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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9. 묵상글 ( 연중 제2주간 금요일. - 얇은 귀, 두꺼운 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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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9. 연중 제2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얇은 귀, 두꺼운 귀
어제 사울은 “주님께서 살아계시는 한 다윗을 결코 죽이지 않겠다.”라고
결심하고 요나탄에게 약속했지만 오늘 그 마음이 바뀌어 죽이려 합니다.
그러니까 사울의 마음이 자꾸 바뀌는 것인데,
사실 인간의 결심이라는 것이 그리 항구하지 않고 자꾸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서약을 하는 수도자들에게 결심하지 말고 서약하라고,
서약도 인간에게 하지 말고 하느님께 서약하라고 강론에서 충고합니다.
그렇지요.
결심은 혼자 하고 약속은 둘이 하는 거지요.
그러니 혼자 한 결심은 언제고 자기 마음대로 깰 수 있습니다.
그에 반해 약속은 일방적으로 깰 수 없고,
상대방의 동의가 있어야 깰 수 있는 건데
사람 간에는 혹 약속을 헌신짝처럼 깨어버리는 사람이 있지만
우리의 서약은 하느님과 약속이니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그러고 보면 사울은 하느님과 사람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이고,
이것이 하느님께 항구한 다윗과 사울의 차이점입니다.
어제 결심한 대로 사울 안에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면 죽이지 않는데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지 않게 되면 시기심과 증오심이 되살아납니다.
그런 것입니다.
내 안에서 하느님이 살아 계시면 인간적인 악감정은 죽어버리고,
하느님이 죽어계시면 인간적인 악감정은 되살아나는 법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왜 이렇게 하느님과 사람 사이를 왔다 갔다 하게 되고
다윗은 어떻게 그렇게 항구할 수 있게 되었을까요?
오늘 다윗의 말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어찌하여 임금님께서는, ‘다윗이 임금님을 해치려 합니다.’ 하고
말하는 사람들의 소리를 곧이들으십니까?
오늘 주님께서는 동굴에서 임금님을 제 손에 넘겨주셨습니다.
임금님을 죽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저는 ‘그분은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니 나의 주군에게 결코
손을 대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임금님의 목숨을 살려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사울과 다윗 주변에
인간적인 조언을 하는 무리가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귀가 얇았고 다윗은 귀가 두꺼웠습니다.
귀가 얇다는 말이 있지요?
인간의 말을 걸러내는 기능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느님 말씀만 받아들이고 인간의 말은 걸러내는 기능이 없는 겁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느님의 말과 인간의 말을 걸러낼 수 있었습니다.
확고한 식별 기준과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께서 하시니 내가 어찌하려 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의 사람도 하느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니 내가 해선 안 된다.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도 내가 진정 하느님의 사람이라면
하느님 뜻대로 해야지 내 감정대로 하거나 내가 감히 어찌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믿음과 기준이 다윗에게 있었던 겁니다.
