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미즘과 휴머니즘
애니미즘(精靈崇拜 , Animism)
〈기식(氣息)〉이나 〈영혼〉을 의미하는 라틴어의 애니마(anima)에서 유래하며, 〈여러가지 영적 존재(spiritual beings, 영혼, 신령, 정령, 생령, 사령, 조령, 요정, 요기 등)에 대한 신앙〉을 의미한다.
영적 존재라는 것은 무엇인가
영적존재의 전형인 영혼(soul)에 대해서 살펴보면, 그것은 인간의 신체에 머물고, 이를 살려서 그 숙체(신체)를 떠나도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실체이다. 그것은 인간의 물질적ㆍ신체적 특질이나 기능에 대해서 정신적ㆍ인격적 특질이나 기능을 독립적인 존재로서 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영혼은 사물에 머물고 있는 한 사물을 움직이고 있지만, 사물이 소멸해 사라져도 독자적으로 존재한다고 보기 때문에 초자연적(supernatural) 또는 초인간적 존재(superhuman being(s))라고도 하며, 통상 보통의 사람에게는 불가시적 존재이기 때문에 영적(spiritual)이 되고, 나아가서 인간과 만찬가지로 희노애락의 마음을 가진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인격적(per-sonal)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모든 생물, 사물, 현상에 인정되는 영혼군을 일괄해서 영적존재라고 하며, 이 존재에 대한 신앙을 애니미즘이라 규정하고, 이로써 종교문화의 기원과 본질에 대해서 논한 것이 영국의 인류학자 E.B. 타일러이다. 그에 의하면 죽음, 병, 황홀, 환상, 특히 꿈에서의 경험을 반성한 미개사회의 지적인 인간은 신체로부터 자유롭게 이탈할 수 있는 비물질적이며 인격적인 실체, 즉 영혼의 존재를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인간은 이 영혼의 관념을 유추적으로 자기 주위의 동식물이나 자연물에도 미치게 되어, 여기에 여러 가지 영적존재의 관념과 그들에 대한 신앙이 성립했다. 따라서 신령, 정령, 사령 등은 각종 대상이나 존재에 관련해서 인정된 영혼이다. 영혼이나 정령의 관념은 후에 진화해서 다신교나 일신교로 전개되었다. 이상과 같은 타일러의 학설은 교묘한 설명으로 19세기 말의 학자나 문화인에게 감명을 주었는데, 너무나 개인심리학에 의거한 주지주의적 해석이나 진화주의 적인 태도는 각 방면에서 엄격하게 비판되었다. R.R. 마레트에 의한 애니마티즘(프레애니미즘)의 주장 등이 그 예이다. 그러나 영적존재에 대한 신앙(애니미즘)을 종교의 본질로 하는 그의 소설은 이론적으로 보강되면서 오늘날에 계승되고 있다.
애니미즘의 제상(諸相)
영적존재의 관념은 복잡하며 다채롭게 전개된다. 그것은 인간ㆍ사회의 행ㆍ불행이나 세계관, 타계관과의 관계에서 파악되는 수가 많다. 오키나와 각지에서는 유아가 병에 걸리거나 밤에 우는 것은 혼이 빠져나간 것에 의하며, 빠져나간 영혼을 신체에 부착시키는 의례가 행하여진다. 어떤 사람의 임종시에 친족이 지붕에 올라가거나, 우물바닥을 향해서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이탈하려는 영혼을 불러들이려는 혼 부르기의 풍습은 각지에서 볼 수 있었다. 과거에 각지에서 행하여진 머리사냥은 머리에 내재하는 영혼을 획득함으로써 획득한 측의 풍요성을 증대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고 한다. 죽음은 신체로부터 영혼의 영구이탈을 의미하는데, 사후의 영혼은 천상, 지상, 지하 등의 타계로 가고, 정해진 때에 이 세상을 방문한다고 믿고 있는 곳이 적지 않은데 일본의 정월이나 추석 행사가 그 예이다. 생령(生靈), 사령(死靈), 동물령 등은 인간에게 달라붙어서 건강을 해치게 된다. 일본의 영혼ㆍ정령에 상당하는 영적존재에 태국의 피(phi, pii), 미얀마의 나트(nat), 인도네시아의 아니토(anito), 말레시아의 한투(hantu) 등이 있다. 이들 영적존재는 민중의 종교생활의 주요 부분에 깊이 관계하고, 외경ㆍ외포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다.
