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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강해 제 15장 사울의 두 번째 실패
요나단의 신앙적인 태도를 강력히 부각시킴으로써 상대적으로 사울의 불신앙적 특성을 암시한 전장에 이어 본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두 번째 시험도 실패한 사울의 불신앙을 언급하고 있다. 두 번째 사건은 첫 번째 사건이 있은 후 상당한 시간이 경과한 후에 일어났을 것이며 그동안 사울은 정치, 군사적으로 나라를 발전시켰고 자신의 왕권 유지를 위하여 많은 제도를 확립시켰다. 그는 백성들의 원성을 들을만한 학정을 시행하지도 않았고 하나님께 대해서도 큰 과오를 범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왕으로서 자질이 있는지에 대해 하나님의 시험을 거쳐야만 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사울은 인간의 요구에 따라 세워진 왕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왕권을 후대에 물려주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하는지의 여부를 확인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 같은 절차는 이스라엘이 다른 이방 국가들과 달리 신정국가였기 때문이다. 사울은 이미 한 번의 시험을 치렀고 그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그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그가 첫 번째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므로 불합격 판정을 받았지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어 이 시험만 통과한다면 그는 왕권을 후손에게까지 물려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울에게는 마지막 시험이요 최종적인 기회였던 것이다.
1. 아말렉 진멸 명령 (15:1-3절)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하여 사울에게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명령을 내리셨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 가나안 땅으로 향하는 백성들을 광야에서 괴롭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광야 여정에서 많은 족속들이 이스라엘을 괴롭혔으나 굳이 아말렉에게만 강경한 태도를 견지하신 것은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아말렉은 잔인한 수법으로 이스라엘을 공격했기 때문이다.
둘째, 그들은 사막 여행에서 지치고 힘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후미를 공격하여 노약자와 부녀와 어린아이들을 무참히 죽였다.
셋째, 백성들이 르비딤에서 여호와를 시험하여 여호와와 다투고 있을 때 즉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연약하고 혼란했기 때문에 여호와의 도움을 받지 못할 것을 알고 그 틈을 이용하여 악랄하게 공격했기 때문이다.
사무엘은 믹마스 전투 이후 사울을 찾아오지 않았다가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다시 사울을 찾아와서 여호와의 명령을 전달하였다. 이 시기를 계산해 보면 다윗이 30세에 유다 왕으로 등극했는데 그 전에 7년 반을 사울 왕에게 쫓겨 다녔기 때문에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은 나이가 약 15세 정도로 가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아말렉 전투는 B.C 1025년 경에 벌어진 것이 틀림이 없다. 결국 사무엘이 사울에게 다시 온 때는 믹마스 전투가 B.C 1048년이므로 약 23년 후에 찾아온 것이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그가 열방의 왕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신정국가의 왕이기 때문이다. 그의 왕권은 신적 기원을 가지며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선지자의 지도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라는 이 말은 전일에 사울은 일차 시험에서 실패하여 선지자의 책망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에 획실하게 순종하라는 것이다.
사울은 이스라엘 왕으로서 하나님의 일차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제 새로운 시험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질 것을 예시하는 것이다. 이는 아직까지 여호와께서 사울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그로 하여금 새롭게 변화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신다는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는 특별히 하나님의 성전에 관련하여 나타나는 여호와의 칭호이기 때문에 아말렉과의 전투 명령의 엄숙함을 강조하고 있다. 아말렉은 에서의 손자 아말렉의 후손들로서 유다 남부 광야를 거점으로 유목과 약탈로 살아가는 호전적인 족속이다. 이들은 이스라엘이 르비딤에 이르렀을 때 후미를 기습 공격하여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당시 이스라엘은 노예 상태에서 해방된 직후였기 때문에 아무런 전투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무방비 상태에서 당한 것이다. 아말렉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푸신 것을 무시하고 이스라엘을 박멸하려고 가나안 여정에 결정적인 방해를 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 유다 남부 지방을 통과하여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방해 했고, 사사 시대에도 미디안 족속과 연합하여 잔인하고 난폭하게 이스라엘을 침략하였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아말렉을 천하에서 도말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말렉에 대한 복수의 시기를 이스라엘이 여러 측면에서 안정을 찾은 시기로 정하셨다.
