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606
9월7일[연중 제22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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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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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4mGyVqucg4s
(이정한 베르나르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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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악의 세력은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딱 한 마디 말씀,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로 마귀 들린 사람을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참으로 놀랍고도 시원시원합니다.
오랜 세월 동안 마귀 들린 사람과 가족들이 겪어온 고통은 참혹한 것이었습니다. 언제 어느 순간 마귀가 발작을 시작할지 모르니, 본인과 가족들은 늘 긴장 상태였습니다. 한번 발작을 시작하면, 길길이 뛰고 부르짖고, 잡아채고 집어던지니, 남아나는 물건이 없었을 것입니다. 틈만 나면 여기저기 들이받으니 온몸으로 상처투성이였을 것입니다.
한번 치유되어 보겠다고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이비 의료인들과 종교 지도자들을 찾아다녔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많은 돈을 갖다 바쳤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끝끝내 치유나 회복은 불가능했고, 이러다 제풀에 지쳐 죽겠지, 자포자기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저런 복잡한 절차도 필요 없었습니다. 치유의 대가로 목돈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강력한 한 말씀만 던지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예수님 말씀에는 다른 사이비 지도자들과는 달리 권위와 힘이 있었습니다. 말씀에 권위와 힘이 있다는 것은 말씀에 실행력이 있다는 것, 다시 말해서 예수님 말씀은 언행일치가 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자격도 전혀 갖추지 못한 지도자들이 얼마나 많은 감언이설과 어불성설의 허언 대잔치를 벌이고 있는지 모릅니다. 민생을 펴 드리겠다. 서민 경제를 살리겠다. 국민의 안전과 건강을 보장하겠다. 자유 민주주의 국가를 만들겠다.
그러나 그들의 말에는 실행력이 조금도 없습니다. 지도자에 앞서 한 인간 존재로서 가장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인성은 물론, 기본적인 지적 능력, 통상적인 판단력조차 결핍된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들에서 대체 무슨 권위와 힘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국가 지도자로서 어떻게 그렇게 해야 할 일은 하나도 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할 일만 딱딱 골라서 하는 모습에서 참담함을 넘어 서글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함과 광채 앞에 마귀는 물론 모든 악과 어둠의 세력이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나자빠집니다. 예수님의 고귀함 앞에 천박하고 속된 악령들이 자지러지고 물러납니다.
악의 세력은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함으로, 그 거룩함을 물려받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아무리 거대한 악이라 할지라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악의 힘이 너무 세서 감당하기 힘들다고 느껴질 때마다
우리는 세 가지 진리를 기억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극진히 사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매일의 성체성사를 통해 당신 생명을 내게 주십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확실히 현존하십니다. 그 힘으로 악과 결연히 맞서 싸워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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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의 요청 앞에 아무런 표징도, 특별한 그 무엇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묵묵히 순명했습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 복음 5장 4절)
안그래도 밤새 헛탕 치고 돌아온 베드로 사도였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그는 어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나자렛의 목수 출신이신 예수님, 고기잡이의 문외한인 예수님께서 고기잡이 전문가인 자신에게 조언을 해주신 것이 꽤나 고깝게 들렸을 것입니다. ‘이분이 지금 뻔데기 앞에 주름잡고 계시네!’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몬 베드로 사도는 참 착하고 순종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전문가적 판단에서 도저히 안 될 것이라는 것, 의미 없는 일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루카 복음 5장 5절)
시몬 베드로의 대답은 아마도 이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스승님, 저 이래봬도 전문직 어부 입니다. 이 근방에서 저 모르면 간첩입니다. 제 어부 경력이 30년입니다. 안될 것 뻔히 알지만 스승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예의상, 속는 셈 치고 그냥 한번 그물을 쳐보겠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홀로가 아니라 팀으로 고기를 잡던 어부였습니다. 두 척의 배 사이에 긴 저인망 그물을 바닥에 내려놓은 다음, 배를 이동시켜, 바닥을 끌면서 고기를 잡는, 이른바 저인망 어선을 몰았습니다. 이런 작업을 위해서는 적어도 4명의 어부가 필요했습니다.
어부들의 오랜 경험에 따르면, 동이 터오는 아침 시간에 그물을 치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었습니다. 잘 잡히는 밤 시간에도 고기를 못잡았다면, 아침 나절에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맞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무조건 그물을 내리라고 하십니다.
엉뚱한 시간에 그물을 내리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일종의 시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물을 내리라는 명령을 통해 시몬 베드로의 믿음, 그의 순응성, 스승을 향한 신뢰심 등등을 시험해 보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부르시고 선택하실 때 조건 없는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즉각적인 순명을 원하십니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하는 낙관성을 바라십니다. 이러한 요구는 나자렛의 마리아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습니다.
스승님의 명령에 따라 시몬 베드로가 보인 믿음을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와 동업자들은 잠시 후 엄청난 목격합니다.
사실 처음에는 내키지 않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그물을 내린 시몬 베드로였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그물을 끌어올리면서 깜짝 놀란 것을 넘어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세상에 머리털 나고 그렇게 많은 고기를 한꺼번에 잡아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 속 고기란 고기는 총집합 한 것 같았습니다. 얼마나 고기가 많이 잡혔던지 그물이 터질 지경이었고, 고기들을 쌍끌이 어선 위로 끌어올리니, 수많은 고기들의 무게로 배가 가라앉을 정도였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의 요청 앞에 아무런 표징도, 특별한 그 무엇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묵묵히 순명했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그는 자신이 받은 소명과 자신의 생애에 걸맞는 표징을 받았습니다.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강한 믿음이 요청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다양한 표징들을 통해 우리 인간의 믿음을 강하게 해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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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U9WOWMV9Lak<먹는 것이 내가 되고, 먹는 것에 먹혀 그것과 같은 운명이 된다>
오늘은 성시간이 있는 날입니다. 그래서 가톨릭스튜디오에서 오늘 강론을 하루나 이틀 뒤에 올린 것이니 그것을 보고 묵상하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성시간도 많이 참석하시어 함께 주님을 찬미하면 좋겠습니다 ^^ 2023,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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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강론입니다.