귀가 뚜꺼워야지 얇아서는 안 되고,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지 인간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사울과 다윗의 얘기에서 가르침 받고 교훈 삼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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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9. 연중 제2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마르 3,15)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시어,
당신이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마르 3,13)
이는 마치 야훼 하느님께서 모세를 시나이 산으로 불러올리는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처럼, 그분께서는 먼저 부르시고, 제자들은 그분께 응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신께서는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셨습니다.” 이토록, 당신께서는 우리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성소는 당신이 원하신 것이요, 당신이 주신 선물이요, 은총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께 나아온” 이들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부른 이’가 누구인가에 따라, 응답한 이의 삶이 바꾸어지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의 부름을 받은 이는 대통령의 영광을 입은 것이고, 대통령이 부여한 일을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이는 하느님의 영광을 입은 것이고, 하느님의 일을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복음사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 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마르 3,14-15)
이제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열 두 부족으로 구성된 이스라엘 민족을 갱신하고, 신약의 새로운 백성을 선포하십니다. ‘세우다’란 말의 원어의 뜻은 ‘만들다’, ‘창조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제 새 이스라엘이 세워지고 만들어지고 탄생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둘을 “사도”라 부르십니다. 그러니 결국, 이 “열둘”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곧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그분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는 ‘제자’(μαθετεσ)라는 의미와 동시에,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하느님나라를 선포하고 다니는 “사도”(αποστολοσ)라는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제자요 사도인 공동체에 속하게 되는가? 그것은 우선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것’ 입니다. 그것은 마치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면 부모를 떠나 ‘부부가 함께 지내는 것’처럼 한 몸을 이루며, 모든 것을 함께 공유하고 서로 안에 머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스승이 계시는 곳에 제자도 있어야 하고, 스승이 파견한 일을 사도가 하게 됩니다. 곧 제자와 사도의 신원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이’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함께 지내되, 누구와 함께 지내느냐?’ 입니다. 왜냐하면, ‘함께 지낸다.’는 것은 ‘물들어 간다. 섞인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곧 악한 사람과 함께 지내면 악에 물들고 선한 사람과 함께 지내면 선에 물들어가듯, 하느님이신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 하느님이 되어갑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이 되어 간다는 것이요, 예수님과 함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가 됩니다. 그리하여 바오로 사도가 말한 대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품어 나르는 “그리스도의 향기”(2코린 2,15)가 됩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할 일입니다.
“지금 나는 누구와 함께 지내고 있는가? 나 자신인가? 예수님인가?”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마르 3,14)
주님!
당신이 불러 뽑으셨으니, 저는 분명 당신의 사람입니다.
당신을 저의 거처로 내어주시고, 저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셨습니다.
하오니, 당신의 말씀을 실행하고, 당신 뜻 안에 살게 하소서.
당신 뜻의 실천이 제 양식이 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사랑으로 녹아나고, 당신 뜻에 맞는 예배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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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9. 연중 제2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산에 오르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마음에 두셨던 사람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 가운데서 열둘을 세우시고 사도라 이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성경에서 산이란 하느님이 계시는 곳, 하느님의 뜻이 밝혀지는 곳, 하느님을 만나는 곳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산에 오른다는 것은 하느님이 계신 곳으로 하느님의 뜻을 받으러 간다고 말할 수 있으며 오늘 우리에게는 기도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15,16). 는 말씀대로 당신께서 원하시는 사람을 불렀는데, 산에 오르셔서 부르셨다는 것은 아버지 하느님의 뜻대로 처신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냥 뽑으신 것이 아니라 신중하게 기도하시고 선발했습니다. 그런데 뽑힌 사람의 모습을 보면, 특별히 잘난 사람이 없으며 오히려 사나운 사람이 섞여 있었습니다.
기도하고 내세운 사람인데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 남을 등쳐먹는다는 공적인 죄인 세리 마태오, 열혈당원 시몬, 천둥의 아들이라 불리는 야고보, 성질 급한 요한, 다혈질적인 베드로 등등 그야말로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의 속을 아셨을까요? 아니면 모르셨을까요? 제가 뽑는다면 아마도 그런 사람은 제쳐 놓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품고 가십니다. 그래서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셨습니다. “함께 지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동안 어떤 생활을 해 왔든지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실 세리 마태오와 열혈당원 시몬의 관계는 적대관계입니다. 그러나 부름을 받고 예수님과 함께 새 생활을 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함께 지냈다는 것은 단순히 공간적인 의미를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과거의 삶을 버리고 새 삶을 살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는 주님의 사람이 된 것을 기뻐합니다.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미래는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고 오늘을 사랑으로 살라’고 하였습니다.
