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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혜영은 힘겹게 대중교통을 이용해 출근했다.
“우와~. 얼굴 장난 아니다.”
솔희가 엘리베이터에서 막 내린 그녀를 보고 말했다. 혜영이 이어폰을 빼고 가방에 넣으며 솔희를 바라보았다.
“어제 잘 못 잤어?”
“조금..”
“뭐하느라고 못 잤어?”
“커피를 늦게까지 마셔서 그런가 잠이 안 오더라고.”
“다크서클이 장난이 아닌데.. 피로회복제 있는데 줄까?”
“괜찮아..”
“솔희씨. 내가 부탁한 서류 어딨습니까?”
밖에서 남자직원의 목소리가 들리자 솔희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잠시만요~. 이따 얘기하자.”
행복해 보이는 솔희를 보니 어제 데이트는 즐거웠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사무실로 들
어가 코트와 가방을 걸어놓고 의자에 앉았다. 고개를 들어 모니터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한 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점심식사 후의 시간이 찾아오지 않았으면 했다.
“혜영아.. 얼굴이 왜 그래?”
“그래. 무슨 일 있었어?”
고개를 든 혜영은 호기심으로 얼굴에서 광채가 나고 있는 그녀들을 바라보았다.
“카페인 때문이지 뭐.. 잠을 잘 못자고, 아침에 출근길이 힘들었거든..”
“차를 한 대 사지 그래?”
“아니면 애인을 만들던가.”
“글세..”
“정말 인생 재미없게 산다..”
“야~. 뭘 또 그렇게 말하냐?”
“안 그래? 회사, 집. 회사, 집을 반복하면서 살고 있잖아. 연애를 하는 것도 아니고, 대쉬하는
남자도 없고, 그렇다고 근사하게 찾아오는 우연한 만남이 있는 것도 아니고.. 깜짝 놀란 만한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니고.. 혜영아.. 넌 무슨 재미로 사니?”
‘너를 내 소설 속에서 제일 재수 없고, 얼굴과 몸매 말고는 장점이 없는 여자로 만들어 버리는 재미?’
혜영이 다진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차라리 루저랑 정말로 사귀는 건 어때? 그럼 적어도 네 삶에 재미가 있지 않겠어?”
“너 진짜.. 말 다했어?”
솔희가 진심으로 정색하며 말했다.
“그래. 다진아~. 그건 좀.. 너무 하다..”
“너무 하긴. 너희들도 친구라면 이러는 거 아니야. 곧 크리스마스인데 혜영이는 혼자 쓸쓸하
게 보내야 하잖아. 연말 파티에 혜영이 혼자 벽에 세워 놓을 거야? 지난 2년 동안 그랬던 것
처럼?”
“그래서 이번 주 일요일에 소개팅 주선해 줬잖아.”
“잊지 않았지? 일요일 저녁 7시 풀문.”
“응.”
“잘 해 봐.. 이번에도 잘 못되면 정말 네 인생에 남은 남자는 저 루저 밖에 없을지도 몰라.”
그녀들은 창밖을 바라보며 음료수를 다른 남자 직원 한 명과 마시고 있는 한성을 바라보며 키득거렸다. 하지만 혜영은 전혀 우습지 않았다.
‘루저는 어젯 밤에 만났던 그런 남자를 말하는 거지, 일 열심히 하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주지
않는 사람이 단지 외모 꾸미는 것에 관심이 없다고 루저 취급을 당하다니..’
“너는 어제 데이트 어땠어?”
그녀들의 시선이 솔희에게 가자 그녀는 조용히 커피를 마시며 고개를 들어 한성을 바라보았
다. 문득 그와 눈이 마주쳤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녀는 그와 정확하게 눈이 마주쳤다
고 생각했다. 안경너머의 그의 눈은 생각보다 어리버리하지 않았다. 오히려..
‘오히려.. 뭐가 떠올랐는데.. 어떤 동물이지? 사자..는 아니고.. 독수리.. 그래 독수리같은 눈.
아니다. 그보다는 뭔가 더 날카롭고 번뜩이는.. 뭐하는 거니.. 혼자서 겨우 2초 정도 마주쳤을
뿐인데..’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혼자 피식 웃었다. 그녀는 주위의 공기가 달라진 것을 눈치 채고 고개를 들어 그녀들을 바라보았다.
“뭐가 웃겨?”
“응? 미안.. 다른 생각 중이었어.”
“뭐야. 무슨 생각을 했는데?”