<나의 목소리와 주님의 목소리 구별하는 법>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배에 타시고 물고기를 많이 잡게 하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배는 보통 교회를 상징합니다. 하지만 좁게는 우리 각자 자신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우리 안에서 예수님께서 이래라저래라 명령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살다 보면 ‘이것이 하느님의 목소리인가?, 내 목소리인가?’ 구별하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오늘은 자신의 목소리를 따를 때의 극단적인 모습과 또 오늘 복음 말씀에서의 예수님의 목소리를 따를 때의 상황을 비교하며 내 안에서 울리는 주님의 목소리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아른힐 레우뱅의 『나는 자주 죽고 싶었고, 가끔 정말 살고 싶었다』에서는 저자가 어떻게 자아의 목소리에 휩쓸려 조현병까지 가게 되었는지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자는 자신 안의 자신의 목소리를 ‘선장’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의 베드로 배에서의 선장은 베드로가 아니라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선장으로 할 때 어떠한 모습인지 레우뱅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레우뱅이 ‘나는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할 때 이 고민을 멈추게 해 준 주인공이 자신 안에서 울려오는 ‘선장’의 목소리였습니다. 선장은 레우뱅이 다시는 혼자가 되도록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그냥 자기만 믿고 따르면 된다고 했습니다. 선장 없이 떠돌던 배 위의 작은 아기는 그 선장의 말에 솔깃했고 그가 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습니다.
“숙제를 조금 더 하는 게 좋겠다”라고 선장이 말했습니다. 그러면 레우뱅은 한 번 더 했습니다. “아직도 별로인데”라고 선장이 말했습니다.
“내 말을 믿으라고. 아직 좋아지려면 멀었어. 한 번 더 해!”
레우뱅은 선장을 믿었기에 숙제를 다시 했고, 참고 서적에서 다른 사례들을 찾아 전체를 한 번 더 매끄럽게 수정했습니다.
참고로 레우뱅은 조현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일정 기간은 우등생이었습니다. 하지만 선장은 만족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아직이야. 넌 진짜 멍청하구나. 내가 옆에서 도와주기에 망정이지. 한 번 더 해.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하라고.” 하지만 더는 무리였습니다. 새벽 4시였고 세 번을 다시 하다 보니 몹시 지쳐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까지 시간을 투자할만한 가치가 있는 숙제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선장은 말했습니다.
“너는 멍청한 데다가 게으르기까지 해.”
선장은 레우뱅의 뺨을 몇 차례 때렸습니다. 학교 화장실에 몰래 들어가서도 손찌검을 했습니다. 물건으로 때릴 때도 있었습니다. 레우뱅은 분명 자신의 손으로 자신을 때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몇 년 동안 이것은 잘못한 자신에게 당연히 가해지는 선장의 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성적도 곤두박질치고 레우뱅은 정신병원 독방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나를 이끌어줄 선장을 찾지 못하면 결국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뱀과 같은 자아가 자신을 조정하게 됩니다. 그걸 믿어버리면 이제 혼자 힘으로는 그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베드로가 어쩌면 밤새 물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상태일 수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라고 명령하십니다. 하지만 내면의 목소리는 크게 반대합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우선 목소리를 들었을 때, 그것이 내 생각과 반대되면 그것은 하느님의 목소리입니다. 자아는 숙제를 여러 번 반복해서 하면 더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설득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조약돌로 골리앗을 때려눕히고 홍해를 가르시는 분이십니다. 다윗은 그런 분을 의심하고 또 자아에 빠져 병적조사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라고 하실 때, 깊은 데는 바로 자아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에고(자아: ego)의 생각을 수장시키는 곳입니다.
두 선장의 목소리는 항상 반대되기 때문에 한 목소리를 따르면 다른 목소리는 죽습니다. 모세의 목소리를 따르면 파라오의 목소리는 죽고, 파라오의 목소리를 따르면 모세를 따를 수 없습니다. 주님의 목소리는 내 생각과 항상 반대됩니다.
그 목소리를 따르는 과정에서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어떤 목소리를 선택하든 둘 다 힘든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목소리를 따르는 것이 훨씬 편합니다. 그분의 멍에는 가볍고 편하지만, 파라오의 명에는 엄청난 노예살이입니다.
베드로는 밤새 그물을 던졌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목소리를 따르면 한 번만 던지면 됩니다.
결과를 보고도 알 수 있습니다. 자아를 따른 사람은 ‘자책’을 합니다. 열심히 했는데도 그것밖에 못 했다고 자책합니다. 이게 심해지면 자해까지 하게 됩니다.
하지만 주님의 목소리를 따랐을 때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결과를 낳습니다. 베드로가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겸손해집니다. 자신의 힘으로 한 일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라면 못 할 것이 없다고 믿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이렇게 주님의 목소리를 따름은 항상 더 큰 희망을 낳습니다.
