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에드문도 캄피온 순교자
런던의 한 서적상의 아들로 태어난 성 에드문두스 캠피언(Edmundus Campion, 또는 에드문도)는 가톨릭 신자로 성장하여, 불과 15세의 나이에 장학금을 받고 옥스퍼드 세인트 존스 대학을 다녔다.
그의 명석한 두뇌는 그 당시의 석학이던 레스터(Leicester)의 얼(Earl), 로버트 세실(Robert Cecil), 심지어는 엘리자베스(Elizabeth) 여왕까지 놀라게 할 정도였다.
그는 엘리자베스 여왕을 영국 교회의 으뜸으로 인정하는 수장령에 맹세하고, 1564년에 영국 교회의 부제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프로테스탄트 세력이 증대되는 사실에 의혹을 품고, 1569년에 아일랜드로 건너가서 공부한 후에 자신의 오류를 깨닫고 가톨릭으로 되돌아 왔다.
교황 비오 5세(Pius V)가 엘리자베스 여왕을 단죄함으로써 영국 내의 가톨릭에 대한 박해가 시작될 때, 그는 프랑스의 두에(Douai)로 가서 신학을 공부하였고, 예수회원이 되어 보헤미아(Bohemia)의 브르노(Brno)로 갔다.
그는 프라하(Praha)에서 대학 강단에 섰으며, 1578년에는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와 로버트 퍼슨(Robert Persons) 신부가 영국 선교사로 가는 첫 번째 예수회원이 되어 1580년 영국으로 떠났다.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그의 활동, 옥스퍼드의 대학 성당에서 행한 그의 연설 ‘데쳄 라시오네스’ (Decem Rationes), 그리고 유명한 브라그(Brag)의 간행은 그로 하여금 영국사에 한 획을 긋게 하였다.
그는 옥스퍼드 근교 리포드(Lyford)에서 체포되어 런던탑에 투옥되었고, 자신의 변호를 거부한 채 심한 고문을 받다가 타이번(Tyburn)에서 교수형을 받았다.
그는 진정한 사제였으며, 1970년 10월 25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잉글랜드(England)와 웨일스(Wales)의 40명의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가톨릭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