*신25:19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신 땅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사방에 있는 모든 적군으로부터 네게 안식을 주실 때에 너는 천하에서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라. 너는 잊지 말지니라.
당시 이스라엘은 사울의 치하에서 정치적, 군사적 안정을 구축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대적으로부터 침공만 당하였으나 이제는 적군을 공격할 정도로 국력이 강화되었던 것이다. 이는 아말렉을 칠 시기가 도래했음을 의미한다. ‘가서’라는 말 ‘알라크’는 ‘진군하다’라는 의미로 총공격을 감행하라는 명령이다. 아말렉 박멸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은 단호하고 엄중했다. ‘치다’라는 말 ‘나카’는 상대에게 치명적인 상해를 입히는 것을 가리키며, ‘모든 소유’는 아말렉에게 속한 사람과 짐승과 물건을 통틀어 말하는 것이다.
‘진멸하라’는 말 ‘하람’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목적으로 부정한 것을 바치거나 저주받은 물건을 제사장에게 바치는 행동을 말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헤렘’ 바쳐진 것으로 지정된 것은 결코 다른 용도로 쓰일 수가 없고 오직 ‘헤렘의 법칙’에 따라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헤렘’이 산 것이면 죽여야 하고 그 밖의 물건들은 불에 다 태워야 하며, 불에 타지 않는 은, 금은 성소에 귀속시켜 하나님께 봉헌해야 한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전쟁 때에 여리고 성에서 취한 물건은 헤렘의 법에 따라 시행되었고 아간이 이를 어겼다가 아골 골짜기에서 매몰되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단순한 정치적, 군사적 행위가 아니라 영적이요 종교적인 행위라는 점에서 사울은 반드시 ‘헤렘’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남기지 말고’라는 말은 일말의 동정심이나 아낌이 없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의롭고 공의로운 심판대로 철저히 시행하라는 엄숙한 명령이다. 결과적으로 아말렉 진멸 사건은 단순한 전쟁이 아닌 거룩하고 공의로운 하나님의 심판인 것이다.
2. 사울의 범죄 (15:4-9절)
사울은 사무엘을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였다. 사울은 왜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자기 임의대로 행동했을까. 그 이유는 그가 인도적인 차원에서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그가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살리고 아끼는 마음으로 했다면 아말렉 왕 아각은 죽이고 불쌍한 백성들은 살려야 한다. 그러나 그가 아말렉 사람들은 다 죽이고 왕 아각을 사로잡아 포로로 데리고 온 것은 이번 전투에서 자신이 거둔 승리를 자랑하며 오래도록 기념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의 명예심 때문이었다. 그 다음으로 그가 기름진 가축을 남긴 것은 그의 물욕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사울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대단한 축복을 거절하고 자신의 명예와 물욕에 도취되어 자멸의 길을 선택하고 만 것이다.
사울이 백성을 소집했는데 사울이 아말렉과의 전투의 필요성을 알리고 백성들이 전투에 참전하도록 독려했더니 보병이 이십만 명이요 유다 사람이 만 명이었다. ‘들라임’은 유다 남방 국경지대이며 아말렉과 경계지점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전투 수행을 위해 지리상 여건이 좋은 집결 장소로 택하여진 것이다. 유다 지파는 자기 영토 내에서 병력이 집결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만 명의 소수의 병력만 차출하였다. 이는 유다가 사울 왕국에 적극적인 호응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며 유다 지파에서 왕이 나와야 하기 때문에 사울을 실질적인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울은 국경을 넘어 아말렉 영토 안으로 들어가서 골짜기에 군사를 복병시켰다. ‘와디’는 건기에 물이 흐르지 않기 때문에 골짜기 깊숙한 곳에 복병을 배치하기가 용이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말렉 사람들은 광야에 흩어져 사는 유목민들이기 때문에 특별한 병력이나 군대가 없고 정상적인 전투를 할 필요가 없는 족속들이다. 그렇다면 사울은 왜 병력을 매복시켰을까. 사울이 병력을 매복시킨 것은 아말렉을 기습 공격할 목적이 아니라 아말렉 사람들과 함께 거주했던 겐 사람들을 대피시킬 시간적 여유를 갖기 위하여 시간을 지체해야 하는데 이 사실을 적들이 알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사울은 다윗처럼 이스라엘에 우호적이었던 겐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있다. ‘겐'이라는 말의 뜻은 ’금속 세공업자‘ 혹은 ’대장장이‘라는 의미이다. 이들은 본래 동광석이 풍부했던 아라비아 지역에 살았는데 아브라함 당시 유목민으로서 가나안 땅에도 살고 있었고, 모세 당시에는 미디안 지역에 살았으며 이스라엘의 출애굽 시에는 모세의 처남 호밥이 광야의 길을 인도하면서 이스라엘과 우호적인 관계가 성립되었다. 그 후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유다 남부 브엘세바 근처에서 살았으며 점점 남부로 내려가서 아멜렉 족속 지역에 거주하였던 것이다.