“유다’라는 말은 “찬미하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뜻을 가진 유다가 왜 주님을 찬미하지 못하고 배반자가 되었을까? 그는 예수님과 함께 지내기를 제대로 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몸은 같이 있어도 마음은 따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몸과 마음이 그분과 함께 있지 않으면 유다처럼 되지 않으리라고 장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있지 않고 어떻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지내야 듣고 보고 체험한 바를 전할 수 있습니다. 사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누리는 기쁨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은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주어지는 것입니다. 복음을 선포하고, 선포하는 바를 살면 그 안에 주님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저희는 왜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하고 제자들이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지 않고서는 그런 것을 쫓아낼 수 없다”(마르9,28-29).고 말씀하셨고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8,33). 하며 꾸짖으셨습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곧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것이고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사탄을 쫓아낸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을 접고 하느님의 능력을 사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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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9. 연중 제2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필라델피아에서 올라온 청년들과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청년들의 세례명은 ‘알베르토, 가브리엘, 미카엘, 루시아, 레지나’입니다. 모두들 성당에서 함께 지냈고, 청년활동을 열성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신앙 안에서 기쁘게 지내고, 미국에서 자리를 잡고 열심히 살고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오래 살았기에 ‘사자성어’는 잘 몰랐습니다. 저는 올해가 용의 해이기에 ‘화룡점정, 용두사미’의 의미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청년들은 눈을 크게 뜨고 저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끝으로 새해의 덕담으로 ‘적선지가 필유여경’이라는 말을 해 주었습니다. ‘선을 베푸는 집은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긴다.’라는 뜻입니다. 짧은 저의 식견이지만 청년들에게는 새롭게 다가왔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적선지가 필유여경이라는 말의 지평을 더욱 넓혀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주어라.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오늘 독서에서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사울 왕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사울 왕은 하느님께서 기름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원수로 갚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재판관이 되시어 저와 임금님 사이를 판가름하셨으면 합니다. 주님께서 저의 송사를 살피시고 판결하시어, 저를 임금님의 손에서 건져 주시기 바랍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다윗은 용맹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윗이 그 용맹함으로 거인 골리앗을 물리쳤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윗이 자신의 뜻대로 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그런 다윗에게 이렇게 축복해 주었습니다. “내가 너를 나쁘게 대하였는데도, 너는 나를 좋게 대하였으니 말이다. 나는 너야말로 반드시 임금이 될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스라엘 왕국은 너의 손에서 일어설 것이다.” 초대교회의 첫 순교자 성 스테파노 부제도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에 스테파노는,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하고 기도하였다.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하고 외쳤다. 스테파노는 이 말을 하고 잠들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 나를 해치려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함께 복음을 전할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복음서는 그 제자들의 이름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그리고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우리들 각자의 이름이, 언젠가 하느님 나라에 기억되고 기록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지금 내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제자로서 충실해야 합니다. 주어진 능력과 재능을 하느님을 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나는 그들의 생각 속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리라.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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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9. 연중 제2주간 금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는 12사도를 뽑으십니다. 그리고 첫 번째 명하신 것은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당연합니다. 12사도의 의무는 바로 복음 선포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무엇인가? 사전적인 의미로 ‘기쁜 소식’이라 하는데 기쁜 소식이라는 이 말에 복음의 의미 전체를 담아낼 수 있을까!
복음은 말 그대로 기쁜 소식입니다. 여기서 기쁜 소식이란 주님께서 우리의 구세주이시라는 뜻입니다.
구세주라는 말은 곤경과 고통에서 구할 뿐 아니라 하느님 나라와 반대되는 세상의 모든 것에서 구원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하늘나라로 인도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제자들의 의무인 복음 선포는 하늘나라로 우리가 들어갈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하는 것입니다. 누구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이렇게도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복음을 선포하게 하신 이유는 바로 마귀를 쫓아낼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하려는 것이다.
즉 복음을 선포의 열매는 바로 마귀를 쫓아내는 힘일 것입니다. 복음을 선포할 때 즉 하늘나라에 대한 선포를 이어갈 때 마귀들은 그런 우리에게 달려들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귀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하늘나라와 가까워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시고 복음 선포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마귀들의 움직임을 경험시키셨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선포할 때, 선행을 행하고 사랑을 나눌 때도 마귀들은 움직입니다. 우리를 방해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니 겁내지 마십시오. 당연합니다. 마귀들이 유혹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늘나라와 가까이 가고 있다는 방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저 그 주님의 길을 충실히 걸으면 됩니다. 그저 복음, 하늘나라를 전하며 걷는 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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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를 구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사탄이 주님께 이렇게 불평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든 큰죄를 저지르기도 하고
여러번 죄를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고 주님은 그들의 죄를 모두 받아주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무리 큰 실수라고 해도 단 한번 뿐이었는데
영원토록 단죄하시는 것은 불공평합니다.
