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사랑한 일본인》
*천세창 벗님께서 보내 주신 자료
1.
1893년 노르웨이선 선원으로 홍콩에 머물다가 대만으로 건너가 독일인이 경영하는 공장에서 사무원 겸 통역으로 일했으며, 쑨원(손문)의 혁명운동에도 가담하였고, 산악지대를 방랑하면서 고생을 많이 한 일본인이 있습니다.
1899년에 그는 술에 만취되어 길에서 거의 죽게 되었을 때 어느 한국인이 그를 업고 여관으로 데려가서 치료를 해주고 밥값도 내주었습니다.
전혀 모르는 한국인의 도움으로 살아난 그는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의 나라에 은혜를 갚고자 1905년(38세) 6월 한국에 왔습니다.
그는 한국 YMCA 일본어 선생으로 취직하였고 이상재 선생님을 만나 감화를 받고 기독교인이 됩니다.
41세 때 기독교인인 30세의 우에노 다키와 결혼을 합니다.
1911년의 105인 사건과 3.1운동 때는 일제의 만행을 외치면서 수감자의 석방을 위하여 애썼으며, 1921년 가마쿠라보육원(현 영락보린원)의 경성지부장이 되어 수 천명의 한국 고아들을 양육하였습니다.
거리에 버려진 갓난 아이를 데려다 이집 저집 안고 다니며 젓 동냥을 하기도 했고 밤새 우는 아이들을 안고 꼬박 날을 새기도 여러날 했습니다.
***눅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2.
고아들을 돌보는 일은 매우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는 고아원에서 본인이 길러낸 고아가 독립운동에 관여하는 바람에 일경에 체포 되어 취조를 받았습니다.
그는 3.1운동 때 자신의 은인이었던 이상재 선생까지 투옥되자 일본의 대법원장까지 찾아가 이 당시 행해진 일본의 불의와 만행을 이야기 했습니다.
한국인들은 일본인이면서 한국을 위해 일하는 그에 대하여 고마워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일제의 간첩이고 위선자라고 비방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1943년엔 부인 우에노에게 고아원을 맡기고 원산(일본인)감리교회 전도사로 일하였습니다.
1945년에 다른 일본인들이 조선을 떠날 때도 홀로 남아 조선의 고아들을 돌보아 주었습니다.
1947년 10월에 원산에서 서울로 돌아와 부인을 잠깐 만나고 1947년 11월에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한국으로 다시 오려고 했지만 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아내 우에노는 광복 후에도 일본으로 귀국하지 아니하고 고아들을 돌보다 1950년 74세로 서울에서 별세하였습니다.
***잠19:21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
3.
8.15 해방 당시에 소련군이 온 시가를 휩쓸며 일본인의 집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등의 횡포가 끊이지 않을 때 겁에 질린 일본인들은 원산감리교회로 모이게 되었습니다.
소련군은 교회까지 습격했지만 원산시민의 존경을 받는 소다 가이치 때문에 돌아설 수 밖에 없었습니다.
1947년 일본인들이 거의 다 돌아간 후에 소다는 인생의 마지막 결단을 내립니다. 부끄러운 자신의 조국이지만 고난에 처해있는 모습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에 희망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 건강이 악화된 아내와 이별을 감수하면서 일본으로 향하게 됩니다.
일본에 도착한 소다는 한 손에는 세계평화라는 표어와 또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일본 전국을 다니며 조국의 회개를 부르짖었습니다.
그의 모습은 조선의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배운 것들이었습니다. “회개의 눈물로 다시 희망을 세워가자" 였습니다.
***느12:43 "이 날에 무리가 크게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 아이도 즐거워 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의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
4.
일본에서 한국으로 가고 싶어하는 그의 사정을 알게된 아사히 신문사와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의 주선으로 1961년 5월 15일 다시 한국에 왔습니다.
그리고 옛집인 영락보린원에서 고아들과 함께 지내다가 1962년 3월 28일 96세로 별세하였습니다.
그의 장례식은 1962년 4월 2일 ‘사회단체 연합장’으로 국민회당(의사당)에서 집례되었습니다. 2천여 조객이 참석한 가운데 대광고교 밴드의 조악(弔樂)으로 시작하여 한경직목사의 사회로 기도와 성경 봉독,
그리고 유달영의 조사가 있었습니다.
“소다의 생애는 어느 사회사업가보다 우리들에게 감격과 충격을 준다.
소다의 생애처럼 깨끗한 인류애와 사랑만이 한국과 일본이 단합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한국일보 1962.4.2 기사)
묘비에는
“孤兒의 慈父 曾田嘉伊知”,
“소다 선생은 일본 사람으로 한국인에게 일생을 바쳤으니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으로 나타냄이라.
소다 가이치는 일본인으로서 처음으로 한국 정부에서 문화훈장을 받았습니다.
일본인이라면 적대시하던 일제시대에도 한국 고아의 아버지로 41년간 한국의 고아들을 위해 헌신했고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힌 유일한 일본인 입니다.
***눅6: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5.
소다 가이치는 선교의 사명을 가지고 먼 길을 찾아와 선교의 큰 업적을 남긴 조선의 기독교 초기의 다른 선교사들과 달리 조선에 와서 조선의 초기 기독교 신자들을 통해 복음을 받아들이고 힘없고 불쌍한 조선의 고아들을 위해 평생을 바쳐 음지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으로 나타내었습니다.
소다 가이치 부부의 손길을 몸소 느끼며 자란 아이들은 그들을 ‘하늘 할아버지, 하늘 할머니’라고 불렸습니다.
그들은 친한파와 친일파의 사이에서 오해도 많이 받았고 미움도 많이 받았지만 그를 아는 조선의 기독교인들은 그를 진실한 기독교인으로 기억하고 복음을 몸으로 전해주기 위해 일본에서 온 선교사로 받아들였기에 소다 가이치 전도사와 우에노 여사의 묘비를 외국 선교사들의 묘지인 양화진에 세워 기리고 있습니다.
***살전2:8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