사울은 겐 사람들이 출애굽 시 이스라엘을 선대한 사실을 말하고 이제 그 혜택을 받을 것을 천명했는데 이러한 사실의 근거는 이방의 술사 발람의 예언 속에 이미 나타나 있다.
*민24:20-21 또 아말렉을 바라보며 예언하여 이르기를 아말렉은 민족들의 으뜸이나 그의 종말은 멸망에 이르리로다. 하고 또 겐 족속을 바라보며 예언하여 이르기를 네 거처가 견고하고 네 보금자리는 바위에 있도다.
사울이 겐 사람들을 떠나라고 한 것은 그 지역에서 멀리 벗어나라는 뜻이 아니라 이 전투에 관여하지 말고 몸을 보존하라는 의미였으며 이에 겐 족속들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여 대피했고 전투가 끝난 후 다시 이 지역에서 살았다. 당시 아말렉 족속은 하윌라에서 애굽 앞 술까지 흩어져 살았는데 사울은 유다 국경에서부터 애굽 국경에 이르기까지 아말렉 족속의 전 지역을 초토화시켰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의 진멸 명령을 부분적으로만 이행하였다. 즉 일반 백성들과 짐승의 가치가 없고 열등한 것은 모두 진멸했지만 자신에게 실리적으로 유용한 짐승과 우수한 짐승은 전리품으로 취한 것이다.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아말렉 왕 아각을 죽이지 않고 살려둔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아각을 통하여 큰 물질의 실리를 얻고자 한 것이다.
둘째, 아각을 통하여 자신의 관대한 아량을 과시하고 명예를 얻기 위함이다.
아말렉 사람들은 왕의 이름을 ‘아각’이라고 불렀는데 그 뜻은 ‘맹화’이며 맹렬한 불이라는 의미로서 이름만 들어도 그가 얼마나 무자비하며 난폭한 사람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3. 사무엘의 책망 (15:10-23절)
사울의 안하무인격인 태도를 안 사무엘은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것과 불순종한 사실에 대하여 엄히 책망하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의 발걸음을 재시며 그의 모든 행동을 저울에 달아보신다.
*시33:13-15 여호와께서는 하늘에서 굽어보사 모든 인생을 살피심이여 곧 그가 거하시는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들을 굽어 살피시는도다. 그는 그들 모두의 마음을 지으시며 그들이 하는 일을 굽어 살피시는 이로다.
사무엘의 제사권 침해 사건에 이어 두 번째 시험인 아말렉 진멸 사건에서도 사울은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였는데 하나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후회’는 인간의 후회와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 즉 하나님의 후회는 어떤 특별한 행위가 잘못되었음을 인정하며 거기서 돌이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죄인의 거역에 대한 신적 슬픔을 의인화하여 묘사한 것이다. 하나님의 슬픔은 사울이 돌이켜 하나님을 떠나 반역하고 배교했다는 것이다. 사무엘은 자신의 간곡한 권면에도 불구하고 사울이 인간적인 이기심의 충동에 따라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불순종함으로써 결국 이스라엘 왕을 세운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이 손상되고 파괴되었다는 사실을 인하여 거룩한 분노를 느낀 것이다. 그래서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고 기도했다. 사무엘의 기도의 내용은 두 가지였을 것인데 하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사울의 불순종한 죄를 사죄받기 위함이요, 하나는 사울이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기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울은 이 사실을 회개하기는커녕 반대로 행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더욱 촉발시켰다.