그녀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불편해진 그녀는 고개를 들어 시계를 바라보았다.
“오후 일 시작해야겠다. 먼저 갈게.”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쓰레기를 버리고 자신의 사무실로 향했다. 솔희가 그녀의 옆으로 왔다.
“괜찮아?”
“응. 정말 다른 생각하던 중이라서 더 있으면 무슨 상상을 했는지 물어볼 것 같아서 일어났어. 다들 내 얘기 엄청 하겠지?”
“무슨 상관이야.”
“네 이야기를 못 들었어. 어제 데이트 즐거웠어?”
“응. 우리야 뭐.. 그런데 호진씨한테 혼났어.”
“왜?”
“네가 해준 티가 팍팍 난다면서.. 다음에는 배워서 하라고. 친구를 부려먹는 사람이 어딨냐고 혼났어.”
“부려먹긴.. 도와주는 거지. 요리하는 것도 좋아하기도 하고.”
“그래서 호진씨가 너에게 제대로 한 번 식사초대 하고 싶대.”
“안 그래도 된다고 전해 줘. 눈치 없는 사람 되기 싫으니까.”
“아니야. 정말 괜찮을 것 같아. 만약에 이번 소개팅이 잘 된다면 말이야. 더블데이트도 즐거울 것 같아.”
“소개팅.. 후우.. 난 잘 안 될 것 같은데..”
아직 휴게실에 남아 있는 그녀들의 이야기는 아직 멈추지 않았다.
“제윤씨가 혜영이랑 소개팅 한 대?”
다진이 물었다.
“대신 너랑 데이트 한 번 하게 해달라는 조건이래. 어떻게 생각해?”
다진이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하더니 미소를 지었다.
“좋아. 대신 제대로 하라고 해. 밥만 먹고 헤어지지 말고. 내가 알기론 레스토랑 풀문에서 혜
영이네 집이 멀지 않은 걸로 알고 있으니까.. 무슨 얘긴지 알지? 혜영이도.. 남자를 좀 알아야
할 나이잖아.. 친구로서 그 정도는 해 줘야지. 안 그래?”
“그건 좀 그런데..”
다진이 날카로운 눈으로 그녀들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싫다는 거야? 아니지? 그리고 정말 싫으면 혜영이가 싫다고 하겠지. 안 그래?”
“응.. 그렇지..”
“재미있는 일이 기다리고 있어서 그런지.. 시간이 좀 안 간다.”
다진이 새초롬하게 말하고는 의자에서 일어나 사무실로 갔다. 그녀들이 휴게실을 나가고 한성
도 조용히 휴게실을 나와 자신의 사무실이자 혜영의 옆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는 새벽에 그녀
의 집에 갔었다. 그녀의 집 옥상에 운동화 165 쯤 신는 자의 발자국이 나 있었다. 분명 그녀
를 취객으로부터 도와준 자의 발자국이었다. 그녀가 끌려갔던 골목에서도 같은 발자국이 있었
기 때문이었다. 출근을 하려고 건물을 나온 그녀를 바라보다 도혁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휴게
실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같은 루저클럽 회원이 된 것에 대해 안타깝지만 약간은 동료가 생긴
것에 기뻐하는 듯한 자가 옆에 와서 같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와 그녀를 엮는 여자의 말
에 기분 얹잖아 보였다. 문득 그녀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와 시선이 잠시 마주
친 후 그가 눈동자를 돌렸다. 잠시 후 그녀가 일어나 나가는 것이 보였다.
“비밀이 많은 아가씨가 곤란하게 됐군.. 그런데 나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길래 그렇게 도망치듯 간 거지?”
일을 하고 있는데 사무실 문이 열리고 솔희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퇴근 안 해?”
“미안해. 내일 아침까지 올려야 할 서류가 있어서. 먼저 퇴근해.”
“차도 없으면서 얼른 서두르지 않으면 걸어서 갈지도 몰라.”
“최대한 빨리 하고 갈 거야. 집에 가면 연락할게.”
“응. 조심해서 들어가.”
“너도~.”
사무실 문이 닫히고 그녀는 다시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며 서류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그녀도 컴퓨터를 끄고 코트와 가방을 들고 불을 끄고 사무실을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
고 1층에서 내려 건물 정문으로 걸음을 걷고 있는데 앞에 걷고 있는 남자직원의 목소리가 들
렸다.
