 다쳤다.
병원에서도 회복이 될지, 장애가 남을지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중상이었다.
영국 정부는 선교사 구타 사건에 대해 일본 측에 엄중 문책과 배상을 요구했다.
영국이 요구한 배상금은 5만 달러였다.
토마스 선교사는 한국에 남아 선교를 계속할 뜻을 밝혔지만,
본국의 강권으로 1920년 2월 한국을 떠나야 했다.
토마스 선교사는 귀국 후 구타 후유증으로 숨진 것으로 전해진다.
강경성결교회 예배당은 토마스 선교사 사건 이후 5년이나 지난 1924년 9월에야 완공되었다.
건축 비용은 토마스 선교사가 받은 배상금을 쾌척했다는 설도 있고,
미국의 성결교회에서 지원했다는 기록도 있다. 건립 계획은 늦어졌으나 예배당은 튼튼히 지어졌다.
사용된 자재나 건축 설계 등으로 미루어 착공 무렵부터 건축비를 걱정하지는 않은 듯하다.
강경성결교회 옛 예배당은 개신교 교회 건축물로는 매우 드물게 남아 있는 한옥 교회다.
더욱이 건축 평면이 정사각형인 점이 이채롭다.
개항기와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한옥 성당이나 한옥 교회는 대부분 직사각형 평면이나 기역 자(ㄱ) 형이다.
강경성결교회 옛 예배당은 정면 4칸, 측면 4칸을 하나의 예배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내부 기둥을 최소화하고, 들보를 3단으로 해 서까래를 받치도록 했다. 건축학적으로 흥미로운 사례로 꼽힌다.
강경성결교회가 예배당을 지은 직후인 1924년 10월 교인과 교인 자녀 수십 명이 관련된 사건이 발생했다.
강경공립보통학교의 김복희 교사와 학생 62명이 신사참배를 거부한 것이다.
김복희 교사는 강경성결교회의 신자였고, 학생 62명 가운데 57명도 교인이었다.
기독교인의 관점에서나, 민족적 관점에서나 신사참배는 모욕이자 굴욕이었다.
김복희 교사는 면직되었고, 학생 7명은 퇴학당했다.
당시 강경성결교회의 백신영 전도사는 항일 비밀조직인 대한애국부인회 결사 대장으로
옥고를 치른 경력이 있는 항일 운동가였다.
강경에 성결교 전도가 이뤄진 시점은 타 교단에 비해 늦다.
침례교는 1896년부터 강경에 선교사를 보냈고, 감리교도 1907년 강경에 교회를 설립했지만,
성결교회는 1918년 처음 전도를 시작해 1919년 강경성결교회가 세워졌다.
하지만 토마스 선교사의 희생과 신사참배 거부 사건 등을 거치면서
강경성결교회는 성장을 거듭하여, 1930년대에는 충청남도의 대표적인 성결교회가 되었다.
1943년 조선총독부의 성결교단 폐쇄로 교회 문을 닫았던 강경성결교회는 해방 후 다시 부흥하였다.
한국전쟁 때는 공중폭격으로 교회 한가운데 폭탄이 떨어졌으나
불발탄이어서 화를 면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강경성결교회는 교인이 증가하여 1957년 흥교리로 이전했다.
교회를 옮겨가면서 한옥 예배당은 소유권이 넘어가 북옥 감리교회가 되었다.
옛 예배당은 건축학적 가치와 역사적 의미를 인정받아 2002년 등록문화재 제42호로 지정되었다.
지정 당시 문화재 명칭은 강경 북옥 감리교회였다.
2000년부터 교회 역사를 발굴하여 신사참배 거부 사건의 전말을 밝혀낸 신영춘 목사가
2008년 성결교단에 옛 예배당 환원을 요청하여
2012년 북옥 감리교회는 다시 성결교단 소유로 되돌아왔다.
문화재 명칭도 구 강경성결교회 예배당이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첫댓글 강경가면 한번 찾아가 봐야 겠어요~^^
북옥동에 있는 성결교회가 이런 역사를 가지고 있는걸 몰랐습니다.
제가 강경에서 학교 다니느라 6년동안 중앙동에서 살았거덩요...ㅎ
요즘에도 한국에 거면 제가 살았던 집에도 가보고
옥녀봉에도 올라가 본답니다.
2019년에는 황명선 논산시장님과 함께 젓갈축제 체험도 하였지요.
감사 합니다.
이글을 충청남도방에 올려 주시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