우리는 두 선장의 목소리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내가 어떤 목소리를 선택했느냐는 처음과 과정과 결과에서 모두 명확히 구분됩니다. 내가 지금 따르고 있는 목소리의 선장은 누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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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5,1-11: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쳐라
회당에서 배척당하신 예수님은 겐네사렛 호숫가에서 배에 앉으시어 가르치신다. 예수께서는 시몬 베드로의 배를 빌어 육지에서 배를 조금 떼어 그 배에서 군중들을 가르치신다.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4절) 베드로는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5절) 베드로는 자기 일생을 고기 잡는 일로 잔뼈가 굵었고, 고기 잡는 일에는 이골이 난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의 말씀 앞에 모든 오만을 버리고 자신을 낮출 줄 알았다. “스승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물을 내리겠습니다.”(5절) 베드로는 전능하신 분의 말씀을 따랐다. 그 결과 그물이 찢어질 정도였다고 하였다. 고기 잡는 일에 그렇게 경력이 있고 능력 있던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따른 결과는 지금까지 자기 생애에 보지 못했던 엄청난 것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예수께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8절)
베드로는 자신의 모습이 주님 앞에 아무것도 아님을 느낀다. 자신의 죄를 생각할 때, 불결한 인간으로서 순결한 분을 감히 모실 수 없다고 생각하여 두려워한다. 그래서 그렇게 말했다. 예수님은 그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10절) 하셨을 때,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새로운 임무를 주신다. 베드로가 자신의 오랜 경험 등에 대한 모든 미련을 버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랐을 때, 커다란 체험을 하였듯이, 때로는 우리도 우리 자신의 고집을 버려야 할 때가 많다. 더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이 우리 자신을 비워야 하는지 오늘 복음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진정으로 우리 안에 살아있는 하느님의 말씀, 생명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살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삶 속에서도 항상 말씀이 강생하는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말씀을 강생시키는 삶, 여기에서 근본적인 우리의 변화를 가질 수 있다. 베드로와 같이 자기 생각이나, 고집, 고정관념을 주님의 말씀 앞에 모두 버렸을 때, 기적을 체험했듯이,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체험케 하고 하느님 안에 자녀로서의 기쁨과 구원을 체험하게 해줄 것이다. 우리 안에 강생하시는 말씀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삶을 열심히 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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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저는 1982년에 신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당시 입학생 대부분은 저처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교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몇몇 분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군대도 마친 후에 신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한두 살 차이가 나면 ‘형’이라고 부르지만 대부분 저보다 7살은 많았고, 그 중에 제일 나이가 많은 분은 저보다 15살이 많았습니다. 우리는 ‘형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제일 나이가 많은 형님은 1948년생이었고, 그 다음은 1952년생이었습니다. 그분들의 직업도 다양했었습니다. 어떤 형님은 학원 강사를 하였고, 어떤 형님은 보험회사를 다녔고, 어떤 형님은 장교였고, 어떤 형님은 시장에서 장사를 하였습니다. 가수 백지영의 ‘총 맞은 것처럼’이라는 노래처럼 형님들은 예수님을 따라서 세상의 것들을 모두 버리고 신학교로 왔습니다. 반듯한 직장을 포기하고 신학교에 들어온 형님, 모든 사람이 알아주는 대학교를 졸업했지만 기꺼이 신학교에 들어온 형님들을 보니 신학교에는 분명 세상의 것들보다 더 좋은 것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막 신학교에 들어온 저와는 생각의 폭과 깊이가 많이 달랐습니다. 그 형님들과 군대에 갈 때까지 4년을 함께 지냈습니다. 군대 갈 때는 형님들이 조촐한 파티를 열어주었습니다.
저는 마지못해서 하는 일들을 형님들은 기쁘게 하였습니다. 성소주일이나 축제를 마치면 청소할 것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습니다. 저는 일의 요령도 잘 모르고, 힘들어 하는데 형님들은 군대를 다녀와서인지 삽질을 잘하였고, 기쁜 마음으로 청소하였습니다. 저는 기도할 때면 졸리기도 하고, 집중이 잘 안되었습니다. 외출하고 한 잔 한날은 몸은 성당에 앉아 있지만 마음은 세상의 것들에 있었습니다. 형님들은 기도 시간이 행복해 보였습니다. 가장 나이가 많았던 형님은 더운 여름날에도 흐트러짐이 없었습니다. 세상의 어려움을 이기는 길은 오직 기도밖에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수업시간에도 그랬습니다. 저는 다른 책을 읽은 적도 있고, 늦게 들어간 적도 있었습니다. 형님들은 나이가 많아서 배움에 어려움이 있다면서 구도자의 자세로 수업을 들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장학금은 수녀님과 형님이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과 같다. 농부가 밭에 묻혀있는 보물을 발견하면 모든 것을 팔아서 밭을 산다.”고 하셨습니다. 형님들은 신학교라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을 발견하였고 모든 것을 버리고 신학교로 들어왔으니 그 기쁨이 충만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초대 교회의 사도들을 보면 어린 나이에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온 첫 번째 제자들은 어부였습니다. 베드로는 장모가 있었으니 결혼도 했었습니다. 바오로는 유대교의 정통파 바리사이였습니다. 당대의 스승인 가말리엘에게서 배웠습니다. 그런 베드로와 바오로도 총 맞은 것처럼 예수님께 사로잡혀서 사도가 되었습니다. 초대교회의 교부였던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마니교를 신봉했었습니다. 방탕한 생활도 했었습니다. 예수님의 오상을 받았던 프란치스코 성인도 방황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분들도 예수님께 사로잡혀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나이와 상관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직업과도 상관이 없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교에 들어갔던 많은 동기들도 이제는 서품 32년이 되었고,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더 많은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적은 빚을 탕감 받은 사람보다 더 많이 감사할 것이다.” 저 역시도 많은 빚을 탕감 받았으니 감사할 뿐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세월의 무게가 쌓이면서 조금씩 알 것 같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예’라고 응답하면 됩니다. 다른 것들은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방법으로 채워 주심을 믿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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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예수님께서는 그 두 배 가운데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그에게 뭍에서 조금 저어 나가 달라고 부탁하신 다음, 그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셨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루카 5,3-5)
이 이야기는 요한복음에 있는 이야기와 합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그곳에 다시 서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그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요한 1,35-37.40-41ㄱ.42ㄱ-ㄷ)
