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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여성시대 복숭아 크림파이, KBS 각시탈, 위키피디아
이름높은 포도대장인 조부와, 서자였으나 매우 총명하여 마지막 과거에 합격했었던 부친 밑에서 자란 그.
그의 부친은 고종의 신임을 받던 인물이었는데, 철저한 반일주의자였다.
일본에 의해 신변에 위협이 가해지자 고종은 그의 부친을 보호하기 위해 미국 워싱턴 공사로 임명한다.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간 그는 미국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고, 프랑스와 러시아에서 중등학교를 다녔고, 군사학교도 마쳤다.
그는 당시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의 3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조선인이었다.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면서 일본은 각국 주재 한국 외교관의 소환령을 내린다.
그러나 그의 부친은 고종황제의 뜻을 알고 있었으므로, 대한제국으로 귀국하지 않는다.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자, 본국에서 송금하는 유지비용도 끊겼으나 그는 부친과 함께 비공식적인 외교활동을 계속하며
일본의 불법척인 침략과 대한제국의 상황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온 힘을 다한다.
일본의 침략을 세계에 알리고, 국제사회의 여론을 통해 대한제국의 주권을 되찾으려는 고종의 의지에 따라 그는 그 외의 2명의 동료와 함께 네덜란드로 떠난다.
유능한 외교관이던 그의 아버지가 러시아 황제에게 이들을 위해 러시아 호위병의 보호를 요청한 덕분에, 그들은 네덜란드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보호받는다.
그들은 사연을 길게 적은 글(長書)과 그 부속문서인 ‘일인불법행위(日人不法行爲)’를 프랑스어로 작성하였다.
그러나 정작 이들은 네덜란드에는 도착하였으나 국제회의가 열리는 장소에는 입장할 수가 없었다.
대한제국은 이미 외교권을 상실하였으므로 대표를 파견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작성한 내용을 일본 외의 40여 개 참가국 위원에게 보냈고, 각국 위원들에게 지원을 호소했다.
그러나 각국 대표는 모두 이를 거절했다.
그는 출입이 거부당하여 문이 닫힌 회의장 앞에서,
동료들과 함께 ‘왜 대한제국을 제외하는가’라는 성명서를 프랑스어로 작성해 회의장 입구에서 배포하며 일제의 부당함을 크게 외친다.
그러자, 국제회의를 취재하기 위해 왔던 한 기자가 그에게 의문을 느껴 질문한다.
“여기서 무엇을 하십니까? 왜 딱한 모습으로 나타나서 이 모임의 평온을 깨뜨립니까?”
그는 대답하였다.
“흔히 제단이 이곳에 있다고 말하는, 법과 정의, 평화의 신을 혹시라도 이곳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먼 나라에서 왔습니다.”
기자는 그의 말에 대답하였다.
“드 마르땅(de Martens)씨가 1899년 숲 속의 집(제1차 만국평화회의 장소)에서 이 제단을 찾았습니다.”
그도 대답하였다.
“1899년, 그때부터 법의 신께서는 무명의 신이 되셨군요. 도대체 이 방에서 대표들은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기자는 그에게 말했다.
“그들은 전 세계의 평화와 정의를 보장하기 위한 조약들을 체결할 것입니다.”
그는 조소와 함께 말하였다.
“조약들이요? 조약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내가 그것에 대해 말해 보겠습니다. 내가 알고 있습니다. 왜 대한제국이 이 회의에서 제외됐습니까? 조약들이란 바로 위반되도록 만들어지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자는 당황하여 말하였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말하였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정의란 없군요. 여기 평화회의가 열리는 이곳에서조차도. 당신들은 우리 한국인들에게 이렇게 얘기하려는 것이로군요. 결국, 가증스럽게 당한 치욕을 회복할 길은 없고, 정당한 조약이 불법적으로 위반됐다고 항의해도 무시되며, 또 한 나라의 독립은 그것의 국제적인 보장 여부와 관계없이 침탈당할 수 있는 것이라고….”
기자는 말하였다.
“당신은 일본이 강대국임을 잊고 있습니다.”
그러자 그는 기자의 말에 반박하였다.
“그렇다면, 당신들이 말하는 법의 신이란 유령일 뿐이며, 정의를 존중한다는 것은 겉치레에 지나지 않고 당신들의 기독교란 한낱 위선에 불과합니다. 왜 대한제국이 희생되어야 합니까? 대한제국이 약자이기 때문입니까?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정의, 권리, 그리고 법에 대해 말할 수 있겠습니까? 왜 대포가 유일한 법이며 강대국들은 어떤 이유로도 처벌될 수 없다고 솔직히 시인하지 않습니까?”
기자는 변명하려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는 참지 못하고 말을 가로챘다.
“싫습니다.”
“정의에 대해 나에게 말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소위 말하는 평화주의자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나에게서 당신 신념과 어긋나는 점을 찾아보십시오. 대한제국은 무장하지 않는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대한제국은 침략적 야심이라고는 전혀 없는 나라였습니다. 대한제국은 평화롭게 조용히 살아갈 것만을 원했습니다. 대한제국이 주변 강대국들에 대행해 성공적으로 국토를 방어해 내기 어려운 나라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대한제국은 구릉 하나하나가 천연요새를 이루는 산악 국가이며, 이천만 우리 민족은 우리나라를 극동의 스위스처럼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쟁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평화를 사랑하는 국민이었습니다. 내가 여기 이 문 앞에 앉아 있다는 이 사실은, 칼이 아니라 법과 정의, 평화의 신을 신뢰하는 다른 나라들이 겪을 운명을 보여주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열강들은 이와 같은 호소에도 꼼짝하지 않았으나, 각국 기자들과 네덜란드 언론은 그의 행동에 크게 감명받는다.