그러자 주님게서 이르셨습니다.
너는 용서를 구하거나 참회한적이 한번도 없지 않느냐?
용서를 구하는 사람은 용서를 얻을 것입니다.
만약 자존심으로, 교만을 담아낸다면
영원한 단죄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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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9. 연중 제2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학창 시절에 부러운 친구들이 참 많았습니다. 과연 어떤 친구를 부러워했을까요? 공부 잘하는 친구, 운동 잘하는 친구, 그림 잘 그리는 친구, 노래 잘 부르는 친구, 춤 잘 추는 친구…. 사실 이런 친구에 대해서는 그렇게 부럽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부러웠던 친구는 모발이 얇은 친구입니다.
저의 머리카락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완전한 직모입니다. 별명도 머리카락에 관계되는 것뿐입니다. 돼지털, 빗자루 등입니다. 완전히 뻣뻣한 직모인 머리카락을 넘겨 가르마를 만들 수 없었고, 조금만 길어지면 사정없이 뻗치는 머리카락이었습니다. 그래서 늘 스포츠머리의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저를 싫어했기에, 모발이 가늘어서 자유자재로 머리 스타일을 만드는 친구가 얼마나 부러워했겠습니까?
하지만 요즘 학창 시절의 친구들을 만나면 “너의 머리카락이 너무 부럽다.”라며 이야기합니다. 당시의 가는 모발을 가지고 있었던 친구들 대부분 머리카락이 거의 없습니다. 학창 시절에는 제 머리카락을 가지고 놀리곤 했는데, 이제는 반대로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미장원에 가도 “머리카락 숱도 많고, 모발이 이렇게 튼튼하니 얼마나 좋겠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콤플렉스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이제는 자랑할 수 있는 이유가 된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님으로부터 나쁜 유전자를 물려받았다고 생각했지만, 가장 훌륭한 유전자를 물려받았다고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지금 만족스럽지 않은 자기 모습도 언젠가는 만족스러워지지 않을까요? 지금의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절대로 포기하고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분명히 실망할 삶이 아닌 감사할 삶이 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일을 함께할 제자 열둘을 뽑으십니다. 그들을 뽑으신 이유는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인정할 만한 제자들의 모습이었을까요? 당시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대부분이 어부였고, 세리도 있고, 열혈당원도 있습니다. 능력이 많은 유능함과도 거리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특별한 신앙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의 죽음 이후 곧바로 뿔뿔이 흩어진 것만을 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분명히 부족하고 나약함이 가득한 제자들이었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체험한 후에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교회를 세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들 중에 유일하게 포기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유다 이스카리옷은 스스로 목숨을 끊지요. 자기를 이끌어 줄 주님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포기와 좌절에 가까이 가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주님께서 주시는 희망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주님의 일을 기쁘게 수행할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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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자유란 주어진 상황 안에서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다(장 폴 샤르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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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9. 연중 제2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더불어(Together) 성화(聖化)의 여정
“성소 역시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 과제'이다”
-부름, 따름, 섬김, 배움, 닮음-
어제 목요일 저녁미사는 왜관수도원의 주세환 프란치스코 새 수도사제가 주례했습니다. 저와 똑같은 수도명 프란치스코입니다. 문득 35년전(1989년 7월11일) 사제서품식 미사때 만감이 교차했던 감동스런 입당성가 445장이 생각났습니다.
“내 한평생을 예수님 안에 내 온전하게 그 말씀 안에
내 결코 뒤를 바라봄 없이 그분만을 따릅니다.”