어부들은 제자로 부르심을 받기 전에 이미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있었고,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들었고,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신 일은, 그들을 처음 만나시고 나서 몇 달 뒤의 일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어부들 처지에서 생각하면, 그 몇 달은 부르심에 응답할 준비하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또는, 제자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부르심을 기다리는 시간이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 처지에서 생각하면, 어부들을 눈여겨보시면서 그들이 제자로 적합한 사람들인지를 살펴보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정하신 때에 그들을 제자로 부르시려고 작정하고 계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어부들이 어느 날 우연히 만나서, 만난 그날 바로 느닷없이 제자로 부르시고 그들이 갑자기 응답한 것은 아닙니다. 어부들은 이미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부르심을 받자마자 곧바로 응답할 수 있었고, 따라나설 수 있었습니다. 따라나설 때 모든 것을 버린 일도, 그렇게 하려고 이미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일입니다.>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라는 시몬의 말은, 먹고사는 일만 신경 쓰면서 사는 인생의 허무함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말입니다. <뜻에 따라 풀이하면, “저희는 지금 저희의 인생이 허무하다는 것을 깊이 느끼고 있습니다. 허무하지 않은 새 인생을 스승님께 청합니다.”가 될 것입니다. 뜻을 생각하면, 시몬이 먼저 간청했고, 예수님께서 그 간청에 대답하신 것으로 바꿔서 풀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라는 말씀은, 고기를 많이 잡는 방법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새 인생’을 사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깊은 데’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는(인도해 주시는) 길’, 또는 ‘주님께서 가시는 길’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나를 따라라.”와 같은 말씀이 됩니다. <이 이야기는 실제 일어난 일을 기록한 이야기겠지만, 뜻을 생각하면, 이야기 자체를 상징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부들을 위해서 ‘고기잡이 기적’을 일으키신 것은 그들을 제자로 삼기 위해서 하신 일이 아니라, 그들이 제자가 되었을 때 살게 될 새 인생이 어떤 인생인지를 가르쳐 주려고 하신 일로 해석됩니다. 어부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들이 예수님의 지시를 실행해서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은 일은, 주님의 권능을 체험한 일이기도 하고, 주님께서 가시는 길을 따라가면 허무하지 않은 새 인생을 살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고 믿게 된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 시몬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사실 베드로도, 그와 함께 있던 이들도 모두 자기들이 잡은 그 많은 고기를 보고 몹시 놀랐던 것이다. 시몬의 동업자인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그러하였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루카 5,6.8-11)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라는 말은, 초자연적인 주님의 권능에 대한 경외심과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을 때 자신이 하게 될 엄청난 일들에 대한 두려움과 예수님을 따르고 싶은 강한 희망 등이 섞여 있는 복잡한 심정을 나타낸 말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지금까지는 물고기나 잡아서 먹고사는 어부로 살았지만, 이제부터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사도로 살게 될 것이다. 너의 새로운 인생을 두려워하지 마라.”로 해석됩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을 따라나서면서 모든 것을 버렸다는 말은, ‘새길(새 인생)’을 선택함으로써 ‘옛길(옛 인생)’을 버렸다는 뜻이기도 하고, ‘좁은 문’을 선택함으로써 ‘넓은 문’을 버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루카 13,24)
<신앙인은 ‘부르심’에 응답하고 주님을 믿기 시작함으로써 ‘새 인생’을 살게 된 사람입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깊은 데’에서 그물을 내리는 생활이고, 신앙인이 그 그물로 잡게 되는 첫 번째 물고기는 바로 자기 자신의 ‘새 인생’입니다. 우리는 이미 버린 길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을 버려야 합니다. 오직 앞만 보면서, 즉 앞에 계신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계속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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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는 이야기가 예수님 공생활의 시작에 나타납니다.(마태 4,18-22; 마르 1,16-20 참조)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만난 어부들에게 당신을 따르라 하시니 그들이 순순히 그분을 따릅니다. 루카 복음서 저자는 그러한 어부들의 모습이 조금은 비현실적으로 보였는지, 부르심에 관한 이야기를 카파르나움 활동 다음으로 옮깁니다. 그래서 시몬 베드로는 부르심을 받기 전에 카파르나움에서 일어난 기적들, 특히 자신의 장모가 치유되는 기적을 목격한 사람이 됩니다.(어제 복음) 그리고 오늘 복음이 전하는 고기잡이 기적도 그가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순히 따를 수 있는 현실적인 배경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어부가 듣기에 짐짓 불쾌하거나 황당한 명령이 아니었을까요? 베드로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였을지 모릅니다. ‘아니, 나자렛 출신 주제에 어업에 대하여 알면 얼마나 안다고 감히 그물을 내려라 마라 한다는 말인가? 우리가 밤새 노력하였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는데, 다시 그물을 내린다 한들 허탕을 칠 게 너무 뻔하지 않은가?’ 받아들이기 힘든 명령이었으나 베드로는 어찌하였든 해 보려고 합니다. 카파르나움에서 본 일처럼 ‘혹시나’ 하는 마음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한번 예수님의 기적을 강렬하게 체험합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이는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며 ‘사람을 낚으라.’는 주님의 명령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저합니다. 사실 요즘은 복음을 전하는 일이 너무나 어렵게 느껴집니다. 신자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돌아오는 것은 사람들의 시큰둥한 반응뿐이라며, 오히려 선교를 하면서 받는 상처만 크다고 하소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체험하였기에 그분께서 지니신 놀라운 능력을 고백합니다. 겉보기에는 척박한 땅이거나 텅 빈 바다처럼 보일지라도, 그런 곳에서도 거두어들이시는 분의 권능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저 묵묵히 땅에 씨를 뿌리고, 바다에 그물을 내리는 일을 합시다. 나머지는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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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군중이 예수님께 몰려듭니다. 그분께서 들려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에 목말라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하십니다. 그렇게 하여 많은 물고기를 잡은 시몬 베드로는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라고 두려움에 휩싸여 자신도 모르는 말을 내뱉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뿐 아니라 그의 동생과 동료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우리는 평소에 얼마나 예수님을 그리워합니까? 얼마나 보고 싶어 합니까? 그분께서 우리에게 오신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우리도 곧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났을 때 베드로와 같이 자신도 모르는 말을 하지 않으려면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아이의 아버지처럼 불신을 버리고 주님께 도움을 청하며 (마르코 복음 9장 24절 참조), 신랑을 맞으러 나간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애덕을 통하여 등잔에 기름을 준비하고(마태오 복음 25장 4절 참조),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많은 민족들의 믿음의 아버지가 된 아브라함처럼 (로마서 4장 18절 참조) 어떠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믿음을 바탕으로 한 희망을 주님께 두어야 합니다.
믿음, 희망, 사랑은 주님을 만나기 위하여 우리가 준비해야 할 자세이며, 신자들이 살아가는 ‘덕’입니다.