그 시간 사울은 자기를 위하여 갈멜에 기념비를 세우고 길갈로 내려갔는데 ‘기념비’는 아말렉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승전비이다. ‘갈멜’은 헤브론 남동쪽 15km 지점에 있는 유다 지파의 성읍으로 갈렙에게 주어졌으며 나중에 나발과 아비가일의 고향이기도 하다. 사울이 수도인 기브아로 가지 않고 길갈로 간 것은 그곳에 여호와를 위한 제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무엘은 이 소식을 접하고 길갈로 가서 사울을 만났을 때 사울이 인사하기를 ‘당신은 여호와께 복을 받으소서.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라고 하였다. 사울은 자신이 여호와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여 아말렉 족속을 모두 진멸하고 크게 승리를 거두어 여호와께 영광을 돌렸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방인 왕들이 자기 신에게 하는 경배요 그 신의 제사장에게 하는 축복과 동일한 것이었다.
이에 사무엘은 자신의 귀에 들려오는 짐승의 소리를 증거로 사울의 말이 위선이요 거짓임을 예리하게 폭로한다. 사울은 짐승을 끌고 온 것은 자신이 아니라 ‘무리들’이라고 하며 위기를 벗어나려고 변명을 한다. 진정한 회개와 죄의 고백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사울의 위선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것은 태초에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죄를 하와에게 전가시키는 모습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나아가 사울은 좋은 짐승을 남겨 온 이유를 하나님께 제사하려고 했다고 주장하여 거룩한 제사를 빌미로 자신의 범죄와 이기심을 합리화한 것이다.
이에 대해 사무엘은 지난밤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하겠다고 사울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권한다. ‘가만히 계시옵소서.’ 문자적으로는 ‘중지하라.’는 뜻이다. 핑계와 변명, 책임전가 등 구차한 말들은 더 이상 듣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사무엘은 철야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것 같다.
첫째, 왕이 스스로 자신을 작게 여길 때에 여호와께서 택하시고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사울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른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택과 역사와 은혜이며, 따라서 사울은 이방의 왕과 달리 하나님의 명령과 뜻을 온전히 실행할 의무가 뒤따른다는 것이다.
둘째, 사울에게 하달된 여호와의 신성한 명령을 전적으로 이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말렉의 죄는 하나님 나라와 그의 백성을 멸절시키려는 악한 죄이다. 그러므로 사울은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어 죄인 아말렉을 징계하고 철저히 진멸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이 단지 아말렉과 전투하여 승리감에 도취되어 탈취물을 취하는 것에만 욕심이 생겼던 것이다.
사무엘의 지적에 대해 사울은 여호와의 진멸 명령을 다 이행했고 아각까지 잡아 왔으니 자신은 사악한 죄를 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여호와의 명령을 좇아 아말렉 전투를 신실하게 수행했다는 증거로 아각을 포로로 잡아 온 것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나아가 짐승을 취한 것에 대해 전과 같은 말을 반복하여 하나님께 대한 제사를 빙자하고, 그 죄를 백성들에게 떠넘겨 사실을 정당화 하였던 것이다.
‘번제’는 헌신을 뜻하는 제사이다. 그리고 ‘다른 제사’는 희생 제사 모두를 일컫는 말이다. 이 제사 제도는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제사보다도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다. 아말렉에 대한 여호와의 진멸 명령을 무시한 채 여호와께 제사를 드릴 목적으로 그 족속의 짐승 중에 가장 기름진 짐승을 끌고 왔다고 극구 주장하는 사울에게 사무엘은 명쾌한 대답을 내렸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 말씀을 정의하면 세 가지이다.
첫째, 예배의 형식보다는 예배자의 마음가짐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전5:1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둘째, 영이신 하나님께서는 수양의 피나 기름보다 인간의 전인격적 마음을 원하신다.
*시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51:19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그 때에 그들이 수소를 주의 제단에 드리리이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모든 신앙생활의 척도가 된다.