예수님은 “나를 믿어라”, “나를 사랑하라” 한 것이 아니라 “나를 따르라”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 불림받은 성소자들 모두가 너나없이 주님을 따라 살아갑니다. 주님을 따라 닮아가는 “따름의 여정”은 동시에 날로 거룩해져가는 “성화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혼자의 여정이 아니라 도반 형제들과의 더불어의 여정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당신께서 원하시는 제자 열둘을 부르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십니다. 목적은 그들이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대로 주님의 사명을 위임받은 제자들이자 사도들임을 깨닫게 됩니다. 비단 사도들뿐 아니라 세례성사로 불림받은 모든 이에게 해당되는 신원이 안으로는 주님과 함께 지내는 “제자”요, 밖으로는 복음 선포의 “사도”라는 하나이자 둘인 이중신원입니다.
여기서 분명히 알아둘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제자공동체에, 교회공동체에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사도들만이 아니라 우리도 혼자가 아닌 형제들과 더불어 주님과 함께 하며 주님을 따르는 여정을 살게 됐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주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여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이 우선했고 우리는 그 부르심의 성소에 응답한 것입니다.
열두 사도들의 면면이 참 다양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셔서 부르셨으니 우리는 몰라도 나름대로 주님의 뜻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성소의 부르심은 은총의 선물이자 신비라 말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다양한 이들이 주님을 공동체의 중심에 모시고 함께 하며 따르기에 가능한 공동생활임을 깨닫습니다.
성소는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 과제라 했습니다.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죽을 때까지 살아 있는 그날까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따르고 섬기고 배우면서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평생 성화의 여정입니다. 삶의 마지막까지 날마다 부름-따름-섬김-배움-닮음의 성화의 여정을 살아가기에 저는 믿는 이들의 신원을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학인이자 주님의 전사라 칭하곤 합니다.
나이 40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저야 한다 합니다. 과연 날로 주님을 따라 닮아가는 내면의 얼굴입니까? 주님 앞에 갔을 때 주님은 우리 내면의 얼굴을 검사할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닮은 참나의 얼굴인지 말입니다. 참 소중한 얼굴입니다. 날마다 아침 저녁 거울에 비춰보는 내 얼굴일 것입니다. 참으로 날마다 주님을 닮아가는 내면의 얼굴인지 주님의 거울에 비춰보기 바랍니다.
아마도 나중에 남는 얼굴은 둘중 하나일 것입니다. 주님을 닮은 얼굴인가 그렇지 않은 얼굴인가? 평생 삶의 흔적이 배어있는 얼굴이듯 내면의 얼굴도 그러할 것입니다. 날마다 하루하루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따르고 섬기고 배우면서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거룩한 내면의 얼굴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깨어 하루하루 끊임없이 끝까지 사랑하는 주님을 따르려는 분투의 노력이 얼마나 본질적이요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여기서 제가 강력히 권하는바 각자 삶의 성경책 “렉시오디비나”하기입니다. 믿는 이들 하나하나의 인생이 미완의 성경책입니다. 하루1쪽씩 써내려가는 내 삶의 성경책, 나이 곱하기 365일 하면 내 삶의 쪽수가 나올 것이고 마침내 죽는 날, 이 내 삶의 성경책을 하느님께 드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자주 틈나는대로 신구약성서와 더불어 내 삶의 성경책을 렉시오 디비나 해보는 것입니다. 과연 주님을 한결같이 잘 따르고 있는 삶인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믿는 이들 모두가 예외없이 성화의 여정중입니다. 일일일생, 일년사계로 압축한 현시점을 살펴보는 것이요 주님의 거울에 나의 내면의 얼굴을 비춰보는 것입니다. 얼마나 주님을 닮았는지,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얼굴인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참 신기한 것이 날마다 평생 바라보는 똑같은 얼굴인데 사진으로보면 언제 이렇게 세월이 흘렀는가 놀랍니다. 2009년 심은 애목들인 수도원 메타세콰이어 가로수들이 지금은 아름드리 나무가 되었는데 하루하루 볼때는 몰랐는데 지나고 나니 이렇게 거목이 되었습니다. 우리 내면의 얼굴도 그러할 것이며 주님은 한눈에 당신을 닮았는지 알아볼 것입니다.