언젠가 주님을 만났을 때 베드로 사도처럼 두려워하지 말고 이렇게 말합시다. “주님, 이 순간을 위하여 제 삶의 등불을 밝히고 주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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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에파프라스가 그의 고향인 이곳에 공동체를 세웁니다.(콜로새서 4장 12절)
수인이 된 바오로는 에파프라스 편에 콜로새 공동체의 어려운 처지의 소식을 전해 듣고 티키코와 오네시모스를 그곳으로 보냅니다.
사도 바오로는 비록 감옥에 있지만 골로새 공동체를 세운 그의 제자 에파프라스 (콜로새서 4장 12절)나 후에 그곳으로 파견했던 티키코스와 오네시모스 편 (콜로새서 4장8)으로 그곳의 어려운 처지에 대한 소식을 여러 차례 들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심정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에 관한 소식을 들은 날부터 여러분을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며 간청하고 있습니다.”(콜로새서 1장 9절)
사도 바오로는 어려움에 처해 있는 그 공동체가 영적지혜와 깨달음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알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공동체가 모든 면에서 주님의 마음에 들 뿐 아니라 온갖 선행을 통하여 열매를 맺으며 하느님을 아는 지식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뜻을 또한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스런 능력으로 모든 것을 참고 견딜 수 있기를 사도는 격려하며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 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이 아드님 안에서 우리는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습니다.“(콜로새서 1장 13절-14절)
루카는 예수님께서 요르단에서 세례를 받으시고(루카 복음 3장 21절-22절), 광야로 가시어 사십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신 일 (루카 복음 4장 1절-13절)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전도를 시작으로 나자렛 회장에서 희년을 선포하십니다. 여러 회당을 다니시며 가르치시고 더러운 영을 쫒으실 뿐 아니라 병자를 고치시며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그분께서는 갈릴래아를 떠나 유다의 여러 회당을 다니시며 전도여행을 하십니다.(루카 복음 4장 42절-43절)
예수님께서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군중을 가르치실 때에 호숫가에 배를 대어 놓은 두 척의 배를 보십니다. 주님께서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뭍에서 조금 저어 가달라고 하시고 배에서 군중을 향해 가르치십니다.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사몬에게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 복음 5장 4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시몬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는데 주님의 말씀대로 하니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고기가 잡힌 것입니다.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두 배에 고기를 가득해웁니다.
이것을 보고 시몬은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합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복음 5장 8절)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루카 복음 5장 10절)
그들은 배를 저어가 뭍에 대고 나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사도 바오로가 자신을 가 본적이 없는 콜로새 공동체를 걱정하며 서간을 보내는 모습은 ‘어디서 저런 열정이 나오는 것일까?’라는 말과 함께 우리를 감동시킵니다.
주님께서 겐네사렛 호숫가에서 배에 오르시어 군중을 가르치시는 그 모습을 새겨봅니다. 하느님 나라 선포의 열정은 바로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오는 것이지요. 우리도 우리의 부족함에 머물지 말고 주님과 복음에 대한 열정을 갖고 이 세상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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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버리고 떠나기>
어디로 떠난다는 것은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희망입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한다는 것은 새로운 것에 적응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더 좋은 것을 기대하며 희망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길을 떠났던 아브라함,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길 바랐던 성모님의 모습에서 “절망 속에서도 희망”(로마4,18)해야 한다는 믿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많은 수고와 땀을 통해 일구어 자리를 잡은 삶의 터전을 떠난다는 것은 많은 미련과 아쉬움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명을 받았으면 후회가 없어야 합니다.
성직자나 수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있고 싶은데 떠나라는 명을 받고, 빨리 떠났으면 좋겠는데 더 있으라는 명을 받기도 합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그러면서도 내일 당장 떠날 것처럼 살아야 하는 것이 성직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때가 되면 자기가 움켜잡고 있던 모든 것을 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떠났으면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안주하면 더 이상 성장할 수 없습니다.
엉뚱한 생각을 해 봤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 추기경으로서 교황으로 선출되리라고 생각하셨을까? 선출되면 다시 그리로 돌아가지 못하시는데 짐 정리는 다 해놓고 오셨을까? 소지품들은 어떻게 처리하실까? 아니 추기경 관저에서 살지 않으시고 방 한 칸의 아주 검소한 아파트를 임대하여 간단한 저녁식사를 직접 해 드셨고, 버스로 출퇴근하며, 근검한 선교사들에게 추기경 숙소를 내놓으셨다니 아예 정리할 것도 버릴 것도 없이 사신 것은 아닐까? 세상의 권력은 다 버리고 주님의 권위와 겸손으로 만족하셨음에 존경과 사랑을 드립니다.
시몬 베드로는 고기 잡는 어부였습니다. 어부가 고기를 잡는 이유는 생계를 유지하고 더 나은 윤택함을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밤새 고기를 잡으려 애썼지만 잡지 못했습니다. 실망 속에 그물을 정리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하셨습니다. 시몬은 말씀대로 그물을 내렸고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믿고 주님의 말씀대로 했더니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했는데 차고 넘쳤습니다. 순명은 기적을 낳았습니다. 믿음은 순명을 낳고 순명은 기적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기쁨보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어부가 많은 고기를 보고 두려워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지만 현실입니다. 전에는 고기만 봤는데 이제는 능력의 예수님을 볼 수 있는 눈이 뜨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하고 고백합니다. 그는 주님을 가까이 모시기에는 너무도 부족한 자기의 모습을 또한 보았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하시며 죄 많은 자의 고백을 기쁘게 받아들이셨습니다. 마침내 주님의 능력과 자비를 체험한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자기의 어부로서의 지식과 경험, 상식, 그야말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어부가 배를 놓고, 고기를 놓고 떠난다는 것은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두려움을 없애주시고 사람을 낚을 사명을 주시니 절망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간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고기 잡는 어부가 아니었습니다. 인생의 목적과 의미가 바뀌는 제자로서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사도로 살게 된 것입니다.