*신8: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로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구약 시대의 모든 희생 제사는 짐승을 잡아서 피를 뿌리고 그 고기를 제단에 올려 태우는 일, 그 자체가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희생 제사는 인간이 그 제사 속에 담긴 참된 뜻을 깨달아 하나님께 헌신하고 순종하는 일을 배우게 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즉 제사는 그림자요 순종은 그 실체인 것이다. 사무엘은 이어서 말하기를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 즉 무당을 찾아가서 점을 치는 죄와 같은데 이스라엘 사회에서도 거짓 선지자들에 의해 이러한 사술이 행해졌다. 이러한 행위는 우상 숭배로 규정되어 절대 금지되었던 것이다. 또 하나님의 은혜로 살지 않고 모든 것을 자기 고집에 따라 사는 완고한 성격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다는 것이다. ‘사신 (邪神)이라는 말은 '악하고 무가치하고 허탄한 신’이라는 말이다. 즉 사람의 손으로 만든 조각이나 형상을 신이라 부르고 그것에게 절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죄는 우상 숭배에 해당하는 범죄이므로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끊어지는 것이다.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버려’라는 말은 미래형이기 때문에 사울의 왕권이 멀지 않아 끊어질 것을 의미한다.
4. 왕위 유지를 위한 사울의 노력 (15:24-31절)
사무엘의 엄한 책망을 듣고 멀지 않아 왕위를 박탈당할 것이라는 경고를 받은 사울은 자신의 왕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하여 애처롭게 호소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매우 비굴한 모습으로 사울은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자신의 왕위를 유지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던 것이다.
사울은 사무엘의 날카로운 신문과 경고에 의해 변명으로 일관하던 태도를 바꾸어 자신의 죄를 시인했지만 그 시인조차도 불가피한 상황에서 백성들 눈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범한 것이라고 변명한다.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이 고백은 진정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범죄했는지 뉘우치고 회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 그 이유는 세 가지이다.
첫째, 계속 자신의 죄를 시인하지 않고 변명과 책임 전가로만 일관하다가 사무엘의 책망과 선고를 듣고 비로소 어쩔 수 없이 시인했기 때문이다.
둘째, 죄의 고백 후에 다시 백성들의 탓으로 그 죄의 원인을 전가했기 때문이다.
셋째, 고백 후에도 계속해서 왕위와 명예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사울이 백성을 두려워했다는 말은 어느 정도 진실이었을 것이다. 사울의 왕권은 어느 정도 백성들에게 인정을 받고 있었으나 근본적으로 사울은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왕이 아니고 백성들의 요구에 따라 선출된 왕이기 때문에 백성들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울 왕권의 한계요, 비극이었다.
사울은 사무엘에게 자신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는데 이는 사울이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아직도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반영한다. 사울의 죄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 하나님께 회개하고 죄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대한 범죄를 인간에게 지은 범죄로 가볍게 인식했던 것이다. 사울의 요구는 사무엘이 자기를 용서하고 자신과 함께 길갈로 가서 제사장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달라는 것으로 하나님께 회개할 기회를 가지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왕으로서 제사 현장에 함께 함으로써 백성들에게 건재함을 보이고 권위를 과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울의 심정을 간파한 사무엘은 사울의 폐위된 왕권은 어떤 방법으로도 회복될 수 없음을 단호히 선포한다. 사무엘은 왕권에 굴복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으며 참 선지자로서 직무를 다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사울에 대한 하나님의 왕직 박탈 사건은 단순히 두 가지 시험에 불합격했다는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울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고 신본주의 신앙이 아니라 인본주의 중심의 처세였으며 참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이방인과 하등 다를 바가 없는 불신앙적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울은 율법을 배우려고 노력하지도 않았고 율법을 중시하려는 마음도 없었다. 오로지 자신의 왕권과 권위주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눈치를 보며 비위를 맞추고 적당하게 안일주의로 살아가려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사무엘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고 떠나려고 몸을 돌이킬 때에 사울이 그의 겉옷자락을 잡는 순간 옷이 찢어져버렸다. 사울이 급한 마음에 겉옷을 붙들고 매달렸기 때문에 옷이 찢어진 것이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에 의한 일이었다. 하나님은 사무엘의 옷이 찢어지게 하심으로 그 일이 그의 나라가 찢어지는 하나의 징조로 삼으신 것이다. ‘찢어지다’라는 말 ‘카라’는 나라를 ‘떼어서’ 라고 할 때와 동일한 말이다. 왕보다 나은 이웃에게 주었다고 했는데 이는 다윗을 가리키는 말로 다윗이 이미 왕으로 선택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주셨다’라는 말은 과거 완료형이기 때문에 사울 왕국의 시대는 이미 그 종결을 고하고 말았던 것이다.