애니미즘과 현대
애니미즘은 인간의 영혼에 대한 관념을 인간 이외의 여러 존재에도 인정하고, 그들과 밀접하게 관계를 맺으려는 행위이다. 일반적으로 애니미즘은 원시(미개)사회나 원시종교의 특질로, 현대사회나 문명종교에서는 그 의의와 역할이 현저하게 상실될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현대의 도시생활에서도, 현대의 여러 종교에서도 영혼이나 사령, 조령 등 영적존재와 무관계한 상황은 볼 수 없다. 현대의 불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에서도 그 기층부분에는 애니미즘이 농후하게 나타난다. 이런 의미에서 애니미즘에서 종교의 본질을 찾아보려고 한 타일러의 주장은 오늘날 정당성을 가진다.
휴머니즘(Hhumanism)
인간주의·인문주의(人文主義)·인본주의(人本主義)라고도 하며 ‘인간다움’을 존중하는 대단히 넓은 범위의 사상적·정신적 태도·세계관. 15∼16세기의 유럽에서는 고대의 문예를 부흥시키려는 운동이 일어나, 중세 이래의 신학(神學) 중심 학문체계에 반기를 들고 새로운 시대의 학자들 간에 ‘보다 인간다운 학예(學藝)를!’이라는 외침이 일어났다. 즉 고대의 학예를 부활시킴으로써 교회적 권위 아래 질식되어가는 자연스런 인간성을 회복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리스·로마의 고전이 ‘보다 인간답게 만드는 일’을 의미하는 후마니오라(humaniora)라는 말로 불리고, 그리스·로마의 고전을 연구함으로써 인간다움을 높이고 새 시대의 이상적 인간상(人間像)을 실현하려는 새로운 교육이념이 대두되었다. 그래서 이 ‘보다 인간다운’을 뜻하는 라틴어 후마니오르(humanior:인간적이라는 뜻인 humanus의 비교급)에서 휴머니즘이라는 말이 생겼다. 르네상스의 인문주의라는 말도 같은 말이다.
예컨대 페트라르카는 젊었을 때부터 베르길리우스와 호라티우스 등의 고사본(古寫本)을 열심히 수집하여 고대인을 이해함으로써 인간완성의 이상상(理想像)을 찾아내려고 하였다. 이러한 휴머니즘의 정신은 르네상스의 운동이 확대되면서 이탈리아로부터 알프스를 넘어 유럽 전역에 파급, 네덜란드의 에라스뮈스, 프랑스의 몽테뉴 등에 의해 새로운 인간성의 이상이 확립되었다. 이것은 있는 그대로의 인간, 자연스런 인간성을 존중하고, 이러한 인간성에 입각하여 지혜를 탐구하려는 것이었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 휴머니즘은 근대과학의 합리적 정신과 결부된다. R.데카르트는 ‘인간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인간’의 입장에서 진리를 방법적으로 탐구하였다. 신학자처럼 ‘은총의 빛’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연의 빛’에 의해 세계를 인식하려고 노력하였고, 수학적 방법으로 학문의 확실한 기초에 도달한 지점(地點)에서 출발하여 인생에 유용한 지혜로서의 철학체계를 완성하려고 하였다. 그것은 ‘생활의 지도, 건강유지, 기술발명에 관하여 인간이 알 수 있는 모든 사물에 관한 완전한 인식’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즉 휴머니스트의 지혜의 이념이 새로운 과학이나 기술과 결부됨으로써 근본적으로 변질된 셈이다. 이와 같은 과학과 휴머니즘의 통일이라는 과제는 18세기의 계몽주의 사상가들에게 계승되었다. 이 시대의 휴머니즘은 과학적 합리성을 단순히 자연에 관해서 뿐만 아니라, 사회·정치·경제 등 각 분야에 걸쳐 추구하여 인간성을 한없이 확충(擴充)하려고 하였다. 이와 같은 과제의식(課題意識)이 18세기 계몽사상의 부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진보의 관념’을 낳게 하였다.