떠난다는 것은 단순히 몸이 떠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내가 부여잡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합니다. 지식이나 경험, 업적, 애착…인정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주님을 만나는 데 걸림돌이 되는 하나를 버리는 가운데 새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거듭나고 싶은 만큼 버려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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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림 그리기 대회에 나간 주인공이 ‘불꽃놀이’를 주제로 불꽃과 검은색 밤하늘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이 그림을 본 친구가 이렇게 말합니다.
“밤하늘이 마냥 검은색인 건 아니야.”
주인공은 밤에 빛이 없으니 검은색이 맞다고 우겼지만, 상을 받은 것은 짙은 남색으로 밤하늘을 칠한 친구였습니다. 그때 주인공은 처음으로 하늘을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파란색, 붉은색, 연보라색을 거쳐 짙은 남색이 된 하늘을….
인상적인 이야기였고, 동시에 나 자신을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말입니다. 그냥 막연하게 ‘이럴 것이다’라며 판단했던 적이 참 많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읽고 있는 역사책이 있습니다. 많은 시간이 지난 뒤에야 제대로 된 판단이 가능해짐을 깨닫습니다. 당시의 군주는 최고의 선택을 했다고 생각했겠지만, 역사는 최악의 선택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최악의 선택을 했던 당시의 군주는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누구나 자기 역사를 만들어 갑니다. 그러나 좋은 역사를 만들기 위해서는 지금을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눈에 보이는 것만 보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너머에 있는 그 사람의 믿음을 보셨고, 겸손을 보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시선으로 봐야 나의 좋은 역사를 만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를 부르십니다. 베드로는 호숫가에서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꾸리는 어부였습니다. 어부의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이 겉모습만을 보고서 과연 장차 교회의 반석이 될 것임을 누가 알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만이 알아보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릅니다. 어떤 목수가 어부에게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라고 말하면, 어떤 어부가 따를까요? 베드로가 예수님 말씀을 따를 수 있었던 것은 굳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는 엄청난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지요.
예수님을 통해 베드로는 어부라는 자기의 옛 역사가 아닌, 삶의 변화가 이루어져서 예수님의 제자라는 새 역사를 쓰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자기의 가장 좋은 역사를 만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앞으로 평가될 자기의 역사를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과연 주님과 함께하는 가장 좋은 역사를 만들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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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을 낚으러>
루카 5,1-11 (고기잡이 기적-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다)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시고, 군중은 그분께 몰려들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였다. 그분께서는 호숫가에 대어 놓은 배 두 척을 보셨다. 어부들은 거기에서 내려 그물을 씻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 두 배 가운데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그에게 뭍에서 조금 저어 나가 달라고 부탁하신 다음, 그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셨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 그래서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다. 동료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시몬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사실 베드로도, 그와 함께 있던 이들도 모두 자기들이 잡은 그 많은 고기를 보고 몹시 놀랐던 것이다. 시몬의 동업자인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그러하였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사람을 낚으러>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루카 5,10)
사람을 낚으러
사람에게로
사람에게
거부당할지라도
사람에게 오신
주님 따라 주님처럼
사람을 낚으러
사람 속으로
사람에게
버림받을지라도
사람 속으로 들어오신
주님 따라 주님처럼
사람을 낚으러
사람과 함께
사람에게
상처받을지라도
사람과 함께하신
주님 따라 주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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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3년 09월 07일 - 연중 22주 목요일
<영적인 지혜와 깨달음을 얻으려면>
바오로 사도는 오늘 영적 지혜와 깨달음에 관해 얘기합니다. 그런데 지혜와 깨달음에는 영적인 것만 있는 것이 아니지요.
생활의 지혜나 삶의 지혜도 있으며 이런 지혜는 보통
깨달음을 통해서 얻게 되는 것 곧 깨달음의 결실입니다.
버리는 것을 가지고 유용한 것을 만드는 것과 같은
생활의 지혜가 있으면 얼마나 삶에 유익이 많겠습니까? 우리 가운데서는 이렇게 지혜가 뛰어난 분이 많습니다.
저도 주방에서 같이 일하시는 분도 정리를 잘하지 못하는 편입니다. 그런데도 저는 정리가 잘 되어 있기를 바라는 모순적인 사람인데 얼마 전 한 분이 팔을 걷어붙이고 정리하니 순식간에 깔끔해졌습니다. 그야말로 모두가 깜짝 놀랄만한 정리의 달인이요 생활의 지혜가 있는 분이셨지요.
그런가 하면 인생의 지혜를 갖춘 사람도 많습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욕심이 우리를 병들게 한다는 것을 깨닫고 욕심을 버리고 심신이 건강하게 사는 것이 최고라는 지혜를, 모든 걸 잃어도 사랑을 얻고 사람을 얻는 것이 제일 값진 것임을 깨달은 결과 사랑도 얻고 행복도 얻는 지혜를 갖춘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깨달음과 지혜란 어떤 것입니까?
여러 가지로 얘기할 수 있겠지만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따르면 하느님의 뜻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지는 것이 영적인 지혜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주님께 합당하게 살아감으로써 모든 면에서 주님 마음에 들고 이웃에 대한 온갖 선행으로 열매 맺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을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며 간청하고 있습니다. 곧 여러분이 모든 영적 지혜와 깨달음 덕분에 하느님의 뜻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지고 그 지식이 자라기를 빕니다.”
그러면 이런 영적인 깨달음과 지혜는 어떻게 얻습니까? 이것을 우리는 오늘 베드로 사도의 하느님 체험과 연결해 볼 수 있겠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고기잡이의 달인입니다. 고기 잡는 데 지혜가 많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의 생활의 지혜가 그날은 아무 쓸모가 없어졌습니다.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나타나시어 치라고 하시는 대로 그물을 치니 엄청나게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사실 주님께서 그물을 다시 치라고 하셨을 때 달인인 내가 밤새도록 애썼는데도 안 되니 싫다고 거절할 수도 있었는데 전날 자기 장모를 예수께서 치유해주신 것을 봤기에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하고 그물을 칩니다.