사무엘은 인간의 가변적 속성과는 달리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불변적 속성을 소개하며 사울의 왕권이 다시 회복되기는 불가능함을 선언하고 있다. 즉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가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울의 귀에는 이런 말이 들릴 리가 없다.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라고 한 것은 그의 마음에는 오로지 하나님의 작정과는 관계없이 오늘 자신의 왕권이 건재함을 만인에게 알릴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울의 죄의 고백은 오직 정치적 목적 때문이었으며, 여호와께 대한 경배 역시 자신의 명예를 높이려는 수작에 불과하였다. 사울은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는 자로서 선민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하는 왕으로서 부자격자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최종 폐위 선언으로 말미암아 사울은 왕위에는 있으나 실상은 왕이 아닌 자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무엘은 사울의 요청대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는데 그 이유는 아직은 차기 왕이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당분간은 사울이 왕위를 계속 이어나가야 하기 때문이며, 사울과 함께 아말렉 왕 아각을 죽여 하나님의 명령을 완수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5. 사울과 결별하는 사무엘 (15:32-35절)
사무엘은 이제 사울이 살려둔 아말렉 왕 아각을 불러 사형을 집행하였다. 그리고 사울을 떠난 사무엘이 이후 다시는 사울을 만나지 아니한다. 사무엘이 아각을 처형하기 위하여 군사들로 하여금 데려오게 하였는데 아각이 기뻐하면서 하는 말이 ‘진실로 사망의 괴로움이 지났다.’고 하였다. 두 가지 해석이 있는데 하나는 아각은 자신의 신변이 왕으로부터 제사장에게 넘겨지자 자신의 목숨이 부지될 줄로 생각하고 기뻐한 것이라고 하는 견해와, 죽음을 눈앞에 둔 전사로서의 영웅적 기개로 이제 기꺼이 죽을 때가 되었다는 용기로 보는 견해이다.
사무엘은 ‘동해 복수법’에 근거하여 아각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동안 아각은 수많은 전쟁과 약탈을 통해 매우 잔인하고 포악하게 행동했다. 그는 여인들까지 무자비하게 죽여 후대가 없도록 살인했던 것이다. 사무엘은 여호와의 제단 앞에서 아각을 처형했는데 그 이유는 이 처형이 단순한 정치 보복이나 군사적 행동이 아닌 하나님의 명령에 철저히 순종하는 공의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일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찍어 쪼개다’라는 말은 아각의 비참한 죽음을 연상시키는데 평소에 그의 잔인했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임을 명심해야 한다.
길갈에서 여호와께 대한 제사와 아각의 처형을 마친 후 사무엘과 사울은 각각 자기의 처소로 돌아갔다. 이 사실은 단순히 고향으로 갔다는 의미 외에 이 두 사람의 교제가 단절되었다는 것이다.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보지 아니했다는 것은 서로 상면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사무엘이 선지자로서 사울에 대해 영적 권고나 교훈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사무엘이 사울을 신정 왕국의 왕으로서 더 이상 인정하지 않았음을 뜻하는 것이다. 신정 왕국의 특성은 왕에 대한 선지자의 신의의 전달 및 권고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러므로 선지자의 충고가 없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진 것이며 이것은 ‘왕의 폐위’를 뜻하는 것이다.
사무엘은 사울이 어리고 젊었을 때 왕으로 기름을 부었고 그를 진정으로 위하는 마음으로 왕직 수행을 잘 할 수 있도록 권면하고 가르치며 도와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사울은 교만해졌으며, 사무엘의 가르침을 정중하게 대하지 않았고 자신의 경험과 지식, 왕적 연륜에 따른 권세로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말씀을 가볍게 하여 열방과 같은 왕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이제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심으로 자신은 더 이상 그에게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다만 그를 위해 슬퍼할 뿐이었다. 이 말은 사무엘이 사울의 회개를 위해 계속해서 눈물로 기도했다는 것이다. 사무엘의 눈물의 기도를 보신 하나님 역시 사울을 위해 근심하시고 마음이 아프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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