18세기 후반에는 독일에서 뉴휴머니즘(Neuhumanismus)이라는 정신운동이 일어났다. 이것은 독일 계몽사상의 추상적인 합리주의와 기계론적 세계관에 대한 반항으로 생긴 것이며, 그리스적인 미(美)의 이상을 고취한 J.J.빈켈만을 선구자로 하여 T.레싱, J.G.헤르더, J.W.괴테, F.C.S.실러 등으로 이어지고 훨덜린의 시에서 완성되는 새로운 인문주의 운동이었다. 이 가운데 한 사람인 헤르더는 고전적인 인간성(Humanität)의 이상을 부활시켜, 이것을 모든 인간이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이상상이라 하고, 이것으로 바이마르의 김나지움에서 실시하는 그리스·라틴의 학예습득에 의한 인문주의 교육의 기초를 삼았다.
20세기 초엽에 독일에서는 ‘제3인문주의’라는 것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고전 연구자들의 새로운 문제의식이 낳은 신인문주의 운동이었다. 또한 영국의 철학자 실러는 자기의 프래그머티즘적 세계관을 휴머니즘의 이름으로 불렀다. 그에 의하면 진리는 영원한 것이 아니고 인간의 행동과 경험에 의해 생기는 것으로 실제적 유용성에 의해 규정된다. 또한 그는 세계의 설명원리(說明原理)는 신이나 절대정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 그 자신의 세계를 행동적으로 개혁해나가는 원리로서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였다.
이상 여러 예가 보여주듯 휴머니즘은 각 시대에 따라 실로 여러 가지 사상형태로 등장한다. 여기서 공통되는 것이라면 겨우 ‘인간다움’의 존중이라는 정도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인간다움’이 자주 정반대의 측면에서 추구되는 경우가 있다. 어떤 사람은 인간은 인간을 한없이 초월한 것, 즉 신이나 절대자와의 관계에서만 자기의 인간성을 비로소 실현해나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 어떤 사람은 이와는 반대로 인간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인간의 자연적 소질을 발전시켜나가는 것이 참 인간다움이라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사람은 과학이나 기술의 합리성을 철저히 추구하는 일이 결국은 인간성을 확충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인류는 새로운 기술의 힘을 구사함으로써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틀림없이 한층 커다란 행복을 실현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에 대하여 다른 사람은 그와 같은 행복에 대한 환상은 오늘날 이미 배반당했고, 과학기술의 발달은 인간을 기계문명의 주인공으로 만들기는커녕, 과학기술에 노예화되었으며, 세계의 합리화와 기계화는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과정이므로 이러한 추세에 저항하는 것만이 휴머니즘을 실현하는 길이라고 반론한다. 이와 같이 현대의 휴머니즘은 혼미상태에 빠져, 그 지향하는 바는 정반대의 방향으로까지 갈라졌다. 다같이 ‘인간다움’을 추구한다 해도 그 인간성을 어떤 방향으로 확충해 나가는가가 문제이다.
‘인간다움(humananitas)’이란 말을 맨 처음 사용한 것은 키케로라고 하나, 그의 후마니타스란 것은 반드시 인간성의 이상(理想)의 전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별한 인간다움을 나타낸다. 그것은 문명인만이 가질 수 있는 ‘우아함’ 정도의 뜻이었다. 로마인은 ‘인간다운 인간(homo humanus)’이라는 말을 하였는데, 이것은 본시 ‘이방인(homo barbarus)’이라는 말과 상대적인 의미에서 쓴 말이다. 즉 이방인은 풍속습관이 다르고 문화적 교양이 낮은 야만인인 데 비해 자기들은 그리스로부터 이어받은 고전적 교양을 갖추고 있고 또한 로마인으로서의 모든 덕(德)을 갖춘, 세련된 인간이라는 자부심이 이 말 속에 담긴 것이다. 1537년 로마 교황 파울루스 3세가 인도인과 흑인, 아메리카대륙의 토착민들을 ‘참의 인간’으로 인정한다는 회칙(回勅)을 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때까지는 그들을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결과가 된다.
휴머니즘이라는 것이 풍속·습관·사상이 자기들과 같은 인간만을 인간다운 인간이라 생각하고, 그 밖의 인간을 모두 인간의 규범에서 벗어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라면 그야말로 독단적인 사고방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휴머니즘의 본질은 그러한 자기중심주의·자국중심주의(自國中心主義)에 있지 않으며 끊임없이 자기를 초월함으로써 자기를 실현해나가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휴머니즘 자체를 초월한다’는 것이 바로 휴머니즘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