그리고 예수의 무한한 능력을 보고 자기의 한계를 봅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유한함을 깨닫고 더 나아가 자기가 죄인임을 깨달으며 동시에 예수는 스승 정도가 아니라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주님임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스승이던 예수님 호칭이 주님으로 바뀌고, 죄인이니 떠나가 달라던 그가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는 주님 뜻을 따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영적인 지혜는 영적인 깨달음을 통해서 얻는 것이고, 영적인 깨달음은 영적인 체험을 통해서 얻는 것이며, 영적인 체험은 자기의 인간적인 힘과 지혜로 한 일들이 좌절되고 그 좌절로 인해 오히려 하느님을 만나게 될 때 하게 되는 겁니다.
인간적 좌절-영적인 체험-영적인 깨달음-영적인 지혜의 순서가 성립됨을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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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내적 여정의 순례자들>
“함께와 홀로”
- 예수님은 우리의 평생 유일한 가이드 -
어디서부터 강론을 시작할지 모르겠습니다. 인터넷을 열어보니 국내외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갑니다. 어제처럼 만세오창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이념의 늪에서 민생을 구하겠습니다.”인터넷 뉴스를 보다 마음에 와닿은 말마디입니다. 정말 시급한 것이 민생이요 정치도 민생을 위해 존재합니다. 엊그제 받은 녹색평론 183호가 반갑고 기뻤습니다. 맨처음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근대문명은 쓰레기를 생산하는 시스템이다. 망가져버린 지구 물질대사 사이클의 한쪽에서는 물, 표토, 광물, 생물 등 기초적 자원들이 급격히 사라져가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처리되지 않는 쓰레기들이 더 빠르게 쌓여가고 있다.”
쓰레기들은 제가 요즘 부쩍 실감하는 현실입니다. 쓰레기를 치우는 원장수사에 물으니 1주에 3회, 쓰레기를 치운다 했습니다. 쓰레기를 볼 때마다 깊은 좌절감에 죄책감을 느낍니다. 먹고 살아간다는 것이 지구에 죄를 짓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정말 안팎으로 쓰레기를 최대한 적게 내고 살아가는 것이 잘 사는 길임을 깨닫습니다. 쓰레기들이 양산되는 시절 급기야 사람들도 쓰레기 취급을 받기도 하는 비일비재한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사람 자신도 쓰레기처럼 처신하지 말아야 합니다.
“깨어 있어라!”
정말 작금의 타락한 현실에서 늘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할 말마디입니다. 어제 수요일 베드로 광장에서 일반 알현시간 교황님의 몽골 방문 소감도 우리를 되돌아보게 하는 가르침이었습니다.
“나는 얼마동안 아시아의 중심에 있었고 그것은 나에게 참 좋았다. 내가 몽골 사람들을 만났을 때 좋았던 것은 그들이 자신의 뿌리와 전통을 애호하고, 자신의 어른들을 존경하고 주위 환경과 조화되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늘을 바라보며 창조의 숨결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우리의 옛 모습도 이랬습니다. 정말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너무 많은 우리 현실이 마음 아프게 와닿습니다. 사상누각, 흡사 모래위의 집처럼 위태해 보이는 우리의 불안한 현실입니다. 어제 우리 수도원은 아랫집 수녀님들과 함께 가을 소풍을 다녀왔습니다. 우리 수도원의 14명과 아랫집 수녀님들 10명이 자동차 셋에 분승하여 전번 삼척의 덕항산德項山에 소재한 환선굴에 이어 대금굴을 순례여정하듯 가을 소풍을 다녀왔습니다. 5억 3천만년전에 생긴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덕항산속의 굴이었습니다.
대금굴안에 흐르는 물소리는 얼마나 우렁찬지 흡사 세찬 강물 소리와도 같았고 폭포소리도 모습도 장관이었습니다. 12시부터 1시까지 무려 1시간 동안 걸었던 참 긴 강같은 굴이었습니다.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정말 내적 순례 여정을 상징하는 듯 한 1시간 동안 걸었습니다. 대자연의 신비앞에 저절로 대침묵이었습니다.
“산같은 정주의 수도원이라면, 수도승이라면 이런 정도의 대금굴같은 강을 지녀야 하지 않겠어요?”
제 말에 “저는 싫습니다. 너무 복잡하고 시끄럽습니다.” 원장 수사의 즉각적인 답변이었습니다. 그런데 밖에서는 백두대간 태백산맥에 위치한 1070m 덕항산은 산속에 무려 큰 강같은 환선굴과 대금굴을 지니고 맑은물을 끊임없이 쏟아내니 놀랍기 짝이 없습니다. 저 역시 덕항산을 닮아 날마다 맑은 강물같은 강론을 쏟아내야 하겠다는 결심을 새로이 했습니다. 말그대로 “산속의 강”같습니다. 마침 전에 인용했던 제 애송시에도 딱 맞는 모습입니다.
“밖으로는 정주의 산, 천년만년
끊임없이 한결같이 임 기다리는 산,
안으로는 강, 천년만년
끊임없이 한결같이 임향해 맑게 흐르는 강,
산속의 강”
밖으로는 산, 안으로는 강, 산속의 강 같은 내적 여정의 삶, 제가 늘 소망하는 삶이요, 정말 이런 한결같은 내적 여정의 삶이라면 참 멋질 것입니다. 밖으로는 정주의 산, 성 베네딕도를 살고, 안으로는 강같은 성 프란치스코를 살라는 성 베네딕도회 이수철 프란치스코 수도사제로서 제 신원에 만족합니다. 바로 여기서 착안한 오늘 강론 제목, “내적 여정의 순례자들- 함께와 홀로-”입니다. 어제의 대금굴 가을 소풍은 혼자라면 의미도 없고 엄두도 못냈을 것입니다.