“몰라~. 그럼 어떻게 하냐? 다진씨랑 데이트를 하게 해 준다는데.. 애인지 어른인지 아직 구
분도 안 가는 덜 큰 소년같은 여자랑 저녁 한 번 먹지 뭐.. 몰라.. 식사하면서 마음에 들면 진
도를 더 나가도 좋다던데? 야.. 모르겠다. 설마 그렇게 여자로서의 매력이 없는 여자랑 하고
싶어질까? 또 모르지 술에 취하면.. 하하하..”
혜영이 걸음을 멈추었다. 남자직원인 안제윤이라는 남자는 코너를 돌아 사라졌다.
‘그러니까.. 애인지 어른인지 구분도 안가는, 여자로서의 매력이 없는 여자가.. 나네.. 나랑 저
녁식사와 잠자리를 하면 다진이랑 데이트.. 그래서 소개팅이 가능했던 거구나.. 말이 돼? 누군
지도 모를 남자와 원 나잇을 하려고 지금까지 기다린 게 아니라고. 그렇게 원 나잇을 원하면
자기들이나 하지. 왜 날.. 누가 데이트 하고 싶댔나? 난 이렇게 지내는 게 훨씬.. 훨~씬 좋다
고.’
혜영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옮기려는데 지나가는 누군가와 어깨가 부딪쳤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그녀는 고개를 들어 자신과 부딪친 남자를 바라보았다.
‘박한성씨.. 지금 퇴근하네..’
남자는 어리숙한 몸짓과 표정으로 그녀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지금 퇴근하세요?”
“아.. 네.. 지금 퇴근하세요?”
“네. 그럼 안녕히 가세요.”
혜영이 인사를 하고 지하철을 타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뒤에서 그가 불렀다. 아주 조심스럽고, 소심한 목소리로..
“저.. 저기..”
혜영이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네?”
“제가 차를 갖고 왔는데요.. 가.. 같이..”
‘말은 왜 더듬지.. 좀 당당하게 말하면 조금 더 괜찮게 보일 텐데.’
혜영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지하철로 금방이거든요. 운전 조심해서 가세요.”
“아.. 저기..”
“네?”
“머리에..”
그가 손을 올려 자신의 앞머리를 만지작거렸다. 그의 행동을 따라 자신의 앞머리를 만진 그녀의 손 끝에 볼펜 뚜껑이 만져졌다. 그녀가 입을 살짝 벌리며 뚜껑을 빼 손에 쥐었다.
“고마워요. 알려줘서. 내일 봬요.”
“네..”
한성에게 다시 인사를 하고 그녀는 몸을 돌려 걸어가면서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눈길 운전을
피하기 위한 사람들이 지하철을 타기 위한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녀는 간신히 떠밀리듯 지하
철을 타고 잡을 만한 것 근처로 가지도 못하고 사람들에 끼어 집근처 역에서 비틀거리듯 타야
만 했다. 집근처 역에서 내린 그녀의 안경은 삐뚤어져 있었고, 분홍색 머플러는 간신히 걸쳐
져 있었다. 그녀는 품에 끌어안고 있는 가방을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가방안에 있는 가발을
쓰고 색이 없는 립글로즈를 발랐다. 화장을 고치고 안경집에서 와인빛 안경테를 꺼내 끼고 가
발 앞머리를 매만졌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머플러를 목에 두르고 가방을 들고 화장실에서 나
와 역을 빠져나왔다. 그녀는 조그만 소리가 뒤에서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곤 했다. 풀문에 도
착했을 때엔 그녀는 긴장으로 이마에 땀이 맺혀 있었다. 가게 안에는 사람들이 여전히 북적거
렸다. 유리창너머로 원성이 그녀를 발견했다.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안
으로 들어가 바에 앉았다.
“왔어? 퇴근이 늦었네?”
“네. 어제 일로 걱정하고 계실 것 같아서 잠깐 들렸어요.”
“잘 했어. 그리고 미안해. 집까지 데려다 주면 좋았을텐데..”
원성이 진심으로 사과를 하자 혜영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지금은 괜찮아요. 당분간 콘텍트렌즈랑 화장은 못 할 것 같지만요.”
“무서웠지?”
“조금요.”
미수가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는 따뜻한 자스민차를 들고 나왔다.
“아직 저녁전이면 뭐 만들어 줄까?”
“아니에요. 정말 피곤해서요. 차만 마시고 갈게요.”
“그래. 정말.. 괜찮아?”
혜영이 자스민차를 한 모금 마시고 미소를 지으며 “그럼요~.” 라고 말하고 미소를 지었다. 원
성이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혜영이 고개를 돌려 원성이 바라보는 곳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어둠이 내려앉은 밖에는 집으로 가려는 사람들 말고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 다시 원성
을 바라보며 혜영이 미소를 지었다.