어제에 이어 사울과 다윗의 일종의 치열한 권력투쟁의 연속입니다. 둘다 주님께 불림받은 거룩한 사람들인데 사울은 성소에 불충함으로 이미 하느님께 내침받은 불쌍한 처지에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루하루 죽는 그날까지 충실해야 하는 성소임을 깨닫습니다. 이에 필수적인 요소가 끊임없는 기도와 끊임없는 회개로 하느님을 향한 방향을 늘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다윗은 성소에 큰 위기를 겪습니다만 분별력의 지혜로 그 큰 유혹을 벗어납니다. 다윗을 쫓다가 다윗 일행이 숨어있는 줄도 모르고 뒤를 보는 사울을 발견한 다윗에게는 사울을 죽일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자 성소의 위기이기도 합니다. 다윗의 부하들이 다윗을 유혹합니다.
“주님께서 ‘내가 너의 원수를 네 손에 넘겨줄 터이니, 네 마음대로 하여라.’ 하신 때가 바로 오늘입니다.”
정말 아찔합니다. 부질없는 상상이지만 만약 다윗이 뒤를 보던 사울을 비겁하게 죽였더라면 다윗의 성소 역시 위태했을 것이니 하느님께서도 다윗을 내치셨을 것입니다. 하느님께 “만약?”은 부질없는 상상입니다. 하느님은 지금까지 믿는 이들을 나름대로 최선, 최상의 길로 인도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저의 경우만 해도 다시 산대도 이렇게 살 수 뿐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지난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섭리에 맡기고 하루하루 날마다 좋으신 주님을 선택하여 부름, 따름, 섬김, 배움의 삶에 충실하면서 주님을 닮도록 하는 것이 참으로 지혜로운 삶이겠습니다. 삶은 선택이요 행복도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마지막날 주님께 봉헌할 “이야기(story;스토리)”와 “내용(contents;컨텐츠)” 풍부한 아름답고 거룩한 내 고유의 삶의 성경책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역시 다윗은 판단은 지혜로웠고 그의 인품은 참 멋지고 관대하고 훌륭했습니다. 오늘날 정치가들이 배워야 할 덕목입니다. 다윗은 부하를 꾸짖으며 사울을 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주님의 기름부받은이인 나의 주군에게 손을 대는 그런 짓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어쨌든 그분은 주님의 기름부은받은이가 아니시냐?”
새삼 성소의 신비를 묵상하게 됩니다. 이웃의 성소를 소중히 여기고 보호해주며 그들의 성소에 대해 왈가불가하지 말아야 함을 배웁니다. 하느님만이 아시는 각자 고유의 성소이기에 자칫하면 주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건방지고 교만한 어리석은 무지의 행위가 되겠기 때문입니다. 이런 다윗의 지혜롭고 관대한 처사가 사울을 회개하게 했고, 그 감동적인 내용은 제1독서 후반을 아름답게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결국은 다윗의 영적 승리요 주님의 신뢰와 더불어 그의 성소도 더욱 굳건해졌을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형제 도반들과 더불어 성화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 믿는 이들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따르고 섬기고 배우면서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성화의 여정중인 우리들입니다. 우리의 성소는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 과제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깨어 정성을 다해 내 고유의 삶의 성경책을 잘 써가도록 합시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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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9. 연중 제2주간 금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 가까이>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마르 3,13)
당신께 들을 만큼
당신 가까이
당신이 들을 만큼
당신 가까이
당신께 닿을 만큼
당신 가까이
당신이 닿을 만큼
당신 가까이
당신께 안길 만큼
당신 가까이
당신이 안길 만큼
당신 가까이
당신께 스밀 만큼
당신 가까이
당신이 스밀 만큼
당신 가까이
당신께 물들 만큼
당신 가까이
당신이 물들 만큼
당신 가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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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9. 연중 제2주간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리고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마르 3,18-19)
마태오의 새로운 이름
마태오의 이름이 둘이었다는 사실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마태오는 그가 받은 은총을 보증해 주는 이름인 ‘레위’로도 불렸습니다. ‘레위’는 ‘더해진 자 또는 ‘높이 들어 올려진’ 이라는 뜻입니다. 주님께 선택받음으로써 높이 들어 올려지고, 사도의 수에 더해졌다는 뜻입니다. 마르코와 루카는 복음 사업의 동지인 마태오의 지난 삶을 훤히 드러내지 않으려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레위라는 이름을 사용합니다(참조: 마르 2,14; 루카 5,27). 또 열두 사도 이름을 꼽을 때는 ‘레위’라고 하지 않고 마태오라고만 합니다(참조; 마르 3,18; 루카 6,15). 그러나 정작 마태오 자신은 ‘의인이 먼저 자기 자신을 고소하고, 그다음에 친구가 와서 그를 조사한다’(잠언 18,17 참조)는 말씀대로, 세관에서 부름 받은 이야기를 들려줄 때에는 평소 이름으로 자신을 일컫지만, 사도 명단에서는 “세리내}태 10,3)라는 별명을 분명히 덧붙여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라고 합니다. 세리들과 죄인들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더 큰 확신을 그들에게 심어 준 것입니다.