24명이 함께, 내적 여정을 상징하는 가을 소풍에 주님을 찾는 내적 여정의 순례자들이 되어 떠났던 것입니다. 함께 하되 홀로의 순례 여정이었습니다. 또 내적 여정을 상징하는 대금굴 탐사 여정에는 가이드가 앞장 섰습니다. 새삼 내적 여정의 순례자들에게 필수적 전제 조건이 영적 가이드, 안내자임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함께와 홀로의 내적 여정의 순례자들인 우리의 평생 유일한 영적 가이드, 안내자는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시편23장이 고백하는 바로 우리의 영원한 착한 목자 예수님, 얼마나 큰 위로와 평화, 격려가 되는지요!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파아란 풀밭에 이몸 누여주시고, 고이 쉬라 물터로 나를 끌어주시니 내 영혼 싱싱하게 생기 돋아라. 주께서 당신 이름 그 영광을 위하여, 곧은 살 지름길로 날 인도하셨어라. 죽음의 그늘진 골짜기를 간다해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나이다. 당신의 막대와 그 지팡이에, 시름은 가시어서 든든하외다.”
바로 착한 목자이자 최고의 영적 가이드 예수님을 은총의 선물처럼 만난 오늘 복음의 베드로 일행 어부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의 배에 오르신 다음 군중을 가르치신후 시몬에게 명령하시니, 주님의 개입이 참 은혜롭습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어디가 깊은 데입니까? 바로 주님이 함께 하시는 오늘 지금 여기 내 삶의 자리, 꽃자리가 깊은데입니다. 시몬의 대답이 참 솔직하여 마음에 와 닿습니다. 언뜻 영적 가이드 예수님을 알아챈 듯 스승님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영적 가이드 예수님 말씀에 순종합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밤새 노력을 다했지만 인생 바다에서 물고기가 아닌 허무만 가득 길어 올렸던 것입니다. 즉시 생각나는 시편127장 전반부 내용, 시몬 베드로는 아프게 깨달았을 것입니다.
“주께서 집을 아니 지어 주시면, 그 짓는 자들 수고가 헛되리로다.주께서 도성을 아니 지켜 주시면, 그 지키는 자들 파수가 헛되리로다.이른 새벽 일어나 늦게 자리에 드는 것도, 수고의 빵을 먹는 것도 너희에게 헛되리로다.”
베드로는 신속히 주님의 명령에 순종했고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물고기를 잡으니 배가 가다앉을 지경입니다. 바로 그 순간, 전광석화 베드로는 주님을 만났고 즉각적인 회개가 뒤따릅니다. 스승이자 주님이신 영원한 영적가이드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의 즉각적 응답에 주님의 따뜻한 위로와 격려입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많은 사람입니다.”
주님의 거울에 비친 죄많은 자기 얼굴을 발견한 베드로의 즉각적 응답입니다. 주님을 만남으로 회개를 통해 참 자기 얼굴을 발견한 베드로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미련없이, 지체없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나선 시몬을 위시한 어부들입니다. 이제부터 당신을 따르는 이들의 순례 여정에 영원한 영적 가이드가 된 주님입니다. 그대로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의 영원한 순례 모델이 되는 예수님과 그 어부들입니다. 사람마다 주님을 따르는 양상은 다 다릅니다. 각자 공동체 삶의 자리에서 동료 순례자들과 함께 날마다 온맘과 온힘으로 새롭게 예수님을 따라 나서면 됩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의 콜로새 교회를 위한 기도는 그대로 이런 우리를 위한 기도가 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다음 이 기도대로 이뤄주시어 성공적 내적 순례 여정을 살게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모든 영적 지혜와 깨달음 덕분에 하느님의 뜻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져, 주님께 합당하게 살아감으로써 모든 면에서 그분 마음에 들고 온갖 선행으로 열매를 맺으며 하느님을 아는 지식으로 자라기를 빕니다. 또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능력에서 오는 모든 힘을 받아 강해져서, 모든 것을 참고 견디어 내기를 빕니다.”
바오로의 우리를 위한 간절한 기도에 이어 다음 말씀이 우리를 더욱 용기백배, 사기충천하여 내적 순례 여정 길을 걷게 하며,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 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콜로1,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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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루카5,5)
<대박과 따름!>
오늘 복음(루카5,1-11)은 '고기잡이 기적과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어 군중을 가르치시고 난 후, 시몬 베드로에게 이렇게 이르십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잡아라."(5,4)
그러자 시몬이 예수님께 대답합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5,5)
시몬 베드로의 이 결정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는 일에는 베테랑이라고 여겼을 베드로가 교만함을 드러내지 않고 예수님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 결과는 대박!'
그렇게 하자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됩니다. 이 기적에 베드로는 몹시 놀라,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5,8)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5,10) 그러자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업자들인 야고보와 요한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순종의 결과인 대박!'
'그리고 따름!'
모두가 대박이라는 기적을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대박은 물질적인 대박이 아닙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참자유와 참기쁨과 참평화를 지금 여기에서 누리는 대박입니다. 그리고 내가 변하는 기적의 대박입니다. 내가 세속적인 사람에서 하느님의 사람으로 변하는 대박입니다. 내가 예수님의 사람이 되어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기적의 대박입니다.
그러니, 내가 하느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면서도. 내가 성체를 받아 모시면서도. 내가 말씀을 필사하고 기도하면서도. 내가 변하지 않는다면 거짓 자녀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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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Yg1cpq6uLT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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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루카 5, 5)
지나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우리들
시간입니다.
깊은 데서
건져올리게 되는
아픔의 빛나는
교훈입니다.
서로를 살리는
교훈으로
이끄시는 분은
모든 것을
아버지 하느님께
맡기시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믿음의
풍요로운
삶의 깊이를
잃은 우리들에게
믿음의 깊이를
되찾아주십니다.
믿음이란
순명하면 할수록
더욱 깊어지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힘겨움을
꿋꿋하게
짊어지고
가셨던
겸손한 성인을
기억합니다.
깊어져야
내려올 수 있는
진실한
사랑입니다.
사랑은
시련을 통해
더욱 깊어지는
믿음입니다.
그때 그때마다
믿음을 주시고
사랑을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에겐
주님이 계십니다.
그물을
끌어올리니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큰
선물이었음을
비로소
알게됩니다.
가장 깊은 곳에
가장 풍요로운
사랑의 만남이
있음을 믿습니다.
오늘도 그물을
힘차게 던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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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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