“뭐 보셨어요?”
“그냥.. 오늘 별이 떴나 싶어서.”
“요즘 별 보기가 힘든 것 같아요. 그래도 더 눈이 안 와서 다행이에요.”
“일요일에 근사한 저녁식사를 준비해 놓을 게.”
미수가 웃으며 혜영에게 말했다.
“근사한 저녁식사에 남자에게 주는 음식에는 수면제 좀 넣어 주실래요?”
미수가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원성과 시선을 교환하고 혜영에게 물었다.
“진심이야?”
혜영이 다 마신 찻잔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하하..”
그러다 조금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네. 하지만 그러면 범죄가 되겠죠?”
“그렇게 마음에 안 들면 하지 마.”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네요. 그럼 일요일에 봬요.”
그녀가 인사를 하고 가게를 나왔다. 주머니에 넣은 이어폰을 꽂고 머플러안으로 코를 집어넣
고 걸음을 옮겼다. 어제보다는 조금 더 빠르게 걸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기분이었지만
생각보다 일찍 집에 도착했다. 4층까지 올라가는 게 오늘따라 더 힘들었다. 집에 도착한 그녀
는 가방을 의자에 내려놓고 머플러와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그리고 안경을 벗고 가발
도 벗었다. 갈아입을 갖고 욕실로 들어갔다. 맞은 편 건물에서 검은 물체가 스윽 일어나 사라
졌다.
미수가 원성을 바라보았다.
“아까 뭘 보고 있었던 거야?”
“아무것도 아닌데?”
“거짓말은.. 누구 왔었어?”
원성이 어깨를 으쓱했다가 미수가 걱정스런 표정을 짓자 그녀의 어깨에 손을 부드럽게 올렸다.
“걱정할 거 없어. 우리가 이곳이 위험하다 생각이 되면 바람처럼 사라지면 그만이야.”
원성이 손을 들어 미소의 볼을 살짝 쓸었다.
집에 들어가자 진혁이 도혁을 바라보았다.
“집에 오자마자 어딜 갔다 온 거야?”
“산책..”
도혁이 냉장고에서 음료수 2개를 꺼내 하나를 진혁에게 던졌다. 도혁은 뚜껑을 열면서 소파에 앉아 한 모금 마셨다.
“나한테 비밀 있지. 그치? 센서까지 끄고..”
“내 모든 걸 알려고 하니까 그렇지. 그리고 정말 산책이었어.”
“진짜 이러기야? 형한테 무슨 일이 생길까봐 내가 얼마나 걱정하는데.”
“진혁아.”
“왜!”
“덜 바보스런 안경 좀 만들어 줄래? 이거 말고 조금 평범한 안경 말이야.”
“뭐?”
“아니 그것보다 안경을 쓰지 않는 편이 괜찮을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지금 그 안경이야 말로 내 야심작.. 뭐야.. 누구한테 잘 보이고 싶은 건데?”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긴.. 설마.. 여자 생겼어? 아하~. 그렇지.. 그러니까 센서도 끄고 어떤 여자를 만나러 간
거였어. 그래?”
도혁이 가만히 음료수를 마시자 진혁이 정말 화가 난 듯 도혁에게 다가갔다.
“정신 차려! 우리는 연애할 수 없다고.. 아니 나는 되지만 형은 안 돼. 몰라?”
“알아. 연애하고 싶은 게 아니야.”
“그럼 뭔데?”
“그냥.. 신경이 쓰이는 사람이 있어. 조금 곤란한 상황에 있는데 좀 도와주고 싶기도 하고.. 주위를 맴도는 정체 모를 녀석도 있는 것 같고..”
도혁이 문득 입가에 미소를 짓자 진혁은 머리카락을 양 손으로 쥐어뜯었다.
“형! 안하던 짓을 왜 해? 그런 건 내가 하는 거야. 말썽 부리는 거, 여자 보면서 침 흘리는
거, 함정에 빠지는 거, 여자한테 차이고 정신 못 차리는 거..”
도혁이 진혁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일어나서 진혁의 곁을 지나면서 그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흩트렸다.
“얼마나 대단한 여자인데 이래?”
도혁이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생각하다 대답했다.
“음.. 글세..”
“여자한테 별로가 아니라 아예 관심도 없던 사람이 이러면 무섭거든?”
“걱정하지 마. 네가 걱정하는 일 같은 건 안 일어나.”