-존자 베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2
창조 – 밖으로 흐르되 안에 머물기
말씀을 선포하시오(2티모 4,2).
“말씀을 전하십시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말씀을 제시하십시오, 말씀을 낳으십시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말이 밖으로 발설되어 여러분 안으로 스며드는 것은 흔히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논의한 것은 밖으로 발설된 말이 아니라 안으로 발설된 말입니다. “말씀을 선포하여라” - 이것은 여러분이 여러분 안에 있는 것과 내적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말씀 하나, 나는 둘로 들었으나"(시편 62,12)라고 예언자는 말합니다. 이 말은 옳습니다. 하느님은 끊임없이 한마디만 하고 계십니다.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은 한마디뿐입니다. 이 한마디 속에서 그분은 아들을 말함과 동시에 성령과 모든 피조물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안에는 한마디의 발언만 있을 뿐입니다. 예언자는 ‘나는 물로 들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느님과 피조물이 귀에 들렸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이 피조물을 드러내시는 곳에 하느님은 계십니다. 피조물은 지금 여기에 존재합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이 저기에서만, 곧 역사적인 육화 속에서만 사람이 되셨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오래 전에 한 인간 안에 육화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에도, 바로 이 자리에도 계십니다. 그분이 사람이 되신 것은, 여러분을 독생자로 낳으시기 위해서였습니다.(105)
✝️ 금요일 성인의 날✝️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암브로시오
직무 수행자의 의무에 대하여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 저는 의도적으로 제 글의 도입 부분으로 이 시편들을 사용했습니다 ... 이 시편들이 지닌 의미와 뛰어난 생각들은 저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말씀들을 지키기를 권합니다. 불과 얼마 되지 않는 짧은 구절들 안에서 우리는 침묵하는 것을 배우고, 말해야 하는 때에 말하는 것과 부귀를 경시하는 것을 배웁니다. 이들은 덕행으로 나아가는 데에 매우 중요한 기본 바탕들입니다 ...
이들에 대해 몇몇 철학자들이 서술했습니다 ... 그러므로 저는 저의 직무에 합당하게 여러분에게 이 글을 썼습니다…. 저는 복음에 힘입어 여러분을 나의 형제로 가까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신혼부부가 나누는 사랑 못지 않은 사랑으로 여러분에게 이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은총은 자연이 사랑을 독촉하는 것보다 더 강하게 사랑을 독촉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와 함께하는 사람들보다 믿음으로 우리와 영원히 함께할 사람들에 대해 더 강한 사랑을 느낍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의 아버지에게 부끄러움만 가져오는 타락한 존재들입니다. 저는 여러분을 나의 사랑하는 자녀들로 선택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사랑은 오직 혈육 관계에서 성립합니다만. 이 혈육 관계는 서로 사랑을 나누는 데에 종종 적합하지 않고 오래 지속되는 사랑의 바탕이 되지도 못합니다. 여러분에 대한 사랑은 명백한 선택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이 선택을 통해 자연적인 사랑에 이보다 훨씬 더 깊이 나아가는 사랑이 더해 집니다.(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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