그리하여 며칠 후, 그는 국제기자클럽 주최로 열린 ‘한국에 관한 연설회’에 초청받는다.
그는 유창한 프랑스어로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 당한 경위와 일본의 침략상을 낱낱이 지적하여 폭로, 규탄하면서 한국민과 황제는 독립을 열망하고 있으니 세계는 한국 독립에 협조해줄 것을 호소했다.
이것이 바로 그의 ‘한국의 호소(A plea for Korea)’라고 불리는 명 연설이다.
일본을 지지하는 이들이 일본을 두둔하며 그를 압박했지만, 그는 전혀 기죽지 않은 당당한 웅변조로 일본을 공격했다.
당시 그의 나이, 스무 살이었다.
당시 그와 논쟁했던 일본인 기자 다카이시 신고로는 일본 정부를 옹호하면서도 이렇게 덧붙였다.
“그들 3명은 진실로 애국지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궁핍해 보였으나 풍채와 언어 거동을 보면 나라의 쇠망을 우려해 자진해서 임무를 떠맡은 것 같았다.”
영어ㆍ프랑스어ㆍ러시아어에 능통한 그는 모든 회의와, 기자회견에서 주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국제 언론에 대한제국의 왕자로도 소개되었다.
그가 전주 이씨 가문의 출신이었다는 사실에서 고안해 낸 것이었으나, 현지에서 특사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국제사회의 관심을 모으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였다.
그의 연설은 각국 대표와 수행원, 언론인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고 각국의 언론에까지 보도되어 일제에 대한 국제여론을 환기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대한제국의 사정이 각국 신문기자들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영국인 스테드가 회장으로 있는 국제협회의 회보에는 연설 전문이 게재되었다.
인도네시아의 <로모코티브>지 기자는 서명운동을 통해 한국을 지지하자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각국 신문도 매일 한국의 사정을 논하여 한국을 돕자는 여론이 급격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국제 여론은 여론일 뿐이었다. 대한제국의 현실을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대한제국 최후의 외교는 이렇게 종말을 고할 운명이었다.
이때 중대한 사태가 돌발하였다.
나라의 운명에 절망한 그의 동료 중 한명이 누적된 과로와 울분으로 인해 갑자기 숨을 거두고 만 것이다.
그의 동료는 죽기 전 몇 시간 동안 마치 의식을 잃은 듯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내 조국을 구해주십시오, 일본인들이 내 조국을 유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의 동료의 마지막 말이었다.
일본에 의해 고종황제가 퇴위당하자, 평생을 나라를 위해 힘썼던 그의 부친은
독립운동을 위해 거액의 재산을 모두 기부하고, 조선 민족에게 항일 의식을 심어주고 일본에게는 충격을 주기 위해 자결을 택한다.
“나라를 잃은 자는 머물 곳도 없고, 편히 쉴 땅도 없으니 죽어 마땅하다.”
그의 부친의 유서였다.
그보다 열세 살이 많은 형은 그가 네덜란드에 다녀온 후로 불행한 삶을 마감했다.
그의 형은 동생의 사건 직후 일본 헌병대에 끌려가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그 이후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하여 정신이상 증세까지 보였으며, 결국은 객사하고 만다.
네덜란드에 다녀온 이후, 그의 행적은 묘연하다.
그러나 최근, ‘모스크바에서 열린 집회에서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는 연설을 했다’는 기록 등이 발견되어
그가 평생 독립운동을 위해 힘썼음을 짐작 할 수 있다.
나라를 위해 힘쓰다 순국한 열사로 임명되었지만, 그는 무덤이 없어,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제단에 위패로 모셔져 있다.
당시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던 유일한 조선인이었던 그.
그는 대한제국의 외교관이자 항일 독립운동가로서, 국권수호와 국권회복을 위해 헌신한 애국자였다.
그의 이름,
이위종(李瑋鍾)이었다.
헤이그 특사.
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그리고 이위종.
<본 글은 '네이버 캐스트', '한국 근대사 산책' 등을 참고하였습니다.>
문제시 둥글게 댓글로 알랴주세요!
안문제시 역사속 흥미돋 여인들 시리즈 얼른 쪄옴....ㅎ
첫댓글 ㅠㅠㅠㅠㅠㅠ
와대박 어렸을때 배운 헤이그특사 이렇게 자세한 얘기는 첨봐 감사합니다ㅜㅜ
헤이그특사구나...
매번 네덜란드 헤이그특사파견 이상설이준이위종 외우기만 했는데ㅠㅠㅠㅠㅠㅠ 하 생각 이상으로 대단한 분이셨구나 이렇게까지 활동해주셨는데도... 결국 합병되고ㅠㅠ오늘 날까지 명예좆본인이 반민특위웅엥웅 이지랄하고 있다니 씨발
네덜란드 살았는데도 기념관? 못보고 왔는데.. 이번 여름에 가면 꼭 보고 올거야..
지금 자한당 꼴을 보시면 분통 터지실 듯... 이렇게나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애써주셨는데ㅠㅠㅠㅠ
네덜란드 헤이그 놀러갔을때 이준열사기념관 가서 저 기사 걸린거 정독했었는데 진짜 말이안나오더라....글로만 읽던 역사가 실제 내 앞에 닥친 기분이었음..
가슴아파
그저 감사하고 존경... 옛날부터 지금까지 평화을 원하는 우리에게 주변국들은 왜이리 가혹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