“형이 어떻게 알아? 연애에 대해 뭐 아나? 엄청난 미인들이 작업을 해도 넘어가지도 않았으면서..”
“왜 작업하는지 그 이유를 아니까. 그 여자는 조금.. 독특해.”
“뭐가 얼마나 독특한데?”
“음.. 선해.”
진혁이 콧방귀를 뀌었다.
“사람이 선하다고 아직도 믿어? 사람은 원래 악해. 선한 척 가면을 쓰고 있는 거지. 우리는
그 가면을 여러 개 갖고 있는 사람들을 신물 나도록, 셀 수 없이, 그것도 한, 두해를 참아주고
있는 게 아니잖아.”
“나도 사람을 그다지 믿지 않아. 하지만.. 착한 사람이야.”
“흥. 여자에 대한 칭찬이 겨우 선하다는 거야? 여자들이 그 말을 듣고 감동할 거라고 생각하
는 거야? 예쁘다, 아름답다, 사랑스럽다, 정말 섹시하다.. 그런 말과 함께 비싼 선물을 제공해
야 여자들은 감동한다고.”
“그래서 그런 여자들은 싫다는 거야.”
“이름이 뭐야.”
“응?”
“이름이 뭐냐고.. 우리 회사 직원이지? 아.. 설마.. 그 여자야?”
“누구?”
“작년 연말파티에서 봤던 끝내주는 여자 말이야.”
도혁은 그가 말하는 여자가 누구인지 떠올리고는 인상을 찡그렸다.
“아니야?”
“그래. 아니야. 그 여자가 어딜 봐서 선하게 생겼냐?”
“전체적으로 다~.”
진혁을 바라보며 도혁이 웃었다.
“안경 좀 만들어 주라. 내일은 다른 걸 써야겠어.”
“알았어. 오늘도 한 건 있어. 나갈 준비 해.”
“응.”
도혁이 방으로 올라가자 진혁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작업실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간 그가 외출 준비를 하다가 피식 웃었다.
“변신에 재능이 있는지는 몰랐네..”
확실히 그녀는 주위 사람들과 섞일 줄 알았다. 어디에 있든 그렇게 튀지 않았다. 옷도, 화장
도, 심지어 얼굴 표정도 조금 변하는 듯 보였다. 도혁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 녀석을 얼른 찾아야 할 텐데..”
노트북을 닫은 후 침대에 누운 혜영은 오늘 휴게실에서 눈이 마주쳤던 한성의 눈이 떠올랐다. 천정을 바라보고 누워 생각에 잠겼다.
“어리버리한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눈빛이었는데.. 잘못 본 건가? 하긴 나를 상대로 긴장해서 말까지 더듬던데.. 덜 큰 소년같은 여자라.. 마음에 드는데?”
그러다가 토요일 소개팅이 떠오르지 그녀는 한 숨을 내쉬었다.
“어서 지나갔으면 좋겠다. 아니면 어그러지던지..”
그녀는 눈을 감았다.
어두운 골목을 움직이는 검은 모습이 있었다.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감옥에서 출소한
모습으로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골목 안으로 들어가 자신의 집을 몇 걸음 앞두고 뒤에서
다른 사람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려는데 뒤에
서 내밀어진 차가운 우산 끝이 그의 오른쪽 볼에 닿았다.
“출소를 축하드립니다.”
남자의 눈이 공포로 커다래졌다. 몸이 덜덜 떨려왔다. 추운 겨울이었지만 그가 쓰고 있는 비
니 아래로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볼을 누르던 우산이 사라졌다.
“오늘 집행하면 좋겠으나 이번은 마지막 경고를 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다시는 만나는 일이
없길 바랍니다. 그 이유는.. 다음번에 다시 만난다면.. 그건 경고로 끝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
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남자가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바르게 사십시오.”
“아.. 알겠습니다. 부디 목숨만..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남자가 주위가 조용함을 느끼고 천천히 떨리는 몸을 돌렸다.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가 일
어나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누군가 있었다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가방을 들고 집으로 뛰어갔다. 높은 곳에서 그가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본 검은
그림자가 사라졌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3.07.23 09:16
첫댓글 ㅇksduskdjf 님도 더운 하루 힘 내세요~!!
저런 싸가지도 있군요. 사람을 거의 물건 취급하는.. 자기가 당하면 기분이 어떨까요? 잘 읽고 갑니다.
그렇죠? 저런 사람들에게 무뎌지는 사회가